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4:9
상종합시다.
최 진실 양이 안타깝게도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죽을 당시에도 꽤 많은 재산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인에 비하면 절대 죽어서는 안 될 만큼의 풍성함과 행복한 요소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아하여 분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고 보니 의외로 너무나 단순한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단절”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 라고 생각한 그 생각이 자신을 옭아 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유명했던 스타가 외롭고, 분하고, 견딜 수 없는 분노까지 몰려온 것입니다. 결국은 우울이라는 질병의 세계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한 여인이 나옵니다. 어쩌면 이 여인도 자살을 시도할지도 모를 만큼의 상당한 외로움과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이 여인에게 “상종하지 않는다.”는 말을 사용해서 본문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할 때,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는 말을 하는데요. 이것을 요한은 재해석하기를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종하다란 말을 찾아보니까 "슁크라오마이"란 말인데 이 말은 「함께」란 말 “쉰”이란 말과 빌려주고 빌려 받는다. 란 말을 가진 '크라오' 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서로 함께 사용하기 위해 빌리고 빌려주고 하는 교제를 갖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상종치 않더라.」고 했으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한 나라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물건이나 물질을 서로 빌려주거나 받는 일을 전혀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은 이처럼 생활 속에서 서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나누지 않을 만큼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서로 대화인들 했겠습니까? 애경사를 오고갔겠습니까?
나아가 이 여인은 자기 동네 사람들과도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낮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나아가 자기 가정에서조차 단절되었습니다.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니 이미 다섯 명의 남자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상처받은 완전히 인생 송두리째 짓밟힌 여인입니다.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대화가 단절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을 것이 짐작이 갑니다.
가족도, 친구도, 같은 나라에 안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하고도 대화가 단절된 여인, 그 여인이 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처절하다 못해 슬프고 외롭고 절망스런 것입니다.
“이렇게 단절된 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될까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좋은 것은, 언제든지- 아멘, 그리고 어디서나-할렐루야, 심령 깊은 곳에서 자주 대화하고 교제가 가능한 분입니다.
저도 힘들고 외로울 때, 아내도 자식도 내 마음 몰라줄 때, 예수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 하고 부르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받아 주시니 다시 새 힘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목회는 기도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도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정말 외롭고 힘들고 지쳐있을 때 친정어머니 보다 더 큰 위안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어떤 종류의 죄인도 용서가 가능한 분입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은 유대 법에 돌로 때려서 죽이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를 위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면서 용서하여 돌려보냅니다.
주님은 실패한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두 번이나 배신하여 바닷가로 돌아갔어도 여전히 찾아와 주셔서 생선까지 구워 주시면서 다시 사명을 부여 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상처주고 사람들이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 수가성 여인도 결국은 사람들에게 단절된 아픔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이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살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문제를 해결해 주러 온 주님을 바로 영접치 않습니다. 꼬치꼬치 따지고 듭니다.
이것을 보면서 인간은 영안이 열리기 전까지 그 누구도 얼마나 단순하며, 얼마나 어리석은가?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우리가 똑똑하고 지혜로워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이 수가성 여인 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기다려 주시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믿게끔 인도해 주신 은혜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포기하면 안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슴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찾아가야 되고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줘야 될 줄 믿습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은 복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날도 이 수가성 여인을 변화시킨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만 비춰졌다가(9) 나중에는 주여!(11) 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이 때 주여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여! 로 부르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단순히 높은 분을 지칭하여 부르는 의미입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나누던 가운데 선지자로 보게 됩니다.(19) 그러다가 자기 맘을 송두리째 꿰뚫어 보시고, 잘못 해석하고 적용했던 예배 장소에 대한 명확한 답을 듣고 부터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어질 때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될 줄 믿습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고통과 문제들이 떠나가는 줄 믿습니다.
나를 얽어매던 가난과 질병의 세력들이 끊어지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십시다. 전능하시고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신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통째로 바뀌는 것은 그 주변의 사람이 바뀌는 일이요, 환경이 바뀌는 일이요, 나라가 바뀌는 일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노예를 팔아먹던 나라, 스페인 같은 나라가 바뀌었고, 바이킹의 나라인 영국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바뀌자 자기 역시 상종치 않았던 지역인 마을 여인들에게로 뛰어 들어 갑니다. 틀림없이 안하던 짓을 하는 여인, 너무나 확신에 찬 여 여인을 보고는 그 동리 여인만 아니라 남성들까지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리고는 이제 너의 말에 의해서 이 예수님을 만나고 믿는 게 아니라, 우리가 친히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되고, 그 체험한 예수님을 전해 주면 이제는 그가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나가서 또 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너무나 생생하게 자기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신 원장님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으로 체험할 차례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초청할 분에게 확신 있게 초청하고 전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가 와서 은혜 받고 또 다른 이를 초청하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