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지역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국민회와 대동보국회가 1910년 2월 10일부로 합동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신한민보(2월 9일)는 두 단체의 합동을 축하하는 논설에서 “아, 이제야 우리 민족이 세상 사람을 대할 때에 머리를 들고 떳떳한 기상으로 큰 소리를 지르게 되었도다”라고 했다.
같은 날 잡보의 ‘국민대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대한의 국민들이 ‘손을 벌려 춤을 추며 발을 굴러’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국권회복 멀지 않고/
민족자유 이에 있네/
아서라 말아라/
왜놈의 종자야/
네 아무리 방해한들/
우리 동포 단체 보라/
대한인국민회원 이천만이 정정하다/
두 사람만 동심(同心)해도 /
그 리(利)가 단금(斷金)커든/
두 단체의 합한 힘은/
혼천동지(混天動地)하올 이라/
얼씨구 좋을시고/
어화 우리 회원들아”
두 단체의 통합인데도 이천만 동포 전체가 국권 회복이 멀지 않았다고 과연 춤추며 노래할 만큼 ‘즐겁고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부 총회 후 기념 촬영 대한인 국민회 이승만 입회증서
1905년 이후 미주의한인 동포사회에서는 국권회복운동 단체가 지역과 지도자에 따라 공립협회·대동보국회·한인합성협회 등으로 분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미국인 친일 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을 계기로 미주 지역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통합 노력이 본격화하였다.
이에 1909년 2월 1일 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우선 합동하여 국민회가 조직되었고,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대한인 국민회는 중앙총회 산하에 북미·하와이(왼쪽사진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마친 후 기념사진)·만주·시베리아·멕시코 등 5개의 지방 총회와 116개의 지방회가 있었다. 국내에는 공식적 지회가 없었으나 비밀결사 신민회는 공립협회의 연계 조직으로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를 통해 국내와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국내외를 망라한 가장 큰 독립운동 조직(오른쪽사진 이승만의 대한인 국민회 입회증서)으로서 통일적인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인국민회원이 이천만이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인국민회는 대한제국 정부를 부인하면서 국민을 위한 국민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임시정부’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기관지 신한민보는 1910년 7월 6일자 논설에서 ‘어디까지나 우리는 대한국민이므로...융희황제가 동경에 가서 작록(爵祿)을 받을지면, 우리는 우리의 임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고 했으며,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 이라고 하였다.
이어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21일자 논설에서는 대한제국이 망했으므로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한 가정부(假政府) 설립’ 을 촉구했다. ‘가정부’는 ‘무형국가’락도 불렀다. 국민회는 대한제국 이후의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임시정부 수립을 가장 먼저 촉구했던 독립운동 단체였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