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8월호 강화문학기행 및 조경희문학관 탐방’ 기고(최원돈)
한국수필의 어머니
“한국수필의” “어머니”
행사장을 가득 메운 문우 내빈들이 발제자와 좌장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외쳤다.
제43회 한국수필가협회 국내 심포지엄이 강화 ‘에버리치호텔’에서 열렸다. 발제자인 최원현 한국수필가협회 명예 이사장은 20분간의 발표 시간에 쫓겨 말까지 더듬었다. 누군가 10분 더 연장하라며 소리 질렀다. 겨우 발표를 마치고 그는 말했다.
“‘한국수필가협회’ 하면 ‘조경희’이고 ‘조경희’ 하면 ‘한국수필’이요 ‘한국수필가협회’입니다.”라며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리움이라 쓰고 조경희라 말하고 싶다.”
왜 조경희는 ‘한국수필의 어머니’일까. 그 물음에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우리는 ‘강화문학관’을 찾았다. 2층 조경희 문학관으로 올라가니 많은 문우가 너도나도 ‘이미지 월’에 새겨진 캐릭터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붐볐다. 나는 거꾸로 출구로 들어섰다. 일중 서예 작품 ‘금석기심(金石其心)’ ‘유어예(遊於藝)’가 걸려있다. ‘금석의 마음’ ‘예에서 논다.’ 는 선생의 굳건한 마음과 예술을 말함이리라. 이어서 ‘물방울 화가’의 작품과 조소가들의 작품들이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미술관인가, 웬 문학관에 미술품.”
“조경희 선생의 소장품이겠지요.”
‘운보’의 부엉이 도자기, 심상옥, 유근형의 작품들도 있다. 삼국시대 토기들까지. 박물관에나 있음 직한 문화재급이 아닌가. 선생의 안목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경희 서재는 작고 소박했다. 앉은뱅이책상에 책장과 옷장 그리고 한글 병풍 한 점이 고작이다. 밀화 빛 방바닥에는 선생의 수필집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첫 수필집 《우화》 두 권이 나란히 있다. 전쟁통에 냈다는 수필집이다. 김환기 화백의 표지 장정이 예사롭지 않다.
‘어젯밤 꿈속에서 그려 보았던 그 책이다.’
꺼내어 만져보고 펼쳐 보고 싶다. 그런데 《얼굴》은 보이질 않는다. 어젯밤 이 책도 꼭 보고 싶었는데 수장고 속에서 잠을 자는 모양이다. 선생의 육필 원고 <우리의 마음갖임> 과 <男尊女卑(남존여비)>를 보니 선생의 숨결이 느껴져 온다. 선생의 작은 서재에서 넋을 놓고 보는데 문득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화들짝 놀란다.
‘송산 선생, 왔는가. 내 처소는 보여주기 싫은데 왜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는가.’
‘네 선생님, 어젯밤 월당 선생의 모습이 어디 계시는가 해서요.’
‘그런가, 그러면 저쪽 벽에서 찾아보게나.ㅎㅎㅎ’
벽에는 선생의 수필 <얼굴>과 <처소> 전문이 걸려있다.
<얼굴>에는 여학교 일 학년 때 얼굴이 예쁘지 못해 비관한적이 있었다고 했다. 좋아지내던 상급생 언니가 내 친구를 더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 사랑을 빼앗겼다는 자격지심에 미국에 계신 아버지에게 ‘왜 나를 보기 싫게 낳아 주셨느냐?’고 원망스러운 항의 편지를 보냈다. “인간은 얼굴이 예쁜 것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마음이 아름다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 는 아버지의 이 말씀은 진리와 진실을 품고 있다고 느끼면서 평생을 떳떳하게 살았다.
‘조경희문학관’의 그림은 운보가 단숨에 먹으로 그린 얼굴이다. 언뜻 보면 못생긴 얼굴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귀엽게 생긴 얼굴이다. 선생의 얼굴이 예쁘고 뛰어난 미인 이였다면 이토록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선생은 못생긴 자신의 얼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었으며 끝내 한국수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처소>도 읽어본다. “나는 나의 처소(處所)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나는 훌륭하고 호사스런 친구들을 내 보잘것없는 나의 처소에 오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우연히 내 처소에 오게 된다면 내 생활을 새롭게 발견이나 했다는 듯이 어리둥절할 것이다.”
월당 선생은 평생을 소박하고 근검절약하며 사신듯하다. ‘최원현의 작가 탐방’은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응접실에는 장관님 댁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실내가 소박하고 아담한데 서가엔 책들이 가득 꽂혀있고, 창가 쪽으론 난 분들이 향을 가득 품은 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두 개의 소파 사이로 빨간색 전화기 한 대가 놓여있는 모습이 정갈하고 단아해 보였다.”
선생의 인품과 취향이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조경희문학관’의 저 많은 예술품과 8,000여 권의 서책이 그냥 생겼을 리 만무하다. 선생은 평생을 사치보다는 근검절약하며 사 모았던 것이 아닐까.
조경희 선생은 평생을 수필과 함께한 여장부였다. 20세 때 수필 <측간 단상>을 발표하고 37세에 첫 수필집 《우화》를 발표했다. 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예총 회장, 정무 제2장관 등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수필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한국수필에만 전념하였다.
1971년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隨筆文藝》 제호로 수필가협회 회지를 발행했다. 그 후 《韓國隨筆》로 바뀌었고, 통권 27호부터는 《한국수필》 한글제호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조경희 회장은 한국수필가협회 회장임을 무엇보다도 자부심을 갖고 자랑으로 여겼다. 예총회장과 제2 정무장관으로 부임할 때 수필가협회 회장직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그러나 회원들이 그를 밀어주고 또 자신도 회장직을 그만두지 않고 “오늘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은 수필을 사랑하고 회원들을 아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월당 선생은 2005년 작고할 때까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아침 10시에 출근, 오후 5시 퇴근을 규칙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생전에 모은 예술품들과 서책들을 이곳으로 보냈기에 이렇게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실로 “한국수필의” “어머니”였다.
나는 조경희 문학관을 나서며 강화문학관 앞마당에 세워놓은 ‘월당 조경희 선생’의 오석(烏石)으로 된 기념석 앞에서 고개 숙여 묵념을 올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흰갈매기 한 마리가 솟구치며 날고 있다. (2024. 0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