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4년 가해 4월9일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수원] "내 말 안에 ''머무르면''"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다니 3, 14 - 20. 91 - 92. 95
† 복음 : 요한 8, 31 - 42
★ 바빌론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이 세운 신상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다니엘의 세 동료를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불 속을 무사히 거닐 수 있었다. 이 기적을 본 임금은 그들을
석방하고 하느님을 찬미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 당신의
제자가 되며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머물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이 그저 머리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깨쳐 보람을 느끼는 데 그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따른
삶을 말하며, 삶의 방향을 결연하게 바로잡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묵상하였던 회개가 자신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이, 사실은 이러한 말씀 안에 머무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조건 없이
응답하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는 과정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이미 고인이 된, 교육자이자 우리말 운동가인 이오덕 선생의
『이오덕 일기』를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스무 해 동안 나는 세속에 질질 끌려서 내 속마음대로 살아 보지
못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가 갈 길의 키를 단단히 잡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1964년 5월 8일 금요일).
우리는 곧 사순 시기의 성찰과 노력의 열매에 대한 추수기를 맞이합니다. 그
열매는 세상의 생각이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에 따라
'내 갈 길의 키'를 단단히 잡고 살겠다는 분명한 결심입니다. 이러한 삶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 안의 자유는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불가마 속에서도 무사한 세 명의 의로운 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요한 8,31-4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 8,31-42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그냥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라2,20)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10,30).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 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너희가 내 말안에 머무르면
2014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 8,31-42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은 베스트셀러로 장안에 큰 화제입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무척 재미있으며, 또한 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매우 흥미 있게
잘 보고 있지요. 그러다가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서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베스트셀러이니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제 주변의 사람들 중에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베스트셀러 제조기라고도 불리는 이 책의 저자를
모르는 사람도 꽤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만
제 주변에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구입하고 읽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겠지만,
모든 이들이 구입하고 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착각했던 것입니다.
즉, 베스트셀러라는 호칭 때문에 그냥 단순하게 ‘많은 사람’을 저는 ‘모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책을 구입하는 인터넷 서점에
가보니 베스트셀러라는 제가 보고 있는 책의 월 판매량이 만 권이 되지
않더군요. 우리나라 전체 국민 중에서 만 명도 보지 않은 것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에는 만 명이라는 숫자가 큰
숫자지만, 전체 국민 안에서 만 명이라는 숫자는 아주 적을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제 주변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전혀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쉽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쩌면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결론짓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조금 더 생각하지
않고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기준만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쉽사리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결론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내 기준이 주님의
뜻보다도 더 위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주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주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죄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냥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아주 나쁜 우리의 습관들에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과 그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으며, 진리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오만은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데 장벽이 되는 반면, 편견은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데 장벽이 된다(심영섭).
책 '나무를 심은 사람' 예전에 감명깊게 본 영화가 생각나서 구입했습니다.
내가 낮추어야 할 것.
자신을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는 말을 아주 심각하게 하시는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전자 우편을 해킹 당했으며, 증거는 없지만 도청도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무서워서 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사회적으로 유명인사도 아닌 분, 아무런 일도 없이 그냥 집에서
실업자로 지내는 형제님을 왜 누군가가 감시할까요?
또 어떤 분은 자기를 누군가가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십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를 사랑한다는 그 분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그
사람이 스스로 착각하고 있어서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다며
고민하십니다.
소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또 스스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믿는
이유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증거가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외침으로써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을 때, 정말로
이루어질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하게 됩니다. 괜찮은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한 삶, 즉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는 직접 인정해 줍니다. 굳이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이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낮추는 삶이 결국 자기를 높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는 모범을 보여주심을 기억하면서
내가 낮추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자유인의 비결 -찬미와 진리의 말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다니3,14-20.91-92.95 요한8,31-4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 8,31-42
자유인의 비결 -찬미와 진리의 말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참 자유인입니다. 누구나 원하는바 자유입니다.
자유로워 인격이요 사람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인격도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바로 자유인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인간 성장과 성숙의 잣대 역시 자유로움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확장되는 내적자유의 여정인지요. 우리를 얽어매어
부자유롭게 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무수한 걱정 근심에, 두려움과
불안에, 탐욕과 유혹에 종이 되어 자유를 잃고 사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8,34-36).
진정 자유인은 아드님이신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아드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우리도 진정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참 자유인이 되는 비결은 '찬미'와 '진리의 말씀' 둘입니다.
바로 1독서의 세 청년이 참 자유인을 상징합니다.
1독서의 내용이 참 통쾌합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거니는 네 사람을
보며 대경실색하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명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어떻게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을 수 있을까요? 찬미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뭅니다. 신의 아들
같은 모습의 넷째 사람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현존인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1독서에서 생략된 부분이 바로 찬미로 집대성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자르야의 찬미(다니3,24-45)에 이어 세 청년의 찬미(다니3,51-90)가 참
장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찬미하며 불길 한 가운데를
거닐었다."(다니3,24).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이들을 불가마 속에서 자유롭게 거닐게 했습니다.
불가마 같은 생존경쟁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내적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임을 깨닫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해피엔딩,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게 한 네 청년의 찬미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다니3,95).
하여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열렬한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두 번 째 주님 진리의 말씀 안에 머무를 때, 불가마와 같은 세상 현실에서 몸과
맘 하나 다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 되어 살아갈수록 아드님을 닮아 자유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이, 말씀 묵상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참 자유의 길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진리상대주의에서 벗어나 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길은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천명하신 주님 말씀처럼, 주님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찬미할 때, 주님 진리의 말씀 안에 머물 때, 주님의 은총으로
불가마니 같은 세상 현실에서 몸과 맘 하나 다치지 않고 참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진리 말씀 안에 머무는
우리 모두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자유의 선물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우리는 참된 의미의 자유인이어야만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스스로 묶인 자유!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2013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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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보면 떠오르는 라틴어 문장들이 몇 개 있습니다.
“진리는 나의 빛이다.” (Veritas est Lux Mea)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지
모르지만, 모 대학 배지(Badge)에 새겨진 글귀입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한 말도 떠오릅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Quid est veritas?)” [요한18,38].
오늘은 빌라도가 한 질문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짧게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진리(베리따스/Veritas)라는 단어는 사실 4복음서 중 유독 요한 복음서에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요한이 희랍어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이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누구에게나 진리에 대한 개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증명된 사실을
진리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진실을 진리라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참된 이치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누구에게나 옳다고 인정되는 보편적 법칙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란 무엇일까요?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진리는 하나 같이 모두가 예수님과 연결된 표현입니다.
결국 그 모든 표현들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go sum via et veritas et vita).”[요한14,6]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우리의 진리는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 안으로 들어갈 때 체험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따라가야 할 빛 줄기이며 내가 참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며 그 진리가 이끄는 데로 따라가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이자, 신앙인의 길임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는
하루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참된 의미의 자유인이어야만 합니다.(20130320)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말 안에 '머무르면'"
2014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복음 : 요한 8,31-42
< "내 말 안에 '머무르면'" >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두 장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잉거솔이라고 하는
대령이었는데, 잉거솔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에 대한
책까지 저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루 윌리스라고 하는 육군
대장이었는데 하느님에 대하여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서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스 장군의 부모는 그리스도교인 이었지만
윌리스 자신은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모독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잉거솔 대령이
말했습니다. “그 예수쟁이들 말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허튼 소리나 하는데, 그 예수라는 사람을 소재로 하여 에로틱한 소설을
쓰면 어떨까요? 그러면 많은 돈도 벌 수 있을 겁니다.”
윌리스는 전역을 하고서 이것저것을 해 보았으나 신통한 일이 없었습니다.
윌리스는 생각 끝에 이전에 잉거솔이 말한 대로 예수를 소재로 한 에로소설을
쓰기로 작정 했습니다. 계획하는 일이 성공하려면, 먼저 예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윌리스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현장에 가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가 실재 인물로 자신의 마음에 다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원고를 마친
내용은 처음 계획한 내용하고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탈고를 마친 윌리스는
무릎을 꿇고 예수를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영화로도 제작된 ‘벤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말씀은 진리이신데,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그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기적을 보는 것과 같은
신기한 말씀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위의 예처럼 안 좋은
지향으로 성경을 읽어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머문다’는 단어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게 머물러서 나의
것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말씀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 성경을 외우다시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그들 마음에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야 참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너무나 잘 알던 바오로도 결국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은 읽고 공부해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말씀 때문에 변화될 때까지 그 말씀을 잡고 놓지 않는 끈기와 성령의 비추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아나니야에게 안수를 받아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의
빛으로 성경을 다시 묵상해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읽고 쓰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충분히 머무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의사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의사들이 포기한 하루 120번의 발작을 일으키는
4살짜리 악성뇌종양환자를 수술해서 완치시켰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으로 불리며
성공을 거둔 벤 카슨 박사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보고 그가 위대한 의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8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소년기에는
흑인불량배들과 어울려 싸움을 일삼는 장래가 어두운 아이였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는 항상
꼴지를 도맡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한마디 말에 머물 줄 알아도 삶 자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흘러넘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이런 열매를 맺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씀 안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보석 감정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한 눈에 그것이 보석인지 알아맞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문가도 랜턴이 달린 커다란 돋보기를 쓰고 핀셋으로 집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그것에 진품인지 가짜인지 확신이 들 때까지 집중하여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보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한 마디, 혹은 한
단어라도 그것이 완전히 성령의 비추임으로 완전히 나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말씀 안에 머물 줄을 알아야하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4월9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 8,31-42
“Veritas Liberabit Vos!(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입니다. 문득 생각해봅니다.
‘나를 구속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또
무엇인가?’ 가끔 꿈속에서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곤 합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합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그런 자유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장비의 도움을 받지만 중성 부력을 유지하면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요즘 저를 구속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의
일입니다. 자료집을 발간하고, 교육을 하고, 실천사항들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 주 쯤에는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준비한
기도문이 전국 각 교구에 배포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잘 마치면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강의 준비를 하는 것은 늘
부담입니다. 준비를 열심히 해도 학생들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할 때가
있습니다. 3년 째 강의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은 더 해야 자유로울 것
같습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장 안에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은 거의 하지 않고 매일
침묵 속에서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유롭지 않을까요? 쉬는 날
가난한 분들을 위해서 의료 봉사를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얼굴은
참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하늘에 떠 있는 연을 생각합니다. 연은 자유롭게 날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을 구속하는 줄을 끊어버리면 연은 곧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연을 하늘에
떠 있게 하는 것은 줄과 그 줄을 조정하는 사람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불가마 속에 던져진 세 사람을 구해 주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드락, 매삭, 아벳느고’는 세상의 것들을 잡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교만, 인색, 미색, 분노, 질투, 탐욕, 나태’의 불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일곱 가지 죄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와 같은
죄의 뿌리에서 이끌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도,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은 죄의 불길을 피해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돈, 명예, 권력’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진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회개’하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곳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곳에 있습니다.
두 번째 진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에 있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은 진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고, 눈먼 이를 뜨게 하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고,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표징이 진리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의 문을
열었습니다. 걱정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자리에 넣을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
믿음, 희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자리에 무엇을 넣을 수
있겠습니까?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은 몸말로 인류와 소통
2014년 가해 4월9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 8,31-42
하느님은 몸말로 인류와 소통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의 핵심은 ‘하느님이 인류와 몸말을’ 하셨다는 것.
몸말은 생소하지만 영어로 body language 로 예수님의 몸, 인생입니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한 최고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최고 최후 절정이며 결정적 최대 사건입니다.
이 부활 사건은 구약과 신약의 분수령으로 계시의 절정이며 휘날레입니다.
하느님이 몸말(예수님)을 통해 인류와 소통하셨고 이를 계시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 8,42)”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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