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代에 이르러 漢藏(한족과 서장족) 간에 이루어진 소위 朝貢貿易이란 바로 "貢馬賜茶"를 말한다. 이러한 茶馬互市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일찍이 唐宋 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명나라가 藏族地區를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 원나라 때 책봉받았던 藏族地區의 귀족과 士官등에 대해 일종의 회유정책의 수단으로 그들에게 관직과 印信을 주고, 또한 그 직위는 세습토록 해 주었다.
동시에 명나라 조정은 西藏에서의 불교의 막대한 영향력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喇 敎(라마교)의 상층 인사들에 대해 특별한 대우와 예우를 해 주었으며, 아울러 황제의 칙명으로 그들을 보호하기까지 하였다.《明史》에 이를 잘 증명해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永樂時諸衛僧, 戒行精勤者多, 授喇麻·禪師·灌頂國師之號, 有加至大國師,西天佛 子者, 悉給以印誥, 許之世襲, 且令歲一朝貢."
"永樂(영락) 때, 각 衛(위)의 승려들 중에 戒(계)를 행하고 성실히 정진하는 자가 많아 喇 (라마).선사.관정국사의 號(호)를 주고, 게다가 어떤 자에게는 지대국사, 천불자란 호를 덧붙여 주었으며, 그들 모두에게는 印信을 주어 조정의 뜻을 알렸고, 그 직위의 세습을 허 락했으며, 아울러 일년에 한 번 朝貢하도록 令(영)을 내렸다."
朝貢貿易은 藏區의 番僧·官員들이 정기적으로 명나라 조정에 조공을 와서 말(馬)을 바치고, 茶를 하사받아 가거나, 혹은 茶를 개인적으로 구입해가는 것으로써, 官辦貿易(관판무역)이나 민간의 私茶貿易(사차무역)과는 또 다른 하나의 茶馬貿易의 형태를 이루었다.
조공을 온 番僧(서장의 라마승)과 관원들은 돌아갈 때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대량의 차엽을 하사받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보호와 허락 하에 자신들이 올 때 가지고 온 토.특산품을 이용하여 민간의 차엽 등의 물품을 교환하여 돌아 갔다.
조공으로 말을 바친 번승들은 명나라 조정의 이상과 같은 특별대우 덕분에 매우 많은 이익을 챙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藏區에서 조공을 오는 자의 숫자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게 되었다.
명나라 초기인 洪武.永樂 년간에는 그 수가 비교적 적었으나, 景泰年間부터 成化年間에 이르는 사이에 명나라 조정으로 조공을 오는 番僧의 숫자는 매우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宣德.正統 년간에 조공을 하러 入朝한 번승의 수는 불과 3.40명에 불과하였다. 景泰年間부터 그 수는 점차 증가하는 조짐을 보였지만, 그래도 약 3백명 정도에 불과 했다.
그러던 것이 天順年間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대폭 증가하여 무려 2.3천명이나 되었다.《明憲宗實錄》에는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禮部奏:宣德.正統間,番僧入貢,不過三.四十人.景泰間,起數漸多,然亦不過三百人. 天順間,遂至二.三千人.及今前後絡繹不絶,賞賜不 ,而後來者又不可量."
"禮部(예부)에서 보고하기를 : 宣德(선덕).正統(정통)년간 入朝(입조)하여 朝貢(조공)한 番 僧(번승)은 고작 3.40인에 불과했습니다. 景泰(경태)년간, 그 數(수)가 점점 많아지기 시 작하였지만, 그러나 역시 300인을 넘지 않았습니다. 天順(천순)년간에 이르러 그 수는 드 디어 2.3,000인에 이르렀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조공의 왕래가 앞뒤로 끊이지 않고, 하사 품의 양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지출되었습니다. 아울러, 이후에 (조공을) 올 者(자) 또한 (얼마나 많을지) 測量(측량)이 불가합니다."
이러한 貢馬易茶(공마역차)는 규모면에 있어서도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있는 官辦貿易(관판무역)과 私茶貿易(사차무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 또 다른 형식의 무역방법이며, 아울러 이것은 官辦貿易 및 民間私茶貿易과 더불어 明代漢藏茶馬貿易의 형식에 있어서 대표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番僧들의 조공의 횟수와 朝貢오는 使臣의 숫자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貢馬(공마)의 수도 해가 갈수록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洪武 18년(1385년)에 藏區의 승려 人參旦藏卜(인삼단장복)이 말 782필을 조공하였고, 그후 正統 7년(1442년)에 이르러 阿刺谷等簇(아자곡등족)이 貢馬 1,700여 필을 바쳤다. 57년만에 貢馬의 수가 두 배를 훨씬 넘어섰음을 알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명나라 조정에서 番僧들에게 하사한 賜茶의 규모 또한 실로 가관이었다. 成化 18년(1482년), 명나라 조정은 入朝하여 貢馬를 바친 番僧 章牙札巴(장아찰파) 등 263명과 札巴堅 (찰파견잠) 등 149명에게 모두 일인당 茶 50근 씩을 주었는데, 그 賜茶의 합계는 무려 2만 6백근에 달했다.
正德 13년(1518년), 명나라 조정은 서역에서 조공 온 喇 (라마)와 중국 內地에 머물었던 番僧들에게 食茶(식차:일상에서 마시는 차)를 8만 9천 9백근이나 하사하였다. 이 수량은 成化년간 때 보다 무려 4배나 더 많이 증가한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이상으로 보듯, 番僧과 명나라 조정 간의 貢馬賜茶(즉,貢馬易茶)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번승들은 명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하사 받은 賜茶 외에도, 또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온 土.特産品을 이용하여 茶葉을 구하기도 하였는데, 그 수량은 더욱 가관이었다.
《明英宗實錄》에 의하면, 正統 9년(1444년), 安定衛國師(안정위국사) 攝刺藏卜(섭자장복) 등은 京師로 朝貢을 와서 각기 茶 2천근 씩을 사서 돌아갔다. 또《明憲宗實錄》에 의하면, 成化 12년(1476년)에 大能仁寺(대능인사) 大悟法王(대오법왕) 札巴堅參(찰파견삼)은 개인적으로 구입한 茶葉 2만 7백근을 무사히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명나라 조정에 요청했다.
이로써 조공을 온 番僧들이 명나라 조정에서 하사받은 賜茶(사차) 외에도 얼마나 많은 차엽을 개인적으로 별도 구매해 가는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朝貢貿易制度(조공무역제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차발마제도와 함께 다시 상세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도표와 각주가 보이지 않으므로 원하시는 분들은 자료실에 첨부파일로 올린 <명대 한장다마무역의 발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