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아웃 시리즈의 최고점이라면 뉴베가스가 빠질수가 없습니다. 특히 폴아웃 4와 76이 나온 이후에 팬덤에서 내러티브와 스토리적으로 뉴베가스는 다시 오지 않을 전성기로 간주되고는 합니다.
엘더스크롤 팬덤에 뉴베가스는 꽤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비욘드 스카이림 : 시로딜 프로젝트 팀은 레딧에서 여러 퀘스트라인이 뉴베가스의 여러부분을 본받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BS시로딜의 메인퀘스트 라인이 신화와 전설의 영역이 아닌, 황제의 암살과 이에 따른 정권교체를 다룰것이라는 것도 뉴베가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수도 있겠군요.
폴아웃 팬덤의 경우 뉴베가스는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폴아웃 4의 거대 모딩 프로젝트 4개 중 2개가 뉴베가스와 관련되어 있으며(카스카디아 공화국, 폴아웃 4 : 뉴베가스), 최근 5년 동안 일명 DLC급 모드들도 대부분 뉴베가스를 기반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뉴베가스의 가장 큰 대립 구도는 NCR과 군단 이 두 팩션간의 전쟁입니다.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공화국과 신성화된 절대 권력이 지배하는 노예들의 제국인 시저의 군단이라는 대립 구도는 사실 거시적인 맥락에서 지루하기 짝이없는 클리셰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받을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뉴베가스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것일까요. 이 글에서는 역사적 맥락을 중심으로 뉴베가스의 거시적인 플롯이 어떻게 강력하고 흡인력있는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뉴베가스의 대립구도에는 두가지의 역사적 사건이 배경으로 깔려있습니다.
첫번째는 바로 로마 공화정의 몰락입니다.
로마공화정은 동양 문화권인 우리에게는 낯설수도 있지만, 서구권에서는 현대 자유 민주정의 사상적 근원이자 반면교사로 간주됩니다. 중세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로마공화정이 남긴 정치적 유산과 교훈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부를 설계했었죠.
따라서 로마공화정의 몰락은 시민적 자유와 자기자신을 스스로 통치하는 시민사회를 핵심으로 작동하는 현대사회에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유 시민들이 거대 토지와 정치력을 앞세운 원로원의 통치계급에 의해 철저히 몰락당하고, 거리의 빈민층으로 전락한 시민들에 의해 카리스마있는 군벌 지도자가 황제로 추대된다는 이야기는 양극화와 정치적 극단주의의 발흥에 몸살을 앓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우리의 사랑스러운 에드워드 셀로우씨께서 직접 언급하죠. 배달부와의 대담에서 그는 NCR을 로마공화정에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대치시키고(후버댐과 콜로라도 강을 루비콘에 비유합니다.), 자신의 서방으로의 진격을 역사적 필연으로 간주합니다. 즉 NCR은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붕괴될수 밖에 없으며 자기자신은 그러한 역사적 흐름을 실행하는 23세기의 카이사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사실 이런 관점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중세시대에도 로마공화정의 역사는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로마공화정은 제정으로(따라서 중세시대로) 이어지는 중간과정에 불과한, 필연적으로 무너질수 밖에 없는 체제로 간주되고는 했습니다.
두번째는 바로 핵전쟁으로 종결된 냉전입니다. 연표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폴아웃 세계는 2차대전 종전을 기점으로 우리 현실세계와 점점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폴아웃 세계관에서는 냉전이 단 한차례도 완화되지 않았고, 2077년까지 격화되다가 핵전쟁으로 종결됩니다.
국제적 협력은 계속 쇠퇴하다가 UN본부가 장난감 회사에 팔리면서 소멸하였습니다. 폴아웃 세계관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자유로운 시민사회로 시작된 미국을 압도하고, 그 자리에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무력화하고 애국심과 반공주의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거세해버린 전체주의 국가만을 남겼습니다.
이 냉전이라는 테마는 폴아웃 시리즈 전반에 짙게 배어 있습니다. 폴아웃 시리즈는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촌스러운 포스터, 50년대 이전의 음악들, 광적인 애국주의와 반공주의 등등 50년대 미국의 문화적 모습을 대량으로 차용해오고 있죠.
이 두 역사적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폴아웃 세계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 -그에 따라 각 세력들 간의 대립구도 역시- 이 사건들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로마공화정의 몰락은 카이사르에 의해서 "역사적 필연"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로마공화정과 같이 끊임없이 자유로운 시민들의 존립기반을 해치는 지배층의 탐욕입니다. 단지 시저의 말로만 나오는게 아니라 실제로도 브라민 거상들에 의해서 재산을 빼았긴 NCR 시민이 등장합니다. 단지 NCR 내부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도 아니죠. 지배층의 탐욕이 패권을 향하게 되면서 NCR을 피비린내나는 군단과의 전쟁으로 이끌었고 그 사이에 모하비 토착민들이 끼어서 크나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바로 냉전의 연장선이자, 인류의 종말로 끝난 엔클레이브와 전쟁전 미국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공화국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과하고 있는 사실인데요, NCR은 작중 등장인물(라울 테하다, 미스터 하우스, 시저 등등)과 인트로 나레이션에 의해서 "전쟁전 미국의 가치를 계승한 사회"로 간주됩니다.
즉 다른말로 하자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폴아웃 세계관에서 실패했다는 뜻이며 NCR은 그 경로를 똑같이 따라가고 있는 또 다른 엔클레이브의 씨앗에 불과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냉전이 20세기 후반에 끝난 우리와 달리 폴아웃 세계관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로마공화정과 같이 철저하게 무너졌으며, 그 과정에서 핵전쟁을 통해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볼 때 NCR은 우리가 친숙한 민주주의 국가지만, 황무지인들에게는 (역사교육을 받았다면) 전쟁전 미국의 불편한 재림으로 해석될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후자의 시선은 작중에서 주로 묵시록의 추종자 소속인물들에게서 종종보여지고는 합니다. 또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시저의 군단의 지도자인 에드워드 샐로우씨 께서 묵시록의 추종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죠.
이 지점에서 시저의 군단은 단순히 "안정과 치안"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된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시저는 배달부와의 대담에서 전쟁전 미국의 역사로 회귀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류 문명을 만들기 위해서 군단을 만들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NCR을 꾸준히 전쟁전 미국과 로마 공화정 등으로 등치시켜 설명하죠.
거기에 더해 NCR을 "단순히 증오하는게 아니라 사상적으로 적대하는 것이다" "NCR은 전쟁전 미국의 모든 문제점 -부정 부패와 정치적 혼란-을 그대로 재현했다"라고 주장하죠. 묵시록의 추종자 출신인 그가 보기에 NCR은 단지 전쟁전 미국을 아무런 비판없이 재현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핵전쟁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에 불과한 셈입니다.
뉴베가스를 둘러싼 대립구도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vs 독재"라는 지루하고 뻔한 질문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폴아웃 세계관의 역사적 흐름을 어디로 틀어 버릴것인지를 질문 받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나가던 황무지인 A 한테 "NCR이 새로운 엔클레이브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NCR과 군단 간의 대립구도가 단지 거시적인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수많은 NPC들의 대사와 여러 연출들, 사이드 퀘스트 등으로 미시적 수준까지 잘 구현되어 있기 대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들 중에 NCR의 행보에서 패권을 쫓으며 자유로운 시민들의 생존기반을 끊임없이 잠식하는 지배층의 모습이, 애국심을 내세워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전 미국의 모습이 단 한번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화국이 외부의 적들이 아닌 내부의 불평등에 의해서 공격받는다면 어떻게 해야될까요? 거대한 공화국의 몰락이 핵전쟁과 인류의 멸절을 불러왔었다면 새로운 인류는 차라리 시저나 미스터 하우스와 혹은 배달부 같이 능력있는 개인의 권위에 굴종하는 것이 더 안전 할까요?
현대문명에 사는 우리 플레이어들은 이 모든 질문에 완벽하고 명쾌한 답을 제공할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지나야만 날아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단 한번도 뉴베가스를 플레이하면서 "완벽한 루트"를 타고 있다고 느낀적이 없습니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기나긴 인류의 역사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첫댓글 우리나라 인터넷에서만 그런진 모르겠지만 군단을 절대악으로만 보는 시각이 강한데, 군단은 단순한 악의 제국이 아니라는 관점에 동의합니다. 21세기 한국과 서방권은 민주주의 사회가 기본값으로 자리잡았지만 폴아웃 세계관은 NCR을 제외하면 전제정이나 과두정이 대세입니다. 핵전쟁으로 모든 게 날아간 세상에서는 말 그대로 힘센 놈이 왕이니까요. 시저도 글에서 말하신 것처럼 그냥 싫어서가 아닌 추종자로부터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이론을 전개하며 NCR과 싸우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냥 이의를 품거나 하는 걸 넘어 교육 및 이념을 기반으로 시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NPC는 개넌과 율리시즈인데 전 그 둘이 특이하다고 봅니다. 군단에 적개심을 직접 드러내는 동료를 더 찾으면 부운과 캐스인데 부운은 가족이 죽은 원한으로 군단을 싫어하고 캐스는 NCR시민+군단의 남존여비를 근거로 싫어합니다. 다른 NCR NPC야 군단이 공화국의 적이니 싫어하는 건 당연하고... 이념과 후천적 교육을 근거로 군단을 비판하는 NPC는 더 찾아봐도 개넌과 율리시즈, 하우스밖에 없었습니다. 개넌은 엔클레이브 잔당+추종자여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군단을 비판하고, 율리시즈는 부족민이지만 전쟁 전 지식을
익혀 분석한 끝에 NCR과 군단은 모두 잘못됐으니 다 없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동료 중에서 더 찾자면 베로니카가 있는데 베로니카는 캐스와 비슷하게 군단이 싫어하는 강철형제단원+군단 문화에 대한 반발로 싫어하는 쪽에 가까워서 역사 지식과 이념을 근거로 군단을 반대한다고 보기 애매하다고 봅니다.
게임에선 군단 본진(후버댐 옆에 세운 요새는 군영이고 본진은 애리조나 쪽입니다)과 전진기지 몇 개만 있어서 군단 세력권의 정세는 NPC들에게 듣고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군단의 적이 아니면 신민으로서의 삶은 보장됩니다. 노예제가 있지만 다른 레이더 무법자들도 노예는 부리니 노예제에서는 군단이 특이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군단은 전제정의 한계도 가진 세력인데 시저가 뉴베가스 시점에서는 나이도 제법 있고 지병도 있습니다. 부하들도 울페스 인쿨타(책사), 라니우스(장군) 같은 애들은 자기 분야에서는 유능하지만 모두 잘 하거나 시저급으로 골고루 뛰어난 인재가 없고, 시저도 후계자를 확실히 지명했다는 이야기는 없기에 뉴베가스 정사가 어느 쪽으로 정해지든 시저가 죽는다면 군단은 어떤 식이든 혼란을 겪을 거고 결과에 따라 망하든 다른 정체성을 갖든 하겠죠. 물론 이건 뉴베가스 정사가 어느 쪽이든 정해지기 전까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요.
뉴베가스에서 다른 전제군주를 찾자면 하우스가 있는데, 뉴베가스 시는 CPU 역할을 하는 하우스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뒤로 안정을 되찾고 지정학적 이점 덕분에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시큐리트론을 확보해 적어도 뉴베가스 시 주변은 교외(?)인 프리사이드에 갱 NPC가 덤비는 걸 빼면 안전합니다. 그리고 하우스는 핵전쟁 때 유명한 사업가이고 전쟁 전 지식도 쌓아서 군단이나 강철 형제단의 이념을 이념으로 문제점을 지적할 지적 수준이 있고요.
(하우스 루트에선 군단은 시저가 죽으면 혼란에 빠져 와해될 거라고 예측하고 강철 형제단은 전쟁 전 군사기술에만 집착하니 없애라고 합니다)
하우스는 NCR을 어떻게 보나요?
@마스터치프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봅니다.
뉴베가스가 어느 쪽이 정사로 채택될지는 판권을 가진 베데스다가 훗날 정할 일이지만, 다른 폴아웃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선악 이분법으로 세력 호오를 판단할 게임은 아닙니다. 전 직접 사서 해본 게임은 3, 뉴베가스, 4인데 3에서 강철 형제단 동부지부는 주인공 아버지가 연구하던 수도황무지의 정화수 공급 계획을 완성해서 황무지 주민들에게 유료로 판매하지만 계획을 돕던 리 박사는 이 결정에 항의해서 보스턴 인스티튜트로 떠나 4에서 분기에 따라 돌아오거나 남을 수 있고, 물 공급 계획을 가로채려던 엔클레이브에서도 '정화'를 목적으로 물을 쓰려던 이든과 물을 주민 통제의 수단으로 쓰려던 어텀의 계획이 달랐죠.
4는 파더와 댄스의 정체 앞에서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레일로드의 방향성, 신스 자체의 선악 문제처럼 선악 이분법으로 따질 수 없는 문제가 많아서 댓글로 모두 적기엔 양이 많지만, 그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음이 폴아웃 시리즈의 매력에 포함되고요.
?! 세상은 지상의 하등 민족과 지하의 순수혈통 민족 두 분류 아니었어요?
더러운 황무지인들 주제에...
인스티튜트를 위하여...
이글보다 뽐뿌와서 어제 미드 로마 보다 잤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