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처럼 豊盛한 한가위 되시길 祈願 합니다.
高oo 拜上'
친구가 나한테 보낸 문자다.
나는 위 한문을 읽지만 한자옥편을 펼쳐보지 않으면 한자를 정확하게 쓰지는 못한다.
다만 문자의 꼴(형태)를 짐작할 뿐이다.
위 글에서 한문을 안 써도 나는 그 의미를 잘 안다.
친구는 한문을 무척이나 많이 쓴다. 우리나라 말이 잔뜩 있는데도 한문을 쓴다. 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도 말이다.
특히나 이름이다. 중학교때부터 친구였고, 옛 직장에서도 같은 동료이었으므로 벌써 오십 년도 더 넘도록 익힌 이름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는데도 왜 한문을 썼을까?
어색한 한자어가 또 있다. 배상(拜上). 우리말인 '보냄', '씀'으로 바꿀 수 있다.
어른한테 절한다는 뜻을 살린다면 절친한 친구 사이므로 '올림' 이라고 써도 좋을 게다.
나는 한자어보다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훨씬 더 좋아한다.
우리나라 공교육이 지나치게 한문을 많이 가르치며, 또 이런 교육의 폐단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한문투의 말과 글을 즐겨 쓴다고 본다.
사실 말이지, 내가 보아도 한문 투로 글을 쓰면 훨씬 더 유식하며, 고상하며, 뜻이 정확하게 전달될 것 같다는 착각도 이따금 든다. 한자는 사각형 꼴에 들어가고, 몇 개의 글자로도 뜻을 합축하고, 발음도 격해서 단호한 명령이 필요한 전투용어 같다는 느낌이다. 나긋나긋하고 셈세한 말이 아니라 투박하되 격정적인 몸짓을 나타내는 듯싶은 언어다. 막노동 사업현장, 전투장에서는 명령투의 용어들을 쓴다.
군과 관련된 직업을 가졌기에 짧고 단호한 한문투의 명령이나 지시문장에 익숙했는데도 나는 오히려 우리말과 글을 일부러 더 쓰고 싶었다. 직장 다니면서 국어교육기관에서 국어교육을 두어 차례나 받기도 했다.
내 처가 쪽에는 큰동서가 있다. 지방대의 동양학 교수를 역임했기에, 한문에는 아주 조예가 깊어서 본인의 한시집을 여러 권 냈다. 막내동서인 나한테 한시집을 여러 차례나 주었건만 나는 읽지 않았다. 한시는 나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예컨대 여행기를 쓸 때, 한 쪽 정도의 한시로써 여행지의 이모저모를 표현하지 못한 채 어떤 고형의 틀에 꽉 박힌 듯한 어감이었다. 마치 쇠덩어리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부어서 구어내는 붕어빵, 똑같은 모양새의 느낌을 받았다. 내가 시집을 끝까지 읽을 재간이 없었다.
한문투의 언행이 점잖아 뵈고, 존경스럽기는 하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더 좋아하는 나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남의 글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도 한문투의 한시만큼은 영 아니올씨다.
호적신고가 늦는 바람에 나는 초등학교에 늦게서야 들어갔다. 아홉 살때부터 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뒤로는 60년째 책을 보는 책벌레다. 그런데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한문은 남보다 더 많이 알 것 같은데도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내 조부를 이어 아비가 지방도시에서 돌공장을 운영했기에 나는 비석과 빗돌에 새기는 한자를 숱하게 보았다. 붓으로 한자로 문장을 쓰는 한학자를 많이도 보았다. 나 역시 빗돌의 한자를 정(釘)으로 제법 새겼다. 각자(刻字)다.
수염 나고 도포 입은 어떤 할아버지가 주기적으로 돌집에 오셔서 나한테 한자를 가르쳤다. 붓으로 신문지에 한자를 크게 적어주시면 나는 붓대를 잡고는 그대로 베껴 써야 했다. 할아버지 생전에는 4년 쯤 한문공부를 하는 체했지만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 그 지겨운 붓글씨 공부는 끝이 났다. 내가 한문 습작에는 재능이 없는 탓일 게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어렷을 적부터 한문을 조금은 눈에 익혔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한문보다는 우리글인 한글이 훨씬 더 좋았다. 우리말이 있다면 구태여 한자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父母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祖父祖母로 쓰면 더 효성스러워지는가? 아닐 게다.
요즘 초등 교과서에 한자병기를 해야 한다는 집단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집단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한자교육 가부에 대한 찬반의견이 서로 달라서 아옹다옹한다.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한자병기 대신에 오히려 한글병기를 먼저 주장할 게다. 한자어를 가르쳐야 한다면 더욱 심각하게 철저하게 가르치라는 뜻이다. 즉, 모든 문장을 완벽한 한자어에 유사하게 쓰되 아주 어렵다고 생각되는 단어에는 괄호( )를 치고 그 안에 우리글인 한글을 넣자는 역제안이다. '父母(부모)님은 兒童(아동)과 함께 學校先生(학교선생)님을 만났다.' 이런 식이다.
이렇게 하면 더 확실하게 한자어 교육을 제대로 시킬 것인가?
나는 60여 년 전의 내 할아버지 세대들이 썼던 한문투의 문장을 전혀 읽지 못한다.
내가 50~40여 년 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교과서, 특히 1960년대의 대학교재는 내 아이들(30대)은 전혀 읽지 못한다. 당시의 대학교재에는 한문이 많이 들었다. 이것들을 내 아이들은 읽고 한자어를 쓸 재간은 더더욱이 없다. 그들은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를 몰라서 볼펜으로 한문체의 형상을 어설프게 그릴 것이다. 문자가 아닌 그림이다. 한문 획을 쓰는 것조차도 모르거나 서툰 세대다.
한자 낱자의 숫자는 지금쯤 7만 자를 넘어서 8만 자로 육박할 게다.
앞으로도 새로운 낱자의 조어가 숱하게 늘어날 게다. 현재는 7만 자를 넘어 8만 개의 숫자로 증가했을 이 많은 글자를 무슨 재주로 익히며, 그것을 언제까지나 기억해서 또 어떤 때에 쓰느냐? 필수한자만을 압축해서 10.000자로 정한 뒤에 이로써 문자생활을 할까? 우리나라 실정에서 한자 30,000자 이상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됄까? 그럼 더 줄여서 10,000~4,000자라면 좋을까?
일전 어떤 카페에서 퍼 온 내용이다.
대법원은 기존 한자 5761자에 새 한자 2381자를 포함해서 '인명용 한자 규칙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단다. 인명용 한자는 1990년에 신설했고, 이번 9번째 개정을 하여 최대 8142자로 확대했단다.
위 인명용 이외의 생활용 한자까지를 보태면, 우리는 도대체 몇 개쯤의 한자를 알고 써야 하는지 나는 답답하다.
1949년 1월 생인 나는 한자 몇 개쯤을 알까?
나는 소년기 청년기를 돌집에서 보냈다. 나도 비문(碑文)을 짐작하면서 읽는 체를 했다. 또 이따금 한문선생한테 붓글씨를 몇 년째 배우는 체했던 나로서는 한문자를 과연 몇 자나 제대로 알까? 극히 의문스럽다. 한문공부를 중도에 그친 나로서는 지금 한자를 제대로 쓰는 게 아니라 그 형태를 보고 그릴 줄 아는 수준이라고 본다. 1,000자 쯤은 됄까?
읽기는 하되 쓰지 못하는 세대가 바로 나. 그렇다고 해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을 모르고 지낸다.
일전 서울 잠실롯데에서 한국에 관광 나온 중국인한테 신문 한 장을 얻었다.
한문의 획수를 약자로 줄여서 새로 고쳐 쓴 간자체의 한문을 보고는 읽을 듯도 싶고, 아닌 것도 같았다. 간자체의 어떤 형상을 알면 대충 짐작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학창시절에 3년간 일어공부를 하다가 중단한 것처럼, 직장에서 영어를 오랫동안 배우고, 쓰는 체를 하다가는 그만 둔 것처럼 위 간자체의 한문신문이 주는 인상도 좀 그랬다. 아쉽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구한말까지는 한문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판을 쳤다.
1945년 이후에야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아서 국어교육이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본다. 불과 100년 이쪽 저쪽에서 뜻있는 분, 주시경 등 국어학자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다듬기 시작한 이래로, 아직도 국어가 정립되는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이런 판국에 요즘, 초등학교의 어린아이한테 부담이 가는 한자교육을 시키자고? 아직은 성급하다. 먼저 우리말과 우리글을 체계적으로 가다듬고, 통일하는 것부터가 우선이다. 남한에서 발간하는 국어대사전부터 우선 통일시키고, 남북한 간에 언어통일정책이 보다 크게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또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부상하는 국가의 신뢰도를 상승시켜서, 우리말과 글로도 충분히 뜻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국제화시대에 우리말과 글이 세계어로 더 진출했으면 싶다. 한자교육을 조기에 확대 실시할 이유는 극히 적다고 본다.
나.
정말이다. 남들한테는 '우리말이 아름답고, 쓰기 쉬우니까 바르게 쓰자'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나는 지금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모른다. 그만큼 말과 글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뜻이며, 그만큼 우리 학계와 교육도 체계적으로 정립하지 못했다고 본다.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해서 명확하고 뚜렷하게 분별하는 국어대사전이 있을까? 통일된 것이 있을까? 남한과 북한간의 말과 글도 일치할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이제 정립하여 나가고 있는 과정에 있으며 더욱이 남한과 북한이 나눠져서 골이 깊어지면서 언어도 크게 변질되고 있다. 남북한 언어학자가 공동집필하는 '남북한 국어대백과 사전'이 발간되어야 한다. 숱한 난제가 있을 게다.
내 경우에 비춰보면, 어린아이에게 한자교육을 조기에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한자를 조기에 가르친다라고 하면 한자어 이외에 세계 공용어의 하나인 영어, 중국어, 아랍어 등까지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외국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널리 가르치자고 할 것인가?
아니다. 먼저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친 뒤에 필요에 따라서 외국어를 가르치면 좋을 게다. 우리말에 한문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한문을 전적으로 더 애용하자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점차로 한자투의 말을 줄이고, 보다 실용적인 우리말과 외국어를 혼용하면 좋을 게다.
오래 전의 객기다.
직장 상사와 간부가 점심밥 먹는 구내식당에서 벽에 걸린 족자를 보았다.
少年易老學難成 어쩌구 저쩌구.
'소년이 늙도록 공부해도 뜻을 이루기 어렵다'
나는 위처럼 뜻풀이를 했더니만 직원들이 뜨악한 얼굴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 이렇게 무식한 놈이 다 있어?' 하는 멸시의 눈빛이었다.
나는 덧붙였다. 쉬운 우리말과 글이 있는데도 구태여 어려운 한자로, 중국사람이 쓴 말을 우리가 앞으로는 이어 쓰지는 말자고 주장했다. 위 문장의 출원지가 어디인지를 길게 설명한 뒤에서야 그들의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다.
산소 이장을 하는데 여러 명의 일꾼 가운데 제 아비를 따라온 듯 싶은 머슴아가 보였다.
누구의 아들인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 처음 보는 아이한테 물었다.
'아버지 이름이 무엇이니?'
'저의 아버님의 함자는 무엇이고, 무엇'이라고 줄줄이 외워댔다.
세상에나, 그 어린 것이, 불과 댓살쯤의 어린 것이 '함자'라는 단어를 쓸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했다.
일꾼 한 사람이 포클레인 기사를 가르키기에 그 어린 아이의 아비가 누구라는 것을 즉각 알았다.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속으로 흔들었다.
자식공부 정말로 잘못 가르치는구나.
하고는 그 아비를 힐끗 쳐다보고는 더 이상 어린 것한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풀이다. '무슨 자, 무슨 자'라고 한문을 한자씩 또박또박 끊어서 뜻풀이를 외워대는 이름들이다.
내 귀에는 '무슨' 소리만 들렸지 그 이상의 뒷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을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쉽게 말해!, 이름이 뭐냐고?'
중학교 친구가 내게 보낸 추석의 덕담 메세지.
한자가 몇 개 들어 있기로서니 내가 지나치게 과잉반응하나 보다.
2015. 9. 29.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