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일본기독교협의회 김성제 총간사(총무)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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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대학살의 기억과 십자가 신앙-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이하며(1)
* 이 글은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발행하는 「福音新聞」에도 연재 중(2023년 2월호부터)이다.-편집자
전율의 기억- 연극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2018년 7월, 도쿄 시모키타자와(下北沢)에서 상연되고 있던 연극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를 보았다. 2014년에 출판된 같은 제목의 가토 나오키(加藤直樹)의 책을 토대로 연출된 연극이었다. 그 책은 부제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 대량학살[제노사이드]의 잔향”이 말해주듯,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발생 후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6,000명이 넘는 재일조선인(그리고 700명 이상의 중국인)에 대한 학살의 증언집이다.
연극은 그 책을 손에 넣은 5-6명의 일본 시민이 책을 단서로 학살이 일어난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그 역사를 되돌아보고, 이야기하고, 때때로 무대가 시간여행을 떠나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전개로 구성되었다. 나는 그다지 크지 않은, 무대를 조금 아래로 내려다보는 계단 모양의 극장 마지막 줄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였다. 그중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엄청난 긴장감을 느꼈다. 심각한 학살의 역사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현지시찰 참가자들에게 갑자기 철조망과 곤봉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집단이 와서 그들을 펜스로 둘러싸고 욕설을 쏟으며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펜스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펜스를 곤봉으로 두드리면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때 펜스 안에 있던 한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 집단에 외친 한마디, “나는 일본인입니다. 나를 여기에서 빼내어 주세요!”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어두운 극장 내의 비상구 안내등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던 나는 당시 내 마음을 덮친 공포감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았다. 정말이지 재일코리안인 나에게 그 연극은 감당하기 힘든 연출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둘러싼 울타리는 극중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실은 객석에 앉은 모든 사람이 한 방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연출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왜 비상구로 눈길이 갔을까?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 집단의 심문을 받아, “너는 일본 사람인가? 조선 사람인가? 어느 쪽이냐?”라고 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올라온 것은 아닐까? 곧 내 차례가 올지도 모르니,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강연이나 서적을 통해서만 알았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잠든 역사가 한순간에 나의 내면에서 깨어났다. 연극이 끝난 후 감독이 무대에 등장해 관객에게 소감을 묻는 시간이 있었다. 관객 중 일부가 감독과 말을 나누었지만, 나는 침묵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평정심을 잃었고, 분노에 떨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떨리는 목소리로 감독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감독님, 관객 중 재일조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알면서도 그렇게 마지막 장면을 연출했나요? 아니면 전혀 고려하지 않았나요?’ 만약 내가 실제로 그렇게 물었다면, 감독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나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다가 그 순간 극장에서 갑자기 깨어난 나의 느낌과 욕구는 무엇이었는가? 역사에는 잊힌 많은 것, 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동시에 역사에는 잊으려고 해도 사람의 마음 심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갑자기 분출하는 것이 있다. 재일코리안에게 1923년 9월의 학살은 그러한 역사의 하나이다. 그 일을 확실히 극복하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학살의 역사를 다시 마주하겠다고 깊이 다짐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여기, 도쿄의 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역사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923년 9월 도쿄의 거리에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진도 7.9의 대지진이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방을 덮쳤다. 그날 오후가 되자 어디선지 모르게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이 폭동을 일으켜 방화하고 습격하며, 또한 우물에 독을 타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관헌(官憲)에 의한 조선인 구속과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첫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날 내무성은 계엄령을 발령해 군대를 출동시켰고, 유언비어의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불령선인’의 습격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전국 지방장관에게 전문으로 전달했다. 이 계엄령과 전문은 군대와 관헌에 의한 조선인 학살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던 자경단의 학살 행위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 법에 저촉받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조선인 학살 행위에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인 살해를,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자경단은 거리 곳곳에 검문소를 마련하고 조선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어 특유의 탁음으로 인해 조선인이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운 ‘15엔 50센’이나, 교육 칙어의 암송, 또 역대 천황의 이름을 말하게 했고, 잘하지 못하면 ‘불령선인’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죽창, 일본도, 또는 쇠갈고리 등으로 참살했다. 이러한 학살은 일반적으로 9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되었다. 지바현 나라시노 주둔 기병대가 나라시노 수용소에 구속되어 있던 조선인을 주변 마을의 농민들에게 넘겨 죽인 것이 9월 7일부터 9일까지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의 자경단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1) 지진 이전부터 조직된 동네 야경단이 유언비어를 듣고 조선인을 찾아내 학살하는 자경단으로 바뀌었다. (2) 관헌이 유포한 유언비어를 들은 후 조선인을 제압하기 위한 자경단이 새롭게 조직되었다. (3) 관헌의 명령으로 자경단이 결성되었다. (4) 이전부터 있던 지역의 반상회나 조합이 연합하여 자경단을 결성했다. 자경단을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주로 재향군인회 분회(제국 재향군인회 ‘1910년 창립’의 하부조직), 소방대, 또한 청년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경단 구성의 밑바닥에는 각 마을과 도시의 중간층에 속해 있으면서 지역사회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지들과, 거기에 유도되는 도시 빈민 계층의 사람들(인부, 기술자 등)이 있었다고 역사 연구가는 지적한다.(松尾章一, 『関東大震災と戒厳令』; 今井清一他, 『歴史の真実 関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 자경단은 도쿄에 1,593개, 또 관동 전역에서 3,689개 존재했다.(吉川光貞, 『関東大震災の治安回顧』) 아이치현, 나가노현, 또 니이가타현에도 자경단은 존재했다.
학살당한 조선인 수에 대한 조사 활동은 10월에 들어가서 본격화되었다. 먼저 최승만 재일본 조선 YMCA 총무[「신동아」(1970, 2-3)], 요시노 사쿠조(吉野 作造)[“朝鮮人虐殺事件,” 「中央公論」(1923. 12)] 등의 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동포위문반’은 관동 전역(도쿄도, 사이타마현, 지바현, 도치기현, 군마현, 이바라키현, 가나가와현)을 포괄적으로 조사하여 ‘최종 보고’(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학살된 조선인은 6,661명이었다. 시간이 흘러 1980년대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山田昭次)는 이 사건을 깊이 연구하여 학살자 수를 6,647명으로 수정하였다.
당시 10월부터 시작된 추도와 진상조사 작업에 대해서 당국은 공식적으로 허가하지 않았을뿐더러 조사 활동을 철저히 방해했다. 예를 들어 학살당한 시체의 수를 파악할 수 없도록 처리하라는 지시를 자경단에 내리거나 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시신이 묻힌 곳을 파서 시체를 없애거나 시체의 인도를 거부하기도 했다.
국가와 사회는 ‘불령선인’이라는 차별적인 용어를 통해 적대감과 증오, 그리고 멸시를 부추겼다. 이렇게 한 번 폭주를 시작하면, 개인이나 조직의 양심은 모두 무력화되고, 양심에 의한 선의의 행동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를 각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9월 6일에 사이타마현의 요리이 경찰서 분서(分署)에서 청년 구학영(具學泳)을 참살한 것은, 그와 친하게 살고 있던 요리이 마을의 주민이 아니고, 이웃 마을 요도에서 달려온 자경단이었다.(『숨겨져 있던 역사: 관동대지진과 사이타마의 조선인 학살 사건』) 야마다 쇼지는 두 명의 조선인을 구한 지바현 히가시 카츠시카군 호덴촌(현 후나바시시) 마루야마 부족(丸山部落)의 농민들과 사이타마현 코다마군 혼조마치(현 혼조시)의 실 만드는 공장주의 사례를 저서 속에서 소개한다.(『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 학살의 광기에 참여하지 않고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따르는 행동으로 나아간 사례들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평상시에 따뜻하고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다고, 야마다 쇼지는 저서에서 밝힌다. 한일의 기독교회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2017년 3월 2일 코가 도시아키(古賀俊昭) 도쿄 도의원은 학살 인원수에 객관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추도문을 거부해야 한다고 의회에서 주장하였다. 같은 해 8월 25일에 코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 도지사는 1973년 이후 조선인 학살 기념 추도 집회에 매년 도지사가 보내던 추도문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미 도쿄도 위령협회의 추모행사에서 모든 지진 피해 희생자를 함께 추도하고 있으므로, 개별적으로 열리는 행사에는 별도의 추도문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과 학살에 의한 죽음을 어떻게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의심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도지사의 행동에 침묵하고 묵인하는 사회의 존재에 대해 기독교회는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물으며, 기도하면서 기억하고 싶다. 그 학살 사실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방대한 증언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증언- 사람들이 보았던 학살
큰 지진이 있었을 때, 飯倉[도쿄도 미나토구 이이쿠라]에 있었습니다.… [다음날 9월 2일] 모두 本村(혼무라) 쪽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本村의 친척 집 연못은 피로 물들어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니까 ◯◯◯◯◯◯◯◯[불량조선인]들이 쳐들어온다고 순경이 말하러 왔습니다.
-금병동(琴秉洞),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係史料I 朝鮮人虐殺関連児 童証言史料』, 299-300.
니시무라 키요코(西村喜代子) 아자부구 혼무라(麻布区 本村) 심상소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증언한 대지진의 이야기이다. 이 어린이의 증언에서 9월 3일 오전에 ‘불령선인 폭동’(不逞鮮人暴動)이라는 허위 전문이 후나바시시 해군 송신소로부터 전국 지방장관에게 발신되기 전인 9월 2일에 관헌이 유언비어를 확산하고 있었다는 실태를 알 수 있다.
자, 그렇게 하는 동안 소위 유언비어가 밀물처럼 가까이 흘러들어 왔다.… “조선인들이 헝겊에 석유를 적셔 방화하고 다닌다. 도쿄의 화재는 그들의 짓이다. 그리고 우물에 독약을 넣어 일본인을 살해하려 한다.” 누구의 입에서인지 모르지만 이러한 무서운 말이 우리 동네에도 들려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겼지만,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일의 시비와 진의를 판단할 수 있는 냉정함이 없었다. 그 일은 전파와 같이 근방 지역에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재향 군인, 청년단, 소방부는 모두 몸을 바짝 긴장하고 이상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빛나는 눈초리로 동네의 교차로, 요충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친린 마을에서는 확실히 근거가 없는 보고가 전해졌다. “××마을에서는 우물에 독약을 던지는 곳을 적발하여 잡았다.”, “◯◯마을에서는 몇십 명이 몰려 강도질하러 왔다.”, “지금 △△마을에서 수십 명이 우리 동네로 들어오고 있다.” 이런 소문에 자경단은 철저히 매복하여 기다렸지만 물론 고양이 한 마리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광란적인 살기 가득한 분위기는 우리 동네에서 7주간이나 계속되었다.-강덕상 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 183.
위 증언은 유언비어의 무서운 속성을 잘 전해준다. 그들은 그 소문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저 도취되어 믿어버린 채 집단에서 집단으로 퍼뜨리기에 바빴다.
젊은이들은 자경단으로 나서라 하기 때문에 나도 등산용 지팡이를 가지고 이웃 대학생과 함께 경비를 서게 되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서 정찰을 위해 센다가야역의 선로 위로 올라갔다.
그때 내원과 외원을 연결한 도로(그 당시에는 풀밭이었지만) 쪽에서 등불 행렬이 나란히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 ‘불령선인’이라고 생각해서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나는 허리 쪽을 한 대 얻어맞았다. 놀라서 돌아보니 키가 엄청 큰 남자가 ‘조센진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일본인임을 호소하고 와세다대학교의 학생증을 보여줬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흥분한 그들은 장작과 목검을 흔들면서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를 말해봐!’, ‘교육 칙어를 말해봐!’라고 잇따라 요구해 왔다. 이 두 가지는 어떻게든 잘했지만 ‘역대 천황의 이름을 말해봐!’라고 했을 때는 엄청 곤란했다. 이제 막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절반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큰일났다고 각오하고 있었을 때, ‘뭐야, 이토(본명) 씨잖아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주일학교를 함께 다닐 무렵의 지인이었다. 이 한 목소리로 나는 구원되었다.
나는 죽지 않고 풀려났지만, 조금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인을 포함하여 죄 없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이 살해되었을까?-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 『関東大震災 東京地区別1100の証言 朝鮮人虐殺の記録』, 157-158.
위 증언은 당시 19세에 센다가야(千駄ヶ谷)에 사는 와세다대학교 청강생이며, 나중에 연출가가 된 센다 코레야(千田是也)의 증언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센다 코레야)에 대하여, 이와 같은 공포를 ‘센다가야’라는 곳에서 체험한 것에서 ‘센다’(千田)라고, 조선인으로 잘못 여겨져서 죽을 뻔한 경험에서 ‘코레야’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살의 참상이다. 하천 광장에 한인을 다수 모아서 수천 또는 수백 명을 무차별 찔러 죽이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서도 수백, 수십 명을 집합시켜 살해하였고 거리에서 찾아내는 대로 군인과 경찰관이 총과 칼로 죽이고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조선인’이라고 외치는 고성에 늑대 무리처럼 동서남북에서 모여들어 우리 동포 한 명을 수십 명의 왜놈이 잡고 검으로 찔러 총으로 사봉(射棒)을 해서 때리고 발로 차서 굴러 죽게 하고는 목을 묶어 찌르고 걷어차면서 시체에까지 능욕하거나, 부녀자들을 보면 양쪽에서 좌우의 다리를 당겨서 생식기를 검으로 찔러 한 몸을 4등분, 5등분 하면서 여자는 이렇게 해서 죽이는 맛이 있다고 웃으며 담화하면서 우리 동포를 전철 궤교(軌橋) 아래에 목을 매달아 그 양 다리에 줄다리기를 붙여 좌우에서 여러 명이 줄을 잡은 채 신호를 주고 화답하면서 ‘그네’처럼 흔들어 죽인 것도 있어….-강덕상 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 331.
이 수많은 증언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라는 인간의 죄의 실상에 대한 바울의 통찰을 떠올리면서 인간의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가야바의 관저로 끌려가는 예수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던 그 ‘눈빛’(눅 22:61)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국가 책임으로서의 계엄령, 전문(電文), 그리고 고유(告諭)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은 우선 일본의 국가 책임이다. 1882년에 만들어진 계엄령(太政官 布告 第36号) 제1조에는 ‘계엄령은 전시 혹은 사변이 일어나면 군비를 통해 전국 혹은 한 지방을 경계하는 법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전시도, 사변도 아닌 대지진에 대해 9월 2일 정오에 계엄령이 정식으로 공포된 것인데, 이것은 법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엄령이 선포되었는가? 그것은 내무성·군부가 ‘불령선인’에 대한 대응을 전투태세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엄령 제14조의 ‘검사’(検査)를 ‘검사압수’(検査押収), ‘검문설치’(検問設置)로 확대해석하여 자경단에 의한 검문소와 ‘불령선인 사냥’을 합법화하였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우선 9월 1일 오후 2시경,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 경시총감이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 내무대신에게 계엄령을 상신하다.[「자경」(1923. 11)] 우치다 고사이(内田康哉) 내각의 내무대신 미즈노(水野)가 다음 날 2일 아침 내각 회의에서 계엄령을 건의하다. 그리고 추밀원[樞密院, 군주의 자문기관]에서의 자문은 건너뛰고, 하마오 아라타(浜尾新) 추밀원 부의장의 양해만을 얻은 채, 섭정(攝政) 히로히토(裕仁)에게 상신하고 재가를 얻어 2일 정오에 발동했다. 그 경위를 미즈노는 나중에 증언한다.-『帝都復興秘録』, 230-236.
이날 오후 4시에 조각을 완료한 야마모토 곤베(山本権兵衛) 내각은 계엄령하에서 군부 주도의 ‘불령선인’ 제압 노선을 이어받게 된다. 9월 1일 심야부터 민간인 구호 활동을 위해서 전국 각지의 군대가 도쿄·관동에 결집하기 시작했고, 계엄령 이전에 발령되어 있던 위계령에 의해 군에 의한 조선인 살해 행위가 일부 시작되었다. 계엄령이 발동된 9월 2일 정오 이후, 군은 더 강하게 ‘불령선인’을 제압했다. 『東京震災録』(別巻 1927年, 897-898)의 “공훈구상”(功勲具状)의 기록과 학살 현장에 있던 병사의 수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공훈구상”은 군인에 의한 치안유지의 공적을 찬양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군대의 학살 행위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2일 정오 이후 그 기록 속에 ‘선인’(鮮人)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표현 뒤에 숨겨진 현실은 무엇인가? 당시 지바현 히가시 카츠시카군의 야전 총포 제1연대의 일등병 구노보 시게지(久保野茂次)의 ‘군대 일기’(관동대지진 50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사업 실행위원회 편, 『歴史の真実 関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 13-20, 특히 18쪽) 9월 29일 자 일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여성을 비롯한 조선인을 참살한 광경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난외(欄外)에 ‘9월 2일, 이와나미(岩波) 소위가 병사를 지휘하여 조선인 200명을 죽였다.’고 적혀 있다. 반면 “공훈구상” 9월 2일 자에서는 이와나미 키요사다(岩波清貞) 소위의 행태를 구호 활동으로 치하하였다. 그리고 나라시노시 기병연대 소속의 병졸인 엣츄타니리이치(越中谷利一)의 “계엄령과 병졸”이라는 수기에서는 9월 2일 카메이도(亀戸)에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출동한 것은 9월 2일, 시각으로는 정오 조금 전쯤… 그러면서 전쟁 기분!… 불쌍했다. 안녕과 질서를 위한다면서 수천의 피난민을 감시하고 도망가는 사람을 등 뒤에서 큰 칼과 총검으로 차례차례로 쓰러뜨렸다. 피난민 속에서 무심코 끓어오르는 폭풍과 같은 만세 환희의 소리가 들렸다. ‘나라의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係史料Ⅲ 朝鮮人虐殺に関する知識人の反応 2』, 106.
자경단에 참가했던 민간인이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마음에 무엇을 새겼을까? 군에 의한 학살이 9월 2일 계엄령으로 격화된 후, 자경단에 의한 학살은 관동 지방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야마모토(山本) 내각은 이 문제에 관련되는 3개의 고유(告諭, 행정관이 백성에게 어떤 사실을 널리 알리던 일), 즉 내각 결의 내용을 발표했다. 9월 4일에는 ‘섭정전하’(裕仁, 히로히토)의 ‘우려’를 전하며 정부와 국민의 거국일치(擧國一致)를 촉구하였다. 다음 5일의 ‘조선인에 박해에 대한 고유(告諭)’에서는 ‘불량선인’의 망동(妄動)과 불온(不穏)이 약간의 사실인 것처럼 썼지만, 거기에 불쾌감을 품은 민중이 조선인을 박해하는 것은 ‘일선동화’(日鮮同化)의 국가정책에 위배되며, 또 그것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이기에 국민에게 자중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논리의 골자는, 학살이 자경단이라는 민중 조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며, 책임 소재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16일의 고유(告諭)에서는 이 수천 명에 이르는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소 상식에 벗어난 사람들에게 벌을 준 것’이라는 정도의 문제로 정리하고 있다.
미즈노 내무대신과 아카이케 경시총감이 9월 2일에 취한 또 하나의 행동은, “도쿄 부근의 지진 재해를 이용해 조선인은 각지에 방화하면서 그들의 불량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고 있다. 이미 도쿄에서는 일부 계엄령을 내렸기 때문에 각지에서도 주도면밀하게 시찰하여 조선인들의 행동을 엄격하게 단속해야 할 것이다.”라는 전문을 해군 도쿄 무선전신소 후나바시(船橋)에서 송신하였다.(금병동 편,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係史料Ⅱ 朝鮮人虐殺関連官庁史料』, 158) 그 전문은 3일 오전 8시 15분에 발신되었지만, 그 전문 원본의 난외(欄外)에는 “이 전보를 전령에게 전한 것은 2일 오후로 기억한다.”라고 적혀 있다.
셀 수도 없는 증거가 있는 가운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어둠에 묻어 국가의 책임을 100년 동안 불문에 부치고 있는 민주적 법치 국가가 이 세계에 있을까? 그것을 묻지 않는 우리 모두가 공범은 아닐까? 우리 교회가 이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처럼,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눈빛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 호에 계속)
김성제|재일코리안 3세이다. 메이지학원대학과 도시샤대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캘리포니아의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일대한기독교회(KCCJ)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총간사(총무)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