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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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42)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이적을 일으키는 목표는 땅에 있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앞 절에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은 그런 이적, 놀라운 일에 미혹 당하기 쉽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떤 목사가 교회 개척 10년 만에 1만 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주목합니다. 다른 목사들도 그 목사를 추종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모든 일이 허락되는 분위기입니다. 이적의 힘이 미혹의 영으로 작용한 겁니다.
‘우상’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14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우상은 헬라어 εἰκών(에이콘)의 번역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이콘’이라고 말하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헬라어 에이콘에는 likeness, image, form, appearance, statue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짐승을 위하여 우상(에이콘)을 만들라는 말은 황제를 로마 제국이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아이콘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요즘도 K팝을 세계 연예계의 아이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느 시대나 아이콘은 필요한 법입니다. 아이콘은 일종의 종교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짐승이 우상(에이콘)에게 ‘생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생기는 헬라어 πνεῦμα입니다. 프뉴마는 보통 영이나 바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을 가리킬 때도 저 단어가 나옵니다. KJV은 저 단어를 life로 번역했고, NIV는 breath로 번역했습니다. spirit으로 번역할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둘째 짐승은 생기를 우상에게 줄 힘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황제는 흉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세워놓고 일정한 예를 갖추게 했습니다. 황제 모습을 담은 로마 주화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숭배는 프뉴마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볼 정도로 강력한 흡인력이 있는 통치 이데올로기였다는 뜻입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현상이 노골적으로 일어납니다. 오늘날의 북한 체제가 그렇습니다.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는 누가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이런 우상화가 그쪽에서 먹히는 이유는 인민들이 생존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유 민주체제라 할 대한민국도 물질 숭배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현상에 떨어져 있습니다. 부동산 문제로 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은 거의 광기에 가깝습니다. 부동산이 우리를 구원해줄 듯이 매달립니다. 생존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사실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숭배는 로마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합니다. 그걸 거부한 이들은 고난을 겪습니다.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했다는군요. 실제로 문신 같은 걸 새겼다는 뜻은 물론 아니겠지요. 로마 시민권을 재발급했다는 것일 수도 있고, 황제숭배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표를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식료품 배급표일지도 모르지요. 그걸 암시하는 내용이 다음 17절에 나옵니다.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6절에 언급된 표에 대한 설명이 여기 17절에서 이어집니다. 이 표가 있어야 로마 제국 안에서 매매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나, 당시 황제숭배를 독려하거나 강요하려고 실행한 어떤 정책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표를 받을 수 없었으니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겠지요. 이렇게 일상의 문제에서마저 불이익을 당했는데도 로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물론 포기한 이들도 적지 않았겠으나 뿌리까지 흔들리지는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 무지막지하고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짐승의 시대를 그들이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대답은 물론 믿음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정답이기는 한데, 과연 그런 믿음으로만 그게 가능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왜 그런 믿음의 능력이 없는지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믿음과 오늘 우리의 믿음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환경의 차이일까요? 우리에게는 없는 그들만의 특별한 신앙 경험이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신자들 사이의 돈독한 친밀감이나 신뢰가 우리와는 달랐던 것일까요? 어쨌든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선배라는 사실이 마음 든든합니다.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지혜는 소피아(σοφία)의 번역입니다. 유럽 사람들의 이름에 소피아가 제법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좋아했습니다. 철학이라는 뜻의 영어 philosophy는 그 유래가 사랑이라는 뜻의 헬라어 필로스와 지혜라는 뜻의 소피아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philosophy를 그대로 우리말로 직역하면 ‘지혜 사랑’입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love wisdom입니다. 위 18절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곧 총명한 사람입니다. 영어 성경은 총명함을 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철학에서는 understanding을 오성(悟性)이라고 합니다. 이해하고 깨닫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18절이 말하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은 짐승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짐승의 숫자가 육백육십육이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666’입니다. 이 숫자를 세상 마지막에 올 사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컴퓨터 결재에 필요한 상품의 바코드를 이런 숫자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교묘한 말장난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해석입니다. 사이비 이단의 행태입니다. 정통 교회 부흥 강사 중에서도 그런 종류의 설교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풍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습니다.
666이라는 숫자는 알파벳을 숫자로 바꿔서 사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a는 숫자 1을, b는 2를 가리킵니다. 그런 방식으로 계산하면 네로 황제라는 알파벳 Neron Qesar가 가리키는 숫자의 합이 666입니다. 그러니까 666은 세상 마지막에 올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당시 로마 황제 네로를 상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네로의 환생이라 할 도미티아누스 황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