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서천 57코스 역방향 제2부
종천천-삼막골-장구리-송석항-갈목해안-와석마을회관
20230712
1.장구만 철새도래지와 갈목해변 풍경
지금까지 걸어온 57코스 역방향을 되짚어 본다. 비인면 선도리 갯벌체험장, 선도리 해변, 장포리 포성대, 장포리 장진개, 다사리 해변, 다사항, 다사리 마을, 종천면 종천리 들녘, 그 풍경들이 춤을 춘다. 어둠 속에서 걷다가 장포리 장진개에서 새벽의 여명을 보고서 다사리 해변에서 동트는 아침 바다를 맞았다. 새들이 분주히 날아가고 수평선 먼 데서 들려오는 듯 파도 소리는 간지럽고, 해송림에 부딪히는 바람이 상쾌한 향기를 날린다. 다사리 해변 작은 곶(串) 쉼터에 마련된 안식(安息)의 조형물과 휘날리는 만선 깃발을 보며 얼마나 편안하고 풍요를 느꼈던가. 또 하나의 방파제 곶(串) 쉼터에서 모자를 빼앗아 가려는 듯 몰아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억센 바다의 힘을 느꼈다. 펄럭이는 만선 깃발들은 삶의 강인한 의지의 표상처럼 나부꼈다. 다사리 해변의 완만한 해안선이 장구만 다사항으로 들어서서 내륙 골골을 파고들어 섬과 육지의 구별을 불분명하게 한다. 다사항에서 장구만의 기묘한 리아스식 해안선을 파악하며 기쁨으로 다사리 마을을 통과하였다.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깃대에서 펄럭이는 만신 깃발을 지나서 드디어 비인면과 작별하고 종천면 종천리로 넘어왔다. 드넓은 종천리 들녘의 푸르른 벼들의 싱싱한 풍경에 가슴이 푸르러져 청춘의 아침을 맞는 느낌이었다. 비인면 선도리, 장포리와 다사리, 종천면 종천리를 걸어와 이제, 이른 아침 안개가 퍼져있는 종천천을 건너 종천면 당정리로 넘어간다.
종천천에서 상류 쪽을 올려보면 종천리 중심지 마을이 보이고 하류를 내려보면 종천방조제에 의해 장구만 바다는 닫혀 있다. 종천방조제는 종천천 하구 장구만 북쪽 비인면 다사리와 남쪽 종천면 당정리 사이를 둑으로 이어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바닷물을 막았다. 그래서 장구만의 리아스식 해안 특성 한 곳을 만곡부(灣曲部)로 변화시켰다.
종천리 푸르른 들녘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가면 당정리 남쪽 지역이 환하게 보인다. 당정리는 천봉산 줄기의 낮은 언덕에 의해 남북이 갈려 있는 것 같다. 당정리는 1, 2, 3리로 구분되는데, 당정1리는 언덕 너머까지 걸쳐 있고, 당정2리는 장구만 해안에자리하고며 당정3리는 언덕 너머 희리산 서북쪽에 자리하는데, 백제시대의 고분군이 있다고 한다. 이 당정리 지역을 북동쪽으로 감싸고 있는 지역이 종천면 종천리 지역이다.
종천리 들녘에 특용작물 재배시설이 있는 곳 옆에 어디서 본 듯한 넓적한 돌이 놓여 있다. 청동기시대의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역에서 이 돌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굄돌은 없지만 고인돌 덮개돌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분명 남방식 고인돌이라는 확신이 든다.
서천군과 장항읍 지역에서는 마을 입구에 마을 표석이 거의 세워져 있지 않는 것 같다. 대신에 원수1리, 원수2리 등 마을 행정구역 표석을 세워 놓았을 뿐이다. 서천 지역 서해랑길만을 걸었기에 마을 표석을 못 보았을 수 있다. 마을을 알리는 표석과 그 마을의 유래를 표석 앞면이건 뒷면에 새겨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길손들이 그 마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정리에도 마을 표석이 없다. 해암수산 냉동 왼쪽 길을 따라 오르다 마을 주민 한 분에게 마을 이름을 물으니 당정1리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좁혀서 질문하니 그제서야 이곳은 삼막골이고 산 너머는 뚜드랭이라고 알려 주신다. 아, 그렇구나! 이곳이 삼막골 마을이로구나.
삼막골마을의 쉼터정자 옆에 아담한 느티나무가 푸른 잎들이 무성한 가지를 펼쳐 쉼터정자 지붕을 덮고 있다. 여름날 쉼터정자에서 더위를 식히는 마을 분들에게 느티나무는 그늘을 드리워 시원한 그늘 정자를 선사할 것 같다.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며 마을 분들에게 큰 이로움을 드린다. 느티나무가 더욱 크고 그윽해 보인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뒤돌아서서 당정리와 그 북쪽의 종천리와 서쪽의 비인면 다사리 지역을 살펴보았다. 방금 스쳐지나온 그곳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평화롭다. 다시 내려가 쉼터정자에서 힘겨운 여정의 쉼표를 찍을까? 망설임은 순식간에 날아가고 목표를 향햔 의지가 솟아올랐다.
대나무숲을 거쳐 언덕에 오르니 긴 직육면체에 지붕을 덮은 주택이 단단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정형화된 규격의 엄격함이 길손의 흐트러진 마음을 잡아준다. 개인 주택 같은데 지도에는 당정1리 마을회관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당정1리 마을회관을 겸한 개인 주택인가 보다. 당정1리 마을들은 언덕의 남과 북에 나뉘어 자리하기 때문에 그 중간 지점인 언덕에 마을회관을 둔 것이라 추정한다.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아주머니가 그릇을 들고 밭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아침 찬을 마련하기 위해 호박, 오이, 고추, 호박잎 등을 따러 가는 거겠지. 갑자기 허기가 느껴지며 입에 침이 돈다. 호박, 호박잎, 감자, 고추를 넣은 된장찌게 냄새가 코에 사무친다. 아주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 마당의 평상에 앉아, 데친 호박잎에 밥과 강된장을 싸서 입 안으로 넣고, 뜨거운 된장찌게를 한 숟가락 떠 먹는 모습이, 그려진다. 장면을 환상하며 행복감에 젖어, 탐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언덕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북쪽을 바라보니 색채 지붕을 한 건물이 보인다. 무엇일까? 지도를 보니 부내초등학교였다. 그런데, 부내라니? 무슨 뜻일까? 부내초등학교는 종천면 당정리와 경계를 이루는 종천리에 있는 학교이다. 종천(種川)의 토박이말은 북내, 이 말이 변하여 부내가 되어 종천리 지역을 부내라 이른다고 한다. 부내초등학교도 교명이 종천초등학교에서 바뀌었다고 한다. 멀리서 본 부내초등학교는 아담하게 예쁜 모습으로 보였다.
언덕길을 내려가면 부내초등학교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은 V 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V 자 왼쪽 길을 따라 내려가 꼭지점에서 V 자 오른쪽 길로 타고 오른다. 올라가는 길은 당정3리 방향이다. 안개구름이 희리산을 감싸고 왼쪽 뒤로는 더 짙은 안개구름에 문수산이 흐릿하다. 당정3리 마을은 희리산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V 자 오른쪽 길을 올라가다가 동남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당정3리 지역의 마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당정3리 개명마을 뒤쪽 산에는 충남도 지정 문화재인 백제시대의 고분군이 있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당정3리 들녘 V 자 오른쪽 길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당정천을 가로지른다. 당정천은 장구만으로 흘러드는데 당정리와 장구리의 경계를 이룬다.
당정천을 가로질러 지방도617호선 장천로와 만난다. 장천로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예쁘게 조성되어 있어 운치 있는 길이다. 이곳에서 서해랑길을 단축하고자 하면 장천로를 따라 서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거리는 짧아지지만 장구리 푸른 들녘길, 종천면의 중심지 종천면행정센터인 화산리 지역, 장구리의 중심지 장구3리를 놓치게 되며, 서천군 종천면과 서천읍 지역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길손은 서해랑길 정코스를 따라 장천로를 가로질러 장구리 푸른 들녘으로 나갔다.
종천면 장구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푸른 볏모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어느 시기에 이삭이 맺힐까? 북쪽 서천군 내륙으로 희리산과 문수산이 안개구름에 묻혀 있다. 가까운 북쪽에 장구3리 마을, 북동쪽 꽃매산(화산봉) 아래 자리잡고 있는 종천면 화산리(花山里) 지역과 종천면 행정복지센터를 조망한다. 화산 아래쪽 산봉에 멋지게 솟아 있는 건물은 어떤 건물일까? 노인요양원일까? 휴양시설일까? 이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리고 종천면행정복지센터가 어디쯤 있을까? 밀집된 건물들 사이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장구3리 마을은 가장 가까이 있어서 쉽게 확인된다. 장구3리 지역은 장구리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고 한다. 장구리 푸른 들녘 서북쪽으로 마서면 한성리와 장구만 해안이 가늠된다. 아침에 다사항에서 바라보던 장구만 남쪽 해안이 분명하다. 농로에서 동남쪽 지역을 조망하면 종천면 장구1리 지역과 그 아래쪽 서천읍 신송리와 구암리 지역이 어림된다. 장구2리 푸른 들녘길에서 가장 신나는 조망을 즐기며 종천면 장구2리 마을로 들어갔다.
종천면 장구2리 마을회관 앞으로 가니 마을 안내도에 장구2리 마을을 '풍성한 마을'이라고 이르며 이곳 지형의 특색인 장고를 그려 놓았다. 재미 있는 안내도인데, 무엇이 풍성한 마을일까? 인심과 물질이 모두 풍성하리라. 마을의 교회 이름도 풍성한 교회였다. 마을회관 앞 지역은 장구지 원마을인 원장구라고 이르는 것 같다. 이곳에 산제당이 있었고, 빈민을 구휼하는 제민창이 있어서 창촌이라고도 불리는 것 같다. 장구2리 지역은 판교천과 장구만을 접하고 있어서 충분히 풍성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천면 장구리에서 판교천 해창갑문교를 건너 마서면 한성리로 넘어간다. 해창갑문교에서 장구만을 올려보았다. 아침에 다사항에서 장구만을 바라보며 어림하던 당정2리 해안이 건너편에 있다. 바다는 당정2리 남쪽으로 들어와 북쪽으로 파고 든다. 그곳에 당정천 하구가 있을 것이다.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장구만의 특징이 해창갑문교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런데 이정목마다 적혀 있던 장구만 철새도래지가 궁금하였는데, 바로 당정2리와 장구2리 사이의 장구만 바다, 해창갑문교에서 바라보는 저곳이 장구만 철새도래지가 맞을까? 맞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해창갑문교를 건너며 판교천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갑문교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다. 아쉬움이 크다. 갑문교 위에서 판교천 상류 방향을 살피고 판교천 하구 장구만을 살피면 서천군 내륙과 해안이 좀 더 확실해질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여 철조망을 통하여 판교천만 살피고 일행의 뒤를 따른다. 해창갑문교를 건너 마서면 한성리 해창마을로 들어간다. 해창(海倉)은 포구에 지어졌으므로 이 지역 역시 판교천 하구나 장구만 해안에 해창(海倉)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곡선이 세곡미와 특산품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장천로 해창마을 주민휴게실 앞쪽으로 갔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성1리 해창마을' 서천 지역에 들어와서 처음 만나는 마을 이름이 적힌 빗돌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마을 유래가 적혀 있지 않았다. 적을 만한 넓은 표석이 아니어서일까? 그래도 마을 이름이 적혀 있는 빗돌을 만나서 반가웠다. 마서면 한성1리 해창마을은 옛날에 해창(海倉)이 있었던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해창(海倉)이라 부른다고 한다.
장천로 주택가 벽에 '나눔은 꽃'이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주택은 '마서어린이집'과 연관된 건물 같았다. 그래서 어린이 교육용 벽화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용이기만 할까?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마음이다.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다. 어른은 잃어버린 순수의 마음을 어린이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해창 버스정류소 앞 해창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오른쪽 장천로 915번길을 따라간다. 이 길은 지루하다. 서쪽 장구만 해안을 가까이 두고 이 길은 이어진다. 장구만 해안길은 아직 개설되지 않은 탓일까? 그렇다면 뎈길을 조성하여 장구만 해안의 멋진 풍경을 탐방객에게 선물하면 좋을텐데. 팍팍한 장천로 915번길에서 여름꽃의 대표 배롱나무 진분홍꽃이 순간이지만 마음을 달궈준다. 한우농장에서 밥달라고 졸라대는 한우들 울음 소리는 길손의 허기를 보채어 속도를 돋운다. 고개 두 개를 넘어 송석항 삼거리에 이르렀다.
이제 57코스 시점까지 0.9km가 남았다. 송석리 서남쪽 지역이 바다로 돌출한 곶(串)에 송석항, 슴갈목, 갈무산이 자리하고 갯벌체험장이 있다. 이 풍경이 송석리(松石里)의 명품 풍경을 이루는데 서해랑길은 그곳을 거치지 않는다. 만약에 장구만 해안을 따라온다면 이곳으로 이어질 것이며, 서천군 비인면, 종천면, 마서면 해안 전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이어지는 법, 언젠가 이 길은 열릴 것이라 믿는다. 송석 해변을 내려보며 갈목 해변으로 내려갔다. 와석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갈목 해변길에서는 풍경 조망으로 발걸음이 더뎌진다. 송석항과 거위의 목을 닮았다는 아목섬, 남쪽으로 매바위 해변공원과 그 앞의 여러 바위들, 아마도 삼형제 바위 전설이 깃든 바위일 것이다. 그 맨 뒤로 군산 일반산업단지와 군산 외항, 그리고 그 오른쪽 새만금방조제를 어림하며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 저기쯤이 부안이겠지, 그리고 저 방향이 고창 지역일 거야. 걸어온 그곳의 추억을 떠올렸다.
와석선착장에서 언덕길을 통과하여 와석마을로 내려갔다. 와석마을은 바다와 들녘 사이에 자리하여, 언덕길로 이어져 있다. 왜 와석일까? 마을에 넓은 바위가 누워 있어서 와석(臥石)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눈돌마을이라고도 하는데 눈돌은 무엇인가? 아마도 '누운 돌 → 눈돌 → 와석(臥石)'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와석마을 입구에 서해랑길 서천 56·57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안내도에 따르면 거리 15.9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쉬움이라 적혀 있다. 실제 탐방한 결과는 16.33km, 3시간 38분이 걸렸다. 어둠 속에서 정신 없이 달렸고, 밝음 속에서도 마구 달렸다. 쉽지 않고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 스쳐지나온 길 속에서 빛나게 아름다운 풍경들은 가슴에 강물처럼 흘러 가슴을 적신다. 이 추억의 강물은 生의 마지막까지 흐르고 흐를 것이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6.33km 중 7.32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38분 중 1시간37분
종천면 종천리에서 종천천을 건너 종천면 당정리로 넘어간다.
국도21호선 충서로가 달리고 중앙에 종천1리 마을, 오른쪽 뒤에 종천2리 마을이 가늠된다.
종천천이 장구만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종천방조제가 축성되어 있고, 왼쪽에 배수갑문이 보인다. 맨 왼쪽 뒤에 당정2리 뚜드렁이마을이 있을 것이다.
욧골 북쪽으로 있는 마을을 뚜드렁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신당이 있어서 굿을 하느라고 날마다 북을 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며, 당정리의 으뜸되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당정2리에는 오당(五堂)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오당이란 사당호, 당산재, 지당, 서낭당, 아래당을 칭하는 명칭이라 하며, 뚜드렁이에서 북쪽으로 한티라는 절터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가서 이 마을을 쳐다보면 왼쪽으로 갈목과 오른쪽으로 다사리가 보이고 가운데에 볼록하게 나온 곳이 노리정이라고 하는 곳으로 부내복종의 종채 끝 지당을 붙들고 뚜드려야 부내복종에 복이 온다 하여 뚜드렁이라 부른다고 전한다.(서천군지)
오른쪽에 천봉산이 보인다. 농로를 따라 당정1리 삼막골마을을 지나 중잉의 천봉산 자락 고개를 넘어 내려간다.
당정리(堂丁里)는 백제 때 비중현 소속이었으며, 신라시대 서림군의 영현인 비비현에 속했었고, 고려 때는 임천의 비인현에속했다. 조선시대 비인현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정리(金丁里)와 당동(堂洞), 물거리(勿去里), 보도리(保道里)의 각 일부를 합하여 당동과 금정리의 이름을 따서 당정리라 하여 서천군 종천면에 편입되었다.(서천군지)
이 시설은 어떤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것일까? 뒤쪽의 고개가 한티라는 곳일까? 저곳에 올라가서 조망하면 뚜드렁이마을, 남쪽의 갈목, 북쪽의 다사리가 잘 보인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해암수산 냉동 왼쪽 길을 따라 삼막골 마을을 거쳐 올라간다.
당정리(堂丁里)는 비인군 일방면(一方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당동(堂洞)과 여정(余丁)의 이름을 따서 당정리(堂丁里)라 하였다. 양근 김씨(楊根金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 마을도 있다. 양근 김씨의 이곳 정착 중시조는 김기종(金起宗)이고 12대손이 거주한다.(종천면행정복지센터)
당정리의 대규모 선사유적지로 추정되는 지역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여,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무문토기 등 다량의 유물과 주거지, 묘자리 등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돌은 청동기시대의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지석묘)이 아닐까? 뒤쪽 산 너머에 당정2리 뚜드렁이마을이 있을 것이다.
뚜드렁이에서는 길할 때나 흉할 때마다 날마다 굿을 하느라고 뚜드럭거렸다 한다. 신당이 있어서 그 신당에서 복종(伏鍾)의 대지가 있어서 그 북을 치는 소리를 뚜드렁이라 한다. 신당이 있어서 당곡(堂谷)이라고도 부른다.(종천면행정복지센터)
벼들이 푸르른 당정리 들녘 너머 북쪽에 종천면 종천1리 마을이 보인다. 종천의 지면이 유래한 지역이다.
어랭이재 동쪽으로 종천이 있으며, 이곳은 이토정(李土亭)이 찾던 명당자리가 있다 하는데, 명당을 제대로 찾으면 크게 번성할 마을이라고 전해지며, 냇물에서 물이 흐를 때 또는 마을 땅 속에서 가끔 명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해서 종천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한다. 마을에 종천치안센터와 우체국, 농조, 서천농협지소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주로 딸기, 수박, 쪽파 등의 특용작물과 부녀자들의 어패류 채취로 타지역에 비해 소득이 높은 곳이다. 종천리는 1, 2, 3리로 나눠진다.(서천군지)
서해랑길은 해암수산 냉동 왼쪽 길로 진입하여 삼막골마을을 통과한다.
왼쪽 뒤 다사항에서 오른쪽 봉산 자락의 비인면 다사리 마을을 거쳐 종천천을 건너 당정리 삼막골로 올라왔다.
57코스 종점 9.6km, 시점 6.3km 지점, 종천면 당정리 480-1 지역이다.
종천면 당정(堂丁)1리 삼막골마을 앞을 통과한다. "개망굴 서쪽에 있는 마을을 삼막골이라 하며, 지형이 삼태형이라 하고 뒷산은 태알형으로 생겼다 한다. 그로 인해 삼막골이라 부르며, 옛날에 산막이 있었다 하며 산막이라고도 한다."(서천군지)
서해랑길은 왼쪽 쉼터정자를 거쳐 중앙의 언덕에 있는 당정1리 마을회관을 거쳐 당정리 들녘으로 내려간다.
이곳도 삼막골이라 이르는 마을일 것이다. 당정1리 마을의 쉼터정자 옆 느티나무가 그윽하다.
맨 뒤의 봉산 자락 비인면 다사리 마을에서 종천면 종천리로 넘어와 종천천을 건너 종천면 당정리 삼막골로 올라왔다.
삼막골에서 대나무숲 비탈길을 거쳐 언덕으로 올라왔다.
언덕의 도로명 주택은 충서로 363번길 103호, 아무런 표지가 없다. 지도에는 당정1리 마을회관이라고 적혀 있다.
서해랑길은 충서로 363번길 103호, 당정1리 마을회관 옆 길로 내려간다.
삼막골마을에서 왼쪽 대나무숲을 거쳐 충서로 363번길로 올라왔다. 당정1리 마을회관 옆으로 내려간다.
왼쪽 충서로 363번길 103호, 당정1리 마을회관 옆으로 내려간다.
삼막골 남쪽 지역도 종천면 당정1리 지역이다. 중앙 뒤쪽은 당정3리 지역, 중앙이 화산, 왼쪽이 희리산 같다.
종천면(鍾川面)은 조선시대에는 비인현 이방면(二方面)의 지역이었다. 산세가 우람하고 또한 낮은 반면에 수려하여 전국에서 명당지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백제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는 증거로 지석리의 관돌을 증거로 할 수도 있다. 충남 서부문화권이 내륙으로 접어드는 기점이 또한 이 지역부터다. 비인현(庇仁縣)의 전신인 비중현(比衆縣)이 백제 때는 종천면 지석리(支石里)에 있었으며 지금도 아직껏 유적지가 남아 있다. 원래 이곳에 흐르는 종천(鍾川)의 이름을 따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종천면이라 하고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종천면의 정착 대성(大姓)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100여 호, 양근 김씨(楊根金氏)가 90여 호, 진주 김씨(晋州金氏) 70여 호가 대성으로 그 집성마을도 이루고 있다.(종천면행정복지센터)
종천리 지역의 행정구역 구분이 복잡한 것 같다. 서해랑길은 농로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주택들 앞을 거쳐 내려간다.
왼쪽에 색채 지붕의 건물이 부내초등학교 건물이다. 종천(鍾川)을 우리말로 북내라 하는데 북내가 변하여 부내가 되었다. 부내초등학교도, 종천초등학교였다가 부내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언덕 너머 당정1리 삼막골마을에서 언덕 위 당정1리 마을회관을 거쳐 이곳으로 내려왔다.
왼쪽 농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왔다. 오른쪽 뒤에 부내초등학교 채색 지붕이 보인다.
농로를 따라 끝까지 내려간다. 이 도로명은 당정1리 마을회관에서부터 계속해서 따라가는 충서로 363번길이다.
서해랑길은 충서로 363번길 끝에서 유턴하듯이 꺾어 왼쪽 농로 충서로 319번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맨 뒤에 장구만이 있다.
다사리 마을에서 헤어졌던 갯벌체험로와 농로 끝에서 재회한다. 건너편은 당정2리 지역이며 뒤쪽에 장구만이 있을 것이다.
57코스 종점 10.7km, 시점 5.2km 지점, 종천면 당정리 596-4 지역이다. 왼쪽 충서로 363번길과 오른쪽 충서로 319번길이 갯벌체험로에서 꼭지점으로 만난다. 이제 오른쪽 충서로 319번길을 따라 올라간다.
충서로 319번길을 따라 올라간다. 당정리 들녘에 푸른 벼들이 잘 자라고 있다. 건너편 중앙의 산은 희리산일까?
종천면 당정3리 지역으로 이곳을 물거내라고 하여 물거내들이라고 한다. 서해랑길은 물거내들을 가로질러 당정천을 건넌다.
당정3리 물거내들에서 당정2리 지역을 내려보았다. 장구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중앙 충서로 뒤쪽에 당정3리 마을회관이 있으며 왼쪽의 산은 희리산일 것이다. 물거내들을 오른쪽으로 가로지른다.
당정3리는 물리마을 또는 물그네라 부르는데, 수원지가 생기기 전 산이 높고 마을 앞에 맑은 물이 흐르던 시절 여리골재를 넘어가려면 산짐승이 무서워 10명이 모이기를 기다려 넘었다 한다. 수리넘어재를 넘기 위해서는 냇물을 건너 맑은 물 앞에서 그 물을 마시며 20명이 모여들기를 기다려 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장승이 서 있었던 곳이라 장승백이라고 부르는지역이 있다.(서천군지)
57코스 종점 11km, 시점 4.9km 지점, 당정리 134-1 지역이다. 오른쪽 뒤는 희리산, 이정목 뒤의 산은 문수산이라 추정한다.
종천면 당정리에서 당정천을 건너 장구리로 넘어왔다. 앞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있는 도로는 장천로이다.
양식업체 영어조합법인 은파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고 맨뒤에 마서면 송석리 해안이 가늠된다.
중앙 맨 뒤의 당정1리 마을회관에서 내려와 왼쪽 갯벌체험로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와 당정3리 물거내들을 가로질러 바로 아래 비닐하우스 옆을 흐르는 당정천을 건너 장구리로 넘어왔다.
오른쪽 비닐하우스 뒤에 종천리 부내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그 앞쪽은 당정3리 물거내마을이다. 비닐하우스 앞쪽으로 당정리와 장구리를 경계하는 당정천이 흐른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조성된 장천로를 가로질러 장구리 들녘으로 나간다. 단축하고자 하면 장천로를 오른쪽으로 따라간다.
종천면 장구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왼쪽은 장구3리 마을, 오른쪽 테뫼산 아래 장구1리 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앞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바로 왼쪽 마을이 장구3리 마을, 중앙 뒤에 화산이 있고 그 아래 오른쪽 화산리에 종천면 행정복지센터가 있을 것이다.
높다란 돌매산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종천면에서는 가장 많은 주민이 살고 있는 장구3리는 60년 전쯤에 비로소 마을이 제대로 형성된 곳이라 하며, 1950년 말 경부터 융성했다고 한다.(서천군지)
서해랑길은 오른쪽 장구2리 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들녘 건너 왼쪽 산은 테뫼산 그 아래 종천면 장구1리 마을이 보인다.
장구리는 1, 2, 3리로 나누어지는데 점촌이라 불리는 장구1리에는 영수암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아래 자광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폐쇄되고 개인 살림집으로 되어 있다. 뒷산은 테뫼산으로 등잔 형상이라고도 하며, 테뫼산성이 석축되어 있다. 점촌(店村)이라 부르는 것은 그릇점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서촌읍 신송리와의 경계 지역에 말무덤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는 고려말 왜구들의 대대적인 침범으로 서천포 일대가 피바다를 이루었을 때 싸움에서 죽은 왜구들의 시체가 보기 싫어 강변에 운반하여 전사한 고려 병사들과 합장하였다 한다. 점촌 뒤에 있는 골짜기를 최가마골이라 부르는데, 최씨가 불을 피워 그릇을 굽던 그릇가마가 있었던 골짜기라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그 가마터는 현재 폐지되었고 마을에 한 곳의 가마터가 남아 있으나 일부분이 훼손되어 민가가 들어서 있다.(서천군지)
57코스 종점 11.7km, 시점 4.2km, 종천면 장구리 699-2 지역이다. 서해랑길은 농로를 따라 장구2리 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이정목 뒤에 종천면 장구1리 마을이 보이며 왼쪽 산이 테뫼산이며 그 아래 영수암이 있다.
영수암 뒤 산록을 따라 올라가면 산정에 위치한 테뫼식산성인 장구리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장구리 점촌마을에서 보면 등잔 형국(燈)을 하고 있는데, 꼭 등잔의 끝 부분이 솟은 것처럼 되어 있어 그렇게 부르고 있다. 성내에는 평평한 지역이 거의 없고 중앙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기울어져 있고, 우물이 한 곳이 있으나 현재 물이 나지 않고 있다. 성내의 수습유물은 기와편과 경질토기편이 있고, 성 주변에서는 연질토기편, 경연질토편, 미완성 마제석기 등과 자기편 등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또한 성과 절의 관계를 밀접하게 볼 때, 전에는 영수암이 이 성내에 있었다고 한다.(서천군지)
뒤돌아서서 북쪽을 조망한다. 중앙에 장구3리 마을, 중앙 오른쪽 뒤에 화산봉과 그 아래 화산리에 종천면행정복지센터가 있다.
농로에서 북동쪽의 종천면 화산리(花山里) 지역을 조망한다.
꽃매산(화산봉) 아래 자리잡고 있는 화산리는 종천면사무소가 있으며, 3․1운동 당시 마산면 신장리에 이어 2천여 명이 모여 우리 고장의 마지막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던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1413년에 비인현이었고, 조선말 비인군 이방면의 지역으로 꽃매산이 있다 하여 꽃매 또는화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평리, 상화리, 하화리, 하내리의 각 일부와 서천군 장항면의 구암리 일부를 합하여 화산리라 해서 서천군 종천면에 편입되었다. 화산은 상화 또는 윗새말과 하화 또는 아래새말로 구분해서 부르며, 아래새말 남쪽에 있는 다리를 흰다리 또는 오석리로 통한다 해서 오석교라고 한다. 전 종천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 건물이 남아 있다. 서천읍소재지가 가까이 있어 배후 지역으로의 역할이 기대되는 지역이다.(서천군지)
농로에서 동남쪽 지역을 조망한다. 앞쪽은 종천면 장구1리 지역이고 아래쪽은 서천읍 신송리와 구암리 지역일 것이다.
종천면 장구2리 지역이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왼쪽 뒤는 마서면 한성리, 중앙 뒤는 장구만 해안일 것이라 가늠한다. "장구리(長久里)는 조선말 비인군 일방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장구처럼 곶을 이루고 있어 장구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창촌리, 물거리, 당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장구리라 해서 서천군 종천면에 편입되었다."(서천군지)
장구2리 마을은 판교천과 장구만과 접해 있다. 마을 너머에 장구만이 있다.
약초용인지 분재용인지, 선인장 재배 목적이 무엇일까?
남파랑길 장흥 지역에서 민가 화분의 선인장 꽃을 본 뒤 다시 선인장 노란 꽃을 보게 된다.
뒤쪽의 농로를 길게 따라와서 오른쪽 길을 통해 장구2리 마을로 들어왔다.
이곳이 원장구인 듯. 서해랑길은 오른쪽 장촌길 40번길을 따라간다. 잠시 왼쪽으로 가서 장구2리 마을회관을 보고 간다. 마을 뒤쪽에 판교천이 오른쪽 장구만 바다로 흘러든다.
장구리 뒷쪽으로 있는 마을을 뒷말이라고 부르며, 장구지 원마을인 원장구에 당터가 있는데 이곳에 산제당이 있어서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크게 위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에는제민창이 있었다고 전한다. 제민창이란 조선시대에 가뭄과 폭우 등으로 흉년을 맞게 되었을 때 기근에 허덕이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창고의 하나이다. 비인 제민창은 1764년(영조 40)에 재직한 관찰사 윤동승(尹東昇)에 의하여 현 지명 종천면 장구리 갯장구리 부락에 1764년 2월 25일 터를 닦기 시작하여 동년 4월 3일 상량하고 동년 5월 25일 준공하였다고 한다.(서천군지)
장구2리 마을을 '풍성한 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장구리는 지형이 장구 모양이어서 장구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곳은 창촌마을인 것 같다. 왼쪽 뒤 장구2리 마을로 들어와 장촌길 40번길을 따라 풍성한교회 앞을 거쳐 장천로로 나왔다. "조선시대 장구만 부둣가에 창고가 있었다 해서 창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고, 지금은 농경지로 변한 곳에 디딤돌이라는 큰 돌과 비석이 있었다는데 그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서천군지)
장천로 위쪽 장구리 들녘 농로로 들어와 장구리 들녘을 빙 돌아서 오른쪽 마을 뒤쪽으로 이어왔다.
서해안 명품김 생산업체 '평화수산' 앞 장천로를 따라 마서면 지역으로 내려간다. '평화수산'은 장구만에 접해 있는 것 같다.
종천면 장구리에서 판교천 해창갑문교를 건너 마서면 한성리로 넘어간다.
장구만 바다가 내륙 골골을 깊숙이 파고들어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을 보여준다. 건너편은 종천면 당정2리 지역이다. 이곳을 장구만 철새도래지라고 이르는 것 같다.
판교천의 배수갑문에 놓인 해창갑문교를 건너 마서면 한성리 해창마을로 들어간다. 배수갑문에 올라가서 조망하여야 지리적 위치를 분명히 알 수 있을텐데 올라갈 수가 없다. "마서면 한성리 해창(海倉)은 배수갑문이 있는 곳으로 전에 포구가 있어 어선이 많이 들어와 이곳에서 생선을 많이 받아다 팔았다 하며, 옛날에 해창이 있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그곳에는 한양으로 올라갈 곡식이 쌓여 있었다 한다."(서천군지)
해창갑문교를 건너서 철조망을 통해 판교천과 건너편 종천면 장구2리 지역을 살폈다.
장천로 옆 판교천변길을 따라간다. 이 우회도로는 곧바로 장천로와 재회한다.
마서면 한성1리 해창마을 주민휴게실 앞쪽으로 이어간다.
마서면 한성1리 해창마을 주민휴게실 앞에 해창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성리 (漢城里)는 서천군 서부면(西部面)의 지역으로서 한성굴 또는 한성(漢城), 봉성리(鳳城里)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한성리라 하였다. 금녕 김씨(金寧金氏)의 집성촌이 있는 지역이다. 옛날에 해창(海倉)이 있었던 지역에 마을이 생기면서 해창(海倉)이라고 부른다.(서천군지)
마서면 한성리 장천로를 따라 에쓰오일 알뜰주요소 앞을 통과한다.
나눔은 꽃이라는 그림이 장천로 주택가 벽에 그려져 있다. 마서어린이집과 연관된 주택인 듯하다.
서해랑길은 해창 버스정류소 앞 해창삼거리에서 오른쪽 장천로 915번길을 따라간다.
마서면 한성리(漢城里)는 백제시대 설림군(舌林郡)에 속했던 곳이며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서림군(西林郡) 지역이었다. 조선초 서천군에 속했으며, 조선말 서천군 서부면의 지역으로 한성굴을 줄여서 한성 또는봉성리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봉촌(峰村), 마동(馬洞)과 송내리(松內里), 성북리(城北里)의 각 일부를 합하여 한성리(漢城里)라 해서 서남면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마서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한성리는 1, 2, 3리로 나누어진다.(서천군지)
해창삼거리에서 알뜰주유소 너머 판교천과 종천면 장구리 지역을 살폈다.
장천로 915번길을 따라 송석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고개를 넘어 장천로 915번길을 계속 따라간다. 길가에 배롱나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장천로 서쪽 언덕에 야영장이 있다. 언덕 너머는 장구만 바다이다.
장천로 동쪽 들에 한우농장이 있다. 소들이 아침을 달라고 소리하는지 계속 울어댄다.
아침 일찍 무슨 일이 있어서 도로에 나왔을까?
한성리에서 송석리로 넘어왔다.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 송석항 삼거리로 내려간다.
57코스 종점 15km, 시점 0.9km 지점, 송석리(松石里) 601-1 지역이다. 건너편에 갯벌체험장과 갈목마을회관이 있다. "송석리(松石里)는 서천군 서부면(西部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송내(松內)와 와석(臥石)의 이름을 따서 송석리(松石里)라 하였다."(마서면행정복지센터)
송석해변 건너편 정면에 슴갈목과 갯벌체험장, 왼쪽에 방파제가 있는 송석항, 중앙에 갈목마을회관이 있다.
슴갈목은 새멀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지형이 갈매기 목처럼 생겼다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으며, 갈대가 많은 곳이다. 이 마을은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관광객을 대상으로 조개잡기 등 갯벌체험을 실시하고 있다.(서천군지)
오른쪽 송석항 방파제 앞에 아목섬이 있다. "아목섬은 아항도(牙項島, 鵝項島)라고도 부른다. 섬이 거위의 목처럼 생겼다 한다."(마서면행정복지센터)
오른쪽에 아목섬, 왼쪽 뒤에 매바위 해변공원, 그리고 그 뒤쪽으로 군산시 일반산업단지와 외항이 가늠된다.
송신로를 따라 갈목해변으로 향한다. 중앙 오른쪽에 매바위 해변공원과 맨 뒤에 군산 시가지 건물들이 보인다.
송신로를 따라가면 송내와 새멀 지역이 나오고 이곳은 노항, 갈목 지역이다. 갈목 해변으로 내려간다.
송석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노항리, 와석리, 동지리, 송내리, 죽산리, 한성리 각 일부를 합하여 송내와 와석의 이름을 따서 송석리라 하여 서천군 마동면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마서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노항이라 하는 지역은 새멀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갈목이라고도 한다. 노항리는 지형이 목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새멀은 갈목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새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송석리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새멀 동북쪽 지역을 송내, 또는 송매라 하는데 마을 주변에 솔밭이 있다 해서 솔매라고도 한다.(서천군지)
갈목 해변 입구에 세워져 있다. 검은머리물떼새 조형물이 예쁘다.
갈목 해변 끝에 눈돌마을이 있으며, 서해랑길 57코스 시작 지점이다. 앞쪽 언덕의 남궁안옥 갤러리에 올라가 보았다.
전시 작품이 무엇일까? 집수리하는 저 분이 남궁안옥씨일까?
오른쪽 주택이 남궁안옥 갤러리, 맨 왼쪽 방파제가 있는 송석항, 그 오른쪽 산기슭 슴갈목, 중앙의 낮은 갈무산을 확인한다.
왼쪽에 매바위 해변공원과 바다의 바위들, 그 뒤쪽에 군산시 일반산업단지와 군산 외항의 흰 건물들이 보인다. 아목섬 왼쪽 뒤에 새만금방조제가 가늠된다.
남궁안옥 갤러리를 살피고 언덕에서 조망한 뒤 갈목 해안길로 되돌아왔다. 앞쪽 와석선착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와석선착장에서 왼쪽 와석길을 통해 와석마을로 내려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골목 와석길로 이어간다. 잠시 선착장 앞으로 나가 조망한다.
아래쪽은 갈목 해변, 그 위쪽은 송석 해변이며, 갯벌체험장과 갈무산이 확인된다.
왼쪽 방파제가 있는 곳에 송석항, 그 오른쪽 산기슭이 슴갈목, 그 앞쪽이 갯벌체험장, 중앙에 끼어 있는 낮은 산은 갈무산이다.
아목섬은 거위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아항도(鵝項島)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왼쪽 곶(串) 오른쪽에 매바위 해변공원과 그 앞에 바위들이 있다. 그 뒤쪽으로 군산시 일반산업단지와 군산 외항, 그리고 오른쪽 뒤에 새만금방조제가 아득하게 보이는 것 같다.
와석선착장에서 언덕길을 통과하여 와석마을로 내려간다.
와석선착장에서 와석길을 따라 와석마을 방향으로 들어왔다. 바다와 들녘 마을이 언덕길로 이어져 있다.
와석(臥石)마을, 눈돌마을 앞으로 나왔다. 누운 돌, 눈돌, 와석(臥石)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눈돌은 동지산 남쪽에 있으며, 마을에 넓은 바위가 누워 있다 해서 와석(臥石)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서천군지)
거리 15.9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쉬움이라 적혀 있다. 실제 탐방한 결과 16.33km, 3시간 38분, 정신 없이 달렸다.
서해랑길 57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며 서해랑길 서천 56·57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