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는 목종 때부터 벼슬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형부 낭중(刑部郞中)으로 되었다. 현종 원년에 거란 임금 자신이 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구실을 붙이고 침입하여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그때 양규는 도 순검사(都巡檢使)로 있었는데 진사 호부 낭중(鎭使戶部郞中) 정성(鄭成)과 부사(副使) 장작(將作), 주부(主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늠희령, 장호(張顥) 등과 함께 방비를 갖추고 성(城)을 고수하니 거란 임금이 통주(通州) 성 밖에서 벼를 베고 있던 남녀 한 명씩을 붙잡아다가 각각 비단 옷을 주고 종이에 싼 화살 한 대를 주어 3백 명의 군사를 붙여 흥화진까지 호송하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그대들의 먼저 임금 왕송(誦)이 우리 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였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왕을 죽이고 어린이를 왕위에 올려 앉히었으므로 내가 정예 부대를 인솔하고 이미 국경에 당도하였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나에게로 보내면 즉시로 퇴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성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몰살할 터이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은 또 편지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꽂았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흥화현의 성주(城主)와 군인 및 백성들에게 포고한다. 고려의 먼저 임금 왕송이 그 조부를 계승하여 우리의 번신(外臣)이 되어 자기 국토를 수호하여 왔는데 뜻밖에 간흉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래서 내가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그 죄인을 토벌하러 온 것이며 기타 협박에 못이겨서 부득이 종범한 자는 일체 용서할 것이다. 황차 너희들은 전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또 역대의 임금들이 왜 대국에 순종했는가 하는 사유도 잘 알 터이니 마땅히 나의 뜻을 체득하고 일후에 후회가 없도록 조처하라”고 하였다. 이수화 등이 거란 임금에게 글을 보내기를
“하늘 아래서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이 간악한 놈을 제거해야 하며 부모를 모시며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모름지기 절조를 고수 해야만 될 것이니 만일 이 도리에 어긋나면 반드시 벌을 받는 법입니다. 바라건대 백성들의 사정을 잘 살펴 주시며 당신의 명철한 지혜로써 사세를 정확히 판단하시고 우리 고을의 포위를 해제하시오, 저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참새들을 잡지 말고 맹수(猛獸)를 잡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이 비단 옷과 은그릇 등을 보내 진(鎭)의 장수들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이와 함께 또 포고하기를
“보낸 글은 자세히 보았다. 나는 오대(五代) 성군(聖君)들의 뒤를 이어 만방(萬方)에 군림(軍臨)하고 있다. 나에게 충성하는 선량한 자는 반드시 표창하며 흉악한 반역자는 기어코 토벌하여 왔다. 이번에 강조가 국왕을 죽이고 어린 임금을 미끼로 마음껏 호강을 부리며 상과 벌을 자의 대로 행사하고 있는 까닭에 내가 친히 그를 토벌하고 특히 형명(刑名)을 바로 잡기 위하여 지금 대군을 거느리고 근처에 왔다. 근일에 교서를 반포한 것은 불러서 회유하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대들의 글을 잠깐 살펴 보건대 귀순할 성의는 표시되지 않았으며 그 진술한 바가 성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없고 다만 공경하는 뜻을 표시한 것뿐이다. 하물며 그대들은 일찍이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니 반드시 순리와 반역을 분간할 터인데 어찌 역적 도당에게 방조를 주거나 살해당한 왕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겠는가? 마땅히 평안한 것과 위험한 것을 살피고 행복과 불행을 미리 분별하라”고 (재차 투항을 권고)하였다. 이수화가 또다시 답서를 보내기를
“우리들은 어제 보내신 글을 읽고 진실한 심경을 말씀하려 하오. 오직 원하는 바가 울면서 죄인을 가긍히 여기는 그러한 자애를 베풀어서 포위를 해제하는 인덕(仁德)이 있기만 간절히 바라오! 우리들은 눈보라와 찬 서리를 견디면서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노력하겠으며 몸이 비록 가루가 되더라도 조국의 천 년 위업을 길이 받들 결심이오”라고 굳은 결의를 표하였다.
거란 임금이 이 글을 보고 그들이 항복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이어 포위를 풀고 가면서 다시 글을 보내기를 그대들은 백성을 위안하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거란군 20만 명의 병력은 인주(麟州) 남쪽 무로대(無老代)에 주둔하고 20만 명의 병력(兵力)을 통주에 출동시켰다. 그리고 거란 임금이 군대를 동산(銅山) 아래로 옮기니 강조가 군대를 인솔하고 통주성 남녘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패배를 당하여 포로로 되었고 동시에 행영 도통 부사(行營都統副使) 이현운(李絃雲)과 행영 도통 판관(行營都統判官) 노전, 감찰어사(監察御使) 노의,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도 역시 포로당하였으며 행영 도병마 부사 노정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 등은 모두 전사하였으므로 고려군에 대혼란이 일어 났으며 거란군은 승세를 얻어 수십 리를 추격하니 고려 군사 3만여 명이 살해되고 내버린 식량과 무기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 고려군의 좌우 기습군 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 김계부(金繼夫), 이원(李元), 신녕한(申寧漢) 등이 완항령(緩項嶺)에 매복하였다가 육박전으로 돌격하여 적을 패배시키니 거란군이 약간 퇴각하였다.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양규가 말하기를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인즉 강조의 지시는 받을 수 없다”고 하며 항복하지 않으니 거란이 다시 노전과 거란의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로 하여금 격문을 가지고 통주에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니 성 안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팔을 걷고 결연히 일어나 노전과 마수를 억류하고 방어사 이원구(李元龜)와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 등과 함께 성문을 닫고 고수하니 인심이 점차로 단결되었다. 거란군이 곽주(郭州)에 침입하니 방어사 호부 원외랑(防禦使戶部員外郞) 조성우(趙成祐)는 야밤에 도망쳤고 신녕한(申寧漢)과 행영 수제관(行營修製官) 승이인(乘里仁), 대장군(大將軍) 대회덕(大懷德), 공부 낭중(工部郞中)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禮部郞中) 간영언(簡英彦) 등은 모두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거란은 6천여 명의 병력을 남겨 두고 수비하게 하였다.
양규가 흥화진으로부터 7백여 명의 군대를 인솔하고 통주에 이르러 흩어졌던 군사 1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밤을 타서 곽주에 들어 가 거란군을 공격하여 수비병을 모조리 죽이고 성중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갔다. 이듬해에 거란 임금이 수도에 들어 와서 궁궐을 불사르고 물러 갔다. 구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淑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죽이고 양규는 무로대(無老代)에서 적을 불의에 습격하여 2천여 명을 살륙하고 적에게 포로된 남녀 3천여 명을 탈환하였으며 다시 이수(梨樹)에서 접전하고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적병 2천 5백여 명을 살해하고 포로되었던 우리 사람 1천여 명을 탈환하였으며 3일 후에 또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고 적에게 포로되었던 우리 사람 1천여 명을 탈환하였는데 이날 세 번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쟁취하였다. 다시 그들의 선봉을 애전(艾田)에서 요격하여 또 1천여 명을 살육하였다. 잠깐 후에 거란 임금이 인솔한 대부대가 갑자기 들어 와서 형세가 일변되었다. 그래서 양규와 김숙흥은 온종일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군사가 다 죽고 화살이 없어져서 두 사람이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여러 장령들의 강한 반격에 봉착하였고 또 겸하여 장마로 인해서 말과 낙타는 피로하고 병들었으며 군복과 병기를 다 잃어버렸으므로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게 되었다. 정성이 뒤따라 가서 후군을 맹렬히 추격하니 거란군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적에게 항복했던 여러 성들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양규는 많지 못한 군대를 가지고 한 달 동안(旬月) 도합 7차에 걸친 전투에서 적을 무수히 살육하였으며 적에게 포로되었던 고려 사람을 탈환한 인원 수가 무려 3만여 명에 달하였고 낙타, 말, 기계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노획하였다. 전사한 후 군공에 의하여 양규에게는 공부 상서(工部尙書) 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처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곡식을 주고 아들 양대춘(帶春)에게는 교서랑(校書郞) 관직을 주었다. 왕이 손수 교지를 작성하여 홍씨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남편은 장군의 지략을 갖추었고 지식은 정치하는 방도에도 능통하였다. 항상 송죽(松筠) 같은 절개를 지키어 오더니 끝끝내 국가에 충성을 바쳤도다. 그의 충의와 지조는 비길 바 없으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주야로 분투하였다. 지난번 북방 국경에 호란이 있을 때 그는 중군에서 용기를 떨쳤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를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六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 이로써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었고 사기 또한 드높아졌다. 여러 번 승리를 거듭하더니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어라! 항상 그의 출중한 군공을 생각하여 이미 상훈과 벼슬을 더한 바는 있으나 다시금 그의 공로에 보답하고 싶은 생각 더욱 간절하도다! 그대에게 매 년 벼 1백 석씩 보내노니 그대의 일생을 안온하게 보내도록 할 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숙흥에겐 장군 칭호를 추증하고 또 그의 어머니 이씨에게 곡식(粟)을 줄 것을 명령하고 교시를 전하기를
“증직 장군(贈將軍) 김숙흥은 국경을 경비하면서부터 적을 물리치기에 용감했다. 이미 원수를 격파하는 싸움에서 공훈을 세웠으며 마침내 전선에서 목숨을 바쳤다. 그의 지난날의 공로를 회상할 때 마땅히 특상을 주는 것이 합당한지라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을 종신토록 주게 하노라”고 하였다. 현종 10년에는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 녹권(錄券)을 발급하였고 또 15년에는 두 사람에게 삼한 후벽상 공신(三韓後壁上功臣) 칭호를 주었다.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자 다음과 같은 공로를 찬양하는 글을 내렸다.
“현종 원년(1010)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에 서북면 도 순검사 양규와 부지휘 김숙흥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서 거듭 적을 격파하였으나 적의 화살이 빈틈없이 집중되어 가석하게도 두 용장이 전사하였다. 그들의 공훈을 추억하건대 표창하는 것은 응당한 일이니 그들의 초상을 공신각(功臣閣)에 붙여 후대들을 고무하게 하라”고 하였다.
대춘(帶春)은 정종(靖宗) 6년에 안북대도호부 부사(安北大都護府副使)로 있었는데 좌복야(左僕射) 최충(崔沖)이 왕에게 아뢰기를 “대춘은 지조가 탁월하고 지략이 많으며 군사 방면에도 통달한 인재입니다. 만일 국경에 사고가 있을 때에는 이 사람을 제쳐 놓고는 보낼 만한 인재가 없으니 그를 외직에 배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왕은 이 제의를 듣지 않았다. 그는 그 후 벼슬이 직문하성 위위경(直門下省衛尉卿)에 이르렀다. 문종(文宗) 초년에 그가 신병이 생기었으므로 왕은 명령을 내리어 그에게 매일의 조회는 면제하여 주고 다만 축사(祝事)만을 겸관으로 맡아 보게 하였다.
첫댓글 뻥안치고 이거 읽는사람 없다에 내꺼 왼쪽 불x 하나 건다
아....이걸 회수하러 갈수도 없고....ㅜ
별로 길지도 않구만...
존나 김...
착불은 싫어요^^
ㅋ 오징어가 탈까봐 읽을수도엄구.. ㅋ
불알 제거 인증샷이나 올리셈. 다 읽었으니...
양씨 가문의 최고의 영웅중 한명 고구려 양만춘대장군 고려의 충신의 전설 양규 대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