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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필자의 생업과 관계된 어느 단체의 대의원 정기총회를 다녀온 후 인생도 경영이니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깊이 고민하고 반성하던 중, 오후에는 등단 이후
멈춤없이 활발한 시정을 펼치는 이근배 시인을 만났다. 시인을 만나니 시인 또한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잘 운영할 것인가를 늘 고민한다고 하였다. 인생을 대변한다는
쓴 커피 한 잔이어도 이 험한 세상에 만나는 시인마다 가르침을 주니 고맙고 즐거운 기쁨의 시간이었다.
시인의 타자는 누구인가 종교도 이념도 아닌 문학 스스로 가장 우위에 서서 바라본 세계였다.
좋은 시란 민족의 언어 모국어로서 시인의 정신과 역사, 사회, 정치를 뛰어넘어야 하며
과거와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감각에 기대기만 하면 시가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시인의 정서와 시적 대상과의 관계, 시가 생성되는 기본 원리를 조목조목 들으며 필기하니
공간을 뛰어넘어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듣는 듯했다.
여기 와 보면/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홀로 반짝이고/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날 문득/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내리는 까닭을 안다.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수국水國에 와서-
시인은 시인 스스로 표현으로 첩첩 산골이라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각현(李覺鉉)은 당시 당진군 유림의 회장까지 지내시던 분으로 당진 인근에서는
유명한 한학자이고 외할아버지 장후재(張厚載)는 홍성 지방의 유명한 학사(學士)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소위 말하는 골수 남로당원이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공산주의를 하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했고 아버지는
대구 폭동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수배를 당하고 감옥 신세를 졌다.
아버지를 나이 10살 때 보았지만 6.25 동란 후 잠적하였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소식은 못 들었고, 그런 시인을 품속에 앉혀 글을 읽히고 붓을 쥐여 준 분이 할아버지였다.
‘헤르만 헤세’는 4세 때 할아버지 서고에 들어가 책을 만지면서 작가가 되었다고 한 것처럼
시인도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의 품 속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학자이신 할아버지의 벼루ㆍ 연적ㆍ 붓이 있던 사랑방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읽고,
마을에서 유일한 라디오가 있어 청취도 하였다. 만화는 본 적이 없고 삼촌들이 빌려 오는
이광수, 심훈의 소설책을 읽었다. 벽촌이니 구하기 쉽지 않았으나 책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이런 문화적 환경이 활자와 가깝게 했으니 음악가나 미술가의 집안에서 자랐다면
그쪽으로 풀렸겠으나 선택의 여지 없이 학자의 집안이었으므로 붓과 먹과 그런 것들에
둘러싸여 소설가를 꿈꾸는 날이 더 많았다.
시인이 15세 되던 해 프랑스에서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작가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동아일보 기사를 본다.
유명한 소설이 같은 나이의 소녀가 쓴 것임을 알고 충격을 받아 자신도
그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서울로 도망을 오게 된다.
삼촌집에서 서울학교에 다닐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으나 할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쫓겨 내려갔다. 학교에 갈 면목이 없어서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일 년여를 휴학하고
학교를 졸업한다. 가장 찾고 싶은 친구는 ‘차돌’이니 ‘돼지’니 하는 별명을 지닌
이재우란 친구다. 보고 싶은 책은 그 친구에게 빌려서 보곤 했는데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늘 책을 사서 새것을 빌려 준 친구이나 추억이 새록한 봄날 연락이 닿지 않음이 시인에게는 안타까움이다.
“저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한학도 높으셨고 당진 고을이 내세우는 유림이셨던 할아버지는
큰손자인 저를 꾸짖을 때 하시는 말씀이셨지만
저는 속으로 그 말씀이 어찌나 기뻤던지요
일제 때는 나라를 되찾아보겠다고
해방이 되고서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며 처자식을 돌볼 줄 모르던
할아버지의 큰아들인 저의 애비가
어린 나이에도 몹시 자랑스러웠으니까요 제가 애비를 닮았다고요?
그랬으면 사람 꼴이 되었을텐데
아무리 돌아봐도 저는 애비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 가는 것을 알기에
애비를 닮았다는 말씀은
제게는 오히려 분에 넘치는 칭찬으로만 들렸습니다
-중략-
할아버지가 쓰시던 같은 남포석 벼루 하나 골라서
애비를 따르는 제 마음을 제 손으로 새겨
지석誌石으로 묻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그 날 꼭 듣고 싶은 꾸중이 있습니다.
“저놈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라는.
-할아버지께 올리는 글월-벼루 읽기-
고교졸업 당시 학교 선생이나 공무원을 철밥통이라며 최고의 직업으로 꼽았다.
그래서 조부는 공주사대를 가길 원하였다. 하지만, 시인은 신문에서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을류 장학생이 되었으나(갑류는 전액 장학생, 을류 장학생은 반액 장학생)
조부는 그나마도 기특히 여겨 입학을 허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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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한비문학을 보고 있는
이근배 시인 |
서라벌예대에 입학을 하고 보니 장학생 선발로 입학한
까닭인지 대부분의 학우가 신춘문예에 당선한 사람,
학원문학상 우수상,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문학 특기자 등,
한국에서 내놓으라는 학생들은 죄다 몰려 있었다.
이재령 (1772년 시집 「수밀도」출간 및 중학교 때
잡지 「학원」의 표지에 나옴)이란 급우는 시인에게
차라리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라고 무시하는 눈빛을
자주 보이곤 했다. 소설에서 시로 돌아선 것은
서정주 선생의 강의하던 첫 시간에 이근배 시인
본인 시를 가지고 공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점에는 읽을 만한 시집이 많지 않았고
김소월 시집 정도였으니 시집에 대한 목마름이 컸다.
방학 때면 자취하거나 하숙하는 친구들의 집을 돌면서
문학잡지, 시집 등을 모아 시골로 내려가 두문불출 읽었다.
그 당시에는 시집을 읽으면 거의 통째로 외웠다며
암송하는 시가 몇 편인가를 묻는데 필자는 부끄러웠다.
시인의 명패는 아무나 다는 것 아님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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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픈 웃음 풀풀 날리는/애인 하나/있었음.//
젖 냄새 질질 내뿜어/독침 든 뭇 사내/
벌떼같이 달려드는/풋계집.//
꽃술보다 더 깊숙이/배꼽까지 차오르는/
쓰디쓴 꿀맛에/샘물 다 퍼마셔도/목이 타는 한낮.//
속치마 훌훌 벗어 던지고/흰 피 뚝뚝 흘리는/
이쁜 화냥년 하나/가졌음.
-밤 꽃-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묘비명」이 당선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벽」,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압록강」, 196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보신각종」,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달맞이꽃」,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북위선뮌?당선하였으니
시인의 시심의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이런 거침없는 행보는 1963년에는 문공부 신인
예술상 시 부문에「달빛 속의 풍금」이란 작품으로 수석상,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에
「산하일기」로 수석상, 문공부 신인예술상 문학부에 시「노래여 노래여」로 특상을
수상하는 등, 또 가람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월하문학상,
편운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등의 큰 상을 받았다.
시인의 이러한 행보는 당연히 아름다운 모국어에서 비롯한다. 우리 민족은 지난 시간 너무나
많은 담금질 속에 살았으며 이것은 우리가 문학을 할 수 있는 커다란 화두라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제시할 수 있는 우리만이 가진 것으로 우리 문학 자산이다. 기술 좋은 목수도
목재가 있어야 하듯 작가에게 이보다 좋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보고
미래까지도 예견하는, 늘 스스로 묻고 채찍질하면서 눈을 씻고 붓을 고쳐 잡으며 깍고
다듬는 심정으로 시를 쓰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시는 글감(Motive,동기)→
유의창작有意創作→모색, 탐색→영감(Inspiration)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하늘도 목청을 열었다//이 나라 말과 글을 갈고 다듬어/
붓 한 자루로 씨뿌리고/꽃피우고 열매를 거두는 이들이 모여/
토함산 기슭 신라의 옛 서울에서/동해 일출의 눈부신 아침을 맞는다//
어디 닫힌 가슴이 있었더냐/누가 말문을 막아/붓대를 꺾는 아픔이 있었더냐/
저기 산과 산, 봉우리와 봉우리가/골짜기를 건너 이마를 맞대고/
여기 강과 강, 바다와 바다가 둑을 허물고 하나로 흐르고 있느니//
-중략-
참았던 설움 모두 터뜨려/기쁜 날을 노래하리라/끝없는 노래로 이어가리라
-열린 가슴이여, 하나된 붓이여(1994. 7. 26.「한국일보」전국문학인대회「문인만세」기념시-
사회주의에서는 이데올로기 밑에 문학이 존재하고 이념의 하위개념으로 문학을
도구화하였다. 카프 때는 프롤레타리아 유산계급에 존재하는 문학이 좋은 문학이라 주창하게 된다.
결국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 하여 그 뒤를 잇는 모더니스트들은
예술성 회복의 과제를 가지게 되었으니 시인의 문학론은 문학이 주인이며 다른 것이
두드러지면 문학이 죽는다고 본다. 보편적으로 보면 문학이 상위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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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종교를 묻자 종교를 구분 짓기 보다
불교 쪽에 가깝다며 작가나 시인에게
종교 때문에 그런 작품이나 시를 썼느냐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시가 목사님의 설교나
스님의 설법처럼 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오래전 '샘터'에 쓴 글을 보면
유럽에 가서 좋은 성화(미켈란젤로….)를 보아도
감동이 없었으나 석굴암을 보고 감동하였고,
신달자 시인의 시 중에 「포장마차」를 보고
‘거리의 암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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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시인이 기독교적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기독교는 100여 년 정도의 역사로
우리 문화에 들어왔고 불교는 이천 년의 역사로 우리 문학이나 정치,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와 상관없이 문학은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하는 까닭이다.
성찬경(시인ㆍ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은 시집『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에서
“이근배 시인이 글쓰기의 달인이라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의 글의 내용은
언제나 상황에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운치가 있다. 특히 시 부문에서는
시와 시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근배 시인의 시적
감성은 어느 모로 보나 우리 고유의 전통적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때 이 ‘전통적’이라는 말에는 우리 신시 100년의 연륜이 포함됨은 물론, 멀리
고대에까지 가는 역사적 파란이 모두 스며 있는 것으로 나는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의 주제와 소재는, 어머니 할머니 밭 고향 등으로 비롯되어
역사의 아픔으로 확대되어 간다. 특히 근자에 와서 그는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을 즐겨
노래하고 있다. 백두산 금강산 한강이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겨레의
애국심이 고취되고 그것이 통일에의 염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근배 시인의 이런 추세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애국시’라 함직한 이러한 시의 주제적 범주는 말할 것도
없이 이근배 문학의 일환이며, 거의 독보적인 감이 있다.”라고 했다.
들에 나가면/추워 추워 하면서도/눈맞춤하자고 나서는/어린 냉이꽃/
산수유, 진달래, 목련은 잎보다 먼저/울 엄니 시집 올 때 입었던/
고 노랑, 분홍, 하양 옷 빛깔 짜내는데/지난 여름 삽다리 꽃산으로/
올라가신 울 엄니/땔 것도 덮을 것도 없이/삼동을 어찌 나셨는지?/
해 길어 허리띠 더욱 조이던/그 봄날은 오는데/지금 양지바른 언덕에서/
참쑥이라도 뜯고 계신지?/황사바람에 자꾸/눈이 아려 아려
-봄날은 온다-
시인은 전쟁과 분단의 역사적 사건과 가족사에 얽힌 정한을 담았던 작품들로 1961년부터
1964년까지 5개 일간지 신춘문예에 6차례의 당선으로 문단의 경이로움 남겼다.
무슨 비법이 있는가를 묻자 “시는 우러나는 시와 만들어지는 시가 있다.
참여시ㆍ순수시ㆍ사랑시ㆍ애국시 등의 여러 모습은 감성뿐 아니라 체험을 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표현상 다소 미흡하더라도 눈물과 감동을 주어야 한다. 시는 결국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며, 위대한 시인은 그 시대를 대변하고, 역사를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하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있으면 안 된다.”라며 끊임없이 공부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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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배 시인과 필자 |
거시적 시각, 현실인식을 발판으로 가슴에
담긴 이야기들을 적절한 시어로서 표현해 내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상화도 그렇다.
그러나 첩첩 산골 소년은 책을 빌리려고
십 리 길도 마다 않고 갔으니 존경받는 시인이 되었다.
필자는 마음 닿으면 책 구하기 쉬운 이 세상
무엇이 모자라 게으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인지
거듭 반성했다. 박물관보다 더 귀한 벼루를
소장하고 모으는 시인의 눈은 맑았다.
벼루를 닦고 보듬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 내는, 역사 속에 묻힌 아버지에 대한 정
키워 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드높이는 시인이 존경스럽다.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알게 된 하루였다.
‘날아 보고 싶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길
내속에서 무엇인가가 솟아나고 있었다.
은행나무에 연둣빛 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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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한영숙 시인 한비문학 수석 기자 |
촬영: 안은주 시인 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시낭송 분과 회장 |
월간 한비문학 4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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