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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이론/교리/설 세르베투스의 심문- 40개항의 죄목에서 38개로
하토브 추천 0 조회 142 11.10.01 23:54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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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10.02 00:00

    첫댓글 세르베투스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의문시하는 듯하는 글을 썼다가 그것에 대하여 철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삼위일체가 삼두일신이 되어 괴물스러운 교리라는 것을 은근히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성령의 일체성을 더 강화시킨 교리를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아세례는 마귀의 교리임이 분명합니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삼위일체를 반대하였다 하여 도끼로 목을 찍어죽여야 한다고 하나님은 판단하셨을까요? 그러나 칼빈은 그것을 주장하였고 제네바 공회는 더 나아가 화형을 판결하였습니다. 제네바 공회가 그런 판결을 하도록 라틴어를 통역해준 사람은 칼빈이었습니다. 재판관들은

  • 11.10.03 01:28

    이댓글이 없다면 모두 이말들을 그대로 믿지 않겠습니까?
    <<칼빈이 그 당시 세르베투스의 (사형에는 찬성했지만) 화형에 반대한 것은 칼뱅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

  • 11.10.03 01:35

    세르베투스의 형집행은 1553년 10월 27일에 이루어졌다.
    그 전날 칼뱅이 파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칼빈 지지자들의 글들만 볼수 있을 뿐입니다.

  • 작성자 11.10.04 22:01

    칼빈이 참수형을 요청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논고를 통해서 그 재판관들을 격앙시킨 것은 칼빈의 부추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화형을 결정하자 만족하였고 한번도 저항한 적이 없습니다. 10월27일 화형식 날 칼빈은 집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 작성자 11.10.02 00:01

    독일어 사용자였고 세르베투스는 독일어에 능숙하지 못하였고 재판관들에게 라틴어 문서를 번역해줄 때 강력하게 처벌하도록 세르베투스의 주장들을 편향된 시각에서 번역해준 사람은 칼빈이었습니다. 재판관들은 모두 칼빈의 친구들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분별입니다.

  • 11.10.03 01:17

    만일에 하토브님의 이런글이 없다면 대부분 떠다니는 자료들의 내용들은 이런내용들입니다.
    칼뱅에겐 증인의 자격은 있었지만 재판의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칼뱅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다. 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고 그래서 투표권도 없었으며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 11.10.03 01:19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엔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뱅은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다..칼뱅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 뿐이었고,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는 없었다.
    라고 주로 칼빈을 옹호하는 내용들의 글만 볼수 있습니다.

  • 작성자 11.10.03 10:01

    저도 그런 취지의 글들을 한글로 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식의 거짓말은 영어로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반박들이 영문으로는 수백 수천개가 있기 때문에 문헌의 쇄국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한국에서나 통할 수 있지 국제무대에서는 안통합니다.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여야 한다는 글은 그가 수감된지 6일만에 파렐에게 주어졌고, 그는 줄기차게 세르베투스를 제소하고 논고하였으며, 사형집행일 전날에도 자기는 참수형으로 만족한다고 다시 편지했습니다. 칼빈이 반대하는 일이 제네바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칼빈이 고집하는 일이 안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만 참수형이 화형으로 바뀐 것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 작성자 11.10.03 10:01

    칼빈은 트집잡을 것에 혈안이 되어 세르베투스가 독신 생활하는 것을 트집 잡으려 했습니다.

  • 작성자 11.10.03 10:11

    세르베투스가 참으로 무엇을 주장했는가? 에 관한 문헌 자료들은 카톨릭과 칼빈측의 사람들이 모두 소각시켰습니다. 이단 서적이라는 이유였지요. 그러면서 인류는 칼빈측의 사람들이 평가해놓고 옮겨놓은 글들을 통해 그의 주장이 무엇이었는가를 상상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행히 기독교의 회복 등 몇 권의 책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 책들은 전세계에 3권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같이 누구를 신앙상의 이유로 죽인다음 정죄하고 왜곡시켜 남들을 가르치는 예는 카톨릭에서 무수히 있어 왔습니다. 그 예가 알비파들에 대한 카톨릭의 왜곡 선전입니다. 또 네스토리우스 재판도 그러했습니다. 그와 똑같은 방식을 칼빈과

  • 작성자 11.10.03 10:09

    그 후예인 장로교 목사들이 뒤집어 씌우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절대로 장로교 목사들은 제가 분석한 자료에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제가 성경 번역이 끝나면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 경우 역사자료들과 당시 재판기록 라틴어 문헌 자료등을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 작성자 11.10.03 21:47

    칼빈이 죽인 사람들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그루엣도 그중 하나인데 이자는 실제로 칼빈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리하여 불에 달군 꼬챙이로 혀가 뚫린 채 고문당한후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루엣의 분노를 야기시킨 것은 칼빈이었습니다. 그의 수많은 행동들이 위선이요, 고압적 교만으로 드러났음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칼빈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 적도 없습니다. 16세기는 교황들의 춘추 전국 시대였습니다. 독일교황 루터, 루터파 교황 멜랑흐톤, 스트라스부르 교황 부써, 취리히 교황 쯔빙글리, 제네바 교황 칼빈. 이에 반하여 재침례파는 빛도 없이 이름없이 싸우다 죽었는데 휩마이어, 샤틀러

  • 작성자 11.10.03 22:04

    등이 대표였습니다.
    칼빈에 대한 비판을 하다보면 열심히 칼빈을 비판한 다음 진정한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그들은 바로 무신론자들과 카톨릭 들로서 기독교를 흠잡고 말살하기 위한 열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이며 그러한 개혁주의자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참 기독교인들이 다수 있어서 그들이 형제들, 혹은 재침례교도들 재세례파 혹은 침례교도들로 불리웠다는 사실을 알려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부류의 책들 중의 하나가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 입니다. 그 책은 카톨릭 죄악사를 마치 기독교 죄악사인 것처럼 착각하게 써놓고 기독교에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 11.10.04 17:31

    순례하는 교회사를 읽어보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편안하게 신앙 생활 할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할 따름 입니다

  • 작성자 11.10.04 21:59

    인류역사상 그런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은혜시대 중의 은혜시대입니다. 그렇지만 곧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핍박이 시작되기 전의 폭풍 전야와 같은 시기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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