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들어가는 말 최근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도쿄 한국 영사관에 있는 역사 자료관을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노무자로 왔던 조선인과 일본인이 충돌하여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피살된 조선인 2명을 추모하는 표지석을 세웠다는 신문보도가 소개되어 있었다. 이 소개 글은 지난 3월 5일 전라남도가 추진한 2단계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 작업 설명회에서 필자가 소개한 내용이어서 기뻤다. 한, 일 노무자의 충돌과정에 조선인들이 피살되자 이에 맞서 여수 출신 김덕룡은 곤봉을 휘두르며 맞서다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필자는 김덕룡을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발굴하여 이번 용역에 서훈 신청하였다. 김덕룡의 항쟁 사실이 역사 자료관에 함께 설명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지난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광주고보 출신으로 1929년 11월 12일 제2차 학생사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한 조용표의 명예졸업장 수여가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있었다. 조용표는 광주고보 5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문무신 등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였던 시위에 참가하다 투옥된 광주고보 학생들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생생한 역사 기록이다. 조용표가 아직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지 못한 사실을 알고 동창회에 알려 명예졸업장을 받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과정에서 얻어진 뜻밖의 성과였다. 1929년 11월 3일, 그리고 11월 12일 폭발한 광주학생운동은 광주고보 등 광주지역 학교는 물론, 목포상업학교, 목포정명여학교, 여수수산학교 등 전남의 각급 학교는 물론 멀리 함흥지역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중남미 쿠바 동포들이 광주 학생을 돕자는 성금을 자발적으로 내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은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된 학생들이 출옥 후 고향으로 내려가 농민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거나 일본에 유학을 떠나 독립운동의 역량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간회 해소로 인하여 사회주의 계열 운동은 합법적 투쟁 공간을 상실하면서 지하로 암약하여 폭력적 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의 역량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차츰 독립운동의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다. 광주서중의 무등회와 광주사범의 무등독서회 등 비밀결사가 그것이다. 무등회는 1942년 제2 학생운동을 전개하다 4명이 옥중 순국하는 엄청난 희생을 입기도 하였다. 무등회를 대표한 인물의 한 사람인 기태룡의 삶을 통하여 무등회와 그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서중 독서회 결성과 무등회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빛나는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일제의 학제 개편에 따라 1938년 4월 1일 광주서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일본인이 주로 다닌 광주동공립중학교와 구분하기 위해서 서공립중학교라 하였는데, 해방 후인 1951년 광주서중학교로 개명이 된다.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과 황국신민서사 강요 등 일제의 탄압은 날로 강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이 거세질수록 학생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광주서중 재학생들은 투쟁 의지는 더욱 강렬하였다. 광주서중 학생들은 1929년 학생운동을 일으킨 선배의 전통 계승 의지가 몸에 배어 있었다. 다음 판결문이 주목된다. 광주부 누문정 소재 광주서공립중학교 〔이하 광주서중(光州西中)이라고 지칭함〕에서는 창립 이후 주로 전라남도 내의 조선인 자제를 교육해 왔는데, 동교(同校) 상급생 사이에는 소화(昭和) 4년(1929년)의 소위 ‘광주학생사건’ 이후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생도를 교육하는 광주동공립중학교 생도에 대한 대항적 기세, 내지인(內地人) 교유(敎諭, 교사)에 대한 반항적 기질 및 당시 처형당한 생도 등을 영웅시하고, 찬미하는 풍조가 전통적으로 편만해 있었다. 따라서 그 사상 동향이 과격하고, 내선(內鮮: 일본, 조선) 간의 차별 문제에 대해 사실을 곡해(曲解)하여 원망의 소리를 지름은 물론 제국의 통치정책을 지목하여 필경 조선 고유의 문화를 파괴, 멸절(滅絶)하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망단(妄斷)하는 등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이러한 불온, 과격한 사상 동향은 동교(同校)의 은밀한 교풍을 형성해 왔는데, 피고인 등은 모두 이러한 사상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학원(學園)에서 교육을 받고, 부지불식간에 그 교풍에 물들어 민족적 편견을 품기 시작하고, 점차 이러한 편견이 심해지고, 치열한 민족의식으로 변하고, 매사에 제국의 조선통치정책을 비방하고, 끝내 조선 민족의 자유 행복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서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이탈시키고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던 자(하략) 당시 서중학생의 강한 민족의식의 저변에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환도, 유기춘, 나금주, 송하준 등 서중학교 학생들이 1938년 5월 광주 기환도 집에서 조직한 ‘서중독서회’는 독립운동 조직체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었다. 서중독서회의 연원은, 1937년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인 송흥호, 류복열 등이 조직한 독서회였다. 송흥호와 하숙을 함께 한 나금주와 주하준은 독서회에 들어갔다. 송흥호는 일본인 상점 불매운동, 문맹자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독서회원들은 농촌계몽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책들을 서점에서 구입하여 윤독을 하고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 장소는 수피아여학교 뒷산, 학동 현준호 선산, 무등산 당산나무 잔등이었다. 독서회 핵심 인물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송흥호, 류복렬, 광주농업학교 최석두, 윤인중, 광주여고보 김인순이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점조직으로 연결되었다. 1937년 여름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51명 독서회원이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으로 6개월 동안 조사 끝에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나 핵심 인물 송흥호는 1937년 7월 퇴학당하였다. 이때 독서회원은 나금주, 기환도, 유기춘, 주하준, 고길현 등이었다. 기환도, 송하준, 나금주 등 3명은 같은 장성 출신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이들은 공감대를 가지고 무너진 독서회를 재건하였는데, 1938년 5월 결성된 ‘서중독서회가 그것이다. 이들은 기환도의 큰 방 앞닫이 의복 밑에 숨겨놓은 이념 서적을 하숙집을 옮겨 다니며 읽고 독후감 발표와 토론회를 열었다. 회원들은 서중학교 운동장 잔디밭에서, 또는 무등산 골짜기에서, 당산나무 밑에서 장소를 달리하며 독서회 모임을 하며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토론하였다. 회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불굴의 투지로 광주고보 학생운동에서 활약한 장재성, 왕재일 선배의 무용담을 나누는가 하면 상해임시정부의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 행동을 논하곤 하였다. 1939년 5월, 기환도의 집에서 당시 서중 5학년생인 기환도, 주하준, 유기춘, 나금주, 서중 4년생인 유몽룡 등이 모여서 서중독서회의 보안을 더욱 엄하게 하고 완전한 지하 조직으로 바꾸기로 하면서 명칭을 비밀결사 ‘무등회’로 바꾸었다. 또 연락책으로 기환도, 부연락책으로 유몽룡을 정했다. 회의 명칭을 무등회라고 한 것은 ‘무등’은 무등산의 머리말로 광주 수호신이 깃든 영산으로 우리 무등회를 지켜주리라 믿었고, 또 당시 서중학교의 교가의 첫 구절이 ‘반도 남단 무등산록에’로 시작되어 학생들에게 친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등회는 비밀결사로서 다음을 행동 목표로 삼았다. ① 서중혼(西中魂)으로 무장하고 영웅적인 선배들의 얼을 전교 학생에게 심어줄 것 ② 일제 식민지 정책 반대 투쟁에 젊음을 바칠 것 ③ 주체성을 기르기 위해 독서운동 전개할 것 ④ 동지를 위해, 보안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길 것 행동 목표에서 나오는 ‘서중혼’이란 바로 7전 8기 불굴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동지를 위해 보안을 철저히 하자는 것도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목표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학교에서 일본어 상용시책이 있은 뒤로 밀고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보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후일 제2차 무등회 사건에서 기환도는 구속된 이후에도 입을 열지 않고 죽음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3. 무등회 재건과 기영도 1926년 2월 24일 장성 황룡면 월평리 503번지에서 태어난 기영도는,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기삼연의 손자로도 유명하다. 태룡은 기영도의 개명 이름이다. 서중 5학년이었던 형은 평소 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을 비롯한 기씨 가문 내력을 이야기하며 “가문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어렵고 힘들지만 나라는 기필코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39년 4월 광주서중에 입학하자마자 다음 달인 5월 ‘서중독서회’를 토대로 결성된 ‘무등회’에 가입하였다. 무등회 결성의 핵심이었던 기환도의 도움이 있어 가능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기환도를 대신하여 무등회 총책임은 유몽룡이 맡고, 재학생 조직은 기영도가 담당하였다. 무등회 회원들은 일본어 상용 반대,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민족 차별 반대 등을 내세우며 비밀리에 조직을 강화하고 있었다. 기영도가 3학년이 되던 1940년 2월 광주고보 선배 장세정이 중국 상하이에서 밀입국해 독서회 회원들에게 임시정부의 활약상과 “일제가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며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기영도 등은 독립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에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뜻을 같이하였던 동지 규합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세정은 같은 해 6월 국내에 있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장세정의 검거로 독서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조직과 활동 내용 등이 일본 경찰에 탄로 날 것을 우려하여 1941년 12월 광주 북동 126번지 유몽룡 집에서 무등회를 형식적으로 해체하였다. 조직을 숨긴 채 비밀리에 조직을 유지하던 무등회는 1942년 1월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941년 12월 유몽룡이 일기장에 일제 식민정책을 비판한 내용을 적어 학교에 제출했다가 퇴학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광주서중 졸업생으로 담양 무정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주만우가 동료 교사에게 민족의식을 강화하려 하다 일본인 교사의 밀고로 검거되면서 조직이 노출되었다. 유몽룡, 강한수, 주만우 등이 투옥되고 기환도는 도쿄에 유학을 와 있었고, 기원흥은 만주 하얼빈에 있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주만우는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고, 강한수는 징역 1년, 유몽룡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를 1차 무등회 사건이라 한다. 일본 경찰은 관련자 대부분이 이미 서중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단순 사건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 무등회의 뿌리를 파헤치지 않았다. 무등회의 주요 멤버들이 체포 또는 피신하자 무등회 조직은 와해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재학생 조직책을 맡았던 기영도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조직을 확대하는 것만이 독립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는 1942년 5월 광주에 있던 이민수 집에서 신균우, 박화진, 최태석 등과 비밀 모임을 갖고 무등회를 재건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 1942년 5월 신균우(고흥 출신), 기영도 등 20여 명은 무너진 무등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기영도가 총책을 맡아 20여 명의 무등회 간부들과 함께 전국적인 학생 거사 계획을 짰다. 같은 해 10월 기영도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내세워 학교를 휴학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형이 피신한 도쿄로 건너갔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도쿄에 도착한 그는, 동경 예비학교와 신주쿠고등예비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호남의 부호인 현준호의 장남인 현영익이 3백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주었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을 만난 기영도는 만주로 도피하여 위장 취업하고 있던 기원흥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까지 찾아갔다. 기원흥에게서도 2백 원의 자금을 얻은 기태룡은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기원흥은 이 이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어렵사리 임시정부를 찾은 기영도는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을 만났다. 김구와 이시영은 광주서중 학생이 중경까지 왔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김구와 이시영은 “독립의 뜻을 잃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하였다. 감격한 기영도는 도쿄와 하얼빈에서 무등회 활동 자금으로 얻은 5백 원 중 4백 80원을 이시영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이시영은 깜짝 놀랐다. 그 돈은 적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기영도는 이시영을 다시 만났다. 그가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는 부통령이던 이시영의 집에서 생활했고, 학비까지 대 주었다. 김구 또한 해방 이후 남행할 때 장성 기영도의 고향 집에서 이틀간을 묵으면서 ‘忠孝世家’라는 친필 휘호를 써주었다. 이 휘호는 기영도 집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재산이다. 만주의 동포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은 기영도는, 돌아오는 길에 함흥에 들러 오산중학교의 박무식, 평안도 안주중학교의 신길모, 전주북중학교의 김병순 등을 잇달아 만나 학생 거사를 논의하였다. 그들 역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라면서 “일본이 오키나와까지 밀리는 1943년에 궐기하자”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 때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던 때였다. 4. 제2차 무등회 사건 광주에 돌아온 기영도는 무등회 회원을 만나 재일 유학생 선배들의 항일활동과 임시정부에서 김구, 이시영을 만나 들은 격려의 말,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일제는 필연적으로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하게 된 이유 등을 설명하였다. 또 그동안 해외에서 사는 동포들이 독립을 갈망하고 독립 성금을 많이 희사하고 있다는 내용 등을 설명하였다. 설명을 들은 무등회 회원들은 그가 구해온 자금으로 보고 더욱 용기를 얻고 옥중에 있는 동지들의 구출 운동과 항일 궐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조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기영도는, 입학 후에는 무등회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일본, 만주 등지에서 직접 경험한 국외독립운동 양상은 그의 독립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특히 그와 교분을 쌓은 중천원조(中川原助)가 1942년 12월 26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 6월 징역형을 받은 것은 그에게 깊은 충격이었다. 기영도는 피압박 민족인 조선이 사는 길은 오로지 독립뿐이라고 생각을 확고히 하였다. 다음 판결문에 그의 분명한 정체성이 드러나 있다. “(1) 내선(内鮮) 관계에 대해 무릇 하나의 민족은 동일 조선(祖先)의 피를 받은 자를 지칭하나, 내선인(内鮮人)은 그 조선(祖先)이 다르다. 따라서 동일 민족이 아니다. 오늘날 내선일체(内鮮一体)를 부르짖고 있으나 내선인(内鮮人) 사이에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여러 면에서 차별대우가 있다. 이 철저한 해결은 조선의 독립밖에는 다른 길이 없고, 이 총독 정치는 기만이다. (2) 창씨(創氏) 제도에 대해 조선인(朝鮮人)은 그 본래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조선(祖先)의 유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을 폐하고, 창씨(創氏) 개명을 강조하는 것은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다. (3) 대동아 전쟁과 조선독립과의 관계에 대해 대동아전쟁은 제국의 침략전쟁으로 제국은 동양의 적이다. 제국은 무력에 있어서는 우세하나 군수물자, 과학 힘에 있어서는 도저히 미(米), 영(英), 소(蘇)에 대항하지 못한다. 장기전이 되면 제국의 패배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그때야말로 조선의 독립의 호기이다. 만일 제국의 승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는 제국은 피폐 되므로 그 기회를 틈타 동지(同志) 일제히 봉기하면 용이(容易)하게 그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의 때는 전부 각 중등학교 3년생 이상의 사람과 다소의 군사교련을 받은 자를 동원하면 대략 35∼36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고, 최소한도의 군비는 가능하다. 정치기구로써는 일부 사유재산제도(私有財産制度)를 인정한 공산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하고, 우선 내선인(内鮮人) 간의 차별 대우의 문제를 제기하여 일반 민중에게 설명하여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하고, 독립의 소지(素地)를 만들기로 하고, 상(相) 피고인 길전균우(吉田均雨)를 동지(同志)로 획득하고 기타 갖가지 획책을 하고 있던 자” 위 판결문을 통해 기영도가 ① 내선일체 비판, ② 창씨개명 반대 ③ 태평양 전쟁을 틈타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학생 35∼36만을 동원하여 일본과 독립전쟁 준비 등을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영도가 유난히 민족의식을 확고히 하였던 것은 당시 일본인 교장의 횡포도 중요하게 작동하였다. 1938년 광주서중으로 바뀐 후 에노모도(根本正次) 교장이 부임하였다. 에노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전교생의 황민화를 위해 학업보다는 근무 작업, 군사훈련을 한층 더 강화했다. 실전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일제의 전쟁 도구를 육성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창씨개명이 발표되자 하루가 멀다고 이를 강요했으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학생들은 늦게까지 학교에 남게 하여 교장실로 불러들여 “불온사상이 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장래가 없다”라면서 위협하였다. 교과목 가운데 ‘운동’도 새로운 총검술과 국방경기라는 것을 만들어 전투용 일색으로 바꾸어 갔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불참자는 불령한 학생으로 낙인찍어 온갖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주었다. 황국신민서사도 하루에 몇 번씩 소리 내어 읽도록 했는데 서중 학생들은 그때마다 괴성을 지르면서 조롱했다. 한편 무등회 회원으로서 당시 4학년이었던 박화진, 신균우가 일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오게 되었다. 박화진과 신균우는 일본에 간 기회에 많은 재일 유학생 선배들과 만나 대화를 통해 국제정세와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국내외 항일운동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독립의 날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귀국하자마자 기영도를 만나 우리가 바로 행동으로 항거할 때가 왔다고 이야기하니 무등회 회원 및 동급생들과 비밀리에 만나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 교사의 눈을 피하느라 비밀모임은 주로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체육 교구 창고, 농기구 창고 등에서 비밀스럽게 만났다. 1943년 5월 8일 무등회 회원들은 전국학생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작성하여 이민수에게 600여 장을 발송토록 하였다. 무등회 회원들은 이제 결전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실감하고 있었다.이들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차별 정책을 학교 내에서 부각시키며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신삼용은 에노모도 교장의 얼굴을 독사로 그려놓았고, 조병대는 봉안전에 있던 일본 국왕 부부의 사진 액자에 지렁이를 집어넣어 기어 다니게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민족차별을 일삼던 일본인 교사의 책상 서랍 속에 인분 봉투를 넣어 항의했다. 학교 측은 이들을 즉각 퇴학 조치했다. 무등회 회원들의 조직적인 항일운동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친일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일부 학생들은 이미 식민지 지배층에 편입돼 안락한 미래를 꿈꾸기조차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 총독부 공무원이 되거나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을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식민지 조국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기구인 총독부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한 인생처럼 여겨졌다. 1943년 5월 무등회 회원들은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을 이용해 하급학생 교실을 돌아다니며 항일운동과 우리말 사용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무등회의 항일운동을 하급생 일부가 교장에게 밀고한 것이다. 무등회 회원들 일부가 교장실로 불려가 심한 욕설과 체벌을 당했다. 회원들은 밀고자 색출에 나섰다. 그들은 밀고 혐의가 있는 하급생 7~8명을 학교 무도장 뒤로 끌고가 밀고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가했다. 학교와 경찰은 하급생들을 구타한 주모자를 검거해 퇴학 조치를 내렸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며 일본어 상용 반대, 창씨개명 반대 등을 외치며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들은 “한일합병 무효”, “내선일체 반대”, “학병제도 반대”, “창씨개명과 일어사용 반대”, “일본상품 불매”, “대한독립 만세” 등을 외치며 계림동 경양방죽 쪽으로 향했다. 기영도 역시 행렬의 앞에 나섰다. 이들은 경양방죽 쪽으로 진행하다가 선배들이 수감되어 있던 형무소를 향했다. 시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기대했으나, 일제의 신속한 진압에 모든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에 광주사범학교에서 열린 전남 도내 모형비행기 대회에서 광주서중 학생들이 일본 학생을 때린 사건까지 더해져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그해 8월까지 4개월 동안 모두 350명이 붙잡혔다. 일제는 1944년 2월까지 장기간 조사를 벌여 30여 명을 구속했으며, 남정준 등 10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조사 과정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기영도의 형 기환도는 수갑을 찬 채로 밤중에 경양방죽(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홈플러스 일대)으로 끌려가 물속에 처박히는 물고문을 당했다. 물고문 중간에 온몸을 구타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끝내 감옥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 서중을 졸업하고 서울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강한수와 윤봉현은 재판을 받기도 전에 혹독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고, 주만우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이 돼 풀려났지만 채 한달이 못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45년 11월 25일 기환도, 주만우, 강한수, 윤봉현 등 4명의 장례식을 광주시민장 및 광주서중동창회장으로 다시 치렀다. 무등회 사건은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불릴 만큼 치열한 항일투쟁이었으며, 학생 비밀결사와 관련하여 고문으로 숨진 대표적 사건이기도 했다. 기영도는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는 두 손이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천장에 달리는 비행기 고문을 당하였다. 한겨울 밤 꽁꽁 언 경양방죽에 알몸으로 처넣는 고문, 심지어는 쇠꼬챙이를 달궈 허리를 지져대는 고문까지 당했다. 까무러치기도 여러 번 하였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기영도는 1944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단기 2년 장기 4년으로 형이 확정됐다.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기영도는 해방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밤 출감했다. 기영도 이외에도 남정준, 신균우, 기원흥, 배종국, 박화진, 오복열, 조병대, 이민수, 박하주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나금주 등 21명이 기소유예를 받았다. 기영도는 해방 후 1948년 광주서중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1975년 장흥고등학교 교장, 1980년 담양군 교육장, 1984년 전라남도교육연구원장을 지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지금은 우리땅. 봉오리채 떨어진 환도 친형과 무등회 동지들의 항쟁으로 부활한 땅. 이제는 창허 기태룡도 그들 곁으로 떠나려 하는구나. 17세 홍 안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항쟁-형극의 길, 옥고의 모진 상처, 역사의 증언되니 누가 감히 그 푸른 절개를 눈물없이 기억하리-자랑스런 대한의 아들이여! 광주 무등의 횃불이여!”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