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테타는 유행어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제일 먼저 바람을 일으킨 것은 ‘세대교체’와 ‘재건’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건국민운동’, ‘국가경제재건운동’에서처럼 단체 이름이나 구호에서 ‘재건’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고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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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테타 당시의 서울역 ⓒ2007 국정홍보처
“재건합시다”라는 인사말이 나오는가 하면, 새로운 옷을 만들어 ‘재건복’이라고 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돈을 안들이고 걸어 다니는 ‘재건 데이트’가 유행했다.
재건과 무허가 건축
그러나 ‘재건’ 속에 뒤섞여 ‘무허가 건축’도 유행했다. 그 말은 ‘못생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당시 판잣집 류의 무허가 건축이 즐비한데서 유래한다. 요즘 말로 옮기면 ‘얼꽝(얼짱의 반대말)’이나 ‘비호감’ 정도가 될 것이다.
‘세대교체’라는 말은, 1963년 2월 27일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당시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에서 “세대교체의 노력이 대다수 정치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발언한 데서 비롯했다.
그 말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의 용어로 쓰였다. 이후 ‘세대교체’는 “때 묻은 사람 물러가라!”는 구호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곧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5.16 직후 체포된 ‘정치깡패’ 이정재 ⓒ2007 국정홍보처
‘혁명주체’, ‘차트 행정(탁상공론)’, ‘브리핑’, ‘캠페인’ 등의 말도 유행했다. ‘번의’, ‘소신’, ‘민족적 민주주의’, ‘자주성’도 당시 박정희의 작품이다.
‘부재’라는 말도 이 무렵에 많은 새끼말을 만들면서 퍼졌다. ‘언론부재’, ‘교육부재’, ‘공약부재’, ‘정치부재’, ‘대화부재’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부인은 부재중”이라는 말까지 낳아, ‘요정’에서 “수청을 들어 달라”는 암시어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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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김종필 ⓒ2007 국정홍보처 |
공화당의 2인자 김종필 역시 잊을 수 없는 유행어를 창조했다. 1963년 2월 25일,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을 사임하고 순회대사 자격으로 외국행 길에 오르기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종필은 “자의반 타의반이 여행 동기”라고 말해,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유행어를 창조했다. 그래서 당시 화장실에 가는 여학생들은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의 정신적 남편”
1963년의 최대 유행어는 “나는 당신의 정신적 남편”이다. 1963년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 차로 박정희에게 패배한 윤보선이, 한 달 뒤 진해의 국회의원 선거 지원 유세에서 “나는 국민의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로부터 ‘정신적 ~’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구걸하는 이들도 유행에 민감했다. 거지들은 동냥을 잘 안주고 문전박대하는 가정주부들에게 “나는 당신의 정신적 남편”이라고 놀려댔다.
1960년대에는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여 반대파와 내통하는 자를 가리켜 ‘사꾸라(벚꽃)’라고 했다. 이 말의 유래는 1963년 어떤 날, 당시 야당의 거물이던 유진산을 향해 누군가 공개석상에서 “사꾸라”라고 고함친 데서 비롯됐다.
이 말은 그 뒤 크게 유행하여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말과 함께 ‘겹사꾸라’, ‘왕사꾸라’ 등의 말을 낳으며 사용됐다.
또 1964년에는 공화당 의장 이효상이, “나라가 잘되려면, 여당에는 야당 사꾸라가, 야당에는 여당 사꾸라가 있어야 한다”는 공화당 식 희망사항을 발설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말은 이후 정치하는 불쌍한 중생들이 서로 비방하는 말로 써먹으면서 80년대까지 줄기차게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1963년 제 6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서는 ‘전국구 비례대표 의원’을 가리켜 ‘비료(肥料)대표’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는 선거자금이 궁했던 당시 야당에서 정치헌금을 받고 전국구 후보 순위를 팔았기 때문이다. ‘비료대표’는 당시 돈으로 5천만 원까지 호가했으며, 갖가지 추문을 뿌려 매관매직의 대명사가 됐다.
1964년엔 동경에서 올림픽이 있었다. 그 때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 신금단 부녀가 극적으로 상봉하고 난 뒤 다시 헤어지는 장면에서, 북한의 신금단이 “아바이”라고 울부짖어 그 말이 곧 유행했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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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단 선수 ⓒ2007 국정홍보처
같은 해,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가 치열해지면서 ‘재경 교수단’이 대일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하자, 당시 문교부장관이 이들을 “정치교수”라고 비난했다.
이 시위의 여파로 ‘정치학생(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대학생)’이 생겨났고, ‘정치방학(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한 임시 방학)’이 실시됐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그 어떤 사죄나 보상도 없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과거사 문제의 시작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교섭을 맡고 있던 김종필은 회담과장에서 독도 문제가 불거지자 “독도를 폭파하자”는 발언을 해, 커다란 물의를 빚었다. 경제개발 지원금을 향한 한국정부의 굴욕적인 말과 행동에서, ‘고자세(일본 측)’, ‘저자세(한국 측)’라는 말이 파생했다.
막걸리 선거, 개판 선거, 코피 선거
1967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는 ‘선심공세’, ‘타락 선거’라는 말과 함께, ‘막걸리 선거’, ‘장국밥 선거’, ‘개판 선거’라는 말이 유행했고, 친(親)박정희 세력의 폭력이 판을 치던 당시 대학가 학생회장 선거는 ‘코피 선거’로 불렸다.
1969년 3월에는 ‘가짜 박사’ 소동이 일어나 현직 장관, 고위관료, 국회의원, 대학총장, 목사 등 유명인사 40여 명이 들통 났는데, 이 바람에 ‘가짜 대학생’, ‘가짜 의사’, ‘가짜 롤렉스시계’ 등 ‘가짜’들이 주류세력의 실체임이 드러났다.
1960년대 말에는 정치인들이 고위층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과 관련해, 항간에 누가 얼마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불법 음성거래로 이루어진 돈을 ‘오리발’이라고 하여, 정치권에서 크고 작은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오리발’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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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울 ⓒ2007 국정홍보처
1960년대 후반부에는 ‘우주시대 개막’, ‘연예계 시대의 시작’과 관련해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유행어가 창조됐다.
1966년 3월 ‘제미니 8호’가 도킹에 성공하고, 6월에 ‘제미니 9호’가 랑데부와 우주유영에 성공하자, 즉각 “우주 시대의 이성교제는 ‘랑데부’에서 ‘도킹’으로!”라는 말이 나왔다.
1969년 7월 21일에는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에 ‘오염된 발자국’을 남기게 됐다. 그리고 나서부터 양복점, 술집, 다방, 음식점 이름에 ‘아폴로’라는 이름이 대거 등장했다.
첨단 ‘탈 것’을 비꼬는 ‘11호 자가용(걷기)’도 이때 발명됐다. 미국이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을 때, 한국의 여성들은 학교와 공장의 기숙사 창가에 ‘빤스’를 꽂았고, 많은 남성들이 이를 ‘청춘의 깃발’이라 하여 훔쳐보거나 훔쳤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인공위성이 발사되고 궤도 수정을 했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는 ‘애인 바꾸기’를 생활화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한 것이었다.
‘테레비’와 ‘나지오’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연예인의 시대가 차츰 열리기 시작하면서, 연예인들이 유행어의 창조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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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디언 故 서영춘 씨 ⓒ2007 국정홍보처 |
“좋아하네”와 “웃겼어”라는 말은 그것들 가운데 한 예다. 한국 코미디의 영원한 대부 서영춘의 “출세해서 남 주나?”, “놀랐지?”, “가갈갈갈”은 1965년에 탄생한 말이다.
또 구봉서가 창작한 “몰랐지? 몰랐을 거다”는 엉뚱한 일을 해 놓고 뒤에서 약 올리는 데 쓰였다.
가수 윤복희는 국내에 처음으로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를 상륙시켰고, 신문과 잡지의 해외토픽란에 미니스커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미니’라는 말이 득세했다.
‘미니’의 열풍은 ‘미니 아가씨’, ‘미니 만년필’, ‘미니 콘사이스(사전)’, ‘미니 강의’ 등으로 출발해서 ‘초미니’에 이르렀다. ‘미니스커트’는 ‘따오기’라는 순우리말로 바뀌기도 했는데, 이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 보이지 않는 / 따옥 따옥 따옥 소리 / 처량한 소리’의 동요 ‘따오기’에서 따온 말이다.
“누구 왕년에”도 1960년대의 최고 히트 작품 중의 하나다. “누구 왕년에 데이트 안 해본 사람 있나?”, “누구 왕년에 요정 한두 번 안 가본 사람 있나?”하는 식으로 응용되어 널리 퍼졌다.
또 “이거 되겠습니까?”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말은 구봉서가 동아방송(TBC)에서 자주 말한 데서 비롯했다.
‘종삼(종로 3가)’, ‘꼰대(아버지)’, ‘새발의 피’, ‘롱가리트(화학성분)’, “자수해서 광명 찾어”, ‘민생고 해결’, “공부해서 남 주나?”, “말짱 헛거야”, “소비는 미덕이다(김종필)”, ‘아더메치유(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함)’, ‘베트콩(서울 무교동 일대의 사창가에서 옮은 국제 성병)’, ‘불쾌지수’, ‘시행착오’, ‘마이카 족’ 등도 유행했다.
▲1960년대 서울 종로 ⓒ2007 국정홍보처
농촌에서는 정부의 농촌시책을 빗댄 ‘추경(秋耕)’, ‘소주밀식(小株密植-소수의 품종을 빽빽하게 심음)’이 대유행이었다. ‘도둑놈촌(고위 관료들의 동네)’, ‘강도촌(졸부들의 동네)’ 등도 대도시 곳곳에 있었다. 농촌을 죽이고 압축성장을 강조하는, ‘개발 독재’의 시작이었다.
첫댓글 우리 옆집에서 구걸하듯 tv를 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