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제 시행으로 영세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의 아우성이 커지고 있다.
영세자영업자 가운데는 영업을 계속할 수 없어 폐업(閉業)을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 때문인지 [ 해외 투자이민 ]을 부추기는 광고가 눈에 많이 띈다.
확실히 알아보지도 않고 당장 어렵다고 홧김에 해외투자이민을 갔다가는 얼마 못가서
외국에서 빈털터리가 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국제 알거지 신세가 되게 십상인데....
흔히 하는 말로 외국에서 일본 사람들은 세 사람만 모이면 서로 힘을 합쳐 똘똘 뭉치는데
한국 사람들은 서로 못 뜯어먹어 헐뜯고 싸운다고 한다. 사기를 쳐도 꼭 한국 교민들한테
사기를 친다는 말이다. 1980년대 한창 번창했던 대서양 라스팔마스 어선 기지 교민들이 그랬다.
어로조건이 악화되면서 한국 어선들이 철수하자 교민들도 하나 둘 떠나면서 가장 친한 사람들한테
거짓말하고 중남미로 줄행랑을 놓고서는, 거기서 입으로만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과를 하더라고 한다.
배를 타면서 세계 곳곳에서 만난 한국 교포들의 삶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월남전이 패망할 때까지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교민들은 2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월남전이 패망하면서 월남에 진출했던 우리나라 기업의 기술자들이 바로 한국으로 가지 않고
단기 비자로 호주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앗다. 그리고 포항제철을 가동하면서 정가적으로
포항에 석탄을 실어나르는 운반선들도 많아졋다. 월남에서 단기 비자로 호주로 건너온 사람들은
체류 기간이 만료되어도 영주권이 나올 날을 기다리며 귀국하지 않앗다. 그러다가 그들은 불법체류자가 되어
합법적인 취업도 할 수 없어 뜨네기 일일 노동자가 되어 신문 광고를 보고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자 영주권을 가진 한국교민들의 그들을 협박해서 낮은 임금으로 자기 가게에 일하게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호주 이민국에 고발을 했다. 호주 이민국에서는 불법체류자들이 일일공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지만
일 잘하는 한국사람을 강제귀국시키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한국교민들이 잡아가라고 신고를 하니
그냥 둘 수도 없었다. 호주 이민국에서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서로 숨겨주지는 못할 망정 잡아가라고 고발을 하나?"
그런 교포들의 텃세릏 참다못해 불럽체류자들은 '짐빔' 위스키를 들고 포항제철 석탄운반선에 찾아와
술에 취해 눈물로 호소를 했다. 제발 포항까지만 태워달라고...
2. 파라과이 교민 페스탈로치 장의평 이사장. 6인의 海外 名士
장의평 대위는 해사 15기로 1965년 10월 청룡부대 제1진으로 파월 중대장으로 근무 중, 수색작전을 하다가
우물가에서통신병이 세수대야를 집어들다가 부비트랩이 터져 전신 찰과상을 입고 입원햇다가 1967년 10월 귀국해
해양대학, 수산대학 훈육관으로 2년간 근무햇다. 그후 1972년 도미유학시험에 합격 육군의 이필섭, 김진영, 서완수
등 3명과 함께 미육군참모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했다. 1973년 10월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고 장의평 소령은
목포 기지 한직으로 발령이 나자 전역을 결심햇다. 1976년 중령으로 예편 후 가족들과 함께 머나먼 이역만리
남미 오지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다. 거기서 온가족이 힘을 모아 3년 동안 식료품 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땅을 구입
양계장을 해서 성공을 했다. 그후 교민들에게 해사 출신 해병 고급장교라는 전력이 알려져서 재 파라과이
한인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게 되엇다. 그리고 농장 및 펄프공장 사업에 성공을해서 교포2세 장학 사업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2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3. 브라질 비토리아 Vitoria 항 "고향집" 아줌마
고향이 충청남도 홍성인 이 아줌마는 서울대 농대 출신인 남편을 따라 농업 이민을 왔다. 양잠(養蠶)을 하려고 브라질까지
이민을 왔으나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은 사업자금을 더 구해온다고 한국에 나가서는 소식이 없엇다.
아줌마는 고등학생 아들과 함게 오도가도 못하고 한국선원들을 상대로 화장실도 없는 가게에서 맥주집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1등기관사가 충청남도 해미였는데 고향 사람이라고 반갑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가게 이름도 없어 선원들이 판자에 뜨거운 쇠붙이로 지져 [고향집]이란 간판을 하나 달아주었다. 브라질- 스페인
항로를 몇 항차 할 동안 남편은 오지 않아 우리가 귀국하면 알아 봐 주겟다고 남편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했으나 웃으며
손사래만 쳤다.
4. 미국 롱뷰 항의 미니 슈퍼 아줌마
남편이 서울대학 나왔으나 학생운동을 하며 쫓겨 다니다 이민을 왓다고 햇다. 아줌마는 한국에서 중학교 선생님이엇는데.
남편 고집을 꺾지못해 하는 수 없이 왓다고. 편의점 고객은 주로 흑인들이엇는데 늘 문을 잠가 놓고 누군지 보고
문을 열어주엇다. 미국에 이민을 와서도 남편은 뭘 하는지 가게는 고등학생 아들과 교대로 지켯다. 흑인들과
말도 잘 안통하는데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정치 체제가 싫으면 부모형제도 고국도 싫었던 것이다.
5. 캐나다 밴쿠버 우리 동기생 이동춘 사장
1990년대 말 두어 번 밴쿠버에 입항해서 동춘이를 만났다. 이민 자금을 꽤 많이 가지고 갔는지 양복점을 한다고 했다.
가게는 부인이 점원을 데리고 경영하고 자기는 맨날 밴쿠버에 사는 고등학교 동문들과 골프나 치는 모양이엇다.
" 야, 그많큼 많은 돈이면 한국에서도 아쉬운 것 없이 살텐데 뭣때문에 이민 왔나? 골프도 하루 이틀이지 뭐가 그리
재미있나?' 햇더니 그냥 씩 웃기만... 아마 딸들이 공부를 아주 잘하는 모양이었다. 동춘이는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엇다.
부산에 있을 때 대학 동기들 (원양어선 선장들) 모임을 마치고 집에 안 가고 서면 대아호텔에서 카드놀이?를 햇는데
그날 밤 대아호텔에 불이 났다. 그런데 동춘이는 크게 안 다치고 (원양어선 선장 급료가 아주 많으니까) 보상은
많이 받았다고 소문이 났었다. 그후에 한국에 두어 번 나왔다 간 줄 아는데 지금은 소식을 모르겠다.
그 당시 밴쿠버에 투자이민 온 한국 교민들이 많았는데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편의점을 인수했다가 졸딱 망하기도 하고,
장사도 안 되는 가게를 교민들한테 거짓말해서 떠넘기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아이들 공부 시킨다고 따라온
기러기 엄마들도 박사 학위 가진 놈팽이 교민들한테 속아 파탄난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니라고 했다.
포틀랜드 꿀아줌마 이야기도 있지만 너무 길어 여기까지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