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道具)”는 ‘어떤 일을 할 때 쓰는 연장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적(的)”이라는 말이 붙으면 무척 다양한 뜻으로 말뜻이 확장이 됩니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도구의 인간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보통은 ‘도구적 인간’이라고 얘기하는데 사람은 유형, 무형의 도구를 만드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이 도구적 인간에서 인지가 발전하면서 도구적 이성, 도구적 감성으로 발전했습니다.
사람은 감정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성간에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다면, 결코 수정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합리적이고 감성은 비합리적이라는 구분은 타당한 결론이 아닐 겁니다.
과학적 법칙이라며 인종차별을 했던 나치가 보여준 것처럼 ‘합리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사람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아예 ‘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이성을 포장해서 ‘합리적 이성’이라는 말을 만들고 이를 합리화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감추려는 추악한 의도였을 겁니다.
거기다가 요즘엔 ‘합리적 이성’을 넘어 ‘도구적 이성’까지 나오고 있나 봅니다. ‘도구적 이성’은 지배와 억압을 정당성 있는 것으로 강조하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이성이 이론적인 계산을 토대로 하여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제시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기 위하여 도구화된 상태를 가리는 말입니다.
이런 도구적 이성은 종래 파시즘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는 감성조차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도구적 감성’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자칭 진보 세력은 불법과 부정과 부패가 드러나더라도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독재라는 과거를 소환해 분노라는 공감과 슬픔·아픔이라는 공감을 강요하면서, 무적의 감성 방패를 만들려고 한다는데 이를 ‘도구적 감성’이라 명명한 분이 있습니다.
도구적 이성이든 도구적 감성이든 그게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혈안이 된 사람과 집단에 동조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덫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일진의 학교폭력과 부패 기업인이나 정치인, 갑질 상사의 비열한 폭력에 대항해 피해자가 치밀한 계획으로 그 절대악(絶對惡)을 짓밟고 복수하는 드라마들이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드라마들은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게 사건을 전개해 나가느냐, 배우들이 연기를 얼마나 리얼하게 하느냐 등의 차이는 있지만, 해체해 보면 매우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거악을 만들어 놓고, 그 악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하고, 피해자가 행하는 응징을 통해 시청자들이 정의감과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시청자에게 이성의 영역은 별로 보여주지 않는다. 분노조절장애(간헐폭발장애), 우월감, 치욕, 지독한 외로움, 응징의 쾌감, 그리고 적당히 통제된 피해자의 분노 등이 주로 보이는 인간의 내면이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성의 영역을 파고든다. 하지만 이성의 영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복수를 위한 철저한 분석과 계획, 그리고 치밀한 복수의 실행 속에 들어 있다. 그 복수는 피해자가 당한 만큼 폭력적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가해자에게 돌려준다.
흥미롭게도 20세기 초·중반 신좌파 이론가들인 독일의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 등은 이런 치밀한 수단적 성격을 띤 이성에 대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유지해 주는 ‘도구적 이성’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계몽주의의 산물인 인간의 이성이 역설적으로 지배의 도구가 됐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당시 좌파 이론가들이 ‘도구적 이성’이라고 비판한 그 폭력의 도구가 다시 저 드라마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하는 ‘정의로운 이성’으로 변하게 된다.
단, 이번에는 약자도 강자를 향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대다수 시청자는 피해자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같이 분노하고, 같이 고통받고, 같이 복수의 쾌감을 느낀다. 우리는 주인공인 약자에게 ‘공감’하고 있고, 그래서 그 폭력적인 드라마에 빠져든다.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오락은 오락으로 즐기면 된다. 공감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시청자에게 도덕적이고 복잡한 분석으로 초를 칠 일은 없다. 하지만 감성과 공감으로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이 드라마의 플롯이 오락의 세계가 아닌 실제 정치의 영역에서 지배 수단으로 사용되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오랜 기간 피해만 받아 왔다고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한국의 기득권 세력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분노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면 감성에 흔들리는 대다수 국민은 저 플롯과 똑같은 정치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약자와 피해자로 자신을 규정한 저 정치 세력은 피해와 억압, 슬픔에 대한 공감을 국민에게 은연중에 강요하고, 결국은 절대악을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응징해야 한다는 드라마를 만들어 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 계속 방영되기 위해서는 끝나지 않는 ‘과거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부터 오랜 기간 반복되는 억압과 핍박의 역사, 그리고 그에 저항해 정의를 구현해 온 그들의 서사는 절대로 해체돼선 안 된다. 그것이 해체되는 순간 그들의 권력도 해체되기 때문이다.
그 서사가 유지되는 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무엇을 해도 정의 구현으로 용서되고, 무엇을 해도 같이 분노하고 공감하는 ‘시청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약자와 소외계층에 대한 공감은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의 자칭 진보 세력은 불법과 부정과 부패가 드러나더라도 일제강점기와 권위주의 독재라는 과거를 소환해 분노라는 공감과 슬픔·아픔이라는 공감을 강요하면서, 무적의 감성 방패를 만들려고 한다. 이들은 그래서 미래 어젠다를 말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과거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정치적 수단을 나는 ‘도구적 감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들의 도구적 감성은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을 통해 미래를 선점하려는 21세기에 대한민국을 과거와 분열에 묶어 놓는 망국적 정치를 재생산한다.
불법과 부정과 부패를 감성으로 가리려는 행위는 정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 서사를 빨리 깨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위험하다.>문화일보. 이 근 서울대국제대학원 교수
저는 조폭이나 무슨 복수, 물불 가리지 않는 출세 등을 다루는 우리 드라마는 전혀 보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변호사, 무슨 막내아들도 물론 보지 않았고 한 3년 동안은 티비에서 방영하는 국내 드라마는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는 것은 중국의 고전사극 조금, 그리고 미국의 범죄수사물이 많습니다.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제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날마다 하고 있고, 드라마에 나오는 수사관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경찰들과 비교를 많이 해봅니다.
미국에서 수사관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거나 부패하는 일 두 가지 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나라 경찰과 검찰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지 않을까 걱정도 합니다.
가진 사람들과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대립 갈등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 늘 도둑질을 하면서 피해자코스프레를 하는 낯짝 두꺼운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뿐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