오늘 날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기억되는 카프카, 사르트르나
까뮈의 실존주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카프카
인간 존재의 허무와 절대고독을 그린 그의 대표작인 <변신>은 젊은 날
누구나 한번쯤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이 책을 가지고 씨름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읽어본 지가 얼마 만큼의 세월이 지났는지
기억 조차 가물거리는데 그래도 그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독일 시인/소설가 카프카의 문학 세계.
![](https://t1.daumcdn.net/cfile/cafe/24076F4558B6F4190E)
Franz Kafka(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카프카는 생전에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며
발표된 작품은 그가 작성한 작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으로 마감되었으며(예외는
《변신》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하였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인 도라 디아만트 또한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변신』 외에 대표작으로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 독일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아주 긴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번역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독일어: Verkehr→교통,교류,성교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란 단어를 쓴 이유는
카프카의 고백에 따르면 이렇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는 "격렬한 사정'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카프카는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평가의 해석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 (Felice Bauer)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8월 13일 브로트집에서 식탁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식모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난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 곧바로 나름대로 정리를 하였다.
블라우스를 걸쳐 입은 모습이 아주 가정적으로 보였으나
잠시후 그녀는 이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울퉁하고 빈 얼굴은 공허 그대로였으며
삐뚤어진 코, 약간 무디고 매력없는 금발, 거센 턱.
식탁에 마주 앉으면서 그녀를 처음으로 자세히 눈여겨 보면서
나는 그녀에 관해 확고한 판단을 내렸다.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 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이었다.
저작-장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