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사람들
김윤선
톤레삽 호수는 길이 160키로 넓이 36키로의 호수는 캄보디아의 중심지를 흐르며 3천키로의 면적에 수심이 1미터라고하며 조금 깊이 들어가면 3미터정도라고 한다.
베트남 메콩 강 줄기로 내려오는 호수며 우기 때는 제주도의 4배 정도 이르는 바다처럼 거대한 호수며 12미터의 물이 불어난다고 했다. 수상 마을이 생긴 것은 자유베트남이 공산베트남에 의해 패망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무동력으로 조각배를 타고 온 피난민들이라고 했다. 그 당시 캄보디아 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갈 곳이 없는 피난민들은 하는 수 없이 배위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물위에서 살다가 물위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강이 있었기에 오늘의 삶을 살 수 있는 신비의 강으로 섬기며 살고 있다고 했다.
배를 타고 경유를 할 때다. 강 입구에 옹기종기 작은 배위에 원두막 같은 집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연한 황토 물처럼 뿌연 물위에 집들이 둥둥 떠다녔고 큰 강물은 모든 것을 그들에게 재공해 주고 있었다. 생활용수로부터 배수처리와 강에서 나오는 물고기를 잡아서 주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강 한가운데서도 큰 건물을 지어 필수품이나 먹는 음식 등 우리나라 슈퍼처럼 관광객을 위해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특히 악어 사육도 하며 악어에게 물고기를 사서 먹이로 주는 것도 관광 상품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약 한 시간 넓은 강을 헤치고 나가니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지고 망망대해는 갈수록 하늘과 강이 맞붙어 마치 꿈속을 가고 있는 듯 했다.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강을 헤치고 저들이 여기 까지 왔을까, 출렁이는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세상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탐험 할 때처럼 끝없는 바다를 헤쳐 나갔겠지, 망망대해를 보니 영화에서 본 타이타닉의 멋진 장면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이 뱃머리에 두 팔을 펼쳐 세상을 끌어안은 모습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사를 같이 하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강을 이어 무엇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간간이 고기를 잡아 오는 배들이 통통 소리를 내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저들은 하루의 양식을 위해 먼 강으로 가서 고기를 잡아오고 있겠지, 넓은 강 물결을 타고 꿈처럼 황홀해 질 무렵 끝없는 지평선을 달리고 싶었지만 다시 되돌아 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휴식시간 배에서 내려 구경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이 물속에서 뱀을 잡아 헤엄쳐 언제 왔는지 배 곁으로 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초등학생 같은 애기 엄마가 어린 애기를 안고 작은 배를 저어 와서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에게 지폐를 주면 양쪽에서 손살 같이 헤엄쳐서 언제 왔는지 벌떼 같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주면 울고 보챈다. 우리는 미리 천 원짜리 신권을 바꾸어 갔기에 일부 나누어 주었지만, 그 때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오래 동안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마을 입구 한쪽 어귀에 조금 큰 배를 교실로 만들어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 33명의 어린이들에게 5십대 선생님이 칠판에 글을 써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 곳에도 못사는 집 아이들은 학교도 올 수가 없다고 했다.
저 어려운 아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하는 간절한 마음에 일어서서 우리 일행들에게 즉석에서 모금을 시도하여 20 만원을 걷어 보시를 했다.
지난 6.25 전쟁 후 미군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던 건빵과 껌 따위도 서로 한 개 더 주워 먹기 위해 안간 힘을 쓰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저들이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먹을 것이 없어 산으로 들로 바다로 다니며 온갖 것을 다 먹던 시대가 아닌가, 단 얼마라도 하는 나의 마음을 표시하니 선생님은 너무 감사하다며 몇 번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시했다.
작은 마음에서 20 만원 원 정도 모금은 그들에겐 너무 큰 은혜로움이 아닐까, 순간 마음의 문을 열어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행복해 진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곳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성장은커녕 피골이 상접한 몸과 까만 피부에 겁먹은 아이들이 큰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친다면 언제 어떻게 조각배 같은 집이 날아가 버릴지, 전쟁의 상처가 남겨놓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미소를 잃어버린 그곳 사람들을 보며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 동포들은 사할린에서 총칼로 마구 대 학살 당한 현장을 보고 왔다.
1946년 구 소련 중앙당 보고에 의하면 일본 정부의 사할린 강제 동원자는 2만 3천 여명정도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남은 사람은 5천 여 명밖에 없었다고 했다.
1940년부터 사할린에 살다가 2003년 3월 귀국한 김수영(73)씨는 14일 본지에 “에스토루 지역에서 1945년경 일가족 5명 정도가 트럭을 타고 사할린 남부로 이동하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1945년 귀국한 김경순(84)씨는 “사할린에서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다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다”며 “일본 경찰이 귀국하려던 아버지와 오빠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 총알을 퍼붓고 경찰서를 태워버렸다고 말했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일본정부의 만행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바로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을 자행 했다고 했다.
끌려간 사람들은 광산 노동자 벌목공 건설 노동자로 일을 했으며 모래벌판에 버려진 배를 타고 새우를 잡아 살며 오늘을 살아온 고려인들이다.
물위에 둥둥 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지난 역사와 꼭 같은 현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았나,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킨다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들은 일 할 곳도 없고 먹고 살 길이 막연하다. 아무른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궁색한 생활에서 그들의 모습을 깊은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른 나무처럼 바짝 마른 젊은 남자들이 큰 건물 짓는 곳에서 흙을 파 어께에 메고 나르는 형색은 보는 우리들의 마음이 더 힘이 들었다. 돼지 울 보다 못한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육지에 살아도 큰 비나 바람이 불면 재해를 입고 인명피해를 입는데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안전 할 수 있을까,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풍화등전風火登前 앞에큰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들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눈이 유난이 크고 까만 어린 아이들이 배위에서 공부를 하며 낮선 외국인이 다가가니 겁먹은 큰 눈들만 껌뻑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