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또는 먹고있는 양식의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리를 하기에 앞서서 이 요리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가록들을 살펴봄이 정확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턱되고 살펴보면 아니되기끼에 우선 우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호텔에서 부터 시작됨으로 호텔의 엿사 부터 살펴보고 난 다음 요리의 여사를 호텔의 발전과 연관시켜 살펴보도록 하자
본론
서양요리가 우리나라에 전래된것이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한 문헌이 없어 단정짖기 어려우나 개화의 바람과 함께 전래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도입배경을 살펴 보면 양식을 제일 먼저 맛본 사람은 초대 주한 미국공사 후트 장군을 고종에게 소개한 윤치호 선생이다. 1882년 5월 3일 강화에서 맺은 한미 수호 통상을 그 분이 후트장군과 같이 진행, 조인하고 난 다음 천막에서 축하파티를 거행했다.
그 다음으로 고종 20년인 1883년 초대 주미 전권대사인 민영익과 그의 수행원인 유길준일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 첫 발을 내디딘 주한미국공사에 대한 초빙사절로 미국에 건너가는 도중 선편으로 40일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돌았는데 후트 공사가 상해에서 타고 온 기선을 되돌려 타고 갔으니 아마 함상에서 부터 양요리를 맛보았거나 뉴욕에서 당시 미국 21대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찾아가서 고종의 국서를 봉정할 적에 ‘디너’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서양요리를 제대로 접하기 시작한 사람은 고종과 순종이었다고 볼수 있다. 양요리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생억지로 먹었으니 실로 딱한 노릇이었다. 고종 32년 8월 20일 경복궁에서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은퇴했던 대원군이 다시 등장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방에 몰아넣고 말았는데 이때 제일 두려운 것이 음식이었다고 한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겠고 먹자니 독약을 섞었을까 겁이나서 차마 수저를 들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외국 사신중 ‘러시아’공사‘웨벨’의 부인이 손수 조석 수라를 만들어 이중 철궤 속에 넣고 자물쇠로 채워 궁중으로 배달하는 지경에 이르렇으니 싫으나 좋으나 양식으로 이어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위에서 보듯 고종은 그해 12월 21일 새벽 정동‘러시아’ 공관으로 옮겨 석달 동안은 오로지 철궤속에 잠겨져 들어오는 양 요리로만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머무르는 동안 양식맛에 익숙해 지고 말았다.
그래서 덕수궁에 돌아온뒤 예전과 정반대로 ‘러시아’ 공관에서 양식을 시켜다 먹고는 했다. 물론 궁궐에는 양식을 만드는 지기등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즈음에 누구보다 황제에게 양식의 짐미를 들여다 준 사람은 손탁이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웨벨공사의 처형으로 처음에는 양과자를 만들어 민비에게 선사하여 환심을 산후 민비에게 서양요리를 강습도 해주고 손수 요리도 만들어 바쳤다.
당시 32살 꽃다운 나이으 올드 미스인 손탁은 고종의 양식 시중으로 신망을 얻어 마침내 정동의 왕실부속 건물을 기증받아 황실의 양물 일체를 취급하는 어용계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뒤 정동클럽이 ‘손탁호텔’로 바뀌어 2층은 외래객의 객포로 쓰고 아래층에선 상류 사교계를 주름잡던 이완용,이범진,윤호,서재필 그리고 궁중의 의전관 이학규,거부 이봉래 등이 드나들며 죠니 워커를 마시고 양요리를 먹게 되었으니 손탁호텔은 우리나라 첫 레스토랑이며, 손탁은 첫 웨이트리스라고 불러 마땅하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커피가 보급된곳도 손탁호텔이 었다.
일반에선 가배자차로 알려진 커피를 어찌나 진상했던지 고종은 중독이 되다시피 즐겼다. 이때 손탁과 함께 또한사람의 독일 여성인 엠마 크로벨이 궁중 시무를보았으며 엠마는 독일 해군 장교 붕니으로 손탁과 친해 지면서 대궐에 드나들게 되었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전후 지금의 세종로에는 부래상이라고 하는 프랑스인이 나무시장을 열었는데,그는 항상 어깨에 보온병을 메고 다니다가 나무장수가 다가오면 인사를 하고 보온병 속의 가배자차를 주었다고 한다. 나무장수들에게는 ‘양턍국’으로 불리던 가배자차가 오늘날 우리가 마시고 있는 커피이다.
1995년 손탁호텔이 철거되고 손탁이 떠나던 해 경회루에서 열린 뷔페 형식의 개국 축하 피티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황제는 마침내 특명을 내려 궁궐에 본격적인 양식도입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서양요리에 맛들인 고종은 궁중의 양식을 맡을 식보관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국 유학생 윤익을 않히고 서양요리의 본고장인 파리에서 일류 COOK을 초빙하여 집기일식을 사들이게 했다. 그리하여 런던대학 광산과 출신인 윤기익은 엉뚱하게 궁중의 양식도입에 공헌하게 되었으며 또한 궁중의 선무장 안순환도 양식기 도입에 큰 몫을 맡았다. 정식 무역 루트가 없었던 때라 처음으로 나간 해외 공관장을 통해 집기와 요리책을 사들였는데 매끈매끈한 포크와 나이프는 스워덴과 스위스에서, 도자기류는 벨기에에서, 글라스는 얇고 단단하고 투명한 프랑스 제품을 조달, 모든 그릇에 대한 제국의 배꽃마크를 새겨 권위를 높였다.
궁중의 다이닝홀도 프랑스 사람 콜브라의 협력으로 샹젤리궁의 스타일을 본 떠 찬란하게 꾸몄으며 냉장고는 없었지만 나무궤짝에 천을 깔고 얼음을 재어 원시적이나마 아이스 박스로 사용했다. 또 창고에는 외교 루트를 통해 각국에서 들어온 요리감들이 군침을 돋궜는데 창덕궁 연회장 창고에서 마저‘마드리드’제 딱지가 붙은 지증해 올리브가 나오는데 놀라움을 표할 정도 였다.
한일합방이 되기가 무섭게 일본은 프랑스 요리에 탐닉해 있는 고종의 환심을 사려는 듯 일본환궁의 요리사 요시무라를 고종에게 보냈다. 그는 14년 동안이나 파리에서 요리솜씨를 익히고 3년간 일본황실에서 일한 베테랑이었다. 요시무라 밑에 이태운, 이기풍 등과 보조원3~4명, 웨이터 10명 가량이 배속되어 고종의 입맛을 다스리는 양요리 팀으로서 나무랄데 없는 진용이었다. 이태문의 빵고ㅘ고자를 굽는 솜시에 당할자가 없었다. 그리고 이기풍은 고기와 닭 생선등 어,육류를 다루는데는 명수였다. 그는 도미를 저미는데 비단을 재단하듯 예쁘게 칼질을 할 뿐아니라 몇 인분이냐에 대답만 떨어지면 머리와 꽁지만 떨어져 나가고 주문대로 정확한 양이 도마위에 준비되었다. 생선을 후라이 펜에 익혀 접시에 담고 맛있는 소스와 계절에 맞는 채소를 곁들이는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고 할수 이었다.
당시 궁중에 교훈처럼 퍼져 있는 한 도막의 실화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요리장이 식민지 각국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기로 국왕과 약속했는데 재료가 시간에 맞추어 당도하지 않아 약속을 못지킨 주방장이 자살했다는 애기가 있다. 고종은 이같이 훌륭한 주방장과 웨이터를 두고 제맛나는 본고장 양식을 즐겨 매주 금요일에는 신하들을 위해 양식을 준비했고 매주 수요일에는 왕족들을 위해서 궁중에 있는 동행각에서 이른봐 만찬을 곧잘 즐겼다.
윤치호는 1885년 초대 주한공사 후트장군과 상해 미션 스쿨중서 학원을 마치고 W 본넬교수로 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제 1호 감리교인 세례를 받은후 다시 미국에 건너가 내슈빌의 밴더빌드 대학과 조지아의 메모리 대학을 마쳤고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따라 모스크바에 다녀오는 길에 일행과 떨어져 파리에 머물렀던 관계로 미국식과 프랑스식 요리에 흠뻑 젖어들어 귀국하자 약현에 대저택을 꾸미고 처음으로 양식집을 차렸다.
더구나 선생은 노라여사와 국제결혼을 하여 그 당시 서양식(스토브)까지 장치하고 에그프라이며 토스트에 버터를 바른다. 오트밀을 끊인다는 등 장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외무대신을 지닌 아하영과 통역관으로 서울시장을 지낸 이채연도 자신의 저택에서 양요리 숙주를 불러다 놓고 무도회까지 벌였는데 이들은 외국손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양요리를 대접했다. 알고보면 이같이 외국물에 젖은 사람들이 양식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빠뜨릴수 없는 사람들이 외국 선교사들이다. 또 외국어 학교 교사들이 서양요리 보급의 촉매 역활을 했는데 피크닉,파티다 하여 영어선생이 앞치마를 두르고 수 십명의 학생들 앞에서 양식요리 강습을 벌이는 광경이란 영어 강좌인지 요리강좌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신문에는 외국어 학교 학생들이 배제학당 학생들을 초대하여 서양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선생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양식을 즐겼고 향수를 달랠수 있었던 것은 도리어 아펜셀러리 언더우드 그리고 영 .J. 앨런과 같은 옛 선교사들이었다. 그대신 이들은 상해에서 버터,치즈,드레싱까지 기선편으로 실어날라 양식의 명맥을 유지할수 있는 조달원 구실을 맡기도 했던 것이다. 윤치호의 집에서 소문난 양식이 처음 대중에 흘러들어간 것은 YMCA그릴이었다. 당시 일본문화가 마구 쏟아져 나와 이른바 혼마찌라던 충무로 일대에는 첫 양식집 정목당을 비롯 일본책 가게며 다방,까페 등이 문을 열어 동경의 긴자한 모퉁이를 옮겨다 놓은양 ‘게다’ 짝 소리가 드높았다. 양식만 하더라도 일식인지 양식인지 분간 못할 어중간한 것들이 즐비했다.
구미에서 갓돌아온 기독교 인사며 개화 지식인들은 당시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을 중심우로 종로에 모여 ‘이것이 양식이다.’ 라고 본 때를 보여주자는 뜻에서 YMCA그릴에서 양식을 즐겼다. 윤영선은 1922년에 오아이호 주립대학에서 농학석사를 받고 돌아온 신예로 미국선교사 구룹과 양식을 종종 나눴는데 버터,우유,그리고 고기를 자급자족하려는 야심에서 개성에 송고 목장이라는 꽤나 현대식 시설을 갖춘 목장을 만들 정도였다.
아무튼 충무로 쪽에는 일본계,종로쪽에는 한국계의 양식이 도사려 3~4평 정도의 YMCA그릴에는 신지식인들로 붐벼 점심때는 서서 양식을 먹는 진풍경도 예사로 일어났다.
YMCA그릴이 번창하자 김동성이 ‘백합원 그릴’을 열어
서양에 다녀온 사람을 만나려면 YMCA나 백합원에 가면 된다라는 말이 나오게끔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뒤에두고 본격적으로 호텔건립과 철도 개통이 서양요리 발전과 동시에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형성기
1899년 9월 18일 경인 철도 게통을 게기로 1905년에 경부선의 계통,1906년에 경의 선의 계통으로 부산-신의주 간에 급행열차 융희호가 운행되면서 차내식당이 생겨나 열차 내 승객들에게 음식은 제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철도가 완성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로 이동함에 따라 철도역 주변에 숙박시설이 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긴자본이 참여할 만한 능력이 못되 철도회사 자체적으로 건설하고 운영할수 밖에 없게 되자 자연히 호텔업은 철도사업의 부대사업이 되었다. 우선 부산역사를 2층으로 건립하여 1층은 대합실로 2층은 호텔 객실로 꾸며 1912년에 개관하였는데 이 호텔이 우리나라 철도 호텔의 효시이다. 이어서 철도호텔, 조선경성 철도 호텔,금강산 호텔,장안사 호텔,온양온천 호텔 등이 계속 계관되었다. 그후로부터 2년후 1914년 3월에 조선 호텔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관광사업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철도 호텔의 시초였으며 철도호텔의 식당이었던 서울역 그릴이 1925년 탄생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숱한 화제와 서양요리기술을 양성,향상시킨 산 증거로 보고있다.
우리나라 요리업계의 인맥을 살펴보면 고종때 일본인 요시무라 밑에서 일하던 이기풍을 1대 원조로 볼수있고 2대로 이규태와 김원식을 들수 있다. 이규태는 현 한잔 남부 영업소 자리에 있던 경성호텔의 요리장 이었고 김원식은 금강산 그릴에서 일하다 6.25때 납북되었다. 이규태는 후에 프랑스 파리에 요리유학을 가기위해 소련땅까지 갔다가 소원을 못이루고 돌아온 슬픈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외교구락부 이중일은 증언했다. 요리업게는 원래 1924년 1월 20일에 김창열을 중심으로 충무로 1가 소재 명치옥에서 이규태 외 5명이 애우회를 조직하고 김찬열의 집에 본부를 차렸다. 이것이 후에 조리사 협회의 모체가 되었고 그해 2월 10일 이규태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 당시 요리수준을 국제호텔과 성북동 곰의 집에서 근무하던 남복성 옹의 증언에 의하면 일반집에서는 햄버거를 ,절구통에 찌어서 만들었도 소스는 그레비소스와 하이라이스,카레 등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양식인구가 서울 인구를 50십만으로 잡고 줄잡아 5천 명으로 잡았는데 삭식 양식 인구는 5백명이라고 일인들이 자료를 뽑아놓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양식이 지금보다 더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도 볼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요리를 소개한 책은 ‘조선 무쌍신식 요리제법’으로 1915년에 종로에 있는 한흥서점에서 강은영이라는 사람이 출판한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 책을 보면 소스로 미트볼,토마토,돈까스와 이탈리아 스프등이 있고 디저트로는 케이크,아이스크림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1930년 9월 18일 국내 최초로 서양요리 책이 경성부인회 편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션영대조 셔양요리법’으로 판형은 국판,전체 쪽수는 313쪽이며 영문과 국문의 대역판이다.
이 책의 머릿말은 1930년 4월 15일자로 연희전문학교의 백남석이 썼으며 목차는 24개 항목으로 22종의 요리분류와 오븐을 사용하는 방법, 용어 해설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양목표는 대개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볼수 있다. 지금의 서울역은 1925년 당시 서울 인구가 약 10만 명이었는데 5배인 50만 정도로 늘것을 예상하여 지엇다고 한다.
이곳은 부산을 거쳐 함경도 만주로 가는 실업가, 여행객들이 많이 왕래하던 곳이다. 당시 메뉴는 낮에는 스프와 생선,빵 그리고 쇠고기, 닭이 준비되었고 디저트는 아이스크림과 과일,푸딩이 제공되었으며 밤에는 칵테일과오드불이 제공되고 샐러드,커피 등이 나왔다.
양식은 프랑스 식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되었으니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양식값은 당시 쌀 한말에 70전, A정식은 3원 20전 정도이니 양식한끼에 쌀 다섯 말 값이다. 설렁탕이 15전, 카레라이스가 30전, 일식정식이 1원 정도였다. 이 당시 손님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고 1920~1930년대에양식당에 다니는 한국인은 여운형,김규식,서재필,윤피연,윤덕영,이영민,김을한 등 대부분 미국으로 유학 갔다온 신지식인들 이었다. 1938년 11월 2일 저녁에 2원 낮에 1원 50전의 가격ㅇ로 메뉴를 살펴보아도 저녁에 8가지 코스 요리가 제공되었다.
정체기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국호텔업은 본격적으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해방직후의 사회혼란과 6.25동란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1961년까지는 호텔업의 발전은 정ㅊ기 였다고 할수 있다. 일제말에 총독부와 개인이 운영하던 철도 열차 식당,역 구내 식당과 조선호텔,반도호텔,부산 철도 호텔 들은 해방후 미군정에 의해서 관리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 민국 정부수립에 의해 교통부로 이관되었다.
해방 서울에서 양식만 취급하는 그릴은 미장과 수도 그릴이었다. 미장 그릴은 1945년 11월에 개업한 양식집이다. 그 중에도 미장은 당시 한민당 인사들의 본거지 였을 뿐더러 미군정하의 정치 집회소 같은 인상을 줄만큼 정치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이당시 조병옥 박사는 주방에 메뉴를 직접써서 요구했을 정도로 일가견이 있었다.
해방 전에는 프랑스식이 유행했었는데 미장 그릴에서 조병옥 박사가 미국 식으로 짧은 시간에 식사할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 때문에 서울시내의 식사가 모두 미국식이 되었다. 그래서 한 접시에 닭,생선,채소 등을 같이 제공하는 것이 이 당시 유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cold meat와 더운 채소로 baked beans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식자재는 대개 일본을 통해서 수입해 왔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수복후에 현재 중앙우체국 자리에 다시 식당을 신축하였고 옛날에 근무하던 많은 사람이 모여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주방에는 10명정도의 요리사가 근무했다.
요리는 손님이 오면 오드블을 주고 3가지 정도의 칵테일과 3가지정도의스프와 주요리로 방자스테이크인이 개발한 한국이 제공되었고 소스로는 도비소스,디저트로는 푸딩을 많이 제공되었는데 70년대 초반까지 전문식당의 요리가 비슷했다고 보지만 체인호텔,미군부대 물건으로 인해 식재료가 약간씩 변화되었지만 요리는 크게 변하지 않고 맛과 조리법도 그대로 유지 되었다.
그후 미장그릴이 근무하던 많은 요리사가 전국으로 퍼져 양식요리를 하게 한 서양요리의 원조라고 할수 있다.
그후 1950년 6.25가 나서 서울에 있는 식당들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 중에서도 미장그릴은 대전에서 잠시 영업을 하다 서울로 와서 현 중앙우체국 자리에 식당을 개업해 많은 수익을 올려 여러개의 식당을 체인 비슷하게 개업하여 영업을 확장했다. 서울 시청의 구내 식당도 그 무렵에 개업하였다. 그후 이중일은 외교구락부를 인수하여 윤성모와 같이 일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는 53년간 웨이터 서비스맨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1928년 16세에 열차식당에 들어가 25년간 근무했고 해방 후 식당사장과 지배인으로 장안의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돋구워 주던 한국최고의 서비스맨이고 양식사의 산 증인으로 모든이는 인정한다.
우리나라 요리업게를 살펴보면 외교 구락부 주방 총책임자인 윤성모 옹은 1905년생으로 그 당시 우리나라 요리업게에서 유명하였다. 이분은 일어, 영어가 능통하여 다른 웨이터 보다 많은 외국손님을 접대할수 있었닥 한다.
그리고 매일같이 다른 메뉼 고객을 만족시겼으며 외교구락부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스프,육류,생선,샐러드,전체,디저트 등이 몇백가지 넘는다고 한다. 이 당시의 주방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됨 신성 불가침 구역이고 유니폼은 청결과 봉사의 상징으로 흰색에 모자까지 썼다. 그리고 주방에서 손 닦는것을 중요시 했으며 요리사는 외과의사가 수술하러 들어갈 때와 같이 깨끗이 소독한 손으로 요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청결을 강조했다. 또 이분은 철두철미한 성격 탓에 잘못된 요리는 즉시 쓰레기 통에 버리고 한군데서 오랫동안 열심히 근무하는 자세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였으며 외교구락부에서 1958년부터 1976년 11월 7일 까지 일생을 요리사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윤성모 옹과 오랫동안 근무하던 사람은 연규학,최인식,이광길 등이 있는데 이광길은 외교구락부에 근무시 김영삼 현 대통령의 주례로 결혼했다.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의원으로 양식은 즐기는 단골손님으로 외교구락부에 자주 출입했다. 또한 이광길은 도큐 호텔 DPEN당시 총주방장으로 근무했다.
6.25당시 부산에미군부대 장교구락부가 있었는데 여기의 주방장은 일본에서 오사카 상업고등학교를졸업하고 요리사를 하면서 일본 사방사 협회 총무일을 하던 윤성모 옹이 해방 후 귀국하여 부산에서 주방장으로 근무할 때 한국 최초 조리 이사인 박명선이사가 접시닦기로 처음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훗날 이분은 유솜에서 주방장을 했으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이분은 근무하면서 동국대 대학원까지 마쳤는데 상사가 찾으면 동료들은 그를 항상 변명해 주었다고 한다.그 당시는 서로 돕고 돕는 우애가 강했던거 같다.
이분과 비슷한 어두웠던 시절에 우리업계를 끌고가신 분들은 ㅁ낳지만 몇분만 소개하자면 박병희,최병욱,하태두,송인식 등이 있었고 특히 전자에 소개한 하순철 옹과 전정실 옹이 있었다. 하태두 옹은 1000페이지에 달하는 조리용어,메뉴등을 생전에 수기로 남겼다. 출판여건이 좋아지면 책을 펴서 후배들에게 전수할 생각으로 메뉴를 불어로 작성하고 재료,용어,등의 불어를 한글로 번역한 정성은 대단하다.
그리고 라칸티나를 개업한 전정실 옹은 이태리 요리를 시작한 요리의 대가이다. 이분은 라칸티나에서 근무하며 소스에 대한 글을 수기로 남겼다. 이 당시 서울시의 서양요리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전채로는 새우 칵테일과 브랜디 칵테일 소스가 유행이었고 스프로는 이태리 정통 야패 스프(육수,야채,양파,당근,토마토,파,버섯)양파,치즈 스프, 러시안 스프, 크림 스프등이 이었다. 특히 콘소메 스프는 안심날개와 야채를 넣고 끊였다.
샐러드는 후렌치 토마토 드레싱(지금 후렌치 드레싱에 토마토 첨가),다우전 아일랜드 드레싱, 탈타르 소스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생선 요리는 생선에 밀가루를 묻혀 기름에 익히는 무니엘 스타일에 버터소스와 갈색 버터소스를 많이 이용하였다. 생선뼈를 오븐에 굽고 생선 육수와 갈색 루를 넣고 끊인 다음 버터를 넣어 걸른후 사용했다.
육류는 도비소스를 많이 사용했고 냉장고가 없어소 안심을 그날 그날 들여다가 소제한 다음 다시 헝겁에 싸서 얼음을 깔고 그 위에 올려 숙성시키고 피를 일부제거한 다음 고기를 썰어서 고객에게 제공했다.
도비 소스는 원래 그레비소스 인데 일본사람 발음들이 도비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 당시 소스 만드는 방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큰통 100L겅도에 고기,야채,토마토,페이스트를 볶아서 넣고 끊이다가 주방에서 쓰다남는 식재료를 모두 첨가한 후에 게속 끊이면서 그날 쓸 만큼을 덜어서 사용했다. 불위에는 계속 갈색 육수 소스가 끊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3~4일 끊이다가 야채,고기는 걸러서 버리고 재료를 계속 첨가하여 소스를 남들었기 때문에 지금보다도 맛이 더 좋았는짇 모른다. 그 당시는 고기국 소스가 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닷가재가 유행이었고 뉴버그 스타일과 아메리칸 스타일이 있었는데 뉴버그 스타일은 아메리칸 소스에 크림소스를 섞어 사용했고 아메리칸은 석쇠에 바닷가재를 구운후 토마토 소스를 곁들여 제공했다. (생크림이 없어서 분말우유를 사용했다. )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을 많이 제공했는데 분유,설탕,노른자 등을 끊여 앙글레즈 소스를 만들어 통에 넣은후에 넓은 통에 소금을 넣고 얼음을 넣은 후에 앙글레즈 소스를 담은 통을 그 안에 넣고 손으로 통을 굴린후 아이스크림을 얼려서 사용했다.
디저트 소스는 사바용,앙글레즈를 주로 사용했고 초코렛 소스도 코코아와 분말 설탕을 섞어 직접만들었는데 이것이 휘핑크림이다. 선배님들이 양식에 사용하던 색재료중 미군부대에서 조달이 안 되면 있는 재료를 가지고 근사치에 가까운 요리를 만들어 양식을 보급시키고 체계화 시켰다. 여러 측면에서 지금의 우리는 헤택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 전에는 오븐도 없이 모두 조개탄을 사용했고 그 후에 석유 석우 스토브를 사용했는데 불의 조절을 위해 석유 버너에 흙과 벽돌로 가마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당시는 손님앞에 철판을 갖다 놓고 웨이터가 요리를 한꺼번에 가져다가 일일이 고객의 뜨거운 철판위에 서비스를 했다. 프랑스 식인데 이것을 러시안 서비스라고도 하고 모찌말이 서비스 라고도 한다.
정착기
1060년 1월 1일에 설악산관광 호텔과 동년 10월 6일에 서울의 아스토리아 호텔,메트로 호텔 등이 개관, 운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과도기의 호텔 설립은 불과 7개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리업계는 해방 후 1946년 10월 15일 다시 대한 노총 조양사 연맹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김원식은 납북되었고 1950년 5월 22일 다시 사단법인 대한조리사협회로 보부사의 허가를 받아 이규태가 회장으로 산출되었다. 전쟁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서 1956년 3월 15일 까지 이규태가 회장직을 맡았다. 우리 요리업게에 2대 원조로 두 사람이 쌍벽을 이루면서 이끌어 왔고 그 후 이갑용,김기춘,최학천 등이 1956년 3월3일까지 한국조사연합회로 개칭하여 협회일을 돌보아왔다.
이 당시에는 서영요리를 하는 사람이 적어서 서로가 거의 얼굴울 알정도 였다. 실력이 평준화도어 한곳에서 스토브 일을 하면 다른곳에서도 스토브 일을 할 수 있었다. 주방장이 실력을 인전하면 상대방 주방장이 실력을 확인하여 주었고 봉급도 서울시내가 비슷한 수준을 이루었다.
1961년 8월 22일 관광산업진흥법의 제정과 다음해에 제정된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관광호텔들에게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시설을 기준으로 우수한 호텔을 선정 관광호텔로 분류하여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최초의 관관호텔로 선정된호텔은 메트로 호텔,아스토리아 호텔,사보이 호텔,그랜드 호텔 등이다.
1961년 6월 26일 국제 관광공사가 설립되면서 반도 호텔, 조선호텔,그리고 7개 호텔의 경영권이 인수 되었다. 1963년 4월 8일에 개관한 워커일 호텔은 한국호텔 사업에 있어서 최초의 현대적인 호텔이라 할 수 있다.
1970년 3월 17일에는 국제관광공사와 미국 아메리카 항공사가 합작투자한 조선 호텔이 개관되어 처음으로 자본과 경영이 분리 운영되는 호텔이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뎐 요리사들이 호텔에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유는 미군첫수로 인한 인원감원과 체인호텔 건설로 영어에 대한 필요가 요구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백인수,박규약 등은 조선 호텔의 재오픈을 계기로 조선호텔에 근무하였다. 그리고 박명선은 프레지던트 호텔,송장호는 풍전호텔에 근무,1971년 12월25일 대연각 화재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연각 호텔에 고재국과 허경화등이 주방
장으로 있었다. 그외에 많은 이들이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이 시기의 특징이다
1972년 하반기부터 우리나라 기업의 경제무대가 급속히 국제화 되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하였다.
정부는 미국 보잉사에 용역을 의뢰하여 ‘한국관공종합게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한국관광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국제관광공가가 운영하던 워커일 호텔,대한 여행사 등을 민영화 했다.
해방후 부터 이때 까지 우리나라의 전문 양식당은 30군데 정도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지금까지 존재하는 식당이 몇군데 있지만 대개는 모두 개보수 되었거나 업종이 변경된곳도 많다. 유일하게 메뉴,주방시설,홀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라칸티나,그리고 성북동의 곰의집 정도이다. 지금도 곰의 집에는 20년 넘는 나무가 홀을 반 정도 차지하고 있어 명물로 남아 있다. 메뉴로 전복 스테이크,후추 스테이크 등이 있는데 이것은 이윤형 옹과 남복성 옹이 직접 메뉴 개발한 것이 그대로 맛과 향이 계승되고 주방에는 20년 넘게 사용되고 있는 기름 스토브가 아직 사용되고 있어 옛날 그 맛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당 식당이다.
그중 특히 남복성 옹이 직접만든 존복 소스는 그 당시 장안 최고의 소스로 이름을날렸다. 만드는 법을 보면 먼저 전복을 삶을 때반드시 무를 전복과 함께 켜켜로 넣고 삶은 후에 전복내장을 분리하여 으깨어서 만드는데 그 양목표를 보면 양파 200g,당근 100g 셀러리, 마늘 5쪽, 바닷가재 2마리, 토머토 페이스트 200g, 코냑 50cc, 백포도주 200cc 치킨 부용 3L,월게수잎 약간,다임약간, 검은후추 약간, 땅콩 버터 60g, 비푸 베이스 10g 고추가루 약간, 전복내장 10개 정도 으깬 것으로 기본 소스를 만든후 마지막에 손님에게 제공할때 파란 피망을 아주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썰어서 살짝 볶아서 섞어주면 그 향이 아주 오래 간다. 그 당시에 있었던 식당들을 열거해 보면 호수 그릴(무고동),미장 그릴(충무로),제일 그릴(명동극장 뒤),중앙 그릴(영등포),오비스 케빈(명동),명동장,인디안 클럽(을지로),스카이 파크(유네스코 빌딩),미라보 (대한일보 빌딩),명문 싸롱(교육 회관),배재 그릴(배재 고등 학교 앞),훠시즌(조선 호텔 앞),동아 그릴(동아 빌딩),삼양 그릴(충무로),외교구락부(남산 밑 케블카 타는 곳), 유솜 크럽(미 8군 클럽),우촌각(천개천),외백(뎃ㅃ야끼
원조),송현 클럽(한국일보 건물 내),거구장(시청앞),반쥴(종로 관철동),시청구내식당 등이 있었다.
이들 식당은 해방 이후에 생긴 것이기에 일본과의 국교가 사실상 단절되고 미국을 비롯한 구미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맷으면서 구미인들의 한국 여행증가와 미군이 이땅에 주둔하면서 우리는 몇몇 식당을 제외하고는 미국식 요리를 서양요리의 기본으로 알고 70년대 후반까지 서양요리를 할수밖에없었다.6.25동란을 거치면서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기에 실제로는 요리가 암흑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어떻게 보면 정통 프랑스 요리는 해방 전이 더 질적으로 높았는지도 모른다.그 당시는 지식인 몇 사람만의 전용 식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식요리 식재료의 대부분이 미군부대의 암거래에 의해서 약간씩 조달되었다.냄비,스픈,쓰레기통까지도 미군 부대 물건을 양식당에서 쓰지 않으면 운영할 수
가 없을 정도였다.이런 와중에 한국의 양식요리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전혀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의식 중에 습득한 초기 서양요리가 미국식의 기초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다만 아쉬운 것은 그당시 극무하였던 유명 선배 주방장들의 메뉴, 양목표,주방시설,시스템 등에 관한 자료와 그분들의 발자취를 확실하게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이 적다는 것이다.
성장기
1975년 12월 31일 관광사업진흥법을 관광사업법과 관광기본법으로 분류하고 대규모 관광단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조성에 힘입어 1978년 107만 9396명의 외래관광객이 입국하였고 4억 810만 6000달러의 관광외화를 회득하여 한국관광사상 최초로 100만 묘ㅇ 돌파의 기록을 세운 해가 되었다.
그러나 1975년이 되면서 세계 제 2차 석우파동이 일어나 세계의 경제는 침체 속으로 빠지고 10.26 사건으로 시작된 80년의 정치격변은 사회,경제적으로 혼란을 가져와 관광호텔 사업은 두 번째의 시련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호텔들은 극심한 경쟁을 하게 되고 서울의 조선 호텔과 부산 조선호텔, 경주 조선호텔의 경영권이 미국의 아메리카 항공사에서 westin international로 인계 되었다.
결론
49년 조리 업계는 92년 싱가폴 요리경진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 했고 국내 조리경진대회 개최등 조리사 자질 향상에 힘썼다. 그리고 협회도 바명선,백인수 등을 거치면서 권익보호와 많은 업적을 남겼고 91년에 조리인 기술향상 해외정보를 위한 월간 잡지 조리(FOOD)의 창간을 보았다.
1996년 1월 19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30여년동안 주방을 지켜온 요리사들이 특급호텔 이사로 우뚝서 기업 경영에 까지 참여하고 있다는 기사와 특급 호텔 조리 아사들이야 말로 전문 기술직으로 요리사의 길을 열어온 개척자락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글과 함께 쉐라톤 워커힐 김방원 이사. 호텔 신라 이연경 이사, 프라자 호텔 백인수 이사에 대한 내용이 게제되었다.
선배들의 시대에는 요리에 대한 자질과 미적 감각에 앞서 인내심과 끊임없는 연구자섹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고 하지만 향후 우리는 이것과 더불어 자기의 요리를 정확히 평가해 주고 먹어주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 평가를 소중히 간직하고 개선할 줄 아는 올바른 자세를 지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