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단장을 지낸 85세의 정옥동 바오로는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드러낸다. 지인들에게 매일 SNS로 좋은 글을 보내주고, 겨자씨 모임을 만들어 20년 동안 선교를 위해 “혜숙이와 박신부”를 배포하는 등의 활동이 그것이다.
바오로는 1935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정봉삼 토마와 김만식 루시아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후쿠오카 주교좌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해방 후 경남 진해 중앙성당에서 복사를 했으며, 여기서 지금의 짝인 이명자 요안나와 혼배미사를 드렸다.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동료 군인들을 예비자 교리반으로 매주 인도하여 4년 동안 100여명이 넘는 영세자를 배출하는데 기여했다.
바오로는 1956년 진해 중앙성당 하늘의 문 Pr.에 입단한 몇 년 후 소년꾸리아를 담당하게 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났다. 바오로가 꾸리아 단장으로 꼬미씨움에 참석할 때마다 마산교구장이시면서 레지오에 관심이 많으셨던 추기경님께서는 훈화뿐 아니라 평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격려해주셨다. 이것이 그가 추기경님과 좋은 인연을 맺은 계기다.
그는 1967년 서울로 이사한 후 1970년부터 명동성당에 교적을 두고 레지오 마리애 뿐 아니라 사목협의회 및 각종 단체에서 봉사를 하면서 추기경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바오로는 1974년 서울 무염시태 Co. 회계를 거쳐 1975년 무염시태 Re. 단장이 된 후, 서울 레지아의 세나뚜스 승격을 위해 동분서주하여 마침내 1978년 12월23일 결실을 봤다.
세나뚜스 승격 후 1979년 첫 월례회의 때, 광주 세나뚜스 및 부산 레지아 간부들과 5년 후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레지오의 중요 목표인 선교를 범교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1984년까지 “200만 신자화 활동”을 처음 협의했다. 마침내 7월17일 세나뚜스 협의회 제5차 전국회의에서 “200주년 200만 복음화”란 민족복음화 활동을 결의․선포하게 되었다. 이 전국회의 개막미사를 집전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폐막미사를 집전한 윤공희 대주교님은 복음화 활동을 격려, 치하하셨다. 이 복음화활동은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로 전국 규모의 사도직운동으로 일컬어진다.
“200주년 200만 복음화” 한국 천주교 최초 전국 규모 사도직 운동 이끌어
이 운동은 레지오 마리애 전국 평의회 명의로 주교회의 의장 및 각 교구장에게 보고된 후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되었다. 1971년부터 1978까지 연평균 신자증가율이 약 4.7%였으나, 레지오는 84년 200만 신자 달성을 위해 그 두 배가 넘는 연평균 10%를 목표로 했다. 그 결과 1978년 132만784명인 신자수가 연평균 약 9% 증가하여 1984년에는 목표의 92.4%를 달성하였고, 1년 뒤인 1985년에 200만4987명으로 200만을 넘겼다. 그 당시 성직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목표 달성에 회의적이었으나, 바오로는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고 전국 레지오 단원들이 적극 동참하여 이루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결과를 두고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1985년 2월17일자에 “이 운동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으나,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실을 얻어냈다.”라고 실려 있다.
이 운동과 더불어 행동단원 증가도 목표로 하여, 행동단원수가 1978년 약 2만9000명으로 신자대비 2.5%였으나 1984년에는 전신자의 5%를 달성했다. 이 같은 노력이 바탕이 되어 그 뒤에도 레지오 행동단원은 계속 늘어났다. 1990년 약 21만 명, 2000년에 30만 명에 육박하여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뒤 행동단원수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해 약 3천~5천 명씩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는 무염시태 레지아 단장일 때 레지오 발전과 단원의 영성을 위해 훌륭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간부들과 협의하여 로마군대의 기사에 착안, ‘기사교육’을 마련했다. 그래서 박도식, 배문환, 이홍근, 김승훈, 홍인수 등 유명 교수 신부님들과 노길명, 한홍순 교수님들이 강의를 맡았고, 수료식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직접 참석하시어 미사와 축하를 해주셨다. 1977년 8월13일 꾸르실료회관에서 개최된 첫 번째 수료식에서 51명이 ‘기사 메달’을 받았다. 이 기사교육은 명상의 집에서 계속되었는데, 레지오 단원들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고 레지오 발전의 모퉁잇돌이 되었다. 바오로는 이러한 노력으로 1981년 평신도주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으로부터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훈장’을 수원 레지아 이원규 시몬 단장과 함께 받았다.
레지오 뿐 아니라 교회 각 분야에서 많은 봉사
바오로는 레지오 뿐 아니라 교회 각 분야에서 많은 봉사를 했다. 1975년부터 약 15년간 서울교구 푸른군대의 활성화 책임을 맡았고, 서울 평협과 한국 평협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순교자 현양위 위원으로 황사영 알렉시오 묘비조성과 제막식 실무를 맡았으며, 그리고 1974년부터 명동성당 성령쇄신봉사회 회장 및 임원으로, 2009년 세계성령대회 준비위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행사와 한국천주교 200주년 행사관련 위원회 위원으로도 봉사했다. 이 밖에 그가 역임한 교회내 주요 직책과 상훈 등만 다 기록하려해도 A4 3장으로도 부족하다.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신학의 기초를 터득하기 위해 신학대학에서 7년 동안 비공식적으로 매년 3-4과목씩 청강도 하고, 환자방문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 6개월 동안 가톨릭 중앙의료원의 임상사목교육을 받기도 했다. 또한 성경, 신학, 사회교리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쉬지 않고 받았으며, 평신도 교리강사로서 난지도, 명일동, 주엽동 등 여러 곳에서 예비자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다. 한 번은 자신의 명예에 큰 상처를 받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보훈병원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 여기 계신 분들은 한국전쟁과 군 생활을 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가 이런 고통을 한평생 겪었지만 기쁘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는 뭐 잘났다고 그까짓 일로 상처를 받는가!”라는 생각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반성했다. 그러자 모든 미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그는 예수의 성모관상수도회 창설자 문호영 신부님으로부터 관상기도를 꾸준히 받았기 때문에 시련 속에서도 깨달음을 주신 결과라고 했다.
열정적인 바오로를 존경한다는 중서울 레지아 한기영 이냐시오 단장은 “그분은 모든 일에 열심이시고, 교회직분으로 바쁘시지만 후배를 항상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하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