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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되어버린 장로교회(1)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없는, 교회성장과 인간의 감정만을 주장하는 예전(liturgy)에 함몰되어 버린 목회자들의 수준의 한계를 볼 때 장로교회가 과연 한국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한국교회 안에 광풍으로 불고 있는 은사주의 은동은 여전히 그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 목사들과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한국교회 안에 성령운동이 일어나기 전 장로교회는 그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였고, 목사들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인 수준은 그야말로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성도들 앞에서 당당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제가 목사입니다”라고 하면 외인들까지 “아! 목사님이셨군요”라고 하면서 목사의 말을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목사가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부류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들과 돈의 탐욕에 빠져 있는 모습들은 가히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저지르는 불법보다 더 타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목사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도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1)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교회 내에서 간통한 여자와 재혼한 것을 목사가 알면서 자신의 목회에 도움이 된다고 당사자를 장로로 세우는 목사,
2) 교인들의 헌금으로 예배당을 짓고 나서 교인들을 쫓아 버리고 그 재산을 자신의 이름으로 매매하여 탐닉한 자를 치리하지 않는 노회,
3) 어린 청소년과 성관계를 하고 선교지에 가서도 사창가에 가는 것을 알고도 치리하지 않는 노회,
4) 교회 문제에 조직폭력배 두목을 데려다가 싸우는 것을 알고도 그 목사를 지지하는 노회,
5) 목사가 자신의 교회에서 여성도들을 성폭행 것이 들통나자 조기 은퇴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은퇴금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도 치리하지 않는 노회,
6) 교회 내에서 장로들 간의 폭행이 목사의 면전에서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장로를 오히려 두둔한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노회,
7) 비트코인의 열풍에 빠져 목사 자신뿐만 아니라 예배 시간에 아예 광고까지 하여 교인들의 재산을 올인시켜 하루 아침에 거짓꼴로 만든 목사를 치리하지 않는 노회,
8) 교회의 헌금을 자신의 돈처럼 부동산 투자한 목사를 치리하지 않는 노회,
9) 은퇴를 해도 교인들을 선동하여 자신이 계속 설교하고 사례를 받으면서 후임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목사를 인정해 주는 노회 등 ..., 계속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들의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결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학교만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았다는 것이 전부인 양 목사로 인정해주는 장로교단의 반 성경적인 목사교육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직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전혀 없을뿐더러 목사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저 목사 안수만 받으면 목사로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패악은 목사라고 하는 한 개인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성도들의 타락과도 연관되어 집니다.
성령운동은 신학교와 목사를 교회 타락의 앞잡이로 만들었습니다. 성령 은사주의 운동은 결국 목사의 직분과 목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떻게 목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 성경적인 운동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운동은 성경에서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고 지켜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운동은 인간의 감정과 욕구만을 채워주는 거짓 영의 유혹입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타락하였고, 지금 어떤 삶을 사는지 그 모습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 모습만 보더라도 성령운동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복음에 대한 불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령운동과 은사주의에 빠진 교회들은 처음부터 성경과 상관이 없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합동 교단은 초창기 성령운동이 일어날 때 총회 결의로 방언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순복음교회와 오순절 교회가 하는 방언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방언입니다. 방언은 은사운동의 시작이고 여기에서 거짓교회가 계속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교 교단의 목사들이 교회가 커지는 것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방언 가르치는 일을 배워서 교인들에게 방언을 시켰고, 결국 한국교회 안에 있는 장로교회 거의 모든 교회 목사들이 교회부흥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단순하게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방언은 은사운동, 즉 성령운동을 대표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여기에 빠진 순간부터 목사들은 성경과 다른 목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목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부터 돌아볼 수 있는 경건의 시간을 빼앗겨 버리게 되었고, 이러한 목사의 설교는 세상과 하나가 되는 세속주의 설교만 강단에서 가득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은사주의와 성령 운동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킨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무 율법주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보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은사주의에 빠진 어떤 여성은 성령께서 자신의 남편과 이혼하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가정을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체험과 감정에 더 몰두하게 하고 그것이 마치 성경적 신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는 하나님의 신비를 믿습니다. 지금도 신비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그리고 믿는 성도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칼빈은 이것을 성도 개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가르칩니다. 불치병이 나음을 입고 귀신도 쫓겨나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배격하는 것이 장로교 신학과 신앙입니다. 과거 예수님이 행하셨던 표적들에 의한 기적적인 사건과 사도들이 행한 신유, 축귀 등의 사역은 더 이상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장로교 신학입니다.
그런데 마치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님 당시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신유나, 축귀사역이 일어난다고 믿고 가르치는 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에 빠진 목사들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이런 신비주의 현상에 빠져 있게 마련이고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모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장로교회가 함께 하고 있으니 그런 교회들을 장로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을 보면 목사나 성도들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빼앗겼고,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위해 목사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였다는 것을 지난날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장로교회의 모습이고, 장로교 목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은사에 매이지 않습니다. 은사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는 띠로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이것이 장로교 성령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머리입니다.
장로교를 교회정치와 연관시기고, 신학과 신앙과 연관시킬 때 가장 성경적인 정치체계이며, 모든 지상의 교회들의 표본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로교 목사는 다른 교파의 목사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월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의 스승인 사도들처럼 그렇게 복음을 위해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장로교의 가장 대표적인 합동교단은 이미 세속화되어 버린 정치 목사들로 인해 진리의 신학마저 버려지고 있습니다. 이단도 형제라고 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벌린 사람을 단 한 차례 경고나 권면도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신들과 함께 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줍니다. 교세가 크면 성공한 목사라고 높여줍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형제를 음해하고 자신보다 큰 교회를 하는 목사를 죽이기 위해 돈을 주고 여자를 사서 목사와 간음하였다고 언론에 알립니다.
또한 학력위조를 한 자신은 정당한 척 가면을 쓰고 위선자의 모습으로 타인의 학력이 위조되었다고 거짓으로 정치를 합니다. 강단에서는 성경의 말씀의 순수한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목사에게 그리고 계속 목사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면 큰 복이 내려진다고 하는 무당설교만 가득한 현실입니다. 죄에 대한 경각심이나 거룩한 성화의 삶에 대한 그 어떤 내용의 말씀은 사라지고 단지 교회 부흥이라고 하는 것에, 또한 성도들의 헌신에만 설교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성경 본문을 읽고 지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타락한 목사들의 설교입니다.
장로교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과 오늘날 장로교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다릅니다. 장로교 목사들 또한 자신들이 장로교 목사인지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관심이라곤 돈과 명예와 정욕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일부 장로교 목사들의 일탈이라고 하면서 부인할 수도 있지만 강단에서부터 장로교 목사들의 오직 성경의 원리에 의한 설교가 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순수한 장로교의 모습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게 되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의 회복이 없이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도 없을 것이고 신학교의 바른 가르침도 사라질 것이며 장로교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인식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자신의 백성들을 남겨두신 것처럼 오늘날도 많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과 우리 모두는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임진남 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 -
임진남 목사는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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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되어버린 장로교회(2)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사상이라고 우리는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이 나타나는 현장은 성도들의 모든 삶이지만, 그 가운데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께서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아 타락한 로마교회의 예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예전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드러나기를 아주 심사숙고하여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의 순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엄밀한 개혁교회 및 장로교회를 추구하는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시편 찬송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 때문에 시편 찬송을 부르지 않는 교회를 참된 교회로 보지 않는 극단적인 경향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항상 16세기에 일어난 과거 종교개혁의 교회로만 생각하는 현상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일반적인 장로교회에서 부르는 복음송은 복음주의에서 노래하는 것이므로 성도들의 감정만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절대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어는 정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복음송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만을 노래합니다. 인간의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그분의 공의와 심판 그리고 사랑과 인내, 뿐만 아니라 저주와 형벌까지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송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을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송이 항상 잘못된 것만 또한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성경적인 내용의 가르침에 대한 가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사용하는 것은 우리 교단에서도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하는지? 복음송도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글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전을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 요소들이 성경적으로, 그리고 장로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예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장로교회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날 장로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 과연 장로교회의 모습으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시편 찬송을 부르지 않는 것보다 더 심각한 예전의 타락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죄 사함에 대한 부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예배의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성도들의 죄가 사함 받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신약의 예배의 형식을 만드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였고, 이를 교부들과 그리고 속사도들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예배의 요소 중에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구약 동물의 피의 제사를 통해 백성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처럼, 신약의 예배 속에 강조된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사함의 선포였습니다.
신학의 배경이 없는 혹자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왜? 예배 때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지 물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자신의 피로 속죄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날마다 속죄의 사역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죄 사함에 대한 복음 선포입니다.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면 그때 성도들의 죄가 공식적으로 사함을 받는 은혜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목사들이 예전에 대한 중요한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죄 사함의 은혜를 성도들이 누리는 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형식만 내세우는 예배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 가운데 인간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복음송을 사용하고 분별없이 몸을 흔들고 퍼포먼스까지 하는 예배를 장로교회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예배를 강조하는 잘못된 복음주의 예전입니다.
그러나 장로교회가 복음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장로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강단에서 목사의 설교가 복음 선포 없이, 그저 목사가 하는 말이 설교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더 악한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로마교회에서 드려지는 예전에 단 한 가지라도 성경적인 예배의 요소가 있습니까? 사제들이 전하는 말씀이 과연 성경적인 것이 있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성경을 거짓으로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교회를 거짓교회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로마교회를 우상숭배 집단이라정죄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날마다 죄를 사해 주시고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로마교회와 무슨 차이가 있으며, 인간의 감정만을 고조시키고 일시적인 흥분만을 주는 타락한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예전의 타락은 성도들의 성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가 공식적인 예배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갖는다면 성도는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반복적인 죄를 다시는 행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질 것이고, 결국에는 언제가 그 죄에 대한 부분에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타락, 즉 예배의 타락은 교회의 타락이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타락까지도 연결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서 장로교회의 예전을 따라 바르게 예배하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참으로 어려운 실정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의 커리큘럼 가운데 장로교 예전에 대한 교육이 없다는 것은 가장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 문답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도 장로교 신학교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작금의 목사들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장로교 신학의 근간인 이런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신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는 사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입니다.
임진남 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
임진남 목사는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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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페에 후원이 없습니다 근심.걱정으로 답답한 심정...
겨울 난방도 못하도록 생활이 아렵습니다
통신료도 못내고 생활고로 카페도 운영을 못할 지경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가 드리는 부탁의 말씀.....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작은 나눔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치료비,임대료,난방비.먹을것을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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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후원도 한달내내 두세분에 불과하니
카페도 생활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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