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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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남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 성지는 한국 카톨릭 교회에서 최고로 꼽을 만큼 서해안 지역에서 중요한 성지이다.
이곳이 성지가 된 이유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교 현양비와 순교성인비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1866년
그리고 또 이곳에서 70세의 이운필 순교자는 1866년에 교수형을 받았고, 박 베드로와 손치양 사도요한은 1868년 5월에 참수되었고, 6월 18일에 이영중 순교자도 군문효수 되었고, 이 발도로메오는 1870년에 참수되었다. 그리고 수 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도 이곳에서 순교한 곳이다.
1845년에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고 주교와 함께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선교사로써 20년 동안 가장 오래 장수한 선교사이다.
조선 교구 제 4대 교구장이던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 5대 교구장으로 승계 하였으나, 4일 만인 11일에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가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어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하였으니, 다블뤼 주교는 교구장 재임 24일만에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선이의 고발로 선교사들의 은신처마저 노출되고 많은 신자들이 붙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 희생을 막기 위해 동료 선교사들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다음 스스로 자수하였다.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오매트르 베드로 오 신부, 위앵 마르띠노 민 신부도 자진해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새남터에서 처형될 것이었는데, 그때 마침 고종(高宗)의 중병과 가례(嘉礼) 문제로 서울 새남터에서 피를 흘리게 할 수 없다 하여, 400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자리를 옮겨 처형되었다.
갈매못에서 100여리 떨어진 당진군 합덕면 신리 세거리에 지금도 집 한 채가 있다. 다블뤼 안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상황을 황석두의 도움을 받아 수집하여 기록하고, 이것을 여기서 불란서 글로 번역해서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낸 것이 샤를르 달레 한국 교회사의 줄거리가 되었다. 바로 103위성인 탄생의 산실이고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서 현재는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866년 3월 11일 포졸들이 여기에 덮쳤다. 이때 다블뤼 안 주교는 그들을 타이르고 부모님에게 마지막 하직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받은 회장은 중국을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전달하였다. 다블뤼 안 주교, 오매트르 베드로 오 신부, 위앵 마르띠노 민 신부, 황석두 등이 구속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 다블뤼 안 주교는 포졸에게 돈을 주면서 마지막 청을 들어 달라고 했다. “이 황석두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놓아주시오.” 하였다. 포졸들은 돈을 주니까 황석두를 풀어 주려고 했다. 그러니까 황석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꺼내서 포졸에게 주며 “이제 나는 천국에 갈 사람이니 이 돈을 받고, 내 아버지로 모시는 주교님과 죽고 삶을 같이할 터이니 나도 주교님을 따라가게 해 주시오.” 하였다. 포졸들은 서울로 오는 도중에 이쪽 저쪽에서 돈을 많이 받고 좋아서,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 옆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 곳에 와서, 술과 안주, 김치, 절편, 송편을 사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대접하였다.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여 1866년 3월 23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배론 신학교 집주인 장주기 요셉도 그들과 함께 처형하려고 갈매못으로 가다가 다시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 넓은 바위가 있는 곳에 왔다. 여기서 안 주교는 돈을 내주며 포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베풀어준 은혜를 다 갚고 가야겠다며 잔치를 벌렸다. 여기서 서울 쪽으로 5마장쯤 가면 동천(東川-일명 진내)이란 교우촌이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주교 신부가 치명 하러 갈매못으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교우들이 삼거리에 모여들었다. 안 주교는 여기서 식사 후 설교를 하였다. 삼위일체, 강생 구속, 상선 벌악. 영혼 불멸의 강론을 마치고 마니피캇과 떼데움을 부르며 처형지로 향하였다. 삼거리에 있던 그 바위는 1973년 절두산 성지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 불렀고, 1984년 시성식 후에는 5성 바위라고 부른다.
1866년 3월 30일 다섯 분의 순교자를 처형할 때 한사람을 죽이는데 10량씩 50량을 주기로 결정하고 공주에서 다섯 명의 희광이를 데려왔다. 형장에서 사형 집행 선고문이 낭독되고 맨 처음 안 주교에게 두 번 칼질을 하여 목을 반쯤 베어 놓고, 희광이들은 돈이 적다고 사형 집행을 중지하였다. 한사람 죽이는데 20량씩 100량을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몇 시간이 지난 후에 100량을 주기로 결정하고 처형이 계속되었다.
반쯤 목이 잘린 안 주교를 먼저 처형하고, 오 신부, 민 신부, 황석두, 장주기 순서로 처형이 이어졌다.
이들 중 황석두 루가 성인의 유해는 연풍으로 옮겨 안장했고, 나머지 네 분의 유해는 3일 후에 홍산으로 옮겼다가 블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끼로 이장, 다시 1900년 명동 대성당, 다시 1960년대에 시성 시복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 성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 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갈매못에 세워졌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
○ 안 다블뤼 안토니오 성인님. (프랑스. 갈매못. 1866. 3.30. 49세. 주교)
○ 오 오매트로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갈매못. 1866. 3.30. 29세. 신부)
○ 민 위앵 마르띠노 성인님. (프랑스. 갈매못. 1866. 3.30. 30세. 신부)
○ 황석두 루가 성인님. (연풍. 갈매못. 1866. 3.30. 53세. 회장)
○ 장주기 요셉 성인님. (수원. 갈매못. 1866. 3.30. 63세. 회장)
성가 489.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다블뤼 주교의 성성식 |
說明 |
내 보좌 주교 성성식(成聖式)을 거행했다. 조선에서 이 감격적인 의식이 행하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 모든 신자들이 참석했으면 좋겠지만 신중을 기하느라고 참석시킬 수가 없었다. 다블뤼 신부는 캄캄한 밤중에 비공개적으로 아꼰(Acones)주교 칭호로 성성 되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향상과, 우상 숭배자들의 개종을 마련하기 위한 성직자 회의(聖職者會議)도 끝마쳤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271-273 )
우리가 누리게 된 이 작은 평화를 이용하여 내 보좌 주교 성성식(成聖式)에 참여하라고 모든 선교사를 서울로 불렀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도 감격적인 의식이 행하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거기 참석하였으면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중을 기하느라고 그들을 참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주께 감사 드려야 하는 평온 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래도 지극히 조심을 해야 하며 우리가 숨어 있는 가따꼼바에서 서둘러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11년 전부터 이 포교지를 위하여 그렇게도 중요한 일을 해온 다블뤼 신부는 아꼰(Acones)주교 칭호를 가지고 캄캄한 밤중에 비공개적으로 성성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아직 헤어지지 않고 신자들을 향상시키고 우상 숭배자들의 개종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성직자 회의(聖職者会議)를 끝마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었는데 천만 뜻밖에 동료 페롱(Heron)신부가 조선의 수호 천사에게 인도되어 3월 31일 도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전에는 서양인들이 거의 들어올 수 없고, 2년 전만 해도 주교가 없어 온전히 두 선교사와 본국인 신부 한 사람의 짐이 되어 왔던 이 조선 포교지가, 이제는 주교 2명과 외국 선교사 4명 그리고 조선인 신부 한사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주께서 조선 백성에 대하여 크나큰 자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진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무 선교사의 도움도 없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진 이 교회, 오랜 세월 동안 다만 그의 발랄한 신앙과 힘찬 성격으로 스스로를 지탱하여 왔고, 피로 물든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기까지 한 이 교회가, 사도로서의 땀을 흘려 적셔 주는 나의 공경하는 보좌 주교와 5명의 선교사들이, 이지적인 열성으로 주께서 그렇게도 많은 도움을 주시는 지금, 풍성한 추수를 우리에게 갖다 주리라고 바라는 것은 지나친 자만이겠습니까. 이 희망들이 벌써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마 아직도 각 계급에 많은 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교회에 접근해 오는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농후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박해자들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며 관장들도 마치 옛날에 배교자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1, 2개월 전 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승리하였다고 실토하고, 그들이 아무리 노력했어도 10년 후에는 이 나라의 절반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게 될 것이라고 시인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관장이기도 한 어떤 대신의 아들이 우리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무슨 은혜를 청하듯이 우리를 보러 올 허락을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왕의 숙모 한 사람이 자기 남자 형제들에게 천주교인이 되라고 권유하며, 또 천주교인이라는 명칭의 마지막 흔적까지 없애 버리겠다고 그렇게도 여러 번 맹세하였던 바로 그 왕궁에, 참 천주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례를 받으려고 좀더 안온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이 어쩌면 이 사실들을 가지고 조선 점쟁이 여자의 예언이 맞는 것으로 볼지도 모릅니다. 이 여자 점쟁이는 대왕 대비가 올해 안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과, 임금님이 내년에 승하하시리라는 것과, 2년 후에 천주교가 나라 안에 번창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라에 이렇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시는 주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동시에 그 축복을 계속 내려 주시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조선의 현재 상태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은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그 희망들을 뒤엎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오래지 않아 그 박해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약간 보호하시던 대비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온건 책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세력이 현저히 쇠퇴하고, 반면에 우리의 적들이 가장 높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벌써 천주교인들을 찾아내기를 요청하는 상소가 임금님께 올려졌습니다. 지금 전국을 순찰하고 있는 암행어사들은 많은 명단을 받았는데, 그 첫머리에는 선교사들이 올라있고, 어떤 마을 전체가 고발되기도 했습니다. 벌써 78세의 노인이 옥에 갇혔습니다. 몇 주일 후에 암행어사들이 돌아오면 우리들에 대한 방침을 의정부에서 검토할 것입니다. 왕들의 마음을 주재하시고 또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우리 머리에서 머리칼 한 오라기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천주께서, 이미 많은 고통을 당해온 이 양떼를 위협하는 타격을 면하게 하실 지도 모릅니다. 이 양떼가 또 엄습 당하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선배들과 운명을 같이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 천주의 거룩한 사업의 신심 깊은 회원들을 위하여 드리겠습니다. 사실 여러분을 위하여 매일 우리 기도의 큰 몫을 바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1856년부터 1857년 사이의 우리 활동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규 고해 9.961, 대인 영세 518, 교우 자녀 영세 602, 죽어 가는 외교인 자녀 영세 804, 견진 226, 혼배 195, 종부성사 218, 부재중이어서 고해성사 받지 못한 사람 181명 신자 총수 15.206입니다.
성가 211. 주여 나의 몸과 맘
성인 : 황석두 루가(연풍 갈매못 1866/3/30 군문효수)
황석두 루가 성인의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 시성 |
나이 |
황석두 루가 |
본인 |
1866/ 3/30 |
남 |
갈매못 |
성인 |
53세 |
황 요한 |
양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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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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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프란치스코 |
삼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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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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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
황석두(黄錫斗) 루가는 충청북도 연풍(延豊)에서 양반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자 날이 갈수록 학문의 진도가 빨라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기만 학수고대하였다. 20세가 되어 과거를 보려고 한양 길에 나섰다가 주막에서 어떤 유식한 천주교인과 만나 성교 도리를 듣고 감명을 받아 좀더 깊게 연구하고 싶어서 선비로부터 천주교 교리책 몇 권 얻어 가지고 3일만에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공자 말씀에 “아침에 도를 얻어 저녁에 죽어도 한할 바 아니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아버지의 반대와 노여움으로 집안에 풍파가 끝없이 일었으나 황석두는 자기 방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에 열중하면서 아버지의 학대를 침묵과 벙어리로 3년을 지낸 끝에 아버지를 설득하고 집안 모두를 입교시켰다.
그는 덕행과 학식이 뛰어나 교우들 사이에 칭송의 대상이었고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였다. 순교의 소망이 불같아 나는 큰 박해는 바라지 않지만 작은 박해에라도 순교하기가 제일 원이다. 라고 말한 그는 병인박해 때 안 주교가 석두에게 피하라고 권하였으나 그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러면 주교님 혼자만 천당 가시려는 심사입니까?” 하고 주교의 말을 막고 포졸에게 “나도 함께 잡아가 주오. 저분들은 나의 스승입니다. 나는 여러 해를 두고 그분을 모시고 받들었소. 단 하루라도 해어져서는 살수 없는 나요. 저분들이 살아난다면 나도 살려니와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겠오.” 하면서 주교와 신부를 몇 십리나 따라간 끝에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아 54세로 순교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下권428~31,434~5) (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권102)
※ 처형된 다섯 시체는 그 많은 까마귀와 개가 조금도 해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다락골 줄 무덤
성지 설명 |
☏ 041-943-8122~3
소재지 : 충남청양군화성면 농암리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오소산 기슭에 자리잡은 청양 다락골 교우촌은 산비탈 중턱에 40여 호가 모여 사는 산골이다.
이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신부와 그의 부친 최경환(崔景煥)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 촌으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17기가 줄지어 있다. 한 무덤에는 10내지 20여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다고 전한다. 이 순교자들은 공주와 홍주에서 순교한 시신들을 이곳으로 옮겨왔지만 따로 따로 묘를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청양에서 대천 쪽으로 가다 보면 화성면 소재지 국도 변에 묵주와 성지 가지를 들고 있는 최경환 성인과, 그 옆에 십자가와 성서를 펴든 최양업 신부 부자상(父子象)이 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이들 부자의 탄생지임을 나타낸다.
다락골 면소재지에서 오리쯤 올라가면, ‘양업로 줄 무덤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마을 뒤 산길로 올라가면, 경주 최씨 종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와 묘비들이 줄지어 있다.
이 줄 묘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에 몰래 훔쳐내 최씨의 종종 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의 지명이 처음에는 월내리로 불렸는데, 순수한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여기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때이다.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崔仁柱)가 내포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누이인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으로 피난 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되었다.
최인주의 아들은 3형제로, 막내아들이 최경환 성인이고, 손자가 최양업 신부이다. 이들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 길로 나섰다.
또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로 정착한 곳이 안양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수리산 담배골에서 1836년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로 보내졌다. 1839년 수리산 뒤듬이에서 가족과 함께 교우 40명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최경환 성인은 9월 12일 옥사하고, 이성례 마리아는 그 해 음력 12월 27일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성가 286. 순교자의 믿음
시복시성청원자 이도기 바오로(청양 정산 1798년 7월 24일 56세) 장하치명
이도기 바오로는 1797년 정사 박해로 순교한 사람이다. 원래 그는 글을 몰라 아는 것이 없었으나 천주 신앙을 받아드린 뒤부터, 성령의 학교에서 사랑과 실천을 배워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데 사용했다. 청양 지역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여러 신자들이 체포된 적이 있었다. 정조가 천주교 신자로 지목 받고 있던 정약용을 금정(현재청양군대치면금정리) 찰방으로 보내 신자들을 회유하도록 했고, 최양업 신부의 할아버지 최인주도 그 무렵 청양 다락골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도기는 청양 뿐 아니라 홍주, 은진, 공주 등지까지 복음을 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칠갑산을 넘어 정산 땅으로 숨어들어 옹기점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자들의 연락처가 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데 온힘을 기울여 마을 사람 전체가 입교하게 되었다.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한사람이 “천주교 신자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 하고 위협하자 이도기는 아내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자 하느님의 뜻을 어기려고 하지 않았다. 또 자신을 신임하고 있던 신자들의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한 뒤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감추고 포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문초를 받다가 세 번째 문초에서 현감은 “네가 배교한다면 쌀을 주고 상처를 치료해준 뒤에 풍헌(風憲)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겠다.” 고 하였다. 이 말에 “나에게 정산 고을을 전부 준다해도 저는 결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포졸들이 자주 그를 보러왔으나 감시가 아주 소홀하여 도망가라고 권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망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장의 명으로 옥에 갇혔으니 그의 명령이 없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소.” 라고 말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 일이 되었다고 하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얼굴까지 환해졌다. 포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문을 당하지 않으면 얼굴이 창백해져 풀이 죽어있고 형벌을 당하면 생기가 도는 것 같으니 참 이상하다.”
결국 이도기는 1798년 7월 24일(음력6/12) 포졸들이 현감의 명령대로 그의 몸을 짓이겨 버렸지만 그럼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망나니 하나가 가슴에 칼을 대고 그 위에 올라가자 갈비뼈가 부러지고 피가 콸콸 쏟아지며 운명하였다. 이튿날 현감의 명령대로 그의 시신을 매장했다. 7, 8일 후 정산에서 10리쯤 떨어져 사는 신자들이 비밀리에 이도기의 시신을 찾아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 옥사장이 미망인을 찾아와 위로하기를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가 순교하던 날 밤에 큰 광채가 당신 남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오.” 하였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400)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163)
시복시성청원자 : 강완숙 골롬바(내포 서소문 1801년 7월 2일 41세) 참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 순교자의 친인척 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강완숙 골롬바 |
본인 |
1801/ 7/ 2 |
여 |
서소문 |
시복시성청원자 |
교회 매파 |
홍지영 |
남편 |
|
남 |
|
비신자 |
|
홍필주 필립보 |
전실아들 |
1801/10/ 4 |
남 |
서소문 |
시복시성청원자 |
28 |
홍순희 |
딸 |
신자 |
여 |
|
|
|
이로수(二老叟) |
시어머니 |
신자 |
여 |
|
|
|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우리나라 교회 창설당시 여성으로써 조선 교회에 너무나 눈부시고 길이 빛날 활동을 하였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시고 있으면서 여성의 신분을 이용하여 그 무서운 박해 시대에 왕궁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인도하여 들였던 세 사람을 장 살로 처형하고, 신부를 잡으려고 사방에 수사망을 펴고 있을 때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 장작 광에 숨어 있었다. 신부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이 강완숙 골롬바는 여성으로써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역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강완숙은 내포 지방에서 태어나 뛰어난 통찰력과 곧은 마음과 용감함을 겸비하였다. 그녀는 덕산 고을에 홍지영(洪芝栄)이라는 상처한 향반과 결혼을 했다. 그 사람은 순박하고 조금도 총명한데가 없어서 살기가 매우 힘들었고 많은 근심을 겪게 되었다. 강완숙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고,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에게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강완숙은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녀는 자기 가족과 친구들을 입교시키는데 골몰하였고, 그의 열성은 이웃 동네까지 퍼졌다. 강완숙은 시어머니를 입교시키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자기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도 입교시켜 모범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음식을 만들어 옥바라지를 함으로써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도왔다. 그녀는 전답을 남편에게 맡기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기 딸과 남편의 전실 아들 홍필주 필립보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살았다.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 그녀는 지황(池璜) 사바와 그 동료들의 위험한 계획을 돕기까지 하였다. 조선에 첫 번째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가 볼 수 있는 여인들 중에서 강완숙은 특별하였다. 신부가 도착하자마자 그렇게도 헌신적인 보조자를 만난 것이 매우 기뻐서 주문모 신부는 그에게 성세를 주고 여자들을 가르치는 여회장 직책을 맡겼다. 강완숙은 그 직책을 총명하고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고발되어 포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강완숙은 그를 구할 용감한 생각을 가졌다. 그녀는 자기 집 장작 광에 주문모 신부를 숨기고,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까지도 모르게 3개월 동안 음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갖다 드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신부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를 마련하여 드릴 수 없는 것을 매우 괴로워하며 시어머니에게 “신부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려고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한일이 없고, 신부님은 지금 피신하실 곳도 없으니 제가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남장을 하고 사방을 두루 다녀 신부님을 찾아내어 구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시어머니는 울면서 대답하였다.네가 그렇게 나가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니 나도 너를 따라가서 너와 함께 죽겠다. 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하여라.”하고 대답하였다.
강완숙은 기뻐서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안사랑에 모셔들였다. 주문모 신부는 거기서 외부 사람들이 양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 관습의 보호로 3년 동안 계속해서 머물렀다.
그러나 용감한 강완숙 골롬바는 겁을 내지 않고 폐궁에 사는 왕족인 이인의 아내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전교 하였다. 두 마리아는 매우 열심하여 그들의 종 여러 명을 입교시켰으며 명도회(明道会)에도 입회하였다.
신부를 헌신적으로 보좌하여 드린 강완숙 골롬바가 붙잡힌 후 관리들은 그에게서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무서운 주리를 틀었다. 그러나 그 흑형 가운데에서도 강완숙은 입을 열지 않고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 같아 형리들은 자기들끼리저건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다.”하고 말할 정도였다. 강완숙 골롬바는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과 같이 옥을 열심한 기도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신심 행사에 충실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천상 배필이 되려는 생각뿐이었다. 특히 그들이 죽기 전날은 기쁨에 취한 것 같았다.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리고 열렬히 바라던 승리의 날이 밝았다. 1801년 7월 2일(음력5/22) 동료 4명과 함께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녀와 같이 참수 당한 여인들은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였다.
홍필주는 강완숙의 남편인 홍지영의 전처 소생이었다. 그는 언제나 강완숙 골롬바의 아들로 늘 강완숙과 같이 있었고, 그녀를 따라 서울에 왔으며 언제나 자기 친어머니처럼 대접하였다. 그들이 신부를 집에 모셔들였을 때 홍필주 필립보는 신부의 복사가 되어 모든 도움을 드렸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382~9, 476~7,500~3, 579~80)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36)
시복시성청원자 : 황일광 알렉시오(홍주 홍주 1802년 1월 30일 45세) 참수 백정
황일광 알렉시오 순교자의 친인척관계
성 명 |
관 계 |
순 교 일 |
성별 |
형 지 |
시복시성 |
나이 |
황일광 알렉시오 |
본인 |
1802/ 1/30 |
남 |
홍주 |
시복시성청원자 |
45세 |
황차돌 |
동생 |
|
남 |
|
|
|
황일광 알렉시오는 내포지방 홍주에서 백정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가며 어렵게 살아갔다. 그러나 그는 놀랄만한 지능과 예민한 정신과 열렬한 마음을 갖고 있었으며 매우 명랑하고 솔직했다. 1792년 황일광은 이존창이 홍산 땅으로 이주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앙을 기꺼이 받아드렸다. 그리고 천주교를 더 자유롭게 믿기 위하여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 땅으로 이주하였다.
경상도에서 비신자들에게 자기 신분을 숨기기 좋았고, 신자들과 교류하기도 쉬웠다. 신자들은 그의 신분을 알았지만 양반 집에서도 다른 신자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는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하였다.
1800년 2월 황일광은 경기도 광주 분원에 살고있는 정약종의 이웃으로 이사해 살면서 황사영, 김한빈 등 여러 신자들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정약종이 서울로 이사하자 그도 동생과 함께 서울 정동의 주막집 행랑채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가며, 힘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돕고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혹은 시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영광도 얻었다.
그는 신유박해 때 땔나무를 하려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포졸들에게 명랑한 어조로 말하였다. “나리들께서 저를 남원 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 고을로 옮겨주시니,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남원’은 ‘나무’를 ‘옥’천은 ‘감옥’을 의미한다. 그는 이처럼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 것을 기뻐하며 남원과 옥천 두 고을을 빗대어 ‘자신이 나무를 하러 가는 대신 편안한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렇게도 낮은 신분임에도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고 배교도 하지 않자 무서운 고문을 가해도, 그는 천주교는 성스러운 학문이라며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외쳤다. 그래서 그는 다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였다.
1802년 1월 29일(음력1801/12/26) 그는 이경도, 정광수 등 15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홍주로 보내졌다. 그는 걸을 수가 없어서 들것에 실려가면서도 아내와 아들이 끝까지 도와주기 위해 따라가려고 했으나 그로 인해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신분이 비천한 황일광이 감격적으로 신앙을 증거한 그는 홍주에 도착하는 대로 참수되었다. 이 순교가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순교자들에게는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이런 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473~4, 601~2)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210)
최양업 신부의 16번째 편지 |
說明 |
르그레조아 신학교 지도자 신부
공경 하올 신부님에게
안곡에서 1859년 10월 11일
1858년 7월 22일자로 보내 주신 신부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작년에 보낸 저의 편지도 받으셨을 줄로 믿습니다. 작년에 새 선교사들과 새 소식들을 기다렸습니다.
선교사들을 영접하기 위해 주교님께서 보내신 우리 배가 웬일인지 강남 배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배가 여러 날 동안 약속한 장소에서 강남 배를 기다렸고, 또 그 배로 새 선교사들이 입국할 줄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혹시 해적을 만난 것은 아닌지? 또 파도에 휩쓸리지나 않았는지?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배로 우리나라 해안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렸습니다만 우리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픈 일 중에서도 반갑고 위로가 되는 기쁜 소식을 신부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즉 우리 조선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 성하의 인정을 받고, 공적으로 보천하에 선포가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루 빨리 시성식이 거행되어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천하의 모든 교우들로부터 공식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날이 오기만 바라고 고대합니다.
오늘까지 조선 순교자들의 전구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아마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우리의 정성이 미약하고, 또 우리 신부들이 치명자들에게 기적을 구하도록 교우들에 대한 계몽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천주교 시초에 여러 가지 기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신빙할 만한 증거가 부족합니다. 앞으로는 신부님의 명령에 따라 치명자들을 공경하고 또 저들의 전구 하심으로 기적을 얻기로 노력했습니다.
금년에 원자의 탄생으로 귀양갔던 교우들이 둘만 빼놓고는 다 풀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자가 곧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한 괴팍한 여인이 일으킨 박해도 그쳤습니다. 그 여인의 고발로 포위되었던 교우 동네도 이제는 다 풀려났습니다.
사목생활 중 나는 가짜 교우들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처음에는 착하고 열심한 체 하다가 나중에는 약탈하는 이리로 변했습니다.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했던 일을 하나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교우촌에서 이틀 길 되는 다른 교우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쌓여 갈 수 없어서 한 읍내로 들어가 주막에서 자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막 주인이 불량자들과 같이 나를 수상한 인물로 여겨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온 읍내가 떠들썩하게 몰려와 내 일행에 대해 욕을 하고 매질을 하고 나서 관가로 끌고 가니, 미사짐과 나 혼자만 주막에 남게 되었습니다.
관원은 안동(安東)김씨로 교우들을 그다지 원수로 여기지 않는 자여서 자세히 심문도 아니하고, 그 밤으로 읍 밖으로 쫓아내며 자기 관할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포졸들이 읍민들과 같이 횃불을 켜 들고 우리 주막을 습격하고 소란을 피우며 옷을 찧고, 신발과 갓을 벗기고 상처를 입힌 후 읍내에서 우리를 추방하였습니다. 추위를 피하고 밤을 지내기 위해 유숙했던 주막에서 쫓겨나 매를 맞고 또 의복이 찢어져 살이 반쯤 드러났고, 강추위로 몸은 꽁꽁 얼어붙었고, 깊은 눈 속에 발은 푹푹 빠지고, 능욕과 고통으로 기진맥진하여 캄캄 철야에 비틀거리며 걸어가며 관가에서 놓여난 것만 기뻐하면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포졸 떼가 다시 쫓아와서 우리를 습격하며 미사 짐을 풀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안 된다. 우리 다같이 관가로 다시 가서 관헌 앞에서 짐을 풀어보자. 여기서는 절대로 너희 마음대로 짐을 풀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들이 감히 손을 못 대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사 주기를 거절하면 화가 나서 나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악한 사람들이요, 배신자들이요, 강도들이요, 폭도들인 줄로 생각하시겠으나 좋은 사람도 있고, 주의 인자와 은총에 보답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동리에 열두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세 집만 빼놓고는 전부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남은 세 집은 교에 나오기는 고사하고 교우들과 원수가 되어 교 믿는 것을 방해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이에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친절과 겸손으로 저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으므로 저들도 감동되어 천주교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들이 되어 힘을 합하여 강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이 강당에 갔을 때에 그들은 문답과 경문들을 잘 배우고 영세 준비를 훌륭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공소에는 대인이 32명이고, 소인이 10명이고, 예비자가 17명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리를 배워 영세 준비를 다 하였으나 오래 전부터 병에 걸려 자기 방에서 문밖 출입도 못하였습니다. 이틀이나 걸리는 길이어서 영세 받기 위해 공소까지 올 수도 없었습니다. 같이 영세할 동무들이 와서 가마를 타고 가자고 하자 병자는나 같은 죄인이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은 부당하다. 지게나 타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첫날은 지게에 실려 길을 갔습니다. 다음 날에는 지게도 버리고 발로 걸었습니다(집에서는 문밖 출입도 잘못하였는데…). 눈이 두 자나 쌓인 험한 산길을 걸어서 강당에 도착하였습니다. 공소에서 열흘 동안이나 나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아무 고통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영세한 후 영혼도 낫고 육신도 나아서 용약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한사람은 위에서 말한 사람의 일가인데 천주교 도리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우선 자기 집의 우상들과 미신을 청소하기 위하여 귀신 단지를 힘껏 땅바닥에 둘러쳤습니다. 그러나 단지는 깨지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이때 그는 성호를 긋고 단지를 다시 집어, 이번에는 별로 힘도 드리지 않고 내던졌습니다. 하지만 단지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런 모양으로 모든 미신 물건들을 일소하였더니, 평소에 순하던 말이 별안간 광증을 부려 사람을 물었습니다. 이 예비 교우는 귀신이 말에 접한 줄로 여겨 화가 나서 말을 때려 죽였습니다. 다음부터는 귀신의 장난이 그쳤습니다. 그는 열심히 준비하여 영세를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하는데 그의 모친과 아내가 결사 반대하며 날마다 핍박하였습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더욱 큰 소리로 욕을 퍼부으므로, 아들이 귀찮아서 밭으로 가서 하루종일 굶어 가며 일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불쌍한 생각이 나서 함지에 음식을 담아 가지고 아들한테로 갔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잘못하여 넘어져 중상을 입었습니다. 함지까지 땅 바닥에 떨어뜨렸으나 음식은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머니는내가 못된 년이다. 아들이 나보다 낫다. 내가 공연히 아들을 괴롭혔다. 그 벌로 나는 낙상하여 중상을 입었으나 하느님을 공경하는 내 아들이 먹을 음식은 쏟아지지 않았구나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감동되어 교우가 되었습니다.
간월이라는 공소에는 교우들이 상당히 많으나 모두 가난하여 강당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어떤 외인이 와서 보고하느님을 공경하는 집 꼴이 이래서야 쓰겠는가하고 말하며 자기가 하나 지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외인은 자기 비용으로 훌륭한 강당을 지어 주었고, 장식품으로 화려한 촛대까지 사주었습니다. 내 관할 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이 곳만큼 훌륭한 강당은 없을 것입니다.
금년에 다블뤼 보좌 주교께서 내 지방에서 가장 넓고 길이 먼 일부 공소들을 맡아 순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공소들을 제외한 내 지방 연말보고는 사규 고해 2,124명, 재고해 844명, 대인 영세 201명, 예비자 391명입니다. 성영회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식을 버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양육하기 어려운 부모들은 가령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줍니다. 그러나 아주 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영아의 위험 대세도 힘이 듭니다. 어머니와 유아는 딴 방에 있어서 남자 출입이 엄금되어 있고, 여인도 아주 신분이 낮은 여인 외에는 타인의 집에 드나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험 대세를 줄 기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일과 전교 사업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하는 것이지 영구적으로, 또는 항구적으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존재하던 교우촌이 내일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부들이 어느 곳에 거주한다던가, 무슨 성물이나 물건을 맡긴다던가 할 때 1개월 동안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우들은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모양 떠돌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들과 성물 뿐 아니라 돈이나 재물을 몰래 간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인, 양반, 포졸들한테 빼앗깁니다. 외인들까지 부자라도 가난하게 입고 먹고 합니다. 부자라는게 드러나면 양반들한테 수탈 당합니다.
이틀 전에 신부님께 물건들을 청구하였는데 전번 편지에 다 준비되었다고 하셨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청구한 것은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견고한 것으로 보내 주십시오. 많은 기도를 청합니다.
성가 59. 주께선 나의 피난처
홍주읍성 성지
성지 설명 |
☏ 041-633-8891
소재지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조선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하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 평택이남, 동으로 천안 서쪽, 남쪽은 금강 이북이다.
홍주읍성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읍성의 둘레가 810미터의 성곽, 조양문과 함께 사적 제 231호로 지정돼 있다. 읍성 내에는 군청과 함께 감옥 터, 객사, 동헌 등이 있어 교우들을 고문하던 곳으로 쓰였고 때로는 처형지로 이용했었다.
박해 시대 당시 조양문은,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이 문을 통하여, 홍주 성안으로 멀쩡하게 들어갔다가 시체가 되어 성밖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홍주 관아 문을 들어가면 바로 순교 역사가 생생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 기다리며 꽁꽁 묶여있던 기둥들이 있고, 바닥의 흙은 선조들의 피와 고통과 한숨이 서려있다. 이 지역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숨을 거둔 순교자가 얼마나 많은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홍주에서 관할하는 지역에 많은 순교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에 치명 일기에만도 80명의 순교자 명단이 있으며 무명 순교자는 얼마인지 알 길이 없다. 기록으로 볼 때 1793년에도 원 베드로, 1797년 원 바오로, 배 프란치스코, 방 프란치스코 등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홍성에도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가 있다.
홍주에서 출생한 성인
○ 손자선 도마 성인님. (홍주. 공주. 1866. 3.30. 22세. )
○ 이윤일 요한 성인님. (홍주. 관덕정. 1867. 1.21. 43세. 회장)
○ 최형 베드로 성인님. (홍주. 서소문. 1866. 3. 9. 52세. )
○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님. (홍주. 옥사. 1839. 9.12. 34세. 회장)
성가 61. 주 예수와 바꿀 수 없네
성인 : 손자선 토마스(홍주 공주 1866/3/30 22세 교수)
손자선(孫慈善)은 충청도 홍주(洪州)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66년 3월 다블뤼 안 주교가 체포된 뒤 압수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관가에서 받았으나 교우들은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 손자선 혼자서 주교의 돈을 찾으려고 덕산(徳山)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가혹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배교를 거부하자 해미로 이송되었는데 그곳 관장이 왜 천주교를 버리지 않고 해미까지 왔느냐? 하면서 “네가 네 이빨로 네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고 놓아주겠다.”는 관장의 말에 그는 두 팔의 살을 한 입씩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한 후 기절해 쓰러짐으로서 신앙을 지켰다. 손자선은 두 다리가 부러지는 심한 고문을 받고 떠메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도 배교하라는 말에 “배교 하려면 다리가 부러지기 전에 했을 것입니다. 비록 죽어야 한다해도 배교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손자선 토마스는 1866년 5월 18일 교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03위순교성인들의생애3권116)
주교요지 Ⅰ |
說明 |
주문모 신부는 한국에 입국하자 명도회(明道會)를 세우고 초대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하였다. 명도회란 회원들이 먼저 교리를 배우고 난 다음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전할 것을 목적으로 만든 평신도 단체였다. 정약종은 교리를 통해서 전교에 열중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주교 요지를 읽고 다른 한문 교리서보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황사영(黄嗣永)은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이 책을 읽기만 하면 쉽게 교리를 배울 수 있고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한곳도 없었다.” 고 하였다.
주교요지의 내용은 천주의 존재 증명, 천주의 속성,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 상선 벌악과 천당, 지옥, 천지창조, 강생 구속, 예수 부활과 승천, 원조의 범죄, 영혼의 불멸, 천주교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편의상 천주의 존재, 천주의 속성,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 상선 벌악과 천당 지옥의 항목을 묵상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순교자와 증거자들 10-29)
1.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천주님 계신 줄을 아느니라.
무릇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 위에 임자가 계신 줄을 알므로 병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 하늘을 우러러 “하느님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며 빌고,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고 마음이 놀랍고 송구하니, 만일 천상에 임자가 아니 계신다면, 어찌 사람마다 마음이 이러하리요?
2. 만물이 스스로 나지 못하느니라.
천지 만물은 다 제 몸이 스스로 나는 일이 없다. 초목은 열매가 있기에 씨를 퍼지게 하고, 짐승은 어버이가 있어서 생겨나고, 사람도 부모가 있어서 생겨나니, 그 부모는 조부모에게서 나는지라, 차차 올라가면 분명히 시작하여 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 사람을 누가 낳으셨을까?
이 사람도 부모가 있어서 낳았다 하면 그 부모는 누가 낳았을꼬? 처음으로 난 사람은 부모가 없이 낳을 것이니, 그 사람은 제 몸을 스스로 낳았다 할 것이냐? 그렇다면, 이 사람만 제 스스로 나고 뒷사람은 스스로 나지 못할까?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처음에는 사람을 내신 이가 분명히 계실 것이니 사람 하나를 가지고 의논하면, 초목과 짐승도 다 그러하여 처음 난 초목은 초목이 초목을 낳음이 아니고, 처음 난 짐승도 짐승이 짐승을 낳음이 아니라, 초목과 짐승과 사람을 모두 내신 창조주가 계시니, 이 창조주를 천주라고 일컫느니라.
3. 만물이 저절로 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큰집이 있다. 아래엔 기둥을 세우고, 위에는 들보를 얹고, 옆에는 벽을 맞추고, 앞엔 문을 내어 비바람을 가리워 주어야 사람이 몸을 담아 편안히 살수 있으니, 이 집을 보면서 어찌 ‘저절로 되었다’ 라고 하리요? 반드시 ‘목수가 있어서 만들었다.’ 하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둥과 들보와 벽과 문이 저절로 어울려 되었다”하고 말하면 이 사람을 “지각이 없다”고 할 것이다.
천지도 또한 집과 같아서, 하늘로 덮고 땅으로 싣고 해와 달로 밝히고, 비와 이슬로 초목을 기르고 물로 축이고 불로 데우고 나는 새는 공중에 날고, 기는 짐승은 땅에 기어, 만물을 다 배포하고 마련하였기에, 사람이 그 중에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만물을 쓰고 편안히 살아, 마치 집을 짓고 편안히 있음과 같으니, 작은 집도 절로 되지 못하여 반드시 건축한 목수들이 있어야 되거든, 이 천지 같은 큰집이 어찌 절로 되었으리요?
분명히 신통하시고, 지극히 능하신 이가 계셔서 만들어야 될 것이니, 목수들을 보지 못해도 집을 보면 집 지은 목수들이 있는 줄을 알 것이요, 천주를 보지 못했어도 천지를 보면, 반듯이 천지를 만드신 임자가 계신 줄을 알 것이다.
4. 하늘이 움직여 돌아감을 보고 천주가 계신 줄을 알지니라.
온갖 것이 지각(知覺)과 손발이 있어야 능히 움직이고, 지각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니, 사람과 짐승은 지각이 있기에 움직이고, 흙과 돌은 지각이 없기에 움직이지 못하니, 그 중에 지각이 없고도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지각 있는 이가 잡고 흔들어야 움직이므로, 흙과 돌은 지각이 없어도 지각 있는 사람이 굴리면 움직이고, 물래와 수레는 지각이 없어도, 지각 있는 사람이 잡고 돌리면 움직이니, 저 하늘과 해와 달과 모든 별이, 귀와 눈이 없고, 손과 발이 없고, 혼과 지각이 없는데, 능히 날마다 움직여 돌아가고, 또 일정한 법이 있어,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차례로 돌아오고, 밤과 낮의 덥고 추움이 고르게 나누어져서, 천년이 되도록 그 돌아가는 도수가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으니, 지각없는 것이 어찌 스스로 돌아가며, 돌아간들 어찌 절로 도수에 맞으리요?
분명하고 지극히 신명하고, 지극히 능한 이가 잡고 돌려야 돌아갈 것이니, 이 돌아가게 하시는 이는 곧 천주이시니, 그러므로, 물레와 수레가 돌아감을 보면 저 하늘도 천주가 계셔서 돌리시는 줄을 알 것이다.
5. 사람은 반드시 천주로 말미암아 생겼느니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처음으로 난 사람은 천주로 말미암아 났거니와, 지금 사람은 부모의 속으로부터 나니, 천주가 아니 계신들 어찌 나지 못하리요?”
대답하기를 “처음 사람은 천주가 아니 내셨다면, 지금 사람이 어디로부터 낳으리요? 또 부모의 힘만으로는 자식을 낳지 못하니, 이를테면 장인(匠人)이 그릇을 제 재주로 만들기를 마음대로 해서, 만들고자 하면 만들고, 말려고 하면말고,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하는데, 사람이 자식 낳기를 장인들이 그릇을 만들 듯이 제 재주로 할 것 같으면, 어찌하여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며, 아들을 낳고 싶어도 딸을 낳고, 잘 낳고 싶어도 못나게 낳는 일이 있느냐?” 이것을 보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천주의 조화로 하시는 것을 알 것이요, 또 장인은 그릇을 제 재주로 만들기 때문에 그릇 만드는 묘리를 알거니와, 사람은 자식을 낳아도 그 되는 묘리를 누가 아는가? 만일에 알 양이면, 어찌하여 이목구비가 되며, 오장육부가 됨을 모르리요? 다 천주의 신령하신 슬기로 마련하심이니라.
☞천주교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 성지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어농, 단내,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 성지.
제 2차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 성지.
제 3차 배론 성지, 묘재, 용소막성당, 부엉골신학당.
재 4차 초남이 유항검생가터. 치명자산.
제 5차 갈매못 성지, 다락골줄무덤 성지, 홍성읍성 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지, 연풍,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 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 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 정약종 유적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 숲정이 성지, 천호산 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은이 공소, 골배마실.
제12차 나바위 김대건 신부 귀착지. 김대건신부 출생지.
제13차 해미 성지, 성거산 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 성지, 이승훈 묘 성지, 남양 성모 동산.
제15차 대구 관덕정 성지, 한티 성지, 신나무골 성지,
부록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도착 : 매월 3번째 주일 사당역 1번 출구 아침 8시출발․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가톨릭 회관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