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정석
박정석의 아이디는 ‘[OOPS]reach’다. 길드나 클랜 이름을 앞에 쓰는 전통에 따르면 ‘OOPS’라는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reach’라고 이해하면 된다. 박정석이 [OOPS] 길드에 갖고 있는 애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터뷰를 하는 자리가 있으면 “지금의 나를 있게한 8할은 OOPS 길드 덕분”이라고 선전한다.
박정석이 게임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9년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오리지널 시대를 지나 브루드워의 시대로 진행하던 때다. 게임의 ‘게’자를 깨달아 가고 있던 박정석은 부산에 있는 한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게임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길드가 바로 ‘OOPS’. 팀플레이 길드로 알려진 OOPS는 김규형, 양경광 등 우승자를 배출하며 1세대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최고의 길드로 꼽혔다.
이 길드에 가입한 박정석은 강민규, 서병현 등 한참 나이 많은 게이머들로부터 팀플레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박정석이 PC방 이용료를 구하기 어려운 사정임을 안 박종필 사장의 도움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 나간다. 이 밖에도 박광민, 송정훈, 박정우 등 OOPS 길드 선배들의 전폭적인 도움 덕에 박정석은 이재균 감독과의 인연도 맺을 수 있었다.
방송무대 첫 데뷔
itv등에서 경력을 쌓아가던 박정석의 실질적 메이저 데뷔무대는 2001년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였다. 1.08패치와, 테란에게 극도로 유리했던 맵으로 인하여 프로토스의 암울기가 시작되던 시기였던 대회었다. 당대최강자로 꼽혔으며 전대회 3위 입상자였던 기욤패트리를 예선전에서 꺾고 올라오며 주목을 받았지만 홍진호에게 패배하는등,허무하게 16강 탈락에 그쳤다. 하지만 19세의 박정석은 차기시즌이었던 2001 SKY배에서 전 대회우승자 임요환을 꺾는등(이 경기 이후로 임요환의 프로토스전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기 시작) 8강에 입상하여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네이트배에서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한 시즌을 쉬게 되었던 박정석은 그 다음시즌 2002 SKY배에서 다시 비상하게 된다.
SKY배 스타리그
E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우승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2002 SKY배 스타리그였을 것이다. 코카콜라배부터 조짐이 일었던 프로토스의 몰락은 2002SKY배에서 극에 달하게 되는데, 1.08패치에서 전기를 맞이하게 된 테란과, 상성상 프로토스를 앞서는 저그를(당시엔 딱히 대 저그전 해법이 나와있질 않았다) 소수종족 프로토스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당대 최강 프로토스로서 "프로토스의 대부"라 불렸던 가림토 김동수마저 3패 탈락을 한 프로토스진영에서 최후의 1인은 박정석 뿐이었다. 16강을 강도경, 홍진호라는 당대의 두 지존 저그유저들을 상대로 재경기끝에 어렵게 올라왔던 박정석은 8강전에서 베르트랑, 변길섭을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며 비교적 쉽게 4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8강이 아니라 4강이었다. 4강에서 다시 만난 홍진호는 그가 만날 수 있는 저그중 가장 무서운 저그였고, 스타리그 공식전에서는 0승 4패를 기록 중이었다. 박정석이 이전에 진출했던 모든 대회에서 홍진호를 만났고, 졌으며, 그 경기들로 인해 탈락이 확정됐었다. 이미 16강에서도 재경기 포함 두 번을 졌던 상대였기에 그의 부담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온게임넷 스타리그 역사상 최초로 하루에 5선 3선승제가 펼처진 이 4강전은, 지금까지도 올드팬들 사이에서는 회자되는 저그 대 프로토스전 명승부 중 명승부로 꼽힌다. 한 판을 따내면 한 판을 빼았기기를 반복하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5차전, 개마고원에서 두 선수는 저그대 프로토스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으며, 이 치열한 경기의 승리자는 박정석이었다. 당시 승부를 정리한 글을 발췌해본다.
...(중략) 더 이상의 물러설 곳이 없는 두 선수의 마지막 5경기는 1경기와 같은 맵인 개마고원이었다. 박정석 선수는 1경기와 마찬가지의 전략을 사용, 홍진호 선수를 괴롭혔다. 그러나 홍진호 선수는 적절한 방어와 유닛 생산으로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 자신의 별명과 같이 박정석 선수의 앞마당을 폭풍과 같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박정석 선수로서는 앞마당을 잃으면 경기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필사적인 방어를 펼쳤으며 결국 방어에 성공, 홍진호 선수가 주춤한 틈을 이용, 역으로 홍진호 선수를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공격을 감행하며 다수의 확장을 시도, 자원에서 앞서기 시작한 박정석 선수는 프로토스의 힘을 보여주며 홍진호 선수의 기지를 초토화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홍진호 선수는 자원을 채취할 수 있는 모든 기지가 파괴되면 항복을 선언, 박정석 선수가 승리하며 3대2로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원글 : http://www.pgr21.com/zboard4/view.php?id=newvod&no=746)
불리함이 점쳐지던 상황에서 박정석의 승리는 그 무엇보다도 짜릿했고, 4강전을 치르는 동안 종종 튀어나왔던 하이템플러의 사이오닉 스톰은 마치 신내림을 받은 것 같아 '무당 스톰'으로 표현되었다. 프로토스팬은 박정석에게 열광하게 되었고, 몰락한 김동수의 자리를 단숨에 꿰어차며 프로토스의 수장으로 우뚝서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결승전의 상대는 당대최강자로 불리던 임요환, 하지만 박정석은 그 뛰어난 대 테란전실력을 과시라도 하듯 시종일관 유리한 경기를 보여주며 3대1로 승리, 감동의 스타리그우승을 일궈내게 되었다. 그리고 E스포츠 사상 최고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 "영웅"
마이큐브, 질레트, 그리고 EVER 04
스카이배 우승 이후 스타리그에서는 거물급 선수들이 들어옴과 함께 거물급 선수들이 빠져나갔다. 이윤열, 서지훈, 박경락이 전자의 케이스고, 김동수와 박정석은 후자의 케이스다. 김동수의 경우는 군입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박정석은 우승자 징크스에 제대로 시달리며 성적부진과 함께 급추락했다. 이윤열과 서지훈이 스타리그를 제패하고 박경락이 2시즌연속 4강에 진출하는 동안, 박정석은 잠시 밑에 머물러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박정석을 의심하지 않았고, 누구나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슬럼프라고 생각했다. KTF매직엔스는 박정석을 현금트레이드로 야심차게 영입했으며, 팬들은 박정석을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었던 임요환, 이윤열, 홍진호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렀다. 예상은 맞았고, 박정석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마이큐브 스타리그배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전략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초창기의 박정석이 물량에 의존하지만 전술적인 측면이 조금 부족했었다면, 마이큐브 당시의 박정석은 자신의 강점은 더욱 보완하고, 약점은 오히려 강점으로 키워버렸다. 16강 도진광전에서의 헐루시네이션을 이용한 질럿 마인밭 뚫기, 8강 서지훈과의 경기에서의 패스트 다크, 4강 강민과의 경기에서의 마인드컨트롤, 그리고 3,4위전에서는 아비터의 스테시트 필드를 이용해 질럿을 얼려 입구막기까지 - 각각의 스테이지에서 박정석은 그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이용되지 않는 전략들을 가져와 팬들을 열광시켰고, 해설자들을 경악시켰다. (이후 박정석의 캐리어 마인드 컨트롤 전략은 또 한번 실행되었었다 - 박정석 본인에 의해.)
그 시즌 가을의 주인은 절친한 친구 박용욱이 되었지만, 박정석은 잃은 것이 전혀 없었다. 역사상 프로토스의 최전성기로 불리웠던 그 시절의 한 축으로 남았었고, 반년이라는 짧지만 긴 슬럼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의 단 두번째 4강 입성이었을 뿐인데, 그는 이미 스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정확하게 2시즌 후, 박정석은 또 다시 4강전에 진출했다. 이번 상대는 '흑마술사 테란', '벙커링의 제왕' 나도현이었다. 질레트배 당시 스타리그에서 가장 큰 이슈의 중심에 서있던건 세 명 - 최연성, 박성준, 그리고 나도현이었다. 최연성은 스타의 신도 이겨버릴듯한 무시무시한 강력함으로, 박성준은 저그 최초우승을 노리는 겁없는 신예로, 그리고 나도현은 논란이 넘치는 벙커링과 빼어한 외모에 실력까지 양념으로. 인터넷의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박정석의 실력은 예전에 비해 하락하기는 커녕 상승했으나, 이미 세월은 꽤 변한 것 같았다. 임요환-홍진호가 없던 최초의 스타리그, 프로토스의 짧던 전성기도 끝나버린 그때. 설상가상 박정석은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은 상태였고, 이 때문에 치료를 위한 은퇴설도 슬글슬금 나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박정석은 박정석이었다. 진짜로 저 먼 우주에 프로토스라는 종족이 존재를 한다면, 그 모든 프로토스인들이 믿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수장. 그것이 영웅이었다. 노스텔지아에서 셔틀에 타고 있던 한 질럿은 기가막힌 장소에 착륙, 나도현의 메카닉 부대를 한번에 녹여버렸고 그 마인 대박은 바로 박정석을 두 번째 결승에 올려놓았다.
흔히들 사람들은 '부상투혼' 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곤 하는데, 박정석에게 있어서는 아깝지가 않은 단어 선택이었다. 질레트 결승이 끝나고는 인터뷰에서 '주사를 맞으면서 훈련한다'고 얘기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고백하기도 했었다.
"요즘 목에 주사를 맞았는데 통증이 많이 없어졌다. 한때는 이번 시즌을 쉴까도 생각했으나, 당분간 물리치료와 약물치료, 수영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면서 선수 생활을 끝까지 해보겠다." - 박정석, 2004년 8월 28일 파이터포럼과의 인터뷰에서.
하지만 박정석은 결승전에서 "투신"으로 등극한 박성준에게 저그 사상 첫 로열로더의 칭호를 내어주고 만다. 당시엔 풋내기에 불과해 보이던 박성준에게 우승을 내준 것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후일 박성준이보여준 대 토스전을 모두 떠올려본다면 박정석이 결승에서 보여준 3대1의 스코어는 결코 부진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맵사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극적이었던 우주배MSL
MSL에서 박정석은 그렇다할 성적은 MSL의 전신인 KPGA 때 3차 대회에서 준우승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커리어가 없었고 오히려 예선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온게임넷에서 그 많은 드라마를 써가는 동안 MSL의 역사 기록속에 박정석의 이름은 제로였다. 강민, 이윤열, 최연성등이 챕터를 써갔고, 박정석에게는 그런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단 한번, 박정석의 이름은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멋있게 쓰여진 기회가 있었다. 바로 2005년 여름에 펼쳐진 우주배 엠비시게임 스타리그가 그것이다. 스타리그는 잠정 휴식을 들어가던 그때, 박정석은 자신의 실력과 스타성을 MSL에서도 유감없이 뽐내버렸다.
드라마의 본격적인 막은 패자조 준결승부터 시작된다. 최연성. 비록 그전 시즌 박태민에게 우승자 자리를 잠깐 내주긴 했지만, 최연성에게 있어서 MSL은 자신의 집이었고 보금자리였다. 0%의 운을 가지고 100%의 실력으로 3연패를 차지했던 그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최연성의 우세를 점쳤다. 박정석이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5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박정석은 그런 예측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차전 레퀴엠에서의 마인대박은 그 대답을 확실히 보여줬었고, 박정석은 자신의 개인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3대0으로 상대를 셧아웃 시켜버렸다. 그것도 괴물 최연성을.(최연성의 전성기시절, 유일하게 물량전에서 패배를 인정했던 선수가 박정석이었다)
각본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1년에 프로토스에게 2번지는 조용호를 상대로 박정석은 프로토스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고 하면 너무 과분한 표현일까. 하지만 그랬다. 프로토스라는 종족은 언제나 억압 받아왔고, 오랫동안 왕좌에 앉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뚝심으로 뚫어내고, 결국 사나이답게 힘으로 끝내며 시청자들에게 전율을 줬다. 4강전이 그랬다. 2대1로 뒤져있던 상황에서 러시아워에서의 4차전. 박정석은 시리즈 내내 조용호의 무지막지함에 압박받아왔고, 경기 내내 그래왔다. 하지만 그 불리한 상황을 이겨낸 건 뚝심이었다. 1시간이 넘는 역대 최장시간의 경기에 꼽힐 4차전. 박정석의 마에스트롬과 함께 한방에 끝냈던 그 장면은 모든 스타크래프트 팬들에게 큰 전율을 주었다. 겨우겨우 스코어는 원점을 맞추고 난 후 벌어진 5경기, 끝은 허무했다. 하드코어 질럿 러쉬. 스타크래프트의 태생 이후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전략으로, 6분만에 5차전을 끝낸 뒤 박정석은 헤드셋을 벗었다.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었던 시리즈. 박정석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러분은 프로토스를 왜 시작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은,하드코어 질럿러쉬가 정말 좋기 때문에"!- 이승원, 2005년 7월 21일 박정석과 조용호의 4강전 5차전 경기중 2게이트 하드코어 질럿러쉬로 승기를 잡은 박정석을 보며
그러나 SKY배에서의 기적같은 우승 이후, 박정석에게 우승의 운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을까? 박정석의 결승 맞상대는 당시만 해도 "잘하는 저그" 정도로만 평가받던 신예 마재윤이었고, 박정석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자 4대천왕으로 불리던 프로토스의 아이콘이었다. 게다가 결승까지의 극적인 행보는 모두 그의 우승을 바라게 만드는 요인중 하나였다.거기에 결승전 장소였던 부산은 그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승은 3대1 마재윤의 승리로 끝났다. 새로운 본좌의 탄생을 알리면서 말이다.
공군 ACE로 새출발
올드 프로토스 게이머 중 가장 꾸준한 성적을 유지하던 박정석은 우주배 MSL 이후 뚜렷한 개인리그 성적을 보이지 못한다. 덩달아 그동안 성적이 좋았던 프로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박정석은 2008년 말 공군에 입대, 공군 ACE 팀에 합류했다.
공군 ACE에 합류한 이후 2009년 1월 20일에 송병구를 상대로 입대 후 첫승, 개인전 787일 만에 첫 승을 기록한 것은 물론, 친정팀 KTF 매직엔스와의 경기에서도 인상적인 스톰 사용을 보이며 새출발을 알렸다.
이후 2009년 2월 11일날 화승(르까프OZ)전에서 신예 노영훈과 프로토스의 달인 박지수를 격파하고 2승을 하는등 영웅토스다운 면모를 보였다. 공군ACE의 중심축으로 프로리그에 꾸준히 출전하면서 승수를 올리고 있다. 2009년 3월 9일 프로리그 통산 99승을 달성하면서 사상 최초 프로리그 100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참고로 2위 이윤열은 96승 3위 이제동은 88승이다.)
이재균 감독
프로게이머가 된 박정석이 처음으로 만난 감독은 현재 웅진 스타즈(옛 한빛)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이재균 감독이다. 한빛소프트와 스폰서 계약을 하기 전인 2000년 SM(스타크래프트 마니아) 팀을 꾸리고 있던 이 감독은 손 빠르고 생산력 좋은 프로토스가 있다는 소문에 박정석을 찾는다. 18살로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박정석이었지만 경기하는 모습을 보며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이 감독은 팀에 받아들였고 이후 박정석은 팀플레이 선수가 아니라 개인전-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프로리그가 없었기 때문에 1대1일 중심이었다-에 쓰일 카드로 육성됐다.
이 감독의 지도 하에 박정석은 쑥쑥 커나갔다. 2001년 코카콜라 스타리그를 통해 메이저 무대에 첫 발을 들였고 1년 뒤인 2002년 스카이 스타리그를 통해 우승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후 프로리그를 통해 인지도를 쌓은 박정석은 2004년 KTF 매직엔스로 현금 트레이드되면서 이재균 감독과 경쟁하게 된다.
그래도 박정석은 휴가를 받아 시간이 남거나 고민이 생기면 이재균 감독을 찾으며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7월초 공군 입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박용욱과 함께 이 감독을 찾아 세 시간 여 동안 면담을 통해 마음을 굳혔다.
임요환
박정석이 놀라운 생산력을 자랑하고 많은 팬들의 성원을 모을 수 있었던 계기는 2002 스카이 스타리그. 4강에서 홍진호와 난타전을 치른 끝에 3대2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파란을 일으킨 박정석은 결승전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인 임요환과 맞붙었다.
2001 스카이 스타리그에서 박정석과 한 팀이었던 김동수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친 임요환은 두 시즌만에 다시 결승전에 오르면서 제왕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박정석의 생산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박정석은 ‘물량 토스’와 ‘영웅 토스’라는 두 가지 별명을 동시에 얻었다. 또한 김동수에 이어 또 한번 프로토스가 가을에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가을의 전설'이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박정석과의 일전은 임요환에게도 큰 타격을 입혔다. 박정석의 놀라운 생산력 앞에 임요환의 생산력이 비교되기 시작했고 ‘저축 테란’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또 프로토스에게 약한 테란이라는 이미지도 평생 따라다니는 계기가 됐다.
박성준과 마재윤
박정석은 세 번 개인리그 결승전에 올랐다. 2002년 임요환을 제압하며 스타리그 우승자 대열에 합류했고 2004년 질레트 스타리그와 2005년 우주 MSL을 통해 결승전을 경험했다. 그러나 임요환과의 경기를 제외하고 두 번 모두 저그에게 패하면서 ‘저그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4년 질레트 스타리그의 상대는 박성준. 스타리그에 첫 발을 내딛자 마자 결승까지 오르면서 로열 로드를 눈앞에 둔 박성준을 상대로 박정석은 첫 세트를 따내면서 경험이 패기를 누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리 세 세트를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박성준 의 우승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스타리그 사상 처음으로 저그만을 플레이한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고 로열 로드를 달성한 저그를 탄생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박성준 의 소속팀인 POS는 창단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박성준 은 승승장구하며 스타리그 3회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골든 마우스를 손에 넣었다.
2005년 우주 MSL에서는 또 한 명의 저그 스타 플레이어를 만들어 냈다. 최연성과 조용호를 연파하며 천신만고 끝에 결승전에 오른 박정석은 마재윤을 만나 1대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이 결승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마재윤은 5회 연속 MSL 결승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고 ‘프로토스의 재앙’으로 불리며 3년간 최고의 자리를 고수한다.
박정석을 결승전에서 제압한 박성준과 마재윤은 전성기를 구가했고, 박정석은 ‘저그의 시대를 열어준 굴욕의 영웅’이라 불렸다.
정신적 지주 강도경
이재균 감독과 함께하던 시절 박정석의 나이는 아직 20세가 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정석에게 아직 프로게이머로서 가져야 할 마인드가 부족했고 이 감독의 눈에 좋지 않게 비친 적도 있다. 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정석은 주특기인 팀플레이 연습을 하다 이 감독에 발각돼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고 부산으로 내려가 있으라는 벌칙을 받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 박정석은 부산에서 태평하게 연습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석의 잘못을 지적하고 상경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강도경이다. 김동수와 함께 SM팀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던 강도경은 후배들의 잘못한 점을 꼬집는 ‘이재균 감독의 분신’이기도 했지만 후배들에게 따뜻하게 대할 때는 친가족처럼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배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또 박정석과의 호흡도 잘 맞아 프로리그 초창기 팀플레이의 교본이라 불리기도 했다. 박정석과 강도경은 18번 팀플레이에 출전, 15승3패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박정석은 “도경이형이 없었다면 초창기에 방출되어 꿈도 펴보지 못하고 묻혔을 수도 있다”고 회상할 만큼 강도경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고 강도경이 군에 입대한 이후 휴가 나올 때마다 따로 전화하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라이벌이자 죽마고우’ 박용욱
박정석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절친한 친구인 박용욱을 인맥 지도에서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석과 박용욱은 부산에서 함께 성장한 고향 친구. 이재균 감독이 이끄는 SM 팀 시절부터 한빛 스타즈에도 함께 몸 담으며 프로토스 최강 자리를 놓고 경쟁을 펼쳤다.
스타리그 우승을 먼저 차지한 쪽은 박정석이었지만 4강에 먼저 오른 선수는 박용욱이었고 박정석에게 자극제가 됐다. 박용욱이 세밀한 컨트롤을 앞세운 마이크로형 운영을 펼쳤다면 박정석은 전략보다 전술, 생산력과 전투력에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박용욱이 주 훈 감독이 이끄는 동양 오리온으로 이적한 뒤 첫 프로리그였던 KTF 에버컵에서 박용욱은 한빛을 제압하는 선봉장이 됐고 친구에게 발목이 잡힌 박정석은 프로리그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박용욱이 SK텔레콤을 이끌며 2004년 전기리그 준우승, 2005년 전후기 우승 및 통합 챔피언전 우승, 2006시즌 전기리그 우승 등 타이틀을 쌓아갔지만 박정석은 2004년 초 KTF로 이적하며 프로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2005년 부산 광안리에서 열린 스카이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할 때 적수도 바로 박용욱이 몸 담고 있던 SK텔레콤이었다.
그러나 박정석에게 박용욱은 둘도 없는 친구다. 한빛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친분을 쌓았고 두 선수 모두 한빛을 떠난 뒤에도 이재균 감독을 포함한, 한빛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면서 함께 방문하는 등 우애를 과시하고 있다.
'아끼는 후배’ 테란 이영호
강도경으로부터 선배는 어때야 하는지, 프로 마인드가 무엇인지 5년간 지도를 받은 박정석은 후배들에게 잘하기로 유명하다. 지적할 때 지적하고, 다독일 때 다독일 줄 아는 사리가 분명한 박정석의 후배 지도 방침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선수가 바로 테란 이영호다.
만 15살의 어린 나이에 KTF에 입단한 이영호는 주장을 맡고 있던 박정석과 한 방에 배치되면서 팀 적응을 시작했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던 이영호는 박정석의 배려 덕에 KTF 선수들과 금세 친해질 수 있었고 새 숙소에 적응했다. 밤마다 박정석과 함께 전략을 구상하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공유하면서 프로 정신을 받아들인 이영호는 입단 1년만에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최종병기’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박정석은 “이영호가 성년이 되고 나면 KTF 매직엔스를 이끌고 나갈 리더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평하기도 했다.
2009년 2월 2일 프로리그에서 두 선수는 서로 상대편의 입장으로 격돌하였다. 이 경기에서 박정석은 전성기 때의 스톰 사용을 과시하며 대역전승을 노렸으나 이영호의 엄청난 물량에 결국 아쉽게 패배한다. 하지만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포모스로부터 최고 평점을 받았다.
'두 명의 사령탑' 정수영-김철
2004년 KTF 매직엔스로 이적한 이후 박정석은 두 명의 사령탑을 맞는다. 선수단 장악력과 카리스마,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 정수영 감독과 외유내강형이자 자율적인 연습을 강조한 김철 감독 휘하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박정석에게 정수영 감독은 독특한 인물로 기억됐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던 정 감독은 24시간 트레이닝 이후 24시간 휴식이라는 특이한 연습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선수단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정 감독의 스파르타식 지도 방침 덕분에 어떤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생겼다고.
김철 감독으로부터는 스스로 능력을 100% 끌어내는 법을 익혔다. 구구절절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율 연습과 최적화된 시스템을 통해 자발적으로 성장하도록 유도하는 지도 방침에 따라 지금의 박정석이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프로그래머 친형
박정석이 게임을 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친형 덕분이다. 두 살 터울인 박정석 형제는 다른 취미를 갖고 있었다. 박정석이 소프트 웨어에 관심이 있었다면 친형은 하드 웨어에 재능을 보였다. 컴퓨터를 구입하고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에 심취한 친형이 게임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박정석은 게임을 즐기기만 했다고.
그 결과 박정석은 프로게이머로 성공했고, 친형은 컴퓨터 관련 회사에 다니며 프로그래머의 길을 걷고 있다
경력
메이저 대회 우승 1회 준우승 3회이다. 프로리그 통산 최다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첫댓글 아 난 악마토스 박용욱을 제일좋아했었는데 박용욱의악마프로브,악마다크아칸,악마의군대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