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곡 송림사
창건배경 및 역사
신라 눌지왕(재위417∼458) 당시 아도화상이 설단 기원하여 소가람을 세우고 송림사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대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대가람을 세웠다. 이때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을 세우고 이곳에 불지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1959년 송림사 오층전탑을 해체 복원할 때 사리장엄구에서 불지사리 4과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1092년(선종9) 대각국사(道詵國師) 의천(義天)스님이 중창하고, 1235년 몽골의 침입 때 전탑만 남고 폐허화된 것을 다시 중창했다. 이 무렵 보감(寶鑑,1251~1322)국사가 주지로 부임하여 주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당시 송림사가 고려에서 비중 있는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97년(선조30)의 정유재란 때 왜군이 절에 침입하여 다시 소실된 것을 1686년(숙종12)에 기성(箕城)대사가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창하였는데, 숙종은 ‘대웅전’ 현판을 직접 써서 절에 내리기도 하였다. 1858년(철종 9)에는 영추(永樞)스님이 중창하는 등 크고 작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의 5층전탑은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사리장엄구 등의 유물도 보물 제325호 지정되었다.
연혁
1. 신라진흥왕 5년(544) 명관대사가 가져온 불지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
2. 1092년(선종9)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중창
3. 1235년 몽고의 침입으로 오층전탑만 남고 소실
4.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다시 소실
5. 1686년(숙종12) 기성대사가 중창
6.1858년 영추스님이 중창
7. 1959년 5층전탑 해체․수리(사리장엄구 등 유물 발견)
8. 1990년대 초 응진전, 삼성각, 산신각, 천불전, 누각 중건
불지사리(佛指舍利) 봉안한 5층전탑(五層塼塔)에 묻은 영광의 흔적, 송림사(松林寺)
소나무 숲에서 절이 솟아낫다는 전설을 간직한 송림사(松林寺).
송림사는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싸여 아담하고 옛스러운 멋을 풍기는 절 집과 탑, 석등 등이 아름드리 정원수와 잘 어우러져 마치 작은 공원의 안락함이 느껴진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띠는 것이 크고 우뚝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를 뽐내는 오층전탑(五層塼塔)이 절의 가치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인근에 있는 부인사가 잃어버린 영광의 흔적이라면 송림사는 오로지 탑 하나로 현존하는 영광의 흔적이다. 고려 현종 때 거란과 여진을 퇴치하기 위해 처음으로 대장경 각판사업을 진행한 것이 부인사에 보관되었던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인데, 몽고의 2차 침략 때 몽고군이 부인사로 들이닥쳐 불태워 버렸다. 이어 송림사에 들이닥친 몽고군의 만행으로 모든 전각들이 불탔지만, 전탑만은 험한 수난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오롯이 그 모습을 오늘날까지 지켜온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 진(陳)의 사신 유사(劉使)가 중국 유학승인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신라에 오면서 불경 2,700권과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 이때 불경과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절로 그 가운데 일부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탑이 많다. 그러나 순수한 전탑은 몇 기 되지 않아 탑의 상륜부 까지 오롯이 갖추고 있는 송림사 5층전탑은 미술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가치 또한 높다.
탑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이 탑에서 나온 유물 역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 1959년 해체수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사리엄구와 함께 여러가지 유물들은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대구박물관의 입장권 전면에 새겨지기도 했다. 또 미국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되어 한국의 문화와 미술품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관람 포인트
1. 신라 진흥왕 때 진(陳)나라 사신이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불서(佛書) 2,700권과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와 봉안한 송림사 5층전탑은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높이 16.13m, 긴단 폭 7.3m의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추정된다. 쉽게 볼 수 있는 석탑보다 크고 재질도 달라 사방을 돌면서 천천히 살펴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2. 송림사 대웅전의 편액은 조선 숙종대왕의 친필이며, 대웅전안에는 높이 3m의 삼존상이 있다. 삼존상은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으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큰 불상이다.
3. 송림사 명부전은 전국에서도 규모가 제일 크며, 내외부 장엄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명부전의 조선 후기 석조 삼장보살좌상을 비롯하여 시왕(十王)상, 판관상 등 명부전의 다른 제상(諸像)도 조형성이 돋보이고 미술사적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혼구(混丘) 보감국사(寶鑑國師, 1250~1322)
보감(寶鑑)국사는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서 법명은 혼구(混丘)이다. 승과에 급제한 뒤 보각(普覺)국사 일연(一然, 1206~1289)스님의 제자가 되어 그 자리를 이어 강석(講席)을 열었다.
그의 주요 활동 상황을 보면, 1284년(충렬왕10)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 속에 불아(佛牙)를 봉안하는 경찬법회(慶讚法會)에 참석하였다. 1289년 이후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른 것을 비롯하여 내원당(內院堂), 연곡사(冽谷寺), 보경사(寶鏡寺) 등의 주지를 맡았다.
충렬왕은 그에게 가리법복(伽梨法服)을 하사하고, 여러 차례 칭송하는 글을 내렸으며 대선사(大禪師)로 삼았다. 충선왕은 즉위하여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고, ‘대사자왕법보장해국일(大師子王法寶藏海國一)’이라는 호를 내렸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그가 당시 최고 지위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왕사(王師)가 되었고, 1315년 밀양 영원사(瑩源寺)에 머무르다가 1322년(충숙왕9)에 송림사(松林寺)로 이석하여 열반에 이른다. 사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보감, 탑명(塔名)을 묘응(妙應)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어록(語錄)’ 2권, ‘가송잡저(歌頌雜著)’ 2권,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 ‘중편지송사원(重編指頌事苑)’ 30권 등이 있으나 전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스승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가운데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 끝에 첨가된 안설(按說) 및 ‘진표전간(眞表傳簡)’조 아래에 부기(附記)한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는 혼구스님이 지은 것이다.
위치
팔공산 서쪽 끝 자락에 자리한 송림사는 절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옆 계곡에 는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도로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힘들게 산행하지 않아도 팔공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송림사 동쪽으로는 신숭겸 등 고려 태조 왕건의 충신 8명을 추모하고자 이름 지어진 팔공산이 있다. 팔공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불교문화를 꽃피운 영산이다.
북쪽에는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는 가산(架山)이 자리하고 있다.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칠곡(漆谷)이 되었으며, 1640년(인조 18년)에 이곳에 가산성을 쌓고 칠곡도호부의 치소가 약 180년간 산성내에 있었다고 한다.
송림사가 있는 마을을 송림이라 하는데, 송림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약 300년전에 남평문씨가 정착했다고 전한다. 칠곡군 동명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원래 칠곡군 하북면 지역이나 1914년 구지동, 송림동, 덕산동, 양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명면에 편입되었다.
찾아가기
승용차 이용 - 칠곡이나 다부 I.C에서 5번 국도를 이용하여 동명 4거리까지 온다. 오는 도중에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동명 4거리에서 동명저수지방면으로 908번 지방도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송림사를 만난다.
대중교통 이용 - 칠곡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구덕리 방향으로 가는 3번 버스를 타고 송림에서 내리면 길 옆에 바로 송림사가 있다.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가람배치
송림사 가람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자연석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ㅁ’형이며, 경내로 들어서면 엄청난 크기의 벽돌로 쌓은 5층전탑이 중정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전탑을 한 바퀴 돌면서 번뇌망상을 잠시 접은 후에 그 뒤에 있는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다.
대웅전 오른쪽으로는 산신각이, 왼쪽에는 삼성각이 아담하게 지어져 있으며, 산신각 우측 뒤로 응진전이 위치해 있다.
5층전탑 오른쪽에는 우리나라에 가장 크다는 명부전이 위치하고, 그 뒤로 요사가 자리하고 있다.
석탑 왼쪽에는 또 다른 요사가 있으며, 요사 오른쪽에 종무소가 깔끔하게 세워져 있고, 종무소 오른쪽에는 원래 선열당인 것을 2006년 현재 천불전으로 개보수 중에 있다.
대웅전을 마주한 석탑 앞으로 설법전으로 이용하고 있는 누각이 있으며, 설법전 오른쪽에 범종각 자리를 만들어 놓고 2006년 현재 불사를 진행중에 있다.
5층전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빙 둘러싸여 있는데, 누각 앞이 본래의 입구였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으며, 왼쪽으로 50여m 떨어진 곳에 새로 입구를 두고 있다. 입구에는 안내소 겸 매점이 있고 입구로 들어가면 가람이 구성된 왼쪽으로 넒은 공간이 있는데, 주차장 등으로 활용되는 중정이다.
높낮이 없이 전체적으로 평지에 가람이 배치되어 있는 송림사는 군데군데 나무들이 늘어져 있어 아담한 공원에서 산책하는 기분을 들게 한다.
설화
어느 상가집 인부가 배푼 측은지심으로 생긴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부자집에 초상이 났다. 장사 전날밤 상주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내 시키는 대로 한다면 너의 집안은 대대로 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장례를 끝마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물건이나 음식을 주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상이 현몽하여 일러준 것으로 믿은 상주는 조상객이나 인부들에게도 음식을 못 먹게 했다. 인부들은 배가 고팠으나 일을 마치고 나면 품삯을 두둑히 주겠다는 상주의 말을 듣고, 참고 일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추위 속에서 장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장례를 치루는 곳을 알고 찾아온 걸인들이 음식을 좀 달라고 졸라도 상주는 떡 한쪽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음식을 챙겨 집으로 내려 보냈다. 그러나 인부를 시켜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 걱정이 되어, 자신이 직접 뒤쫓아 가기로 하고 남아 있는 인부들에게 신신 당부를 했다.
“절대로 장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게. 품삯 은 두 곱으로 쳐 주겠네”, “염려마십시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불살라 버릴 테니까요” 다짐을 받은 상주는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갔다.
산에는 인부들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을 마치고 나자, 짚푸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한곳에 쌓아 태우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거지 아이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와 떨며 애원했다. “저는, 오늘밤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가마니 한 장만 주십시오”
측은한 마음이 든 인부들은 상의 끝에 헌 사마니 한 장을 줘 보내고 연장을 챙겨 막 내려오려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지 아이가 가고 있던 그 자리에는 웅장한 절이 생기고, 가마니는 그 절의 대웅전에 걸려 있었다.
그 후, 과연 그 상주집안은 점점 몰락하고, 대도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거지 아이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던 인부들은 점점 살림이 늘고 자손도 번창 하였으며, 절의 이름은 소나무 숲에서 생긴 절이라 하여 ‘송림사’라 하였다 한다
누각(樓閣)
대웅전 정면에 있는 누각 현판에는 ‘八公山松林寺(팔공산송림사)’라 적혀 있으며, 설법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았다.
자연석 기단을 놓고 다듬돌 주초석을 기단으로부터 50cm 높이 올려 그 위에 원주 기둥을 올렸으며, 대웅전 쪽으로 통유리를 설치하여 밖이 보일 수 있게 하였다. 정면은 나무로 만든 여닫이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내부에는 통유리 앞으로 불단을 조성하여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그 뒤에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송림사(松林寺):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는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밭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최근 경지 정리를 하면서 거대한 당간지주의 밑부분이 노출되었는데 받침의 기단석은 보이지 않는다. 당간지주의 윗부분은 부러져 길이 60cm, 폭 50cm, 높이 90cm 정도가 남아 있다. 표면은 다듬어지기는 했으나 약간 거친 편이며, 부러진 윗부분을 보면 구멍을 뚫었던 흔적이 보인다. 건립년대는 송림사의 창건 당시로 추정되며, 나머지 한 기도 비슷한 크기에 역시 부러진 채로 조금 떨어져 있다. 당간지주의 위치로 보아 과거의 송림사 입구가 이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송림사(松林寺): 대웅전(大雄殿)
숙종이 글씨를 쓴 커다란 편액이 있는 대웅전은 1686년에 세워졌으며, 1755년과 1830년, 1850년의 중수 사실을 적은 상량문과 중수기를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전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 단청이 되어있다. 장대석 기단을 위에 화강석 정평주촉을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웠다.
목조 건축에서 칸과 칸, 곧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너비는 대체로 비슷하나, 송림사 대웅전 앞뒤면은 이런 일반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중앙의 어칸(御間)은 넓고, 어칸에 이어지는 좌우 협칸은 이보다 좁다. 가장 구석이 되는 양쪽 툇간은 아주 좁아져서 그 비율이 대략 3:2:1 정도이다. 이에 따라 문짝도 어칸에 넷, 협칸에 셋, 그리고 툇간에 하나씩을 달았는데 그 용도에 각각의 차이를 두고있다.
어칸의 문짝 넷 가운데 출입에 이용되는 것은 어칸의 쌍여닫이문 뿐이고, 나머지 두 짝은 채광의 구실만을 하는 붙박이 문이다. 좌우 협칸은 가운데 문짝이 안여닫이, 양 옆의 문짝은 고정되어 광창으로만 쓰인다. 툇간의 외짝문 역시 여닫을 수는 없고 채광창으로만 쓰임새가 한정되어 있다.
어칸의 가운데 두 짝은 빗살문, 양 옆의 두 짝은 소슬꽃살문이며, 협칸은 가운데 안여닫이가 소슬빗살문, 나머지 두 짝이 빗살문이다. 반면 툇칸의 외짝문은 정자실문으로 변화를 주었다. 어칸에 둘, 협칸에 각각 하나씩 남아 있는 신방목은 원래 벽 중간에 세운 문설주, 곧 벽선을 받쳤던 것으로 지금은 벽선이 없어진 채 양 볼에 새겨진 태극무늬와 연꽃무늬를 달고 하인방에 꽂혀 있다.
내부에는 불단 후불벽을 이루는 고주가 건물의 중앙선에 세워져 있어 불단 앞의 공간이 협소하며 상대적으로 불단 뒷면은 여유가 있다. 이는 아마도 불단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돌면서 예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조로 보인다. 낮은 수미단에 삼존불을 모시고, 그 뒤로 후불탱화 3폭과 우측벽에 목각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두가 달린 소종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천상 천하 어디에도 부처님 같은 분 안 계시고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온 세상 둘러봐도 또한 비교될 분 없도다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다 보았으나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 모두가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없도다
대웅전목조석가삼존불좌상(大雄殿木造釋迦三尊佛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358호
대웅전 안에는 높이 3m의 향목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어 대웅전의 위엄을 더욱 뽐내고 있다.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며 규모면에서도 조선시대 삼존상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대웅전의 목조 석가삼존불좌상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좌우보처로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
안정된 부피감에 사실성을 띠고 있으며, 세련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삼존상은 효종 8년(1657년) 불상 조성기가 발견돼 조성연대가 명확하며, 조성자들이 전남 영광 불갑사 대웅전 삼존상의 조성자 명단에도 보이고 있어 송림사와 불갑사간의 교류관계 파악에도 중요한 자료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송림사(松林寺):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며, 사찰에서 지장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법당으로 죽은 사람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6도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으며, 오직 중생애민의 자비심으로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용서할 뿐이다.
보통 명부전 불단 가운데에 지옥중생의 구세주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그 좌우에는 죽은 뒤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다루는 10명의 명부시왕상을 세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후(死後)신앙과 연결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에 지장탱화가 많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지장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송림사 명부전은 전국에서도 제일 큰 규모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막돌허튼층 쌓기 전에 장대석을 깐 기단으로 화강석 정평주초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웠다.
어칸에는 빗살문 3분합문을 달았지만 여닫을 수 있는 것은 가운데의 안여닫이문 뿐이다. 양쪽 협칸에는 기둥 중간에 중방을 질러 그 위에 문얼굴을 내고 두 짝의 정자살창을 내었다. 가장자리 좌우 툇칸에는 벽체 중간쯤에 교창을 닮은 빗살문 붙박이 광창을 두었다. 명부전의 벽면에는 오역(五逆)의 대죄를 범한 무리를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내부천정은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나무마루로 문 옆으로 금강역사가 서 있고 죽은 사람의 생전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이 모셔져 있으며, 불단 중앙에는 지장 삼존상을 봉안하고 그 뒤로 후불탱을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삼장보살상,목조시왕상과제상(冥府殿三藏菩薩像,木造十王像과諸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0호
송림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장보살좌상은 국내 유일의 조선후기 석조 삼장보살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봉안된 상의 조성연대는 허공장(지지)보살의 좌협시상에서 나온 발원문을 통해 1665년임을 알 수 있다.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의 협시보살로 허공장(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천장보살 좌우에는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이 협시하고, 허공장(지지)보살 좌우에는 용수보살과 다라니 보살이 협시하며, 지장보살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그 옆으로 저승의 심판관인 십왕이 봉안되어 있다.
천장보살상 복장물에서 나온 다양한 시기의 경전류와 다라니, 발원문 등도 조선시대 불교사 및 미술사·서지사의 중요 자료로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시왕(十王)상, 판관상 등 명부전의 다른 22구 제상(諸像)은 조형성이 돋보이고 미술사적 자료로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부도는 송림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2m 높이의 기성대사비각(箕城大師碑閣)옆에 잇대어 모두 4기가 모여져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에 속하며, 송림사에 주석했던 고승의 부도인데, 다만 어느 스님의 묘탑인지는 알 수 없다.
송림사(松林寺):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은 대웅전 왼쪽에 자리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1칸으로 삼성각 보다 규모가 작다. 익공계 형식의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리고 단청이 되어 있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다음 자연석 주초석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웠다. 높이가 2m 정도로 아주 낮으며, 아래 기단에서 50cm는 벽으로 막혀 있으며, 그 위로 1m가 채 되지 않는 궁판이 없는 빗살문늬 2분합문을 달았다. 내부공간은 아주 협소하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잇다. 산신탱은 나무 아래 산신이 부채를 들고 앉아 있으며 그 옆에 앉아 있는 호랑이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표현했다. 그 옆에서 동자는 시중을 들고 있다.
산령각 주련은 다음과 같다.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영산에서 옛날 부처님의 부촉으로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강산에 위세 떨치며 중생을 제도한다.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왼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에 익공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고 다듬돌로 기단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웠다. 어칸은 빗살무늬 2분합문이며, 좌우에 작은 유리창문을 달아 놓았다. 편액 양쪽은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내부에는 마루바닥을 깔고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태을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 주련은 다음과 같다.
生界潛形入四維(생계잠형입사유) 중생계 모습 숨긴 채 사방으로 들어오네
隨緣赴感澄潭月(수연부감징담월) 인연 따라 감응함은 맑은 못에 달 비친다.
송림사(松林寺): 송림사오층전탑(松林寺五層塼塔)
송림사 오층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남쪽 평탄한 대지에 높이 16.13m, 기단폭 7.3m로 지대석 위에 토축(土築)의 얕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다. 신라시대의 탑 가운데 유일하게 금동상륜부(金銅相輪部)가 남아 있다.
기단의 각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와 5개의 탱주(撑柱)를 모각하고, 그 위로 갑석(甲石)을 덮은 후 중앙에 1단의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했는데 이것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수법과 비슷하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를 모두 전으로 축조하였으며, 한 변의 길이는 27cm, 높이 6.2cm의 방형전과 이를 반으로 자른 장방형전 2가지로 축조되었다. 탑신부에는 곳곳에 문양전(紋樣塼)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차례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층 옥신은 비교적 높으나 2층 이상의 옥신의 체감율은 완만하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는 벽돌 한 장 두께로 처마를 삼고 밑의 받침수는 1층부터 9단, 7단, 7단, 6단, 4단이며, 낙수면의 층단수는 1층부터 11단, 9단, 8단, 7단, 5단이다.
상륜부에는 5층 옥개 위에 노반의 신부를 쌓고 그 위 네 귀에 풍경이 달린 동판을 얹어 갑석을 대신하였다. 동판 위의 각 부분은 금동제로 되어 있는데 찰주는 목재이며 그 위에 동판을 씌운 다음 복발, 앙화, 보륜, 용차, 보주를 두었다.
보륜의 일부와 수연이 소실된 듯하나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일한 금동상륜부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의 상륜부는 1959년 해체·보수 공사 때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며, 이때 초층 옥신 남쪽에는 본래 감실이 있었으나 후대에 폐쇄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2층 옥개에서는 채색이 있는 거북형 석함 속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는데, 금동 전각형 사리기 안에 안치된 녹색 유리제 사리병을 비롯하여 유리제 잔(盞), 수지형(樹枝形) 금동 장식, 옥류(玉類) 등이 있었으며, 3층 옥개에는 나무 뚜껑을 덮었던 석궤(石櫃)가 있었으나 속에는 부식된 경전의 흔적만 있었다고 한다.
송림사오층전탑내유물(松林寺五層塼塔內遺物)
10점 일괄 -보물 제325호
우리나라에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벽돌로 만든 송림사오층전탑이 있는데, 1959년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면서 탑 안에 있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탑의 1층 옥신부와 2, 3층 옥개부, 복발 등에서 1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1층 옥신에서는 조선시대의 목불(木佛)과 파손된 석불, 동불(銅佛)이 나왔고, 2층 옥개부에서는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궤(石櫃) 안에 넣은 높이 14.2cm 크기의 금동전각형사리기(金銅殿閣形舍利器)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기는 네 기둥의 아랫부분에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 앙련좌(仰蓮座)를 두어 유리잔을 받치게 하고, 기둥 위로는 보개(寶蓋)를 올려놓았다. 가운데에는 높이 7.0cm, 입지름 8.7cm의 녹색 유리잔을 안치하고, 그 안에 다시 높이 6.3cm, 입지름 3.1cm의 녹색유리제 사리병을 얹어놓았다.
녹색의 유리제품은 사리장엄구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잔의 표면에는 12개의 둥근 고리 모양의 장식이 있고, 사리병은 보주형 마개로 막았다. 보개에는 은도금한 수형(樹形) 장식구를 달았으며 200여 개의 영락으로 장엄했다. 금동전각의 노란색과 유리제품의 녹색은 서로 대비되어 호사스럽고 강한 인상을 준다. 사리기 옆에는 높이가 18.0cm에 달하는 금동제수형장식구(金銅製樹形裝飾具)가 세워져 있다.
3층 옥개부에서는 뚜껑이 없는 석궤 안에서 목개(木蓋)와 부식된 종이조각이 나왔다.
5층 옥개석 위의 복발에서 높이 7.8cm, 입지름 18.0cm의 청자상감원형합(靑磁象嵌圓形盒)과 지름 3.0cm, 두께 7.5cm의 금동원륜(金銅圓輪) 2개가 나왔다. 이 원형합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구슬 281개, 은환(銀環) 15개, 향목(香木) 7편, 열매 1개가 발견되었다.
요사(寮舍)
송림사에는 요사가 2동 있으며, 대웅전 좌측 앞에 선설당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팔자지붕을 올려놓았다. 자연석 주초석에 원주와 사각기둥이 섞여 세워져 있으며, 뒤쪽 2칸은 덧붙여 공간을 넓혀 놓았다.
정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툇마루 위에 각 방으로 들어가는 2분합문이 달려있다. 이곳은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공양간으로 사용한다.
명부전 뒤쪽에 있는 요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켭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기단은 가구식이며, 다듬돌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기둥을 세웠다. 정면출입문은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려있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인 승보(부처님의 제자)를 봉안한 전각이다.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수도하는 스님들에 대한 신앙의 결과로 나타난 사찰의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중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의 그림이나 조상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羅漢)이란 남방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서는 소승, 대승(小乘, 大乘)을 막론하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뜻이다. 나한전 안에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를 모시거나, 16나한상을 모시기도 하며, 500나한상과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송림사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에 겹처마로 맞배지붕이다. 가구식 기단에 둥근 다듬돌 주초석를 놓고 그 위에 원주기둥을 세웠다. 어칸과 좌우협칸은 궁판이 있는 띠살무늬 2분합문을 달았다.
내부에는 마루바닥을 깔고 불단을 조성하여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여 좌우보처로 제화갈라보살과 자씨미륵보살이 협시하고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상 뒤로는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주련은 다음고 같다.
有山有水乘龍虎(유산유수승룡호) 산이 있고 물이 있으니 용호가 즐기고
無是無非伴竹松(무시무비반죽송) 시비가 없으니 송죽을 벗하네
靈鷲昔曾蒙授記(영취석증몽수기) 옛날 영산에서 수기를 받은 분들이
而今會在一堂中(이금회재일당중) 지금 한 집안에 모여 계시네
천불전(千佛殿)
천불전은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으로 천불에는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이 있다.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이라 하며 천불전에는 이 중 대개 현겁천불을 모신다. 현겁(賢劫)은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송림사 천불전은 선열당으로 사용하던 전각을 개보수하여 2006년 현재 개·보수 중에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공사가 완료되면 내부에 천분의 부처님을 봉안할 예정이다.
왜인들이 무서워 한 '송림사
신라 미추왕 혹은 내물왕 대에 아들 3형제가 부친의 묘지를 파기 위해 현재 송림사가 서 있는 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묘를 파기로 하고 그들은 집으로 와 잠을 청했다.
그날 밤 맏아들의 꿈속에 현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내일 묘를 파노라면 반드시 어떤 사람 하나가 나타날 것이다. 그 사람은 묘를 팔 동안에 나무에 묶어 두면 반드시 후환이 없을 것이다” 라고 이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그 맏아들은 동생들을 데리고 묘를 파러 갔다. 열심히 묘자리를 파는데 잠시 소동이 나더니 왠 사나이가 서 있었다. 즉시 형제들은 현인이 이른 대로 그를 잡아 나무에 묶자 그는 소리치며 죄도 없는 자기를 묶어 두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애걸하자 그 맏아들은 어젯밤 일을 개의치 않고 그를 풀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과 회오리바람이 일고 반대편에 산이 생기고 절이 생겨났다고 한다.그 후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에 이르러 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이곳에까지 쳐들어 와 이곳의 전탑을 끌어 내리려고 했다.
스님들이 괘를 펴보니 왜인은 ‘송(松)’자를 무서워 한다고 나와, 왜적들이 탑을 쓰러뜨리려고 탑 윗부분에 밧줄을 걸어 당기는 순간, “송림사!” 하고 소리치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며 탑 속에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여 왜적들은 혼비백산 도주하였다고 한다.
탑 속에 있는 보물들은 잘 간직되었으나 이때 탑 상륜부가 부러졌다고 한다. 1959년 보수 때, 사리를 비롯하여 옥으로 만든 줄기에 금 잎을 붙인 보리수, 순금 불감 등 많은 보물이 나오고, 구부러진 상륜부도 바로잡았다.
주변자연환경
송림사는 인근에 영남지역의 영산 팔공산(八公山)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충신 신숭겸 등 8명이 이곳에서 견훤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그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팔공산이라 이름지었는데, 삼국시대부터 공산(公山), 중악(中岳), 부악(父岳) 등으로 불려져 온 영남 지역의 명산(名山)이다.
신령스러운 땅 팔공산에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잡았고, 신라 후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원찰지(圓刹地)로서 원찰 조성과 원탑(願塔) 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고려시대에서도 초조대장경(初彫大裝經)이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되고, 유가종(瑜伽宗)의 거봉인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 자정국사 자안(慈靜國師 子安)은 동화사(桐華寺) 주지로서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이 땅의 불교를 호령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은해사(銀海寺)가 인종태실수보사찰(仁宗胎室守譜寺刹)로, 파계사(把溪寺)가 영조(英祖)의 장수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팔공산의 법등은 계속 밝혀져 왔다. 이러한 전통으로 이곳에는 현재도 수많은 사찰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이어가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맥을 이어온 불교 역사의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팔공산은 아미타신앙, 미륵신앙, 밀교신앙 등의 불교예술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어 모든 불교신앙이 집약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또 송림사에서 북쪽에 자리한 곳에는 가산이 우뚝 솟아있다. 해발 901.6m 가산은 가사산(架士山), 갓산, 가산으로 이름 된 명산으로서 일명 칠봉산이라고도 불리며 칠곡군 내의 최고봉이다.
선조의 호국의지가 깃들어 있는 가산산성과 가산바위 등 명소가 많으며 울창한 수림, 계곡의 석간수는 한여름에도 서늘함을 느낄만큼 시원하다.
가산바위는 산성 서쪽편에 있는 80여 평의 넓은 바위로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도선(道詵)대사가 가산바위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地氣)를 눌렀다고 전한다
칠곡의 자랑거리
1)팔공산 한티재
소 재 지 경북 군위군 부계면 ~ 칠곡군 동명면(국지도79호선)
팔공산은 전국의 10대 명산중 하나로서 동화사, 부인사 등의 명성사찰과 천주교 한티성지, 신숭겸장군 유적지 등 많은 유적과 전설이 서려있어 4계절 내내 등산객과 탐방객이 넘치는 전국적 관광명소이다. ‘팔공산 한티재’는 지역 탐방객의 편의를 위하여 건설된 약 20km 길이의 도로로서 경북 군위군과 대구간을 연결한다.
팔공산의 경치와 관광도로로서의 기능제고를 위하여 환경 친화적으로 건설되었으며, 팔공산의 아름다운 전경과 신선함을 굽이굽이 휘감아 돌다보면 도로의 굴곡을 따라 펼쳐지는 수려한 주변경관에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 특히 가을철 단풍은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2)가산산성 및 가산바위
위 치 :경북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및 가산면 가산리 일원
지정현황 :국가지정 사적 제 216호, 1971년 3월 지정
대구광역시와 구미시 사이에 위치한 칠곡군의 중심은 왜관읍이다. 조선 인조 18년(1640)에 가산산성이 축조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고 칠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표적인 문화재는 가산산성이다.
신라시대 오악신앙의 중심인 명산 팔공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해발 901m의 가산은 일곱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일명 칠봉산으로 불리어지는 명산이다. 산정에 나지막한 7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평지가 있고 여기서 사방으로 7개의 골짜기가 뻗어나가고 있다.
임진, 병자 양란을 겪고 난 후 조선중기에 전략적 방어를 위하여 약 100여년 간에 걸쳐 축성했다. 내,외,중성 구조로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3중성으로 칠곡도호부가 성내에 있었다.
정상에는 백여명이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대구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휴식처인 가산바위가 있다.
3)금오산
위 치 : 경북 칠곡군 북삼읍
높 이 : 976.6m
영남의 명산으로 동북쪽 주봉은 구미시, 서쪽은 김천시, 남쪽은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 걸쳐 있다. 산 정상은 깍아 세운 듯한 암벽과 야은굴, 금오산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북삼읍쪽 금오동천에는 등산객과 휴식처로 많이 찾고 있다.
4)유학산
위 치 : 경북 칠곡군 석적읍, 가산면
높 이 : 839m
가산면 다부리, 학산리와 석적읍 성곡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험준한 산으로 암벽이 병풍을 이루고 여러종류의 동물이 서식하며, 느릅나무, 박태기나무, 자귀나무 등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예부터 학이 놀던 명산으로 도봉사, 쉰질바위, 정상부근의 갈대밭이 볼만하다. 6.25 전쟁 때는 다부동전투의 핵심 방어고지가 되어 무려 9번의 탈환전 끝에 승리함으로써 인민군에게 밀려 대구와 부산의 함락 일보 직전 처음으로 유엔군과의 연합작전을 승리로 장식하였고 북진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호국의 산이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생존자로 구성된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주관으로 군부대등의 협조를 받아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실시된 유해발굴작업 결과 유골과 유품이 수습되어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있는지 그 참상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도봉사에서 우측산길로 약20분쯤 오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위용에 놀라게 되는데 어른키로 50질이나 되며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쉰질바위 또는 학바위로 불려진다.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유명하다.
5)송림사
위 치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91-2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있는 신라고찰로서 대구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절인데 조선 세종때에는 교종, 선종 36사의 하나에 포함된 사찰이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에 자리를 넘겨주고 그 말사가 된 절로서 544년(진흥왕5)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그 뒤 대각국사 의천이 1092년(고려 선종9)에 중창했고 1243년(고려 고종30) 몽골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중창했으나 1597년(선조30) 왜병들의 방화로 가람이 소실되었고 1686년(조선 숙종12)에 기성대사에 의해 대웅전 과 명부전이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대웅전 동쪽 약 50m지점의 도로변에는 기성대사를 기리는 높이 2m의 비석과 부도 4기가 있다.
대웅전의 편액은 숙종대왕의 어필이며 대웅전안에는 3백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의 향목불상 3좌가 있는데 이렇게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국내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며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된 중후한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명부전(절 안에 십왕을 봉안하는 집)은 대웅전 동편에 서향으로 있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오역의 대죄를 범해 교화를 바랄 수 없는 무리를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밭 가운데에는 윗부분이 부러져 60×50㎝가량의 둘레로 90㎝정도만 남아있는 송림사 당간지주 2기가 서 있는데 송림사 창건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따라서 과거 송림사의 입구가 그 곳이었을 것이고 이것으로 보아 송림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옆계곡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함께 대구 근교의 고찰을 찾아드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좁쌀 한알로 정승사위가 된 곱사둥이
옛날 칠곡(漆谷)의 어느 산골마을에, 가난하면서도 고집세고 의뭉스런 곱사등이 총각이 있었다.
어느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과거를 보겠다고 나섰다. 노자도 없이, 몸에는 좁쌀 한 알만 지니고 한양길에 올라, 날이 저물자 객줏집에 들었다. 곱사등이 총각은, 주인에게 좁쌀 한 알을 맡기면서,"이것을 하룻밤 잘 맡아 주시오. 귀중한 물건이오."
하고 당부하였다. 주인은 대수롭잖게 생각해 아무렇게나 간수해 좁쌀 한 알을 간밤에 쥐가 먹어버렸다. 주인이 밥값을 안 받겠다고 해도 총각은, "내 목숨보다 더 귀중한 좁쌀인데 당장에 그 쥐라도 잡아주시오."
하고 고집을 부려, 주인은 간신히 쥐 한 마리를 잡아 주었다. 총각은 그 쥐를 가지고 길을 떠나, 그날도 해가 지자 객줏집에 들렀다.
"이 쥐를 하룻밤 동안 잘 맡아 주시오. 아주 귀한 쥐요."
하면서 주인에게 쥐를 맡겼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또 야단이 났다. 주인집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어버린 것이다. 주인이 사정을 해도,
"정 그러면, 쥐를 잡아먹은 고양이라도 주시오."
하고 버티어, 주인은 할 수 없이 고양이를 내어 주었다. 곱사등이는 고양이를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또, 날이 저물자, 객줏집에 들어가 주인에게 고양이를 맡기었다. 그러나 이튿날 역시 소동이 났다. 간밤에 주인집 나귀가 고양이를 밟아 죽인 것이다.
"귀한 고양이를 죽였으니, 고양이를 밟아 죽인 나귀라도 내시오."
막무가내인 총각에게, 주인은 하는 수 없이 나귀를 내주었다.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길을 가다가, 또 날이 어두워 객줏집에 들었다.
"이 나귀를 하룻밤 동안 잘 맡아 주시오. 매우 귀중한 나귀요."
"염려마십시오. 옆집 소 외양간에 매어 두겠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도 또 소동이 벌어졌다. 밤새 옆집 황소가, 나귀를 뿔로 떠받아 죽여 버린 것이다.
"안되오, 절대로 안되오. 그 귀중한 나귀를 죽였으니 나귀를 죽인 황소라도 주시오."
주인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나, 황소를 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곱사등이 총각은 황소를 끌고 한양으로 들어갔다. 날이 저물자 소장수 집을 찾아갔다.
"이 황소를 하룻밤 동안 잘 맡아 주시오. 정말 귀중한 소요."
주인은 황소를 외양간에 매 두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는, 또 큰일이 벌어졌다. 소장수 아들이, 팔려고 내놓은 줄 알고 그 황소를 팔아버린 것이다. 소는 당시 이름난 정승댁에서 제사에 쓰려고 사갔다.
"안되오, 절대로 안되오. 그 황소가 어떤 소라고, 그 소가 없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오. 다른 소는 백 마리를 준대도 소용이 없소."
곱사등이는 펄펄 뛰며 야단이었다. 소 장수는 총각을 데리고 정승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잡아버린 후였다.
"내 놓으시오. 빨리 내 소를 살려내시오."
곱사등이가 펄펄 뛰는 데는 정승도 난감했다. 궁리 끝에, "나에게 과년한 딸이 있는데, 대신에 내 딸을 주면 안 되겠나."하고 제의했다. 그제야 총각은 못이긴 듯이 응낙하고 장가를 들었다. 이렇게 하여 곱사등이 총각은, 좁쌀 한 알로 단번에 정승 사위가 되고, 글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훗날 경상도 감사까지 되었다 한다.
위봉사
기산면(架山面) 하판리(下板理) 분림지는, 약 1천년전 신라말(新羅末)에 창건한 '위봉사(威鳳 寺)'의 절터였다.
위봉사를 지은 도목수(都木手)는 12세 어린 소년이었는데, 모든 재목을 목침과 같은 나무토막으로 연결해 지었다고 한다. 어린 목수는 계속 나무토막만 다듬어 수만 개를 챙겨 놓고,
"내일이면 상량을 한다."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같이 일하던 목수가 어린 도목수(都木手)를 시험해 보려고, 그 많은 목침 중 한 개를 일부러 감추어 놓았다. 이튿날 도목수가 현장을 살펴보고 나서는,
"아! 하나를 빠뜨렸구나. 나의 계산능력이 이렇게 모자라면서 감히 절을 지으려 하다니....."
하고 연장을 챙겨 떠나려 하였다. 그제야 목수는 탄복을 하며, 사실을 실토하고 어린 도목수(都木手)를 만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절의 '장군수(將軍水)'란 샘물은 장복(長服)하면 기운(奇雲)이 왕성(旺盛)하고 장수(長壽) 했다고 한다.
한말(韓末)에 이 절의 스님이 장복한 나머지 기력이 너무 왕성해, 밤에는 축지법으로 원근(原根)을 배회(徘徊)하면서 여인(女人)을 농락하자, 나라에서 스님을 체포하여 사형(死刑)시키고, 그 후 신도(信徒)들이 불계(佛契)를 조직하여 빈 절을 유지해 오다, 못이 만들어 지면서 폐찰(廢刹)되었다고 한다.
위봉사는 원래 유학산 중턱 암벽(岩壁) 밑에 있었는데, 이 절에는 절 뒤 암벽에서 매일 공양(供養)에 필요한 만큼의 쌀이 나와, 절이 융성했다 한다.
한 스님이 욕심(慾心)이 생겨 막대기로 암공(岩孔)을 넓히려고 쑤셨더니, 쌀 대신 빈대가 쏟아져 나와 폐찰되었다고 하며, 그 절터는 지금도 남아 있어 돌무더기사이의 흰 찌끼들은 그때의 빈대 껍질이라고 한다.
유학산에 얽힌 전설
가산면 학산리의 유학산은 학(鶴)이 노닐 정도로 기암과 산림이 울창하다.
주봉(主峰) 유학산과 소학(巢鶴)ㆍ황학(黃鶴)의 3학산(鶴山)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어떤 문중에서, 유학산에 있던 묘(墓)를 이전(移轉)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전날 밤 묘주의 꿈에 백발 노인이 현몽하여 묘를 옮기면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이튿날 파묘하자, 학 세마리가 묘에서 날아올라, 맞은편 황학산과 마을 서편의 소학산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유학산 정상부위에는, 마당재 옆에 우물이 있고, 다래가 많이 나는 다래바위골이 있다.
지금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는 이 우물은 옛날에는 명주실 두 타래를 늘여 뜨려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유학산 중허리에는 '빈대절'과 '가산절' 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빈대절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승려가 빈대절터에 암자를 지어 불도를 닦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암자엔 빈대가 너무 많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승려는 몇 년 동안 암자를 비우면, 빈대가 없어지리라 생각하고 암자를 떠났다. 몇 년후 다시 돌아와 보니 암자에 빈대가 한 마리도 없고 전에 없었던 구리 빛깔 기둥이 서 있었다. 승려가 그 기둥을 짚어 보자, 그만 기둥이 무너지면서 빈대들이 쏟아져 나와, 결국 그 승려는 빈대 떼에 의해 극락으로 갔다고 한다.
마을에는 천년 넘은 고목으로 다섯 아름 되는 은행(銀杏)나무가 있는데, 신라(新羅) 때는 사찰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은행나무는 신기하게도 국가 환난(患難)이 있을 때마다 꼭 울었다고 한다. 청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그리고 6.25동란 직전에도 며칠동안 울었다고 한다. 마치 탈곡기 소리와 같이 "으-응, 으-응"하며 울었는데, 은행나무에 등을 대면 나무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1973년 겨울에 아이들이 놀다가 밑둥치 구멍에 불을 질러 삽시간에 타버리고 밑둥치만 남았다.
의견총
옛날, 석적읍 어느 마을에 김생원이 살고 있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강아지 한마리가 추위에 떨며 자기 집으로 기어 들어왔다. 원래 짐승을 좋아하던 김생원은, 측은한 마음으로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며 따뜻하게 보살폈다.
강아지는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김생원은 그대로 자기 집에서 기르게 되었다. 이 개는, 김생원의 귀여움을 받으며 잘 자라서, 삽사리가 되었다. 삽사리는 무척이나 영리하여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주인을 알아 보았으며, 항상 김생원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날, 강 건넛마을에 잔치 갔던 김생원은 그날 따라 술이 좀 과해, 돌아오는 도중 강가 잔디밭에 쓰러져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취중에 피우던 담뱃대의 불이, 바싹 마른 잔디밭에 붙어, 그 주위로 번져갔다. 김생원 옆에 앉아 주인이 깨기를 기다리던 삽사리는, 볼을 문지르며 발로 주인을 흔들었으나, 김생원은 깊은 잠에서 깨어 날 줄 몰랐다.
불길이 점점 김생원에게 가까워지자, 삽사리는 번개같이 강으로 달려가 온 몸에 물을 함빡 적셔와서, 불이 타 들어오는 주인의 주위를 뒹굴었다.
강과 언덕을 수없이 뛰어다니며 제몸에 물을 적셔와 주인을 지킨 삽사리는, 화기를 먹은데다 지칠대로 지쳐, 그만 주인 옆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얼마후 찬 기운을 느끼고 잠을 깬 김생원은, 자기 주위만 안 탄 잔디밭에 옷이 젖어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삽사리가 자기를 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김생원은 자기를 살리려다 대신 죽어간 삽사리를, 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으며, 사람들은 삽사리의 충직하고 깊은 의리를 기려, 그 무덤을 '의견총(義犬塚)'이라 불렀다.그 후 세월이 흘러 일대에 밭을 일구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을 개들이 매일같이 의견총 자리에 모여 놀아 농사가 되지 않으므로, 그곳에 다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바위고개와 아기장수의 비극
낙동강을 따라 칠곡군(漆谷郡)과 달성군(達成郡)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고개를, '바위고개'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능선허리를 뚫고 신작로를 개설하였는데, 여기에는 통한스러운 사연이 전해온다.
옛날부터 이 바위고개에는, 산신령이 바위속에 아기 장수를 키우고 있어, 장차 나라를 지킬 위대한 장수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나라가 어지럽던 구한말, 일본의 침략 마수는 이곳까지 뻗치게 되었다. 일본 정보원의 귀에도 이와같은 소문이 들어가, 바위고개에 와보니 과연 낙동강을 내려다 보고있는 이 산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정보원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바위 한 복판을 내리치자, 바위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일본 정보원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전말을 보고받은 일본군은, 다시 많은 병력으로 이 능선의 중간을 잘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일고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능선이 반쪽으로 갈라졌다. 바위속에서 형체가 갖추어 가던 아기 장수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3일간이나 흘러내린 피는, 온 산의 바위를 물들이고, 낙동강을 핏물이 되게 하였다.
한편, 장수바위가 갈라질 때, 그 옆쪽에 큰 바위가 솟아 오르면서 한 마리의 용마가 나와 하루종일 울다가 사라졌다. 용마가 울던 자리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생겼으며, 바위 복판에는 큰구멍이 나 있었다.
그후 바위 아래 도로 남쪽의 버드나무를 등지고, 왼손으로 돌을 던져 바위 위에 얹히면 생남한다고 하여, '아들바위'라 불렀다. 그러나, 이 바위도 6.25 이후 도로확장공사때 사라지고, 지금은 애틋한 전설만 남아 있다.
여우골
왜관읍(倭館邑) 석전(石田)4리를 '여우골'이라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 사냥을 좋아하는 김진사가 살고 있었다. 김진사는, 부부간에 금실도 좋았으나, 늦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어느날, 진사는 사냥을 마치고 고개를 넘어 돌아오다, 닭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나는 여우를 보았다. 이날따라 별 수확이 없던 진사는, 재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도망가는 여우를 명중시켜 그 자리에 쓰러뜨렸다.
그날 이후, 여우에 관한 일은 잊어버렸다. 얼마후 진사의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김진사는 기쁜 마음으로 계속 사냥을 다녔으며,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옥동자를 낳았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났으나,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이상한 버릇이 들어 들에 나가 개구리나 뱀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놀란 진사는 보는대로 꾸짖었지만 고쳐지지 않고, 결국은 동네 사람들까지도 눈치를 채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괴상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약도 쓰고 굿까지 하며 온갖 비방을 다썼으나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열다섯살부터는 그런 버릇이 줄기 시작하여 20살이 되자, 기이하게도 그 버릇이 씻은 듯 사라지고, 아들은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진사 내외는 떳떳이 아들을 장가 보내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사방으로 중매를 놓아 적당한 혼처가 생기자 혼례를 올리고, 드디어 신행(우귀)을 하게 되었다.
외동며느리를 보는 진사집에는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도착한 가마에서는, 얼굴 모습도 똑같은 색시가 두사람이나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진사 내외는 물론, 모여있던 모두가 놀랐다. 마침 이때 한 스님이 지나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두 색시를 살펴보고는, 진사에게 귓속말로 비방을 일러주고 갔다.
진사는 장대 세 개를 가져오게 하여, 바깥 마당에다 두 개의 지주를 세운 후, 거기에 하나를 높이 걸쳐 놓고는, "이 장대를 뛰어넘는 색시가, 진짜 내 며느리다."하고 두 색시에게 말하였다.
행례도 올리기 전에 색시끼리 높이뛰기를 겨루라고 하자, 한 색시는 빨개진 낯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다른 한 색시는 주저없이 높은 장대 위를 훌쩍훌쩍 뛰어 넘어, 구경꾼들은 신기한 듯 환성을 질렀다. 바로 그때, 진사는 감추어 있던 낫으로, 장대를 뛰어넘는 처녀의 가슴을 내리쳤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색시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차츰 누런 암여우로 변해갔다.
20년전 닭을 물고가다 죽은 수여우의 앙갚음을, 스님의 슬기로 모면한 김진사는 그 후에도 잘 살았으나, 그때부터 비만 오면, 마을 뒷산에서 여우들이 울어대 이 마을을 '여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어정수
도덕암(동명면 구덕리)의 원래 이름은 칠성암이었다. 칠성암은 고려 광종 4년에 혜거대사 (속명 : 지회)가 창건하였다. 광종은, 고승인 혜거대사를 왕사로 모시려고 여러번 사람을 보내었으나 대사는 번번이 거절했다 한다.
그래서 광종이 친히 어가를 몰아 지금의 도덕암으로 오시게 되었다. 임금이 직접 왕사로 모실것을 권했으나 대사의 대답은 여전했다. 임금이 돌아가시려 하매 대사는 이것도 속세의 인 이라 하여 며칠간 쉬면서 속병을 고치시라 하였다. 임금이 속병이 있어 3일간 쉬면서 절에 있던 샘물을 복용하였더니 씻은 듯이 속병이 나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이 샘물을 '어정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임금이 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 절을 칠성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이 이 어정수를 약물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이절을 찾는 신도들은 으레 약물을 찾는다고 한다.
이후 칠성암으로 전해 오다가 조선 철종 4년에 몽계스님에 의해 도덕암으로 개칭 되었다. 이 이름은 당시의 고승이었던 몽계스님을 모두가 큰 스님이라 불렀으며, 큰 스님이 공부하셨다고 해서 '길 도(道)'자 '큰 덕(德)' 자를 써서 도덕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도덕암으로 개칭했으나 절이 협소하고 자리도 마땅치 않아 고심하였는데, 스님의 꿈속에 대사 한 분이 나타나시어, "지금의 자리보다 어정수가 있는 곳이 부처님의 뜻이니라"하고는 사라지셨다. 스님은 즉시 법당을 지금의 어정수가 있는 곳으로 옮겨 짓게 하였다. 풍수설을 빌자면 이 곳을 연소혈이라 하여 제비가 복을 물어다 주듯이 박복한 사람이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얻는다는 곳이다.그리하여, 지금도 많은 신도들이 법당 뒤 연웅전에 와서 소원을 이루고자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신통한 점쟁이
조선 중엽 석적읍의 조양래(趙陽來)[자는 복초(復初) 호(號)는 양졸제(養拙濟)]는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고 점(占)을 잘 쳐서 세상사람들이 소강절(邵康節)이라 불렀다. 몇 가지 일화를 보아도, 귀신이 탄복할 경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농부가 전날 밤에 소를 도적 맞아 백방으로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마지막으로 조노인을 찾았다. 듣고 있던 조노인은 한참 그 사람을 훑어보거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실물한 것을 찾기 위한 점괘는 뽑을 수 없소. 그러나 당신이 길가에서 갓을 쓴 채로 똥을 누고 있으면 방도가 생길 것이오."
소 주인은 마을로 돌아가, 시킨 대로 길가에서 갓을 쓰고 변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어른이 길가에서 변을 보는 것도 기이하거니와 용변할 때는 반드시 갓을 벗는 것이 예의인데, 갓을 쓴 채로 변을 보는 모양을 보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웃기도 하고 욕도 하였다. 그래도 소를 찾을 욕심으로 꾹 참고 있자니, 대여섯명의 장꾼들이 지나가면서 큰 소리로 지껄였다.
"참 변놈의 꼴도 다 보겠네! 어떤 놈은 소를 방안에 두더니, 갓 쓰고 똥누는 놈도 다 있네 그려."
소 주인은 이 말을 듣자 귀가 번쩍 띄어, 장꾼들에게 그 소가 있던 장소를 묻고, 즉시 달려가 소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웃 마을 어떤 노인이 장난삼아 조노인을 시험해 보려고 찾아갔다. 자기집 암소가 사흘전에 송아지 한마리를 낳았는데, 이것을 거짓말로,
"내가 사흘전에 손자를 보았는데, 손자놈의 평생 운수를 좀 보아 주시오."
하고 점을 청하였다.
조노인은 점괘를 뽑아 보더니,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노인이 캐 물으니,
"3년후에 도끼에 맞아 죽을 팔자이니, 굳이 말 할 필요가 있겠소?" 하는 것이었다. 하도 기막히게 맞추는데에 송아지 주인은 그만 감복하였다 한다.
산중에 힘센 장수들이 모여, 나라를 뒤엎을 역모를 꾀하고 있었는데, 두목은 자기들 운수를 여러곳의 점쟁이에게 점쳐 보고는, 그 자리에서 점쟁이 목을 베어 후환을 없게 하였다.
그 사나운 두목이 자기에게도 점을 치러 찾아올 것을 예견한 조노인은, 모래를 방안에 깔고 자기는 그 위에 누운 후, 석자되는 대나무대롱에 물을 넣어 배 위에 세운 후, 아들에게 일러 자기가 죽은 양, 병풍을 두르고 곡소리를 내게 하였다.
과연 얼마 후 두목이 찾아왔다. 아들이 부친의 임종을 알리니, 두목은 직접 괘를 빼 보았다. 그랬더니 점괘에 '背負黃沙하고 服相에 水高三尺'이라고 나왔다. 두목은, "모래 위에 누워, 배 위로 물이 석자'나 되니, 물에 빠져 죽었구나" 하며 그대로 돌아가고, 조노인은 감쪽같이 죽음을 면하였다 한다.
낙화암에 대한 유래
칠곡군 지천면 신리 발암산에는 낙화암이라는 바위 절벽이 있다. 속칭 '바리덤'이라고도 하는 이곳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전에는 이 동네에 강씨라는 집안이 살았었다. 부자였고 높은 벼슬을 해 오인석 강씨라 했다. 이들 오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인(인양)을 탔으며 집안에 바위가 다섯이나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 때 광주 이씨 조상중에 석 담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당시 24세의 나이로 진사를 지내셨다.
마침 대구 방면으로 여행을 나섰다가 오는 길에 왜병이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는 이 동네로 들어오니 강씨네 집 여자종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종에게 빨리 집으로 가서 샌님들에게 왜병이 쳐들어 온다고 고하라 했다. 그래서 그 여자종이 빨래하는 것을 멈추고 집에 가서 이를 알리자 노인들은 마침 바둑을 두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이 진사 같으신 분도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가?"
갑자기 그런 변을 당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모두 바리덤 발암산으로 올라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곳으로 피난을 했으므로 얼마 후 왜병이 이 동네로 들어 왔을 때는 이미 텅 비고 난 후였다.
발암에 올라간 동민들은 왜병을 향해 돌을 굴리고 함성을 지르자 그곳으로 피난을 간 것을 알아차린 왜병들은 발암을 향해 올라가려 했으나 산 아래 깊은 강과 돌이 굴러 오를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자세히 지세를 살피니 신리 옆으로 비스듬한 경사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올랐다.
왜병에게 포위된 동민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왜병의 손에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자면서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때 대부분의 죽은 자가 부녀자였으므로 이 바위 절벽을 낙화암이라 했다.
이때 강씨 집안도 전멸하고 석담선생은 골짜기로 피난을 했다가 다시 팔공산으로 피난, 공부를 많이 해 학문과 벼슬을 겸비했으며 이 낙화암을 추모하고 이 낙화암 아래 서양서원을 세워 그 덕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