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1,000억' 법정스님, 시인 백석, 김영한 그리고 길상사 이야기
김영모 대표강사
2019. 12. 30.
시간과 장소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어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2010년 3월 11일,
<무소유>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법정스님(속명 박재철)이 열반에 든 날이다.
종교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자 어른이셨던 법정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성북동 길상사에서 돌아가셨다.
1997년에 세워진 길상사는 여러 사람의 발자취와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길상사는 사실 우리나라 사찰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사찰이다.
원래 길상사는 사찰이 아니라 친일 기업인이었던 백인기의 별장이었고,
이를 한국전쟁때 고(故) 김영한 여사가 요정으로 꾸며 그 이름을 대원각(大苑閣)이라고 지었다.
길상사는 주택에서 요정으로 그리고 사찰로 쓰임새가 바뀐 특이한 역사를 가진 사찰인 것이다.
■ 대원각, 그리고 김영한
대원각을 세운 김여사는 처음부터 기생은 아니었다.
열다섯의 나이에 일찍 시집을 갔지만,
불행히도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은 후 기생 수업을 받아 기생이 되었다.
이때 새로 얻은 기명(妓名)이 '진향'이다.
빼어난 미모와 더불어 문재도 뛰어났던 김여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홍보하는 엽서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삼천리> 잡지에 수필을 기고하기도 했다.
■ 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인연
김영한은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백석과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일본 유학후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함흥 영생여고 교사로 부임한 백석은
한 회식자리에서 우연히 진향(김영한)과 함께 앉게되었고,
서로 첫눈에 반한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후 그들은 동거에 들어갔고,
백석은 김영한을 '자야(子夜)'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자야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에서 이름을 땄다고 하며,
백석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는 김영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렇게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을 나눴지만 그들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역경을 만나게 된다.
기생과의 동거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백석의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백석의 아버지는 백석과 김영한의 동거를 막기 위해 아들을 세번이나 결혼시켰지만,
그때마다 백석은 집을 나와 김영한에게 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백석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했던 김영한은 백석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만주로 먼저 가 자리를 잡은 후 부르겠다고 한 후 떠났고,
이후 38선이 막히면서 이들은 영영 이별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원각을 차린 김영한은 뛰어난 수완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인, 기업가들이 드나드는 고급요정으로 대원각을 키웠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게 되었지만, 김영한의 마음은 오직 백석에게만 가 있었던 것 같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김영한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있나?'라고했고,
백석의 생일인 매년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으면서 그를 기렸다고 한다.
후에 김영한은 당시 시가로 천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게 되는데
그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깟 1,000억원,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김영한, 법정스님 그리고 길상사
1987년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그의 전 재산인 대원각 7,000여평과 40여채의 건물을 시주할테니
절을 세워달라고 법정스님에게 간청했다고 한다.
이에 법정스님은 당연하게도 이 제안을 거절했고,
간청과 거절을 거의 10여년 넘게 반복하다가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길상사>를 세웠고,
절을 시주한 김영한에게는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99년 11월 김영한은 '내가 죽으면 눈 많이 오는 날
뼈를 이곳(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유언대로 유골은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고 지금은 길상사 내에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법정스님과 참 인연이 깊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상학과 3학년을 중퇴한 법정스님은
이후 유명한 사찰인 전남 송광사에서 출가하게 되는데,
송광사의 옛이름이 바로 길상사라고 한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길상사로 하지 않았을까 싶고
결국 길상사(송광사)에서 출가하여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서 입적했으니
길상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길상사는 이렇게 백석 시인과 김영한 그리고 법정스님으로 연결되는 발자취를 품고 있는 절이다.
평범한 사찰이 아닌 인연과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공간인 것이다.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평범해 보이는 것에서도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 안에서 많은 배움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길상사는 1987년 공덕주 길상화(吉祥花) 김영한님이 법정스님께 요정이던 대원각을
청정한 불도량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고,
1995년 법정스님께서 그 뜻을 받아들이셔서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하였고
1997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하고
같은 해 2월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 스님 취임 및 1차 도량정비불사 회향을 하였습니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깊은 산중에 칩거하시다가 일주일에 한번씩 상경하셔서
이 곳에서 법회를 하시다가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기거하셨다가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길상화 김영한님(1916-1999)은 일제치하에 태어나 성장하였고,
16살의 나이에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하여 조선권번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하규일 선생님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하였습니다.
한때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뒤에 몇 편의 수필과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규일 선생 약전], [내 사랑 백석]등의
저술을 내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그녀는 바위사이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의 배밭을 사들여
잠깐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이 되였습니다.
길상화님은 노년에 법정스님의[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 후 10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 주시기를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됩니다.
길상사의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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