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유람과 가림성 다시 찾아('23.11.21)(2/2)
(부여) 석성면에서 점심 후에 강경과 부여 세도면을 잇는 금강의 황산대교를 건너 임천면에 있는 가림성을 찾아간다.
그간 여러 번 다녔지만 그 사이에 새 길이 나고 헤매이기도 하면서 찾아올라 간다.
옛날 일도 떠오르고, 성흥산성은 한 두 번 답사로는 양이 차지 않은 산성이기도 하다.
점심 식사를 한 식당은 우여회로 유명하기도 한 곳인 데, 우여라는 물고기는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되는 곳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라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도 옛날 백제시대 때는 서해의 조수 영향이 이곳에까지 미쳤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왜 강경이 3대 시장이었는지를, 천주교 김대건 신부가 처음 도착한 곳도, 이곳으로 오게 된 사연도 알 것 같고, 당연히 강경이 내륙에 있는 항구로서 중요한 물류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해본다. 그래서인지 3대 시장의 하나로 거명됨도 이해가 되고,, 일제시까지도 상업의 중심지여서 상업고등학교가 이름을 얻게 되는 곳이며 군청소재지 논산보다 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힘께나 센 기관들이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하구언이 생기기 이전, 바닷물 조수의 영향을 받던 시절, 옛날의 범선들은 이곳 성흥산성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수도 사비 부여를 두손으로 감싸 품고 있는 오른손에 해당하는 곳에 가림성은 있고 강건너 반대편 쪽으로 야트막한 지형이긴 하지만 왼손 주먹에 해당하는 파진산성이 감싸고 있는 지형이다.
반역을 한 백가의 성이요 백제 멸망의 최후까지 떠오르게 하는 산성이요. 사비부여를 지키는 대문간과 같은 성이다.
이 성에 올라보면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얼마나 요충지인가를 알수있게 된다.
고려 건국 시절의 역사까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요충지 중의 요충지인 곳에 가림성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산성에 올라 사방을 보면 그 전망이 참으로 아름답다.
평화시에 이리 아름다운 조망은 비상 시국에는 더할 나위 없는 관방시설로 변모할 수 밖에.
지금의 남문지 느티나무가 사랑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더욱 에로틱한 감정을 갖게 하기도 한다.
상념은 뒤로 하고 산성을 실제로 걸어본다. 두 발 보다 더 확실한 독서 방법은 없다는데.
(부여 가림성 안내판도 새롭게 바뀌었다)
(부여 가림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천혜의 장애물 지형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압도 당한다.)
바위 위에 올려 놓은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도 정겹게 느껴진다.
무슨 마음으로 올려놓았을까?
(왼쪽 바위 절벽에 위태하게 자라고 있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웬지 마음을 사로 잡는다.
저 곳에서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 지... 무서운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끼며 성을 향해 올라간다.)
(제법 연륜이 넘치는 소나무인데도 꿋꿋한 기상이다.
인공 분재와는 차원이 다른 소나무의 모습에서 자연의 성스럼을 느끼는 것은 지나친 사치일까?)
(드디어 가림성 문지가 보이고 그 유명한 느티나무도 보인다. 연인들의 포토 존으로 애용된다는..
복원한 성벽 모습이 고풍스런 옛 산성의 모습을 앗아감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문지 홈을 파괴했다고 못 마땅 해 하던 촌노의 말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성흥산성의 <사랑나무>는 여전히 산성을 지키고 있다. 수령이 400여년 이 넘는다는....)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경 쪽으로 바라보는 눈맛, 부여 시가지도 볼 수 있는 곳에서 여기저기를 둘러 본다.
바로 성 아래에는 특이한 작은 은진 미륵보살상이 있는 대조사(大鳥寺)라는 다소 특이한 이름의 절도 있고...)
(다시 한번 사랑나무라고 불리우는 느티나무의 위엄을 느껴본다.
그 속에는새집도 보이는 듯 하고.. 산성을 지키는 수호신...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옆에도 신령스런 소사나무가 서 있고,,
단군 할아버지는 신단수아래에 나라를 세우시고 하늘에 비셨다는데.
생각사로 만단정회가 감돈다.)
(느티나무 안내문에는 수령 400여년, 높이 22m 가슴높이(흉고) 둘레 5.4m 고려시대 유금필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후백제군의 노략질과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창고를 열어 이곳 백성을 구휼했다는 사실과 그 때 심었다는 이야기 인데....
고려 건국시로부터 지금이 언제인데 겨우 400년 ? ? ?. ..
조선 건국이 1392년이면 6백년도 더 되었고,후백제 이야기라면 900년대 라면 1천년도 훨씬 더 되었을 터인데.. 아마 손자 나무쯤 되었을까? )
(성지기와 산지기가 실루엣처럼 서있는 모습이 나무와 대비된다.)
(산성 성벽 둘레 돌기는 안내판 사진으로 대신하고 충혼사당 있는 쪽으로 올라간다.)
(가림성 남벽 멀리 임천면소재지 일부가 보이고,
멀리로는 차령산맥 줄기가 서천, 장항쪽으로 내달리고 있는 모습도 아련하게 보인다.)
(충혼사 사우를 세우게 된 사연을 적은 비석도 흘깃 보고는 내쳐 올라간다.)
(충혼사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담 너머로 넘겨다 보고는 또 앞으로 올라간다.)
(태사공 유금필 묘당도 지나간다. 유금필의 성 유자가 곳집을 뜻하는 庾자다, 庾黔弼 흔히 보기 힘든 한자 성에 이름자이다.
평촌 우명동 답사길에 만났던 단청공임을 자랑하던 庾씨도 생각나고, 김유신 장군의 가운뎃 자 유자도 떠올린다.)
(가림성 제일 높은 곳 근처에는 성흥루(聖興樓)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더욱 높아서 사방 멀리까지 보인다.
현판 편액도 보고 정자 건설에 참여한 이름자가 훨씬 많은 정자 사연도 걸려 있다..)
(성흥루기: 한때 실력자의 이름도 보이고. 부여 출신으로 실세 중의 실세였던, 그러나 천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
(성흥루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봉화제단 표석이 보인다. 부여 시가지 쪽으로 눈을 돌려본다.
봉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봉화를 올려 소식을 주고 받던 곳....봉수대. 지금은 현대식 통신시설로 바뀌었지만
계룡산 최정상에 있는 송신탑처럼... )
(내래 오는 길에 바윗돌을 일부러 파낸 것처럼 보인 부분을 지나간다.
의심이 들어서 되돌아서서 보고는 사진을 찍어본다.
아마도 성돌로 쓸려고 떼낸 것인지, 아니면 길을 내기 위해서 파낸 것인지.
어딘가 인공적인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석축산성을 쌓으려면 그 많은 성돌을 어데서 가져 왔을까?
설계도 필요하고, 노동 인력도 동원해야 하고,, 먹여야 하고 재워야 하고,,,,, 보통 대공사가 아닐텐데.
짚세기 신고, 맨 등짐으로 옮겼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한양도성 쌓는 이야기가 나온다. 농번기 때 성축조 공사를 일시 중단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는 논리가 나온다.
수원화성 축성에 정약용 선생의 기록도 생각나고. 거중기도 창안하고, 성돌 큰 것 하나에는 얼마씩 돈도 주고....
보은의 3년산성은 구미쪽 인원이 3년 간이나 쌓았다는데.
성돌 채석 흔적으로 추정되는 곳 중의 하나는 청양 우산성 남쪽에 있고. 대전에서는 적오산성 동편 채석장도 의심된다.
관심을 기울이고 주의를 주는 곳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다시 성문지를 지나 내려오는 길이다.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성돌 떼 낸 흔적을 찾아본다.
다시 만나는 소나무.
저리도 험악한 돌바위에서 어떻게 뿌리 내리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지...
경악이 아니라 감탄을 넘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음을 뒤로 하고 헤어진다..
푸르디 푸른 하늘 속 마음에 남겨두고.. 잘 크거라...)
.
(누군가가 올려 놓은 돌 사이로 기왓조각도 보인다.
고려시대 때 어골(魚骨)무늬 와편인가?)
다시 임천면소재지를 거쳐 강경을 지나서 대전으로 돌아온다.
수 많은 역사적 사연을 담고 있는 계룡산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져 들어본다.
개태사며 황산벌판이며, 황산성이며, 은진미륵이며, 동학군이 지나갔다는 초포 풋개다리며 어느 곳 하나 예사롭지 않은 곳이 없다..
(2024.4.3일(수) 카페지기 자부리 씀)
(다음에는 빠져버린 답사편을 올립니다. 독용산성편도 있고, 대청호 편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