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도원에 부는 바람(36)

[이동민]

36. 이제야 사랑을 찾았구나.

  덕배는 여주 땅에 숨어서 세월아 가거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마침 계룡산의 분청자기 마을에서 연락이 왔다. 경상도의 황학산과 추풍령에서 활동하던 추설패가 계룡산에 와서 동학사의 땡초들과 다툼이 있었다면서 별유사님이 급히 내려오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계룡산ㄷ은 골짜기가 깊고, 산세가 험하여 세상을 피해서 숨어 사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절에 기식하면서 경상도 추설패와 간혹 세력 다툼을 했다. 아랫마을에는 분청자기를 굽는 마을이 있다. 여주 도자기 마을의 촌장인 박개도 그 마을에서 태어난 도공이 었다. 계룡산의 분청자기 마을에서 덕배는 남한강을 따라 충주까지 가서, 한밭을 거쳐 공주의 객주에 머물렀다.

  동석은 순흥 땅으로 들어가서 절이라면 무조건 찾아 다녔다. 부석사에도 들려 보았다. 월아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천봉스님이 동지 때가 되면 동학사에서 동안거를 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계룡산 동학사로 발길을 돌렸다. 지난 번에 월아가 파주의 도피안사에 머물렀던 일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 무의식적으로 절로 찾아갔다. 금강산 유점사의 보현스님이 준 패를 보여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워주었다. 예천의 용문사에ㅔ 들려 하룻밤을 자고 가기로 했다.

  동짓달로 접어든 절기로 밤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좀체 잠이 오지 않아 벽에 기대어 있으면 온갖 생각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머니도, 덕배 아저씨도 아버지를 말 하면서 너의 몸에는 사대부 양반의 피가 흐른다고 했지만 실감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태어나기를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은 아랫것이라면서 짐승이나 다르지 않게 취급 당하던 일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소연 아씨는 친구로 대해 주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으랴. 아버지의 모습은 그림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로는 대쪽같은 성격으로 나라를 위하여 살았다지만 도무지 피부로 느껴오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도, 소연 아씨가 생각나는 것도 마음을 데워주는 따뜻함 때문이었다. 소연, 아니 월아가 이처럼 그리운 것은 어머니의 포근함이 그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배 아저씨를 만난 것도 운명일까? 담대하고, 의지가 확고하여 지금까지 만난 분 중에 가장 존경했다. 그가 하는 일을 알고 나서 자꾸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온 동석이 마법의 끈에 묶어 두듯이 덕배에게 아버지를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그를 따르게 되었다. 같이 다니면서 그가 하는 일을 한 번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덕배 아저씨를 따라서 추풍령에서 저지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면서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운다고 생각했다. 여진족과 싸울 때처럼 나라를 위하는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월아를 찾으려 금강산으로 가면서 단발령에서도 그랬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값싼 동정심 따위는 걸기저거리기만 할 뿐이라는 덕배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동석이 휘두르는 칼날은 더 날카로운 힘이 넘쳤다.

  동석은 덕배가 홍천댁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덕배에게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던 덕배의 눈에서 눈물이 한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보고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았다. 덕배 아저씨는 무엇 때문에 가슴에 홍천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감추어 두고 표현하지 않으려 하였을까?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천한 백성 때문이라고 하겠지. 그것이 변명이 될까? 아버지도 그랬을거야. 가족을 시궁창으로 내몰고도 인륜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라서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하셨을거야. 아버지의 삶도, 덕배의 삶에도 슬며시 회의가 생겼다. 그 보다는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서 사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월아가 더더욱 그리웠다.

  월아는 남장을 하고 일부러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큰길로 다니는 것이 오히려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알았다. 단양을 떠날 때 천봉ㅇ스님이 봉정사에 계시더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예천 족으로 향했다. 절에 가서 천봉스님의 소식을 물으면 쉽게 하루쯤은 유할 수가 있었다. 천봉스님은 스ᅟᅳᆫ님들이 쉴 수 있는 크나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스님들은 모두 그를 따르는 듯했다. 해가 기울자 월아는 용문사로 찾아 갔다. 조금은 이른 저녁이었다.

  절문을 들어서자 절마당에는 젊은 스님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젊은 스님에게 합장하고 하룻밤을 재워주기를 청했다. 갑자기 방문이 왈칵 열리면서 건장한 젊은 남정네가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소연 아씨, 아니 월아가 아니냐.”

“어, 오라버니.”

  월아도 깜짝 놀랐다. 여기서 동석을 만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금강산으로 가면서 단발령 아래의 도자기 마을에서 헤어진 지도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동석은 멍하니 서 있는 월아를 두 팔로 덥썩 껴안았다. 월아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동석은 어깨를 들썩이는 월아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다.

마당을 쓸던 젊은 스님은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월아는 신분을 밝히고 보살이 거처하는 방으로 잠자리를 정했다. 절 마당으로 나오자 동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서 합장을 하고 절 옆으로 난 개울가의 오솔길을 따라서 걸었다.

“오라버니,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겠지. 그런데 그 행복이 실감이 나지 않아. 마치 먼먼 별나라에 있었던 일 같아. 그때가 오라버니가 내 곁에서 친구가 되어 주었던 때였잖아. 그래서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오라버니를 많이 생각했어.”

“나도 힘들 때면 소연 아씨라고 불렀던 그 때가 제일 많이 생각이 났어. 어쩌면 나도 제일 행복했던 때였는지 몰라. 비록 노비였지만 어머니가 있었고, 월아도 그곳에 있었지.”

  동짓달 밤바람은 차가웠다. 그런데도 월아는 조금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둘이서 나란히 걸으면서 월아는 동석의 팔에 매달리기도 하고, 동석의 몸에 기대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 일찍 행장을 꾸려서 길을 떠났다. 노스님이 솜을 두둑하게 넣은 승복 한 벌을 월아에게 주었다. 이리 저리 쫓겨 다니느라 겨울 옷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월아에게는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 이제는 남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둘은 동학사로 향했다. 이제는 산길도, 큰길도 두렵지 않았다. 동석이가 앞에서 지켜주기 때문이다. 잠자리는 절집에서 구했다.

  상주의 남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보은쪽으로 향했다. 충청도 땅에 접어들면 한밭을 거쳐 공주로 갈 심산이었다. 월아는 동석과 걸으면서 행복감을 맛보았다. 김행오의 집에서 잠시 노비로 살았지만 너무 짧은 기간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안평대군 댁에서 보낸 시간은 무척 길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단란하게 살았던 유년시절의 집도 양반가의 집이라서 제법 너른 마당을 가진 집이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사저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대궐같은 집에서 어려움 없이 보냈다 하더라도 행복하다고 느껴 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동석을 만나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이 순간의 행복감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일까?

“월아를 찾으려 금강산을 넘어 설악산 쪽으로 내려오다 깊은 산골의 외딴집에서 이틀을 머물렀어. 중년이 넘은 부부였는데 화전을 일구고 살더라.”

“다른 집은 없었어.”

“그래, 내가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했더니 경계를 하면서 얼굴에 두려워하는 빛이 스치더라.”

 지칠대로 지친 동석은 화전민 집의 축담에 앉아서 축 늘어져 있었다. 일어설 힘도 없었다. 이런 모습을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면서도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더듬거리는 말로 물었다.

“총각은 어디서 오시유.”

“나는 한양의 양반가에서 노비 생활을 하다가 도망을 다니고 있소. 추포자의 눈을 피하려 산속으로 들어왔더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동석은 강원도 산골에는 도망노비들이 많이 산다는 말이 떠올라서 얼른 거짓으로 둘러댔다. 순간이었다. 중년 부부의 얼굴이 밝아졌다.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월아는 궁금하여 다시 물었다.

“도망 노비였어.”

  월아가 노비의 신분이었을 때도 도망간다는 것은 한 번도 꿈꾸지 않았다. 노비로 오랫동안 살지는 않았으므로 노비의 고달픔을 모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안평대군 댁에 머물면서 대군처럼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믿었다. 양반 사대부의 삶을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렇게 살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단발령 아래의 도공 마을에서 아랫것들이라고 불리는 천민의 삶을 피부로 체득했다. 비록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힘들게 살기는 하였어도 불행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웃집 남정네와 여인네들이 조금은 천박하다 싶은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나누면서 깔깔거리고 사는 그들의 삶을 처음으로 부럽다고 느꼈다. 주위의 눈치를 보고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 온 자신의 삼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부글거리는 화를 안고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예의바르다고 한다. 그건 거짓이다. 불행이다.

“나 그 집에서 이틀을 머물렀어. 그 부부가 사는 것이 너무 부럽더라.”

  비록 먹는 것이 험하고 몸을 가리는 옷이 거칠기는 해도 서로를 걱정해주고 서로를 아껴주는 사이라는 것이 훤히 보였다. 겨울 준비를 하느라 남정네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고 아낙네는 화전을 일구어 수확한 옥수수를 다듬어 저장하는 일을 했다. 평화스러운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월아가 생각에 젖어 있느라 잠시 대화가 뜸해지자 동석이 먼저 말을 했다. 그제야 월아도 정신을 추스르고 말은 나누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발령 이레 도공 마을에서 보낸 며칠이 즐거운 기억으로 떠오르더라. 안평대군 댁에 머물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였던 것이었어.”

“대군 댁에서는 어떠 하였는데?”

“대군 댁에서는 노비도 양반처럼 예의를 지키고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아니 몰라. 하여튼 그렇게 살았어.”

“사대부 양반을 많이 만났을 텐데, 우리 상것들하고 다를 텐데?”

“다르지. 겉으로는 성인군자인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꿍꿍이 짓을 다 하는 것이 다르지.”

  월아는 자기가 한 말이 재미가 있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안평대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을 때 뻔질나게 찾아오던 고관대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 올렸다. 그들은 모두가 안평을 떠나서 수양에게로 갔다. 계유정난 때는 정인지, 신숙주, 최항은 안평에게 드나들던 전력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안평과 친분을 가진 사람을 앞장을 서서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그 대가로 누리고 있는 호화로운 삶을 부러워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더구나 신숙주는 안평이 누구보다도 믿었던 사람이었다. 신숙주마저 떠나 갔을 때의 낙담하더 모습이 머릿속에서 회오리 치고 있다. 이제야 사람이 진실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는 듯했다. 월아는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동석을 처다보았다. 늠름하였다. 자신을 편안하게 살도록 보호해 줄 성벽처럼 느껴졌다. 월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안평대군과 김종서 장군이 정말 역적 모의를 하였을까?”

“오라버니는------ 구골 믿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수양과 신숙주 무리들이 내세운 이유는 역적모의를 하였기 때문이라 했다. 머리에 먹물이 더 많이 들었다는 식자들은 왕권이 튼실해야 백성이 잘 산다는 핑계를 댔다. 하기야 정도전 무리의 뿌리가 완전하게 뽑히지 않았다. 이 자들이 신권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약해야 한다는 개떡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 참에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했다. 권력을 쥔 자들이 악행을 저지를 때는 언제나 그럴 듯한 이유를 댄다. 백성들을 위하여 라는 명분을 댄다. 정작 백성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그 중에도 신숙주는 왕권 운운 하면서 앞장을 서서 사람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다. 자기가 호의호식하려고 멋대로 가져다 온 명분이라는 것을 백성들은 알고 코웃음 친다. 월아도 잘 알았다.

“오라버니, 권력이란 너무 부질없어. 안평대군 곁에서 그들을 숱하게 보아 왔어. 설령 고관대작이더라도 행복도, 미래도 보장 받을 수가 없어. 그래서 벼슬아치들이 더 기를 쓰고 발버둥치는 지 몰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서 버둥거리다보면 오히려 권력도 잃고, 가족을 불행에 빠뜨리는 일인데.”

“맞아. 어머니께서 아버지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하면서 존경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아버지른 나는 많이 원망했어.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다. 내 가족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면서.”

“나도 그랬어.”

 “나는 설악산 산골에서 만난 화전민 부부처럼 사는 것이 부러웠어. 기회가 오면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어.”

“나도 그래. 천봉스님에게 그림만 전해주고는 설악산이든, 지리산이든 세상의 인연을 끊고 살아. 우리끼리만 살아.”

“월아야 정말이냐. 내가 곁에서 같이 살아도 되는거지.”

“오라버니가 있어야 행복하지 나 혼자라면 행복할 수가 없지요.”

  동석은 월아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미래의 행복이 손짓하고 있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보였다. 동석도, 월아도 세상에 태어난 것을 비로소 고맙게 생각했다. 행복이란 것이 바로 앞에서 기다린다고 느꼈다. 천봉스님에게 그림만 전해주면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마음껏 즐기리라. 둘은 미래를 약속하며서 즐거워 했다.

  한명회가 몰래 내려보낸 칼잡이들은 동석과 월아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들은 한양을 떠날 때 천봉스님이 머무는 절을 찾으면 월아를 만나리라는 말만 들었다. 그들도 천봉스님의 행적을 수소문하면서 동석과 월아가 걸었던 길을 따라 이 절, 저 절로 헤메고 다녔다. 그들은 절을 찾아가면 카를 뻬들고 눈을 부라렸지만 스님도 보살님도 한사코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이름이 있는 절을 찾아 다녔다. 그들도 보은의 속리산을 찾아갔다.

  동석과 월아는 속리산 자락에 이르렀을 때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을 따라서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한 사람은 여승의 복장이고, 한 사람은 노복처럼 보이는 남정네였다. 한명회가 보낸 칼잡이는 둘의 곁을 스치면서 눈여겨 보았지만 한양을 떠날 때 들었던 들었던 월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흘깃흘깃 훔쳐보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월아라면 숨어서 다날텐데 큰 길을 활보하듯이 걸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놈이 칼자루를 쥐고 유해의 지시를 기다렸지만 유해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용히 지나자는 뜻이다. 동석도 그들의 수상쩍은 짓거리를 눈치채고 있었다. 죽장으로 위장한 칼을 단단히 쥐고 바짝 긴장했다. 월아만이 아무 것도 모르고 행복에 겨워서 동석에게 바싹 붙어서 매달리다시피 하고 걸었다. 낯선 무리들이 보은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자 동석은 그제야 경계를 풀었다.

  지금껏 잠자리는 절에서 구했다. 동짓달의 산길이었지만 용문사 스님이 준 솜옷 승복이 냉기를 막아 주었다. 유해의 매서운 눈초리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산속의 도적을 만났지만 동석에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었다. 이들은 추설패도 땡초 무리도 아니었다. 농사를 짓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산으로 도망온 농군들이었다. 그러니 북대들이었다. 월아는 동석이 옆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것을 보니 백마를 타고 나타난 왕자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오라버니, 우리 천봉스님을 만난 후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우리만 살아.”

“그럼, 그렇게 하자. 우린 아직 나이도 어린데 세상을 너무 많이 살았던 것 같아. 보통 백성들이 겪지 못할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어. 이제는 우리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거야.”

“그렇구 말구.”

 동짓달 찬 바람이 옷깃 속을 스며들어도 추운 줄 몰랐다. 그들 앞에는 따뜻하고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후섭]

태어나기를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은 아랫것이라면서
짐승이나 다르지 않게 취급 당하던 일만이 가득했다.

아
이 원초적 숙명을 어찌해야 할까요

[방종현]

동석과 월아의 사랑 알콩달콩 이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