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 주도로 10여 년 전만 해도 아무도 돌보지 않아 기억에 잊히고 버려진 명례공소에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생가 터가 발견되어 순교자의 삶과 영성이 새롭게 조명된바(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5월호) 있다.
이번에는 명례공소가 사실상 마산교구 첫 본당이라는 점과 아울러 조선의 세 번째 사제 서품이자 최초로 국내 사제 서품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가 사목한 역사적인 현장인 명례를 취재한다.
강성삼 신부는 1896년 사제 서품 이후 부산 절영도(현 영도)에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하였고, 1897년 6월23일에 거처를 옮겨, 밀양 명례를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후 몸이 쇠약해진 강 신부는 언양, 경주, 기장, 양산, 동래지역의 공소들을 돌보며 사제로서 살았던 7년 4개월 중 1903년 9월, 37세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거의 6년을 보낸 곳이 현재 마산교구 수산본당에 속해 있는 명례공소였다는 점에서 그는 마산교구 역사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성삼 신부가 명례로 거처를 옮겨 온 시점이 마산교구 첫 본당으로서 ‘명례성당’의 출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강신부를 취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강성삼 신부는 조선 최초로 국내에서 사제 서품 받아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은 짧았지만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국내에서 거행된 서품식에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 인물이다. 이는 단순히 순서상의 문제가 아니라 박해 중에 성장한 한국교회가 신앙자유기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사제 양성의 기틀을 어떻게 잡아나갔는지 보여주는 첫 사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록을 통해 드러나는 강성삼 신부의 가족은 가장 연장자로 이름을 알 수 없는 형 1명, 누나 이사벨라와 마리아다.(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 기록) 누나 강 이사벨라는 1866년 다블뤼 주교가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 자신이 열한 살 즈음이었다고 밝히고 있어 그녀와 가족들의 출생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강 마리아는 언니보다 두 살 어려 강성삼과 아홉 살 차이가 나므로 그 사이에 다른 형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강 신부 가족은 1866년 3월 이전부터 ‘방갓’이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갈매못(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인근 ‘밤까시’)에서 지내다가 강 신부가 태어난 7월 이전에 다시 고향 ‘내대’로 돌아온 듯하다.
강성삼은 1866년 충청도 홍산 내대(오시대밭)에서 태어나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강성삼이 태어나던 해에 병인박해로 양화진에서 순교하였고, 외할아버지와 외숙은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고향 ‘내대’는 선교사들이 신뢰할만한 신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내대’에 거주하던 순교자로는 1866년 양화진에서 순교한 강명흠과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가 있는데, 황석두의 경우 강성삼의 누나들이 그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증언한 바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강성삼은 선교사들의 표현대로 ‘두터운 신심’을 가지고 있어 사제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극복해가는 밑바탕이 되었다.
1881년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 신학생으로 선발된 강성삼이 사제품을 받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어린 나이에 열대지방 외국에서 유학한 탓에 풍토병과 폐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사제품을 받지 못할 상황까지 갔었다. 그는 1890년 귀국해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1896년 4월26일 서울 약현성당에서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틴노) 신부와 함께 국내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제민 신부와 공사현장
복자 신석복 마르코와 강성삼 신부 기리는 성지 조성 작업
낙동강변 언덕 위에 자리한 명례성지는 어려운 시대에서 사목한 강성삼 신부의 생애와 영성,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누룩과 소금장수’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영성을 기려 현재 성지 조성 작업이 한창이다.
성지조성 작업을 관장하고 있는 이제민 신부는 “화려하고 대단한 건물을 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명례 역사의 숨결을 보존하면서 순교 영성을 심도 깊게 묵상하는 성지를 조성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지난 3월 기공식을 가진 이래 약 7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오는 12월에 우선 시급한 기념관과 250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성당과 부대시설이 완공될 예정이며, 신석복의 생가 터에는 순교자 기념관과 연수원을 계획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공사 때문에 중단한 ‘복음화 학교’도 다시 시작하고, 피정학교, 성지순례 프로그램도 문을 열어 순교자의 영성을 이어가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순교와 역사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김길수 사도요한 대구 가톨릭대 전 교수는 순교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세력을 위한 온전한 죽음’이어야 한다. 둘째, ‘이 죽음이 주님의 진리가 옳다는 것을 증거하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 셋째, ‘본인이 기쁜 마음으로 동의하며 죽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부모가 모두 순교한 강 신부는 건강이 악화되어 목숨이 꺼져가는 기억 속에서 ‘순교 영성’을 남달리 생각하셨을 것이리라. ‘나 한평생 기도하오니, 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시오.’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으리라. 요즘 우리 교회는 주일미사만 참석하는 신자들이 늘고 있다. 예전처럼 봉사하며 순명하는 신앙인이 줄어들고 무늬만 신자인 이른바 ‘신비로운 냉담자’가 늘어나고 있다.
오스트리아 션사인 근처 야훼 성당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예수 성심상’이 있다. 나는 너무나 신비로운 예수님에게 넋이 나가 있었다. 예수 성심상을 찬찬이 묵상하며 다시 보았더니 뜻밖에 예수님은 손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왜 손이 없으셔요?’
‘네가 내 손이 되어 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