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면 유래
송병완
선사시대와 전기시대.
대덕면에서 구석기시대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자연석관묘가 만덕산맥 (상운 범바위로 가는 능선)에서 보였다.
신석기 시대 유물로서 돌 칼 등이 출토되어 있었다. 대덕소재지에서 가까운 운암리 팔학동 마을입구와 등갈마을 가는 길목에 있었다. 지금은 도로개설 등으로 흔적이 없다. 내문마을 속칭 선정이 위 하천변에 있었으나 문학(1985년에 준공으로 한 많은 한해를 종식시켰다.)제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수몰되고, 용대동내앞 도로변에 고인돌 한 점이 있으며 秋成誌에 다리에 있어 금산 리에 學橋 성곡 리 하친에 燕橋 용대리에 石橋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금산리와 용대리에 현존하고 있으며 성곡리 연교(일명 제비다리)는 알 수가 없다.
추성지에 유명한 寺察과 샘에 대한기록이 있다. 玉泉寺가 있었으며 대웅전 옆에 옥천이란 돌비 새겨져 있었는데 최근 관리 소홀로 형태를 알 수 없었으나 샘물은 예나 다름없이 영산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덕면의 설화
조 사 지
담양군 대덕면 갈전리 하갈마을
조 사 일
2000년 6월
정 리
이 해 섭
<하갈(下葛) 마을>
하갈(下葛) 마을은 조선시대에 옥과(玉果)현감과 순창(淳昌)원님이 화순(和順) 적벽(赤壁)의 절경을 구경하기 위해 다니기도 했고, 순창(順昌)·옥과(玉果)·동복(同福)원님의 가마행렬이 서로 마주쳐 신경전을 부렸다는 쌍 기우재라는 큰 고개가 마을 북쪽에 있다
동복(東福)이나 화순(和順) 등지에서 당시 과거를 보러 기우재를 넘어야 하는 상경(上京)길로 큰 길이다.
또한 지나가는 스님이 ‘동네 화산 (백아산)이 보이면 불이 자주나니 동정지(東亭地)에 나무를 심어라’ 하여 느티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을 가리고, 천룡(天龍)등이라 천룡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 축문(祝文)은 14대손 최기형(崔基馨)이 지어 지금까지 전해온다. 그리고 부모께 효를 다하고 득병(得病)함에 똥을 맛보고 약을 드렸으며, 손가락의 피를 빨아드리는등 조석으로 종묘(宗廟)를 참배(參拜), 조상을 모시는 정성이 지극하여 유림이 누차 효자 추천함에 병인년(丙寅年)에 비각을 세웠다 한다.
【대덕면 설화2】
<상갈(上葛) 마을>
상갈(上葛) 마을이 생기기 전 북동쪽 근간에 가절이라는 사찰이 있었고, 중흥리(中興里)라부르는 마을이 있었다고 전하나, 믿을만한 흔적도 없으며, 다만 그 부근을 지금도 중매골들, 중매들이라 부르고 있다.
달 밝아 청청한 밤이면 북소리가 들린다는 마을 터는 큰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 믿고 살아왔다.
마을 뒤에 대밭등과 남서쪽으로 적덕봉이 있으며, 마을 앞에서 북으로 연결된 산이 잉어형국을 하고 있다하여 그 앞산을 그믈봉이라 부른다.
【대덕면 설화3】
조 사 지
담양군 대덕면 금산리
조 사 일
1999년 1월 26일
제 보 자
이 찬 기(남, 70세)
※ 대덕면 금산리(관련설화=대덕면 설화 4, 5, 6, 7, 8, 9)
<금산리의 지명유래> 금산리에 있는 憮月마을은 고려말기 喬桐 印씨들이 처음 입주하였으나 홍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초기 興城 張씨들이 다시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한 때는 옹기그릇을 구워 점등 또는 店里라고도 불렀으나 마을의 서쪽 지세가 토끼가 달을 어루만지는 형세이고 금산의 산세가 신선이 달을 안고 있다는 형 세같다 하여 무월이라 불렀으며, 마을 가운데 당산 나무 옆에 목탁형의 바위를 護身如佛이라 믿고 이를 모시면 복음이 영생하리라 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신라 때 금산에 금산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폐허가 된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지금도 주춧돌 몇 개가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솔매들과 시내미들 사이 산세가 두더지혈이라 하여 이 혈이 마을에 들어오면 흥성하지 못하고 결국 폐허가 된다고 믿고 이 액을 막는다는 미륵불을 제작하여 마을 뒤에 세웠으며 다시 마을 앞 학다리 옆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학다리는 금산사에서 공부하는 불승들이 건너다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시목마을은 조선조 중엽 金寧 金씨와 錦城 羅씨가 입주하여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마을 주변에 밥적골, 새터, 용머리, 안골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으나 도둑으로 피해가 심하여 폐허가 됐다. 하며 마을 이름을 한 때는 細木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마을 동쪽에 위치한 당촌을 합하여 시목이라 부른다.
마을 뒷산에는 부녀자들의 출입이 많았다고 하는 물마통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또 한 금녕김씨들이 조상의 제를 지내는 제실인 松泉齋가 마을 서편에 있다. 마을 서쪽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젊은 이들이 활쏘기를 연마했다는 사장등(뜸)이 있으며 마을 회관앞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서 그릇을 구웠다는 전설과 함께 이곳은 사기등(뜸)이라 부르고 있다. (鄕史의 (3), 潭陽 , 1990, 289~293쪽)
【대덕면 설화 4】
<금산의 암자>
바로 금산리 산의 오른쪽에 가면은 암자가 있어요, 암자. 지금 암자터가 있는데마, 절이라고 하는 것은 좀 부풀려서 하는 말이고, 암자라고 봐져, 그래 갖고 절 마당 이라고 그려, 우리 속된 말로. 거 절터를 절 마당, 그 지금도 활엽수가 있고 돌 같은 것도 정리가 되고 그런 유적이 있다는 것이 있고.
【대덕면 설화 5】
<서재필 박사가 마을에 묵어 간 이야기>
이 마을로 하자면은 서재필 박사, 독립신문을 창간하신 그 어른이 우리 마을에 오셔 가지고 한 석달 여남 계셨어, 여기. 어, 마 서재필 박사는 이 박사하고 일세대가 연령이 더 많은 양반이여, 백 서른 여덟이나 되신데마, 독립운동가로서 미국에 계셨다가 문민정부 때 김영삼씨가 그 유품을, 미국에 있는 유품을 전부 요렇게 우리나라로 요렇게 옮아오게 되었단 말이여. 그래서 그 보성군에다가 사당을 정부에서 지었어. 그래 서재필 박사가 와서 이 마을에 삼사 개월, 서너 달 계셨어. 그것이 마을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제라, 옛날로 하자면은 관찰사라고 안 그랬소, 관찰사가 오시드래도 한 부락을 방문하면은 기념하는 뜻에서 비를 하나 만들어서 세운다든지 아니면은 뭐, 뭐냐 좀 기록으로 후세에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할 때는 기록으로 남긴적이 있고, 또 기념수를 나무를 도지사가 오시래도 나무를 심어서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아까 서재필 박사, 정말 이 박사 보다도 한 세대 윗 어르신이지만 에, 정말 국가적인 인물인지라.어, 요새 뭐, 대통령, 노태우 김영삼 그런 부류가 아니고 선각자고 앞을 좀 보신 양반이고 거, 참 국제적인 흐름도 노대통령, 뭐 김영삼 대통령, 전두환씨 그런 부류와는 달리고 선견지명이 계셨단 말이여. 인자 그런 분이 이 마을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 마을에서는 굉장히 경하해서 손색이 없는 그런 어르신이여, 국중 인물이고, 마 그런 인물이라 하면은 우리 동양권에서는 서재필 박사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며, 마 마국같은 데는 거기가 계셨으니까 더 더욱 잘 알겠지만은, 마 그런 것이 마을에서 경하스런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대덕면 설화 6】
<금산리의 역사>
이 마을이 굉장히 어려운 마을이었어, 역사로는 사백 오십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그것도 옛날 어르신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은 없으니까 어느 마을이나 다 똑 같지만은, 공부할 만한 재력도 없었고, 백년 이백년 전에는 공부할 만한 집안이라 하면은 상당히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양반이라 말이여, 그런 것은 누가 공부를 하고 그런 사람은 없지만은 농경사회에서는 그야 말로 집을 나가드래도 가축을 하더라도 즉 말로, 가축을 하더라도 남의 집에 가서 농사 짓고 밥이나 얻어먹는 그런 일밖에 못한단 말이여, 공장도 없고, 어디가서 식당에 가서 예를 들어 접시를 저, 자기 생활비를 충당하나, 그런 방법이 없어요. 도망을 가도 남의 집에 가서 일하고, 농사 짓는 일, 협조하는 그런 일 밖에 못 해지라(중략)
옛날에는 자기 논이 다 아니여, 타군의 에, 고 말하자면 소작농을 이렇게 참 임대 받아가지고 농사지어 봤자 논 한 마지기에 나락 한 가마니 반내지 두가마니 밖에 못 먹었어라. 잘 먹는 한 마지기 이백 평에 나락 두 가마니에 먹었어요, 잘 먹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산에 가서 풀 야팍하니 뜯어서 많이 넌 사람이라야 두 가마니 먹고 보통 한 가마니 남짓 이백평에 그렇게 못 먹었어라. 옛날에 비료도 없고 산에 가서 침엽수, 활엽수에다가 뭐, 해다가 논에다가 넣어야만 인제 고른 소득을 올리지라.
그러면 그거 뭐 한 가마니 이상 곡식 줘야지, 부잣집 논, 다, 어떤 동내든지 마찬가지라. 자기 논 가진 사람이 거의, 거의가 없다시피 한 것이라. 혹시 자기 논을 좀 한마지기, 두마지기 가진 사람 외에는 그런 숫자는 극히 드물고 다 부잣덕, 부자들 소작을 이렇게 위임받어 가지고 짓고 그 놈 다 줘버리면 묵을 것이 없어, 또, 다 없어져버려. 가을해다가 곡식을 갖다 줘버리면 묵을 자기 묵을 것이 없는 것이여, 어떤 동내든지 거의 같지라. 윤택한 마을이라고 혹시 앞서간 동네, 좀 왜정 때라고 하더래도 이조말엽에 좀 벼슬이라도 하고 하는 집이는 그 후손들이 다 끄니도 먹고 살 수 있고 또 왜정 때 참 친일이라도 저 말하자면 옛날에는 저 지서라고 그랬는데 지금은 파출소, 그런데 그런 심부름이라도 해서 뭐 친일 행동을 한 사람은 뭣인가 여유가 있었어. (중략) 인자 거, 우리가 산업화가 된 지가 육십년대 초라고 안 보겠고, 박정희 대통령이마 육십년도에 거, 한강을 도강을 해가지고 그래서 거기서부터서 산업화의 기초를 닦은 것이지라. 근게 어렵다는 것은 어떤 마을이나 다 똑같소. 우리 마을은, 옛날에는 천석군, 만석군 그야말로 자기 토지가 얼마나 많으냐, 또 곡식 얼마나 받아들이냐, 거기에 말하자면 에, 대산 척도가, 바로 매타가 되었단 말이여. 가늠이 되었어. 농사짓는데 공장은 없으니까 농사가 몇 천 두락이냐, 몇 만 두락이냐 그거 가지고 어, 뭐 자기 지역에서는 농사를 천마지기, 만마지기 지을 수 있는 농경지가 없으니까 타 동내에다 모다 이렇게 논을 사놓고 거, 수여를 했단 말이여, 천석군 만석군하는 이유가 자기 고향에 천 석, 만 석을 싸 두란한 논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 다른 부락에 다른 군에 농토를 사가지고 거기서 인자 수도 받고, 뭐 곡수같은 것을 받아서 이렇게 인자 그런 세상이 되다 보니까 어렵단 말이여. 근게 우리마을이 내가 구전으로 사백 오십년이 되었다는 것도 추정하는거 아니여, 아니 저 구전으로 듣는 것도 없고. 인자 우리 선대는 크게는 못 배웠으니까. 구전으로 남길 힘도 없고 더더욱 기록으로 후손한테 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여. 자기가 모르니까 기록으로 남기다는 것은 어렵고 또 구전으로 들을 수도 없어. 에, 그래서 내가 사백 오십년, 내가 추정 한 것은 추정이 아니라 확실한 것은 내가 저, 윗집에 살았어. 이 마을에 제일 꼭대기. 에, 그래 갖고 동백나무가 있어. 그래서 동백나무가 양가집이 되었는데 한 쪽이 고목이 크게 되었어. 절단하게 되었단 말이여. 그래서 전대교수, 농대교수 분은 오셔가지고 연륜을 조사했어, 연륜. 그래 사백 오십년이 나왔어. 그래서 사백 오십년이란 역사가 흘렀다는 것은 아까 거, 동백나무에 의해서 내가 ‘사백 오십년 역사를 이 마을도 가지고 있구나.’ 그 위에 것은 내가 모르고, 인자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 【대덕면 실화 7】
<두더지 형국의 산>
이 앞산의 두더지. 두더지 표준말로 거, 두더지가 두더지 형국이란 말이여, 앞산이. 그래서 두더지가 이 마을을 자꾸 침식을 혀, 그래서 그 앞에다가 그 두더지를 막을라고 비석같은 것을 해서 지금도 사람 비석도 해서 해놨단 말이여, 이 앞에 가면은. 거 이, 앞산이 두더지 형국으로서 이렇게 마을을 침식헌다고 해서 고걸 막을라고 어, 부처님과 같은 사람형태의 어, 말하자면 석물을 이렇게 세워두고 아주 긴 창으로 두더지를 찌를라고 하는 그런 큰 돌도 세워 놨단 말이여. 옛날부터서 내려온 거란 말이여.【대덕면 설화 8】
<징 이야기>
이 마을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징이 있었어, 징이. 지금부터 칠팔년 전에 아흔 두 살에 작고하신 양반이 계셨는데 그 양반도 징 역사를 유래를 몰라요. 언제 구입했는데, 징 참말로 좋았어. 담양군의 명물이고 어, 마 어느 마을의 징이 좋다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이렇게 거, 상쇠놀이를 잘 했기 때문에 어느 마을의 징이 좋다는 것은 다 안단 말이여. 인자 그런 징이 있었다는 그런거, 어 역사는 몰라요, 한 번 울리면 ‘웅 웅 웅’ 한 번 때린 소리에 울림이 자꾸 파장이 되가지고 그런 일이 있었어.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윗 마을과 이 마을과 호청이 엇비슷했어, 호청수가. 아, 여기가 육이오 때까지 구십육 호까지 나간 적이 있었어. 지금 한사십 호밖에 안되지만, 윗 동네도 역시 똑같은 호청수가 살아있단 말이여. 지역이 한 이백 미터밖에 안되니까 한 마을이 수적으로 적으로 큰 마을에 있는 거란 말이여, 서로 시기하고,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 나하고 대등한 인물이 있으면은 역시 알력이 있는 것이여, 한 사람이 모질해버리고 한 사람이 잘 나버린은 따라가기 마련인데.
게서, 아까 거, 징도 설때나 정월 보름날 같은, 옛날에는 농악놀이가 만았으니까 저, 그늠 깨블라고 그런일 있었어. 놀고 그냥 징도 자기들이 갖다가 치다가 그냥 지붕으로 던벼버리고 여의찮아 가지고 금이 좀 갔단 말이여, 글더니 지금부터 한 십여년 전에 십이삼 년 전에 젊은 애들이 놀다가 갔단 말이여, 깨서 그것을 좀 상식이 있으면은 실수해서 깼다하더래도 정말 그 보존 의욕을 갖고 어, 잔 조각이지만은 다 모았을 것인데 그전에는 식견이 없고 젊은 애들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 거 없어졌단 말이여, 그래 그것이 정말 왜정 때 놋그릇, 뇟쇠의 그릇 공출 했었어. 어 말하자면 폭탄을 제조할라고, 일본 놈들이,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그걸 공출에 안낼라고 마을에서는 다른 징을 장에서 보통 만든 징을 사다가 고놈으로 공출하고 그렇게 보존해왔어. 우리 선대들은, 무식했지만은. 그래, 그렇게 보존하고, 육이오때 어, 말하자면 거, 입산자 산에 가서 이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좌우가 갈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낮에는 대한민국 정치를 받고 밤에는 산에 입산하는 사람들이 밤에는 와서 그야말로 간섭을 하고 그렇게 됐단 말이여. 근게 육이오때도 고걸 보존할려고 우리 선대들은 무식했고, 그러지만은 에, 그 유물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장에서 징 사다가 내놓고 머시기 하고 두 개를 내놨어. 그 징을 보존할라고, 하 그런데 요새 젊은 애들이 그걸 이렇게 파손해 가지고 내가 그 현실을 알았더라면 참 잔 조각 이라든지 큰 조각도 다 보존해서 마 그래도 나중에는 고고학자들한테 물어보면 그 연대도 정확히 짚을 수가 있고 요것이 국보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냐, 도적인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판단 할 거란 말이여, 고고학자가, 그런데 하고 무식하니까 버렸단 말이여. 하고서 나중에 마을에서 그 징을 없애버린 대신에 아깐거, 그런데 젊은 애들이 놀다가 없애버린, 근게 이렇게 크게 쪼개진 조각도 있을거 아니여. 그런데 버려버린 모양이라. 그렇고 인자 마을에서 추궁하니까 장에서 요새 뭐 돈 십만원이나 하고 칠팔만원 주면 사오만원 주면 산가 어찐가 나는 모르겠소만은 고걸 사다가 대치를 했어.
참 내가 가슴 아프게 생각을 하제. 에 내가 전에는 몰랐었는데 그거 나중에 듣고 ‘정말 참 모르는 그런 일도 있구나.’ 인자 젊은애들 고걸 그대로 보존할 수도 없고 얻다 버린지도 모르고, 그런 아타까움이 내 속으론 굉장히,그것이 국보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지 전라남도의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지도 그 고고학자한테 물어 보면 감정해보면 다 나오는 것인데 그 버렸다고 한단 말이여. 나중에 그래서 내가 안타깝게 생각을 하제.
【대덕면 설화 9】
조 사 지
담양군 대덕면 금산리 무월마을
조 사 일
2000년 6월 정 리 이 해 섭
<논실(論谷) 마을>
撨月마을 동편을 장등(長嶝)에 논실(論谷)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어느때인가 폐허되고, 그곳을 지금도 논실들이라 부른다. 마을 안 「시리미들」에서 한때 옹기 그릇을 구워 점등이라고도 불렀으며, 옹점리란 마을 이름은 이때 붙여진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대덕면 설화 10】
<사창(社倉) 마을>
社倉 마을 뒷산 매봉을 통하여, 무월리(撫月里)로 넘어가는 곳을 불당곡(佛堂谷)이라 하고, 시목(杮木)으로 넘어가는 곳을 큰골재라 부르며, 산(山) 안에 함박쟁이, 여시방골, 간지대, 몰랭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으나 연유된 전설은 알 길이 없다.
【대덕면 설화 11】
<등갈(藤葛) 마을>
등갈(藤葛) 마을 북쪽으로 매봉(挴峰)을 등에 업고, 남서쪽으로 득인산(得人山)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개척 당시 수백 년 묵은 칡덩굴이 휘덮고 있어 등갈이라 이름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대덕면 설화 12】
<대조동(大鳥洞) 마을>
대조동(大鳥洞) 마을의 지세가 천학하전(天鶴下田)의 명당터로 천년을 더 산다는 학이 하늘에서 내려온 터라 하여, 대조동(大鳥洞) 또는 한새울이라 불렀으며, 설매 또는 한매라고도 하였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이 많은 마을 터로 서쪽 진등 노서하전(老鼠下田) 명당터에 면사무소가 세워졌으며, 부근 매화낙지(梅花落地) 명당터엔 만덕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대덕면 설화 13】
<신갈(新葛) 마을>
신갈(新葛) 마을은 마을이 생기기 전까지는 인근 득인산 동편 기슭에 잇닿은 야산이었으며, 인근 사람들은 옛부터 이곳에 물팍등이라는 명당터가 있다고 믿어왔고, 그리하여 우괴동 혹은 물팍쟁이라고도 부르는 곳이었다.서기 1979년 취락구조 개선 사업으로 마을이 생겼으며 현 서울특별시장인 고건 도지사가 위치를 결정하였고 장형태 도지사가 건축을 일일이 지도하였다. 서기 1980년 마을 준공식도 못하고(5·18민주화운동) 입주하였다. 당시 군수는 신계우씨다.
【대덕면 설화 14】
<내문(內文) 마을> 내문(內文) 마을은 오랜 옛날 만덕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큰 사찰이 있었는데 절에 빈대가 많아 살지 못하고 현 마을 동남 인근 산곡으로 절을 옮겨 옥천동(玉泉洞)이라 하였는데, 그 후 옥천사가 계속 번창하여 승려가 수백명에 이르고 수도하는 선비들이 몰려들어 사찰부근에 기거하니 곧 이 마을을 문학동이라 불렀으며, 마을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와 연유하여 지금의 외문 마을을 동자 마을이라고 불렀다.
【대덕면 설화 15】
<외문(外文) 마을>
고래물은 고려말기에 마을이 생겨 한때 번성하다가 폐허되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도 이곳의 흙을 헤치면 기왓장이나 구들장이 나오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고려 때 마을이라고 하여 고려 마을로 부르다가 점차 고려말, 고려물로 변한 것이 물을 많이 먹는다 하여 고래물이라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동사골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전(蜓 :뱀의 일종)이 산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초분골은 죽은 사람이 많이 묻는 곳이라 하여 불러진 이름이다.
마을 앞 고속도로 건너에 옛날 창평 옥과 현감들이 지나다 잠시 쉬어갔다는 곳을 원터골 또는 원기동이라 부르며, 10여호의 마을이 있었으나 1979년 폐허되었다.
서기 1977년 정부시책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고서면 상덕마을과 함께 착공하여 서기 1978년 완공하여 옛날 집을 헐어 버리고 새롭게 집을 배치하여 단장하였다.
【대덕면 설화 16】
<차동(釵洞) 마을>
차동(釵洞) 마을의 형세가 하늘에서 금비녀가 날아와 떨어진 명당(金釵落地)이라 하여 비차동(飛釵洞) 또는(釵洞)이라 하였다 한다.
옛부터 명문가(名門家)에서 매봉산에 금차낙지(金釵落地) 명당을 찾아 선조들을 모시고 제실(祭室)을 지으니 마을 주변에 홍양이씨, 김해김씨 등의 제실이 12개서나 있다. 또 한 절(寺)도 많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으며, 부근의 지명이 대절, 작은절, 장절, 새절, 화양절 등으로 불러 내려오고 있다.
【대덕면 설화 17】
<가흥(佳興) 마을>
처음에는 감골이라고 불렀으나, 주변 산세가 아름답고 땅(山佳秀麗之處)이라 하여 佳興洞이라 하였다.총계산(叢溪山) 남쪽 기슭아래(南麓)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남쪽으로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이 옥녀탄금(玉女彈琴) 명당이며, 산 건너를 안골, 서쪽을 진방이라 부르며, 대소산 한실들에 이어진 마을 앞들을 성교평(聖敎坪) 혹은 홈드리들이라고 부른다.
【대덕면 설화 18】
조 사 지
담양군 담양읍 지침리
조 사 일
2000년 6월
제 보 자
이 해 섭 ※대덕면 성곡리 성곡마을 (관련설화=대덕면 설화 19,23)
조선조 때는 창평현의 덕면지역으로 담양군과 창평군이 1914년 통합에 딸 성신리와 요곡을 병합하여 聲谷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곡마을은 1520년경 咸陽 朴씨와 昌寧 曺씨 일가가 입촌하여 정착하였으며 당시 마을 남쪽에 위치한 옥천동의 옥천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의 덕을 입어 마을이 시시로 번창한다 하여 성신리로 불러오다가 1910년 성곡리로 개칭하였으며 일명 새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전해져 오는 전설로는 조선조 말엽 전북 순창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관군들이 숨어 있다가 수십기의 마병을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게 했다는 이야기가 물궁구리라(무정면 경계) 터와 함께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고속도로 건너 산에 베틀굴이라 부르는 동굴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부근 여러 마을 사람들이 이 굴속에 피신하여 베를 짜며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마을 한가운데 명당터로 불리우는 동산이 있고 그 앞에 세 그루의 당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 있는데 아주 옛날에는 이 당산나무 신령이 마을 밖으로 외출 할 때는 마을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이를 알리며 그 동안에 일어날 재앙들을 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떠났다고 하여 당산제를 엄히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옛 지명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매봉 서쪽의 골짜기가 소반처럼 생겼다 하여 소반성국이라 부르고 있고 그 골짜깅,l 서북쪽의 산을 옥산까끔이라 부른다. 요골, 우껭이들, 자래봉, 장구밭, 활맷등 많은 지명이 지금까지 불리어져 오고 있다. ( 鄕史의 (3), 潭陽 , 1990, 294~296쪽)
조 사 지
담양군 대덕면 성곡리
조 사 일
1999년 1월 26일
제 보 자 김 갑 수(남, 80세)
<새말>
성곡리여, 그 전에는 새마을, 새말이라 했는데 새말인데 인자 신식으로 왜정 때부터 지키라 한게 성곡리라 그랬제. 대덕면 성곡리, 담양군 대덕면 성곡리.
【대덕면 설화 19】
<창터샘>
그 전에 여기가 여, 소재지, 주재지소가 여기에 있고 연길이 여기가 있었내, 그래서 내, 저기 새암보고 창터 샘이라고 있었는데(중략) 창터, 창터 샘이라고 그거, 새암으로서 좋거든, 바가치 새임으로 인자 거시기도 알지만.(조사자 : 그 우물은 오래 됐어요?)
아, 옛날부터, 바가치 샘이여. 그래 인자 모두 질로 거시기 해갖고 상수도 연결해 갖고 여러 집이 묵니라고 물이 다 지피들 들어 대갖고 있는데 에 거기는 열어놓고 바가치 샘이여, 나무로 구시 짜갖고. 물은 좋제. 창터, 여기가 창터라고
【대덕면 설화 20】
<선바들터>
여, 거기 올라가면 선바들터가 거기가 면실턴디,
(조사자 : 묘지요?)
면실, 그런데 인자는 저 재 너머에 학교 있는 -데로 고리 다 넘어 가버렸지, 인자. 해방 후로, 일제 때 해방 후로. 아, 대동아 전쟁 해방, 아 올해 오십, 오십 삼년 짼가, 오십 사년 짼가, 올해년 해방인게, 해방이.
(조사자 : 옛날에 마을이 컸겠내요?)
갑나게 컸제. 인자 다 뜯어 버리고 빈터가 있고 근게 글제, 저 쪽 합선리 떨어져 버리고 저 여곡이란데 하고 삼천리 들어 간 저가 일반이고 여기가 큰 마을이고 그런데 마을이 백 가구가 넘었는데. 인자는 저기, 시방 젊은 사람들 다 객지로 떠나고......., 자리 한 오십은 되지. 우리 마을에서 백여호가 넘었어. (중략)
아, 옛날에 여기 진사도 살고 도사도 살고 그랬다네. (◎◎) 이씨들 문중에서 모듬, 시방 자손들이 젊은 사람들이 다 서울로 가서 살어. 전주 이씨들, 그 전에 동네 꽉 짜고 있을 때는 박씨들도 많고 여러 성받으여. 백여호가 넘었은게 그라 안하겠는가? 백호라 그러면 대촌이제. 아 그러고서 한 집에서 삼대가 같이 살고 시방 삼대가 같이 사는 사람은 드물제. (◎◎)
오다가 소재지 있는가, 거기 내 알기로는 그 전에는 지서가 거 바로 신작로 가에 하나 있고 면실은 여기가 있었고, 해방 후에 모도 거기 면실은 해방되기 전에 옮기고 지서는 인자 해방 후에 거리, 시방이 지서라고 해. 그때는 주재소라 그랬네. 주재소.【대덕면 설화 21】
<죽물이 사라진 이유>
저기 저, 비어 버려서 그러지만 인자는 죽물이 담양장이 폭석 (◎◎) 죽물장에서 많이 쟁여 놔블때는 대를 하주라는 대로 죽물 (◎◎) 그러니까 대가 댓금이 없으니까 누가 대사러 들어 온 사람이 없어. 해변으로 많이 가고 그랬는데 해변에서도 인자는 나이롱 안, 써블던가? 옛날에 거, 해우깍조 쪼갤라면 여기서 대가 왕창해서 몇차씩 내려 갔대지 여, 여. 뺑 둘러 대밭이여. 아, 집자리도 대밭안에 들어가면 요런놈이 있다, 야가 집자리가 있거든. 근게 그 때는 이 마을에서도 맨 그런 대일들을 했지. 봄 돌아오면 물박치고 인자 시한(겨울) 돌아오면 향개바구리 한 사람도 있고 밥바구리 한사람도 있고, 아주 재비져는 말석한 사람은 말석도 하고 그랬는데 시방 죽물 해갖고는 밥을 못먹어. 근게 안 해블거든.
【대덕면 설화 22】
<세 그루의 당산나무>
옛날에 거, 당산나무 여러 주 되었네, 내가 알기로. 그 전에 논이여, 거기가 지금에서 터가. 시방 거, 때실도 전부 논이고 그래서 인자 지할름 닥전 끝에 요 위에를 밀어 버리고 싹 취락고지로 해가지고 뜯어 내버린 통에 모도 집들을 안고치고 있다가 지적들이 몰아 버렸지. 그래갖고 그 때 인자 모두 (◎◎) 짓고 그 때는 정재나무가 여러 해 되었놈이 (◎◎) 그래서 저, 시 나무냐, 시 나무 살았구마. 몬야는 많았네. (◎◎) 거 산림산디 있고, 몬야는 거기가 선밭이, 넘ㄹㅂ직허니 멀어, 청년들 놀세는 볼도 차고 팔월 추석 돌오면 씨름도 하고 그렇게 야간 널랐지. 그 대는 사람들이 꽉 짜고 살혀. 사람도 많았고.
【대덕면 설화 23】
<용머리재> 용이 큰 비우를 물고 가다가 놓아 버렸다고 해서 용머리제다네, 전설에. 거기를 나만해서 쪼그마니 동네가 크고 그러니까. 금녕 김씨들이 많이 산디. 홍주 송씨도 살고 여럿 말이 살제, 나씨도 살고. 상촌인제 동네가 크고, 들도 여기보다 훨씬 크제.
시방 요리 들어간 길 없든가. 요렇게 쭉 올라가면 저 위에 가서 석산이 있어, 저기가 금산이시.
【대덕면 설화 24】
<성곡 마을의 산세>
저가 저, 만덕산이고, 저 큰 산이, 그러니까 여기서 듣기는 만덕산이고 광주 무등산이 만덕산 아비다 근다네. 그리고 요 욱으로 가면 석산이 있어. 석산이 있는데 석산이 또 만덕산이 석산 아버지고 글고 저 아래가 (◎◎) 화순가서 희얼산이라고 또 있고. 희열산. 산 볼지 안 사람들은 다 어서 내려온 것, 환히들 얘기를 하든마, 지관들 얘기를 들어보면, 희얼산 즐기는 또 지리산 지리산 즐기란데. 지리산서 뻗쳐 나온 길. (희열산은 백아산을 말함)
【대덕산 설화 25】
<보리마당>
아, 여기 만덕산 저 멀리 가면 보리마당, 보리마당도 있고 이름이 보리마당. 그 전에는 들판에서 보리를 해서 밥보리 같아 갖고 거 , 보리마당에다 특현감 있고 그랬다 글래. 근게 보리마당, 넓직혀, 올라가면. 간데 저, 일본 때는 저 만덕산 몰매에다 꼬치 짖고 저녁에는 야경도 하고 그랬네, 자네들, 안 겪어봐서 육이를 안 겪어봐서 모를 것이네. 우리는 거가지 가서 야경하고 그랬어. 제재소가 수 차례 빵 돌려서 막고, 그 때 입산한 사람들 보고 반란군이라 안 했는가. (중략) 우리 여기서 저녁이면 그 때 접해가면 다 죽었어. 근게 야경을 하러 가고 야경을, 일이 되껐인가, 모두 피신하느라 그 대는 뭐, 들이 묵어가도 모르고 살아어. 저녁 때 가면 어디로 피신허느라고. 반란군들 한테 잡혀가면 자기말 안 들으면 죽애버린게. 【대덕면 설화 26】
<도깨비불>
아, 우리 할 때만 해도 저녁밥 먹고 칙칙하면 거기서 써갖고 저 위에가 문학리시, 고리 가는데 도깨비불이 ‘뻔득뻔득뻔득’허니, 아 그래 쫓아가보면 비찌락 몽둥이나 있거나 도리깨시 같은 거 고런 것이나 있거나 그려. 요즘은 전시가 답답해 버린게로 도깨비들 저기 모두 이북으로 밀려 가버렸는가 어쩐가 행이 그 뒤로 안 맥혀. 아, 그전에 여기 금산리에서 호랭이도 살고 별 짐승 다 다녔는데 시방은 없어.
【대덕면 설화 27】<산으로 둘러 쌓인 마을>요 위에로 올라가면 시방 금산리가 있는데 시봉우리 가서 여기보다 동네가 더 크거든, 상촌리가. 거기는 용록재라고 용록재도 있고 저리 여 신작로 (◎◎) 요리, 근게 그 넘어 간데가 모두 재제. 그 질을 사람이 겁나게 잘라 버린거제. 거기서 굴 뚫기 전에는 서만이 들어 간데가 다리, 다리가 다 있었어. 인자 굴 뚫어서 신작로같이 뭐야, 고속도로가 요리, 저기 포장 있는데로 고속도로 왔었거든. 그런데 새로 남스로 재정이 저 욱으로 해갖고 저 욱으로 시방이 작어졌제. 그 때 그 굴을 뚫고는 그 다리를 없애 버리고 인자 흙으로 거기해 가지고 인자, (◎◎) 북면 화순으로 들어간데 화순 온수장으로.(◎◎)
그전에 마을을 부르기를 무월리, 장촌, 시목리 그렇게 불렀어. 그런데 인자 어느 동네든지 황촌되면 첫 동네가 일대 아닌가, 시방 상구댕이라고 그러게 부른디 그렇게 무월리, 무월리는 홍주 송씨들이 많이 살고 송씨들 터라고 그랬제, 거기가 들어가면 가운데 조그만 있었는데 거기서 장촌이라고 그랬는데 최진사가 거기서 났고, 인자 나도 어른들 말 들어서 그러네, 그 안에 큰 디는 인자, 금녕 김씨들이, 금녕 김씨들 터여. 많이 거기는. 큰데 여기 다 훨씬 크네. 피난터제, 피난터여.
(조사자 : 피난터예요?)
아, 산으로 뺑 둘러 있으니까 저리 오나 저리오나 동네가 안 보인게 사람이 산제가 모르제. 요렇게 저, 한 사람들이 알제. 근게 차도 사람 많은 데로 댕긴게 여기도 고리 길을 냈어. 예전엔 막 걸어 댕겼어, 통.
【대덕면 설화 28】
조 사 지
담양군 대덕면 성곡리 성곡마을
조 사 일
2000년 6월
정 리
이 해 섭
※대덕면 용대리 (관련설화=대덕면 설화 29,30,31,32,33,34,35)
<용대마을>
조선조 때 德面으로 가재가많아 가재굴, 가재등 또는 가작동이라 했으나 화재가 자주 발생해 당시 담양부사에게 그 사유를 고하니 부사가 직접 찾아와서 지세를 살피고 비룡 형이라 하여 불을 끄는데는 용이 물을 내려야 한다는 뜻으로 용대라 하여야 한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용대리로 바뀌게 됐다.
용대마을은 고려 말엽 柗에서 남하하여 은둔지를 찾던 성명미상의 王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中宗때 南平 文씨와 全州 李씨가 정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이 찾아 들었다고 전한다.
또 마을에는 화순 북면간 도로변에 위치한 석교가 있는데 이 다리는 조선조 때 효행이 지극한 전주이씨 문중의 장사가 부모님의 나들이에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해 혼자 바위를 들어다 만들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 이씨보는 문중에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있었는데 노부가 엄동설한에 잉어 먹기를 원하므로 얼어붙은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고기 잡기를 수일 하므로 그의 효성에 감동한 잉어가 스스로 뭍으로 나와 소원을 풀어줬다는 효행에 얽힌 전설을 안고 있기도 하다. 한편, 마을 앞산을 일명 火山이라고 부르는데 화산 상봉이 마을에서 보이면 불이 자주 난다고 하여 산봉우리에 숲이 우거지게 하여 이를 막았으며 지금까지도 나무를 베지 않고 그대로 보호해 오고 있다.( 鄕史의 (3), 潭陽 , 1990, 305~307쪽)
【대덕면 설화 29】
조 사 지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1구
조 사 일
1999년 2월 5일
제 보 자
문 만 기(남, 82세)
<두 장사가 놓은 돌다리>
돌다리 있잖혀, 돌다리 그것이 지금 놓은 제가 한 사백 팔십년 돼, 논제가, 그러고 이 마을을 터 잡으러 들오신 양반이 나로 선조가 들어셨어. 그러면 대수가 나로서는 12대고 밑에 손들까지 16대가 나왔어. 지금 문이 양성, 전주 문씨 월산군파 손이 또 다음에 들어오고 그래갖고 양씨, 말하자면 문이양성이 이 터를 잡었고 그 돌다리를 보첩에 올라있도 안해, 안하고 거기도 거, 문장사하고 이장사하고 갖다놨다, 그러다가 그래서 그것이 우리 자손이나 마을에 산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겁나게 참, 이따 나감서 보시오, 다리가 요렇게 돌다리하나 신작로 구다리, 또신, 큰 길냄서 해서 다리가 나란히 세 개가 있어. 근게 옛날에는 우리 부락들이 건너 댕에는데 그래 중년에 큰 무져서 요람 나버려갔고 부러져 버렸어. (중략) ‘우리 부락의 역사에 맞는 다린디 그 다리가 이렇게 부러져 버렸으니 좀 하나 놔 주시오.’ 했더니 저 전라북도 익산 산에를 가서 그 독을 찾아다가 여까지 갖다 인자 포크레인으로 놓고 나니 오백만원이 들었다 그려.
【대덕면 설화 30】
<남평 문씨 시조 탄생 설화>
우리 남평 문씨가 만평 여, 알지 남평, 고 안에 장현사라고 거기가서 시조 한압씨(할아버지) 그 사당이 계셔. 산소는 거 저 위에 산에가 계시지만, 그러면 그 시조 한압씨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셨냐 하면 음, 옛말에 거, 나주 원님, 지금 나주 군수, 말하자면 옛날에는 남평도 군잉. 남평 군수 지금으로 말하면, 그 어른이 있고 지금으로 말하면 면장이하 옛날에는 거, 부서 이름이 다른게 내가 정확하니 모르지만은 원님이하 있으니까로 고, 부서 이름이 다른게 내가 정확하니 모르지만은 원님이하 있으니까 고, 지금 제각있는 제가 드들강이라고 있어. 자그마하게, 그런데 그 드들강에서 뭔 안개가 자욱해가지고 떠나들 안해, 하루내, 구름뱅이 맨기로 있어 갖고, 그러니까 쉰 말로 면장같은 사람이 그런 보고를 받고 가서 보니까 인자 그러게 되어 있으니까 군수한테다가 원님한테다가 보고를 했어. 해가지고 뭣인가 그 원님이 나와서보니까 그래갖고 있으니까 그 조그만 배를 타고 들어가 보니까 독 서함이 떠 있어. 돌로 된 이런 함이 떠 있으니까로 꺼내다가 보니까 인자 이러이러한 말하자면 원님이 함을 열으라는, 그 개함하라고 써져 있다 그 말이여, 그래 열어보니까 옥동자가 들어 있다 그말이여. 그래 거 옥동자 그 분이 벼슬이름이 무성공이여. 인제 장성한 어른이 되시고 재주가 있고 남의 집 시조될 한압씨 있다면 인자 여러 가지로 투철하시제. 그래서 지금도 그 우리가 볼 때에는 그것이 석암에 해당이 되들 안해. 요렇게 싸서 집을 지어서 지금 딱 있어. 중년에 집이 찌그러져 버려갔고 그 일가 하나가 저 미국에 갖고 부자로 산디 그 사람한테 얘기를 해갖고 그 사람이 나와서 한 백년 전에 새로 인자 공굴로 말하자면 독을 싸서 지금 집을 지어놨어. 옛날에 한 비하고 인자 해갖고, 지금도 그래갖고 있는데 그 양반이 댓수로 보통 평균 삼십년을 일대를 잡아. 사람 서른 살을 일대로, 팔십 살도 먹고 백 살도 먹고 그러지만은 서른 살도 못 먹고 죽은 사람도 있고 그러지만은 옛날에 이대, 삼대, 오대 시는 것을 삼십년 경우를 잡아. 그런데 그 양반이 지금 한 여, 보첩거, 거시기 거, 끼워놨든마는, 대수가 얼마나 나오냐면은 지금 내 밑에 손들까지 해서 칠십대 이상이 나왔어. 칠십대 이상, 그러면은 평균 삼십년을 잡드래도 삼칠의 이십 일, 이천 한 백년 전 양반이라고 인자 거시기를 해야지. 그러고 또 후손으로 나로서 이십일대 선조디 익자점, 문익점이라고 보통 공부를 허재. 명씨(목화씨) 가지고 나와서 중국가서, 그 어른이 나로서는 일십 일대 한압씨(할아버지)디 지금 경상북도 산청군가서 계셔, 산소가.
【대덕면 설화 31】
<용대의 지명 변천>
애초에는 거, 멋이라고 불렀다던데 그거 내가 잊어버리고 잘 모르겠고 두 번째 이름으로 가작골이라고 그래써. 그거 왜 그래서 가작골이냐? 동네가 불이 났다, 저 건네 산이 저 대색에가 빛 갖고 화산이라고 해서 비쳐 갖고 뭣인가 불이 났다, 근게 그 묘목을 저,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를 다 키워가지고 항상 거기를 방어, 잘 안뵈게 끄름 숲을 (◎◎) 용 용자, 집대자, 용집이라고 용이 비를 준게 그러니까 그 그래서 가작골이라는 마을은 요, 안 꼴착들어가면 집 한 집 백에 없어져, 진작 없어져 버렸다가 한 이십 호 살다가 없어져 버렸다가 목장한 사람이 하나가서 인자 살고 그래 갖고는 뭣인가 지금 여, 동네가 백 이십 호가 되었던 마을인데 지금은 삼 십호 백에 안돼. 다 나가버리고 임곡 난리에 새막 하나 없이 다 타져버린 마을이여. 그래갖고 한 삼사년 못되게 있다가 들어와서 그, 저 중대그르 짓고 산 사람, 좋게 짓고 산 사람, 또 힘이 있고 한 사람은 그렇게 하고 또 뭣인가 용대라고 이름을 진 뒤로는 불이 과히 안나.
그래도 용대라고 부른 뒤에도 백이십 호 될 당시 약 육십 호 가까이가 두어 시간 동안에 타버렸어. 한 집이서 대낮에 불 나갖고 바람이 내려 불어 버리니까 그냥 저, 지금 여기 위에 한, 두집, 세집 빼고서 고욱으로 전부다 타버렸어. 그래 마을 가운데 그때 지금 당산나무라고 거, 천제모시고 정월 첫 닷새날이면 제사 그 마을서 모셔댔는데 그 나무가 한참 타갖고 지금도 여, 껍데기 요짝은 불 안 받은데는 살고 불 받은데는 요렇고 지금 병골로 나무가 되어갖고 있고 그려.
그 뒤에도 큰 대화가 한번 왜정 때 일본시대 때 게, 큰불 나서 한 번 있었고요 마을은 불이 참 무서웁게 여기고 모두 조십들하고 살고 있고 그려.
【대덕면 설화 32】
<효자 이야기>
문이양성, 이씨 전주 이씨가 파가 여러 판디 여기 지금 웃마을에 살고 있는, 저 밑에 마을도 한 두집 살고 한데 거기는 여기 사람보다 큰집이고 월산군파고 용대는 지금 두 집밖에 없어, 다 나가버리고 우리보다 늘어서 거기는 목포니 무안이니 서울이니 사방가서 한 이백 호 가까이 그 손이 살고 있는데 월산군파고 그래. 그 지금 손으로 해서 효자공이 그 양반이 내가 자세히 모르겠어. 몇 대 손인가를 놈의 집 내력이라.......
그래 효자가 어째서 났냐하면 여기서 저 물내려간 한 백미터 다 못, 한 칠팔십 미터 내려가면 떠나려가서 보 이름이 이씨보라고 지금은 보통 부른데 옛날에는 이씨보라 그랬어. 그거 왜 그랬냐? 지금 물이 말 그대로 효자공, 그양반이 그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든가 부모가 아픈 놈의 집 내력이라 어머니가 아팠었는가 아버지가 아팠었는가 몰라도 늙어서 골골하면서 거, 겨울에 어름이 이렇게 딱 얼어버린 처지에 천어를 물고기를 원혀. 그러니까 ‘어디가서 뭐 어덯게 잡아야 하나?’ 이런 걱정을 하는 찰나에 그냥 그 옛날에는 새미도 없고 나무미를 들쳐 매고 걷어올리고 그냥 또랑을 헤매서 거기가서 물에 젤로 어느때까지 한질이 되었어 물이, 지금은 인자 큰물이 자꾸 져갖고 또랑이 돌아가버리고 물이 요만치나백이 안보이지만은 거 보여서 얼음을 두드려 깬게 잉어가 올라왔어. 그래 그 놈을 갖다 해서 했어.
그래 말하자면 그, 부모한테 효도가 그렇게 크다는 거, 그렇게 해갖고 거, 효자가 태어났는데 손이 없이 지금 현 이장이 집이 있는가면 원래 이장 자기 종조 할배, 자기 할아버지 형제간이 사형제 였었는데 끝에 종조가 고리 입대를 해갖고 그 입대한 사람 아들이 자기 아부지 재산을 전부 갖고 있다가 없어져 버리고는 광주 나가서 근근히 살다가 어떻게 알미늄을 일을 해갖고 인자 조그마한 회사라 글까 이런 것을 맹글어 놓고 사무소, 돈을 좀 번게 선산일을 많이 헌 그 사람도 효자여, 죽었어도, 내가 취급하기로는 효자여. 왜냐? 여기 이씨들이 우리 중년에 거, 문중논이 한 백마지기가 넘게 있어도 이씨들은 논니 한 마지기도 없었어. 그러니까 저, 선산에 석물 한 개도 못해다 놨는데 그 사람이 들어서 저도 보태도 저, 사방 모도 일가들 처신해 갖고 여기서 나가서 잘된 사람들 돈 빼다가 논도 현재 열 세마지기가 살져 있고 그사람 힘이여, 그 효자비 세운 사람, 능력으로 그렇게 뭣인가 또 선산에 석물도 많이 하고 비도 갖다 놓고 또 재일교포 이런 사람들 재벌가가 있어 갖고 광주서 요리 들어서 있지매. 그러면 저 웃마을 질 내려자면 웃편으로 비 하나 안 섰더라고, 조합편에는, 조금 더 내려와 빈 집 하나 있는 조합편 거기는 잉, 월편군 일자면 여기 터 잡으로 들온 사람들, 큰 집 자손들이 한 삼년 된 년에 신도비를 세웠고.......
【대덕면 설화 33】
<효자 열이 열녀 하나를 못 따라 간다>
이 아래 내려가면 면은 대덕면이라도 운산이라고 있어. 거기서 하씨가 몇이 산디 거기서 로신 할머니, 그러니까 참 옛말에 ‘효자 열이 열녀 하나를 못 따란 간다.’ 그런 말이 전해 나와. 그거 왜 그러냐 하면 열녀란 것이 뻘로 된 것이 아닌 한 이십대에서 과부가 되면 시집 안가고 절개를 지키고 살면 그게 열녀여. 그런데 당초에 시집을 안가고 처녀로 그대로 생활한 사람은 거, 많이 거, 나쁜 맘이 안 들어가지만은 결혼을 해서 남편이, 사람이 약간해서 드물어. 시집가고 거 맘이 시집 안가고 살수가 없는 얼마, 다만 일년이고 삼년이고 살다 남편이 죽은 데는 절개를 지키고 산것이여. 그래서 그런 열녀가 그렇게 중대한 것이라고 해갖고 효자도 중하지만은 ‘효자 열이 열녀 하나를 못 당한다.’ 거 요렇게 모두 공부한 사람들이 거 지금 모두 신학을 배우고 있으니까 그러지 고학을 읽은 인자 학자들한테 물은다면 그런 거시기가 다 있고 그래.
【대덕면 설화 34】
<토반 성씨이야기>
여기가 담양군, 저 앞산 너머가 곡성군, 여기서 한 4킬로 내려가며 화순군, 화순북면, 근게 뭣인가 우리 담양은 토반이 나가(羅氏)하고 유씨하고 송씨가 토반이고, 세가지, 삼성받이가 또 이 아래 화순을 내려가면 정, 조, 하, 동복, 옛날에는 환수도 동복군이었어. 그래 갖고 정씨, 조씨, 하씨 그러면 조씨는 된 조자 조씨, 나라 조자가 아니고 또 곤배 정자 그렇게 해서 삼성받이가 그 골 토반이고 여 옥과는 심, 허, 김, 삼성받이가 토반이고 또 곡성하고 남원하고 붙어있지만은 남원은 인자 전라북도제, 글지만 남원은 (◎◎)라고 저, 삼성받이가 토반 양반이여. 에, 저 장성이네, 장성은 전라남도고, 고, 진, 김 그렇게 있어. 장성은 삼성받이가 또 토반이고.........
【대덕면 설화 35】
<당산제>
※제보자의 이야기 동중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부분부분 보충설명을 하였다.
당산제를 지금 우리는 역사를 몰라, 수 백년 전부터서 모셔 나오니까 모시다가 요 근처 마을 당산제 안 모신 마을 쐬았어. 그런데 ‘우리 마을은 그래서는 안된다.’ 해갖고 그전에는 음력 설 딱 쇠고 초이튿날 날을 개려 갖고 좋은 날은 이렇게 뫼셨는데 인자 요 모도 여, 그리 단문한 사람들 모도 있고 근게 날 개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인자 ‘날을 정해서 모시자.’ 그래갖고 음력으로 초 닷새날 모신데 그전에 우리 마을 당산이 백해 엄중해어.
뭐 도둑놈이 가마니를 나락 섬이로 그렇게 짊어지고 가다가 못가고 거기서 섰었다고 그런 말, 노인들 말 들은게 그때...... 거, 당산마당으로 뭣을 돌라갖고 지내다가는 주저 앉혀 놔, 잡아서 그렇게 엄중했어, 당산이.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엄중하진 안해도 지금도 정신 차려서 깨끗이 잘 모셔야 그해 부락이 평안하니 좋제. 만약 뭐를 좀 부정적인 잘못 모신 거시기가 있으면 그냥 몹쓸 병도 들어와서 야단치고 그러니까 아주 그날은 마을 전체가 여, 돼아지고기고 소고기고 이, 어물같은 거, 조구같은 거 일체를 이리 안 놔. 딱 김치에만 그날은 밥을 먹는 날이여.
지금도 전체가 그렇게 마을이 조심을 혀. 그렇게 엄중헌 당산이여.
그 날 비린 것을 멸치라도 한 마리 먹으면 그냥........
이렇게 붓어버려. 어쩌다 깜박하고 거시기 하면은 입에 쪼까 댓다 하면은 입이 그냥 요렇고 붓어버려.
그냥 이빨이 헐어 버려, 안에. 그날 당산이 그냥 근게 시방까지도 게린다면 게리지.
작년에도 저, 면에서 뭔 음력 설 막 새고 거 당산제 날이여, 그날이, 그런데 회의를 하고는 그때 회의한 사람들 저녁 겸 저 한 네시 넘은 경에 밥을 준다고 묵고 인자 그래 인자 우리 마을에서 서인가 너인가 갔었는데,
“거기가면 맨 위 고기반찬 있으니까 우리 밥 묵어선 안 되어.”
“대체 그러요. 모르고 가서 밥 먹을 뻔 했어.”
그러고는 그냥 아무것도 맛 안보고 그냥 차 타고 들어와 버렸구만. 근게 고렇게 조심을 해서 뭣인가 동시 그 부락 전체가 좋기는 한 것 보담 나 자신부터 좋아. 거 잘못한 마음으로 ‘그거 뭐 상관있냐?’ 이런 식 하면은 큰 일 나. 벌 받어. 뭣인가 해가 있어. 에, 그렇게 지금도 엄중허니 당산제를 모시고 있어.
【대덕면 설화 36】
※대덕면 용대리 수곡마을 (관련설화=대덕면 설화 37, 38, 39, 40, 41, 42, 44) 수곡(水谷) 마을은 조선조 초기 마을 북쪽에 있었다는 옥천동 옥천사에서 일하는 기와공인 金浦 公씨와 南平 文씨가 터를 일구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하며 지금은 그 후손은 살지 않는다. 남과 북으로 사이를 두고 방아제 마을과 바쟁이 마을이 형성되어 두 마을을 합쳐 수곡이라 한다. 방아제 마을은 수철점 바쟁이 소지라 라고도 불렀다.마을 앞에는 전주 이씨 가문에 있었다는 세 효자의 전설을 안고 있는 관수정이 있는데, 가난한 살림에 노모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노루고기라고 속여 먹게 하고 겨울이면 얼음을 깨고 낚시질을 하기 위해 지었다는 움막터를 지었다고 해 이를 기리고자 해서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또 방아제 마을에 통 장수를 하는 서씨라는 사람이 외지에서 죽자 그의 아들이 여러 날을 그 시신을 등에 업고 마을까지 돌아와 양지 바른 곳에 묘를 쓰고 묘 옆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담긴 효행비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 뒷산은 앵부봉, 앞산은 발재라고 하며 마을 뒤를 모시밭골 왼쪽을 덕가리봉 조개사골 앞들을 분무골이라 한다.
용대의 남쪽 산을 꼬두까끔, 파랏골 동쪽의 산을 매봉산이라 하고 산태박골 북쪽 모퉁이의 산을 모퉁이산, 비암바위 서쪽 고개를 무네미 고개, 소지방을 바지방이라 부르고 매봉산 북쪽 들을 방애실등, 서적들 남쪽 바위를 배아바우라 하며 점골 서쪽 골짜기를 파랏골이라 한다.
서적골 동쪽의 산에 절이 있어 절산으로 부른다. 이밖에도 산태박골, 서적골, 소지방, 수곡, 시리점골, 시봉산 암골 엿까끔, 평산골 흠거리 등이 있다.( 鄕史의 (3). 潭陽 , 1990, 308~310)
<소지 마을> 인자 그전에는 인자 소지라고 했는데 소재, 저, 뭣인가, 뒷산이 앵무봉이라 왜정 때, 왜정, 왜정 전에.........
왜정 때는 저, 소지라고 있었어. 그랬는데 인자 해방 후 이, 인자 거, 수곡이라고 바꽈서 했지.
육이로 후로 했어. 육이오 후로......
소개 나갔다 인제 들어오니께, 그래서 수곡이라고 인자 면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가지고 그렇게 만들어 논거여, 다른 것은 없고.......
【대덕면 설화 37】
<옥천사>
옥천사란 절은 에, 말하자면 그 전에 절이, 옥천사란 절이 그 전에 있었어. 그래갖고 우리가 알기도 옥천사 절, 절을 김가들이 절집을 사가지고 제각을 만들어 놨었지. 그래 갖고 육이오때 불나서 터져 버렸지. 그래갖고 없어졌는데 그 후로 인자 이 근래에 ‘이 옥천사 절이 이렇게 파산해서 쓰겠냐?’ 함서 막 지었다고 글대.
(조사자 : 아, 지금 새로 지어 가지고 있어요?)
응, 요만 빗돌에다가 저 가면 빗돌에다 뭣하고 옥천사 절이라는 빗돌도 있고 그러지, 또랑 갓에 가면........
【대덕면 설화 38】
<수곡마을의 변천> 그전에 여기가 어느 때 인지는 몰라 우리도, 어른들 말씀을 들으면 공가하고 문가하고가 이 동네 득실하고 살았어. 그때는 동네도 컸었고 말 들어 보면, 그랬는데 인자 공가, 문가가 하나도 없어져버리고 다 어디로 간 곳을 모르고 인자 그 후로 이가가 좀 들어와서 몇 집 삼서 여러 성받이가 살제. 살다가 인자는 다 광주로 나가버리고 인자는 사람 몇 여 집 살아. 먼저는 한 삼십여 된 호가, 근래에 다 나가버리고, 자식들 기르라고 인자 여기서 포도시(겨우) 인자 밥줄이나 먹고 어쩌고한게 ‘새끼들 잘쳐야겠다.’ 여기서는 새끼 못 갈친다고 전부 도회지로 나가버렸어. 나가갖고 막, 그래서 ‘도회지로 나가기 전에 빗돌을 세우자.’ 해갖고 빗돌을 세워 논 것이여.
【대덕면 설화 39】
<방아재>
방아재하고 여기 수곡하고 평야 한 마을이제. 그런데 어째 여기 방아재란 동네가 수곡일고 있었어. 그러니까 인자 그때가 거기가 동네 이장이 있었고, 그러기 때문 ‘그냥 여기도 수곡으로 고쳐블자?’ 해갖고 그렇게 고쳐졌제. (중략) 지금 거, 수고마을 그래버리지 방아재란 말은 옛날로 있었지.
【대덕면 설화 40】자두가 그전에 유명헌 디제. 아주 뭐 겁났제. 그런데 인자 육이오 후로 들어와 가지고 동네 모두 어른들이 ‘자두나무 여, 베어 버려야지 두면 못 쓰겟다.’ 해갖고 싹 베어버렸지. 그런데 자두가 바쁠 때 자두가 익어. 해필, 그러니까 자두 땀시 농사에도 피해가 많이 있고 또 먼디서 모다 들어 온 사람들이 젊은 사람, 늙은 사람, 가시나 각시 뭐, 머시매 들어면 뭐 장난이 벌어지고 야단나고 그러니까 꼴 보기 싫다고 ‘싹 비어불자,’ 해갖고 비어붓어.
【대덕면 설화 41】
<수곡마을의 형세>
앵무봉, 요것이여. 큰 봉이, 글고 요늠은 덕가리고.......
(조사자 : 예? 서까래요?)
덕가리봉, 덕가리.
(조사자 : 거기 왜 덕가리라 해요?)
아, 닭 키우면 덕가리 없든가? 덕가리, 그 덕가리, 인자 거 넘으가면 장태봉도 있고 닭소도 모도 있고 그려. 글고 또 저 너매로 가선, 소나무 건너 고승달로 가서 지네혈도 있고,
(조사자 : 지네혈이요? 그러면 거기가 지네 모양으로....)
아, 지네 모양으로 쑥 나갔제, 근게 이 닭 장태봉이란 닭봉이 닭이 인자 거기가 있으니까 저가 인자 닭봉이 있어. 닭이 인자 그놈이 뚝여를 벌리고 지네 잡아 먹을라고 한게 지네가 인자 딱 오그리고서 오그리고 있는, 지네혈 닭봉 장태형, 모두 그래.
【대덕면 설화 42】
<관수정>
관수정이 요 밑에 들어 온 거기가 관수정이여. 그거 모듬 지어논 것이 관수정이여.
(조사자 : 누가 지은 거예요, 거기를?)
우리가 지었지, 동네에서 놀라고, 놀라고........)
관수정이라고 지었어. 인자 그것을 지을 때 관수정이라는 거시기를 해갖고 물이 있고 앞에가 있고, 물이 있고 좋으니까 장소가 있고 그래
서 여, ‘관수정이라고 해야 한다.’ 해갖고 지은 것이여.
【대덕면 설화 43】
<도대문> 그 전에는 도대문도 붙이고
그랬단디 이 동네에서, 그런데 도대문 자리는 우리가 그 담, 도대문 거시기 한 것을 우리가 뜯어 버렸지. 말하자면 모다 갖다 써브니라고
(조사자 : 도대문이 뭔대요?)
동네 앞에 문 달아서 도대문 붙이고 그럴 때, 물론 그때 그 일이 공가, 문가의 살 때 그 일인가봐. 여 행적은 있었는데 우라기 다 뜯어 버렸지.
【대덕면 설화 44】
<황장군의 묘>
황장군 무덤이라고 뭣도 있었고 갑옷바우도 거기가 있고, 갑옷바우도 아마 우리 집안이나 할 것이네. 집 바우를, 우리 집보다 크고, 훨씬, 이집만이나, 방보다는 훨신 커, 바우가, 아 그런데 그 바우 위에가 뚜갱이 있었어, 바우 위에가, 그래서 육이오 해방 막 되어서였냐, 석수 들여다 그놈을 깨고 보니까 판판한 위에가 독만 얹혀 갖고 있데. 그러면 인자, 그러고 그 갑옷바우에가, 황장군 무덤도 우리가 파 밨어, 우리가 판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일제시대에 일본놈이 황장군 묘라 해갖고 ‘파보자.’ 그러니까 모모 그 어른들이 일본놈이 와서 ‘파서 좀 보자.’ 근게 우리는 쬐간 했어, 그때는 일본놈 땐께, 쬐깐해서 따러가서 봤는데 그냥 일본놈이 그 부생이 나온 거 보고는
2 “아이구, 그냥 얼른 함봉하라.”
해갖고 도로 함봉해버리고 그랬어. 머리가 꼭 말대그빡 만이 하고 이도뭐, 손구락 요찍이나 요렇게 넓적허니 백히고 그랬든마. 그래 도로 거기도 일본놈이 도로,
“아이구, 어서 장군 묘인데 어서 묻어 버려라.”
그래서 도로 거기다 무더, 묻어 버렸지.
【대덕면 설화 45】
<호랑이를 잡은 사람>
저 밑에 운산가서 호랭이 잡었지, 운산서, 암, 잡었지. 아주 그 양반이 키도 크고 장사여. 여, 호랭이를 보듬아서 잡았어.
(조사자 : 손으로요?)
암 손으로 근게 거기를 나는 운산 살고, 거기네 운산 살고 나는 여기 산게 모른디 호랭이 잡은 양반이라고 이 양반이 호랭이 잡었는데 잡었단디 키도 팔짝 커갖고 생전 당신은 고무신을 못 사신어. 당신이 삼어 신제, 다리 요렇게 큰게, 키도 크고 낮이 나빠닥이 그냥 얼쿠가 많이 지고 호랭이 잡음서 발로 그냥 긁어버려서, 거 근게 누가 보고 함께 보고 자고 모도 그랬으니까 그 양반, 김씨 잡안에가 있어. 그 양반 삼형제가 다 씨어.
근게 호랭이 잡었다는 말 들은게 호랭이가 나온게 불을 논 것이 설 맞었어. 그러니까 자기 성이 총을 부린디 설 맞어갖고는 소락지를 지르고 대녀. 그런께 자기 성은 저독에 가서 목을 딱 안고 이 호랭이 잡은 양반은 그 양반이 삼형제 가운덴디 몰일를 하고 올라가. 근께 호랭이가 덤불 속에가 들었다 그냥 사람이 올라가면 설운도 올라간게 그냥 입을 딱 벌리고 그냥 달라든게 허리로 꽉 보듬아 버렸다고, 보듬아 버렸어. 그래갖고 보듬아 갖고 그냥 궁글어, 호랭이하고 사람하고 그러니 지 성이 불을 놀래야 놀, 사람 상할까 부선게 못놔. 그러까니 보듬고 궁근께 글고 또 그 호랭이 보듬는데도 불 놓지 마라고, 인제 내가 놓으라면 놓으라고, 그래 못 놓게 하고 있다가 인자 그냥 둘이 싸와, 님기고 야단쳐 갖고는 인자 호랭이가 지웠어. 다 기워서 그냥 딸싹을 못 할 만큼 대니께 지 성님 보고 인자 곁에 와서 호랭이 대고 놔버려라고, 그래 갖고 호랭이를 총으로 쏴버렸다고 그래서 잡었다고, 그런데 잡었는데 크더라 혀, 크기는..... 그 정재나무다 달아 매놨는데 자랑스럽게 달아 매놨는데 꽁자가 땅에가 질렁질렁 질고 한 발 이상 되더라고 근다고 그려. 그래 갖고 관가에서 대는, 관가에서 가져라고, 관가에 그냥 보내서 돈 얼마 타 먹었는가, 안타 먹었는가 모를 일이고 그런단 말만 들었지, 호랭이는 우리 보도, 잡기는 확실히 잡었어. 그 양반이, 우리까지 와서는 그 양반밖에 호랭이 잡은 양반이 없어.
【대덕면 설화 46】
<여씨가 놓은 돌다리>
용대 그 독다리만 역사에 있더라 하든마. 역사도 그것도 여씨가 놨다는 이것만 나왔제. 뭐 아무 거시기가 없다고 그 말, 그러든마.
(조사자 : 예, 누가 놔요?)
여기가가, 여기가가 독다리를 여씨가 놨다고, 그런데 인자 향교에서 거기 역사를 찾어 볼라고 전부 지어놓고 보니까 우리 이 꼴짝에 와서는 그거밖에 없더라 그래.
【대덕면 설화 47】
<신출귀몰한 황장군>
시대는 미상인데, 신출귀몰한 황(黃)장군이 그가 소지하고 있는 황금덩어리를 바위 속에 감추었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일본 사람이 석공을 도원하여 바위를 깨뜨리던 중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일어나고 황금덩이는 이웃 만덕산 농바위 속으로 옮겨 갔다는 전설이다.
【대덕면 설화 48】
<저심 마을>
저심 마을 서편의 금계봉(錦鷄峰)은 임진왜란 때 주민들이 난의 화를 면하기 위해 이곳 바위 동굴로 들어가 베를 짜며 살았는데, 왜병들이 베 짜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새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탄복하여 그냥 지나쳤다하여 금계봉이라 이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마을 앞 안산 상봉 각시바위를 마을에서 보이면 불륜(不倫)을 저지르는 여자가 생긴다하여 소나무를 심어 보이지 않게 가려와 누구도 그 나무를 베지 못하는 것이 계율(戒律) 처름 내려오고 있다.
【대덕면 설화 49】
<산정(山亭)마을 옥녀골>
산정(山亭) 마을 뒷산 수양산에 지상양지(地上洋紙)라는 명당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玉女)가 약수에 목욕하고 베를 짜고 살았다는 전설어린 옥녀골이 있으며, 앞산 앵무봉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들이 글을 읽었다는 선인독서(仙人讀書)라는 터가 있다.
처음에는 수양산 터에 명당이 많다하여 찾아와서 묘를 쓰고, 그 터를 지키는 사람이 많아 마을세가 컸으며, 그때는 산직촌(山直村)이라 불렀으나 조선조 말엽에 산정이라 개칭하였으며, 이는 마을 앞에 당산(느티나무) 목이 좋아 관수정을 건립하였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 대덕면 설화 50】
<상운(上雲) 마을>
상운(上雲) 마을은 만덕산 등허리를 구름이 감싸고 있다하여 운암리라고 부르며, 산 안으로 위쪽에 있다하여 상운이라 하였다.
500여 년 전 평산(平山) 신씨와 순흥(順興) 안씨 일가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시대미상의 난리 때 만여 명의 주민들이 산 속 동굴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는 덕을 보았다하여 명명되었다는 만덕산 아래 위치하며, 산봉우리가 마치 붓끝같이 생겼다는 필봉(월봉산)이 서쪽에 있다.
마을 뒤 만덕산 기슭에 오랜 옛날 내운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덕면 설화 51】
<하운(下雲) 마을>
하운(下雲) 마을 뒤 만덕산 산정에 1920년대까지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무잿등이 있으며, 저수지 부근인 주산에 애기당이라는 샘이 있는데 자식을 낳지 못한 부녀자들이 이 샘을 찾아 절하고 기원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는 애기당 샘에서 절을 할 때면 건너 대덕면 신갈리 뒷산인 득인산(得人山)정기를 받는다는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전한다.
【대덕면 설화 52】
<팔학 마을>
팔학 마을 터를 잡기 전에 이곳에 효행이 지극한 백발의 한 노파가 하늘이 내려준 명당이라 믿어 부모의 시신을 장례하고 오랜 세월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뒤부터 이곳에 살면 후손들이 번창할 것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이주해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 주변에 호랑이가 많아 산신의 정기가 내린 땅이라고도 하였다
【대덕면 설화 53】
<입석(立石) 마을 석신(石神)>
입석(立石) 마을은 다른 산촌고는 달리 바위가 곳곳에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많아 마을을 지켜주는 석신(石神)으로 모시고 제를 지내왔으며, 마을 이름을 선돌(立石)이라고 불렀다가 지금은 입석이라 한다. 북쪽 마을 입구와 마을 앞쪽 각각 두 개의 선돌이 있다. 그리고 범죄 없는 마을 표석이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창촌 당시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길게 서 있어 마을 북쪽에서 들어오는 잡신을 막아 불행을 없애준다고 믿어 석신과 함께 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지금가지 지내오고 있으며, 한 때는 울창했던 당산나무가 지금은 느티나무 2그루와 써나무 32그루가 노거수(老巨樹)로 남아있다.
【대덕면 설화 54】
<대소산(大小山) 마을>
매봉(매峰)의 정기가 뻗어 내리다가 한데 모아진 서당제 아래 득인산(得人山)을 마주보아 아무리 못살아도 오가리솥은 면하고 큰 인물을 얻을 수 있다하여 터를 닦았으며, 동서로 밀양인 박씨가 잡은 터를 소산(小山), 광산인 김씨가 잡은 터를 대산(大山)이라 하였다 한다. 한 때는 산막동(山幕洞)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대산, 소산, 황곡 세마을을 합하여 대곡(大谷)리 (한실)라 하였다 한다.
【대덕면 설화 55】
<장동(章洞) 마을>
장동(章洞) 마을은 큰 벼슬을 한 아홉 사람의 인재가 나왔다하여 구화동(九花洞)으로 부르다가 1910년경 마을 뒷산인 매봉 산하(매峰山下)에 노루 형상을 한 노루봉이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연유되어 장동(獍洞) 즉, 노루골이라 불렀으나, 선비가 많이 배출도라는 뜻으로 다시 장동(章洞)이라 바꿔 오늘에 이르나, 자금도 노년층에서 윗마을 노랑골, 아랫마을을 안양골이라 부르는데 여기에서 노랑골은 노루골의 변형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