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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라는 행정구역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강남구로부터 서초구가 분리 신설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서초구 지역에 우리 조상들이 정착한것은 역사시대 이전으로 올라간다.
서초구 일대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은 것은, 또한 오랜 것으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대 국가로서의 성장 발전과정에서 그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는 데서 알 수 있으며, 지리적으로 위례성 서쪽에 인접함으로서 도성 외곽 경작지로서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고려시대에도 지리명이 여러번 바뀌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초구 지역이 과천군 동면과 광주군 언주면에 속하게 되었다.
1975년에 접어들어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강남구가 신설되어 관악구 방배동을 제외한 9개동이 강남구 관할로 개편되었고, 1980년 에는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서초구 지역은 모두 강남구에 편 입되었으며 서초구 지역이 현대 도시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서울특별시 도시기본계획에서 부도심으로의 개발이 결정 되어 1968년 영동 제1차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부터이다. 그후 연차적인 토지구획 정리사업에 의해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어 오늘날과 같이 선진도시로서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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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특별시 서초구청www.seocho.go.kr
서초구의 구석구석
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동명으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칭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에서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당산마을은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린다.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호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었다.
이 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다. 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밖에도 사도감개울, 사도감들,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다.
반포대로와 남부 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이다. 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 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왕미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 100여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다. 개발 전까지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다.
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세종 10년(1428) 임영대군에 봉해졌고,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문종 1년(1451) 왕의 직접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 옛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 자연석 2개에 '鄭谷(정곡)'이라 정중만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변 해주 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다
서초구 잠원동
잠원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불려왔는데 1914년에는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었다. 잠원동은 뽕나무, 양잠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엔 이곳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잠원동이란 동명도 양잠과 관련있다. 원래 잠실리라 불리던 것이 서울로 편입될 때 송파구의 잠실과 구분하기 위하여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인근지역은 뽕나무밭이어서 뽕 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양잠을 치는 농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강변에 이 지역이 위치하고 있어 뱃사람 또한 많았다
오늘의 설악아파트 1동 북쪽, 한신아파트 337동 동쪽 잠원로 부근에는 지금부터 60여년전까지 사평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아 돈대마당이라고도 불리던 곳인데 그 동쪽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초구 한강나루
한남대교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원래 한강진이 있던 곳으로 예전부터 수상교통의 길목이었다. 일찍이 신라 때는 북동이라하여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때는 사평도라하여 진선이 배치되어 교통편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제1의 도선장으로 송파·노량진과 더불어 경강 3진을 이루었다. 한강나루 북쪽에는 양진단이 있어 나라에서 봄·가을로 사고예방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부근에는 제천정이란 정자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자연을 즐겼다.
한편 한강나루의 진선으로 관선 10척이 있었다. 세종때 삼전도를 신설하면서 1척을 이관하 여 9척으로 운행되다가 15척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한강진은 삼전도와 더불어 대모산 기슭의 헌·인릉과 나루 동쪽의 선정릉으로 가는 길목으로 역대왕들의 도강이 있었고 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한 도성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연산군 때는 청계산 수렵을 위한 부교가 가설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교를 설치하여 도성을 함락하려고 하자 의병들이 이를 파괴하여 작전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한남대교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지는 것은 옛날 한강진을 건너 삼남으로 이어지는 옛 길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농가공산품판매센터(잠원동 65-32번지)부근에는 할떡거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반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 성당 뒤쪽에 있다.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예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
서초구 반포동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이 홍수피해를 입는 상습침수 지역으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1963년 1 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 동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훼손되었기 때문 에 찾아 볼 수가 없다.
1960년대만 해도 신반포로 이서지역의 대부분은 모래사장 또는 늪지 대로 강물 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 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업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큰 비가 내려 한강 의 수위가 높아지며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자주 있었다. 일제 때에는 지 금의 반포아파트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유사의 사리채취로 생계를 잇는 이가 많았다.
옛날 어느 임산부가 산기가 있어 친정인 마포로 가다가 진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길옆 갈대밭에 들어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태를 끊을 수가 없어 어려워 할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태는 갈대잎으로 끊으면 되나 아기가 걱정이다"라고 하며 당부하기를 "뒤에 말탄 병사가 쫒아 올텐데 그가 아기는 어떻게 낳았으며, 태를 어떻게 잘랐느냐고 추궁할 것이니 그때 갈대로 잘랐다고 말하지 말아라" 만일 말한다면 아이를 죽일 것이다."하고 일러주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곧이어 말탄 병사가 뒤쫓아와 산모에게 추궁을 하자 산모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병사는 즉시 아이를 죽였다. 이 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아기가 죽은 뒤편 큰 바위에서 무수히 많은 왕벌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 병사를 향해 날아가 병사와 말을 쏘아 죽였다. 그 후 벌이 나온 큰 바위를 벌바위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곳에는 반포전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방사를 태우고 온 용마가 벌에 쏘여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긴 마을 사람들은 용마를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반포동 1번지 경남쇼핑센터 옆이다.
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에는 예부터 이곳에 살아온 20여호의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 일대를 서래마을 또는 서애마을, 서릿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서애라는 마을 이름은 매곡동(현 조달청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마뉘꿀이라는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이 자기네 서쪽 물가에 있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불렀던 이름이다. 서래마을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 15차 한신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고 이주해 와 형성되었다.
둥근말이라고도 불린 원곡마을은 산 모퉁이에 둥글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현재의 강남성모병원 뒤쪽이다. 현재 이 병원의 기숙사 자리는 전에 빙고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겨울에 언 얼음이 늦봄까지도 녹지 않아 이같은 이름이 생겼다한다.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조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던 이 동리는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관악구가 설치되자 관악구 사당1동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 사당1동의 분동으로 방배동은 독립하게 되었고 이때 인구는 8,480명이었다. 1978년 10월 10일 방배동은 1·2동으로 분리되고 1980년 4월 1일 사당동의 일부를 편입, 강남구로 이관되는데 이때 이 편입된 부분이 방배본동이 된다. 1985년 9월 1일 방배2동에서 방배3동이 가라져 나오고 1988년 1월 1일로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91년 9월 방배본동과 1동의 서문로와 동광로 남쪽과 사당로 북쪽을 갈라내어 방배4동이 신설됨으로써 방배동의 행정은 방배본동·1·2·3·4 동에서 나누어 맡고 있다.
서초구 남태령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가까운 골짜기에 호랑골과 여우골이 있어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명명되었다는 설과, 옛날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 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남태령이 란 이름이 붙게 된 시기에 대해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 남태령이 이미 나오고 있 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려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은 근래에 신흥주택가로 발전한 곳이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 명칭들을 통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천촌말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 그 뒷골에 있는 논을 뒷굴논, 천촌말 고개 너머의 벌을 뒷벌, 천촌말과 사궁말앞 벌을 앞벌, 천촌말 근처의 산개천둑을 갤둑이라 하였고 거꾸로 넘어간다 하여 가꿀고개, 논이 깊어 구레논, 쪽박 엎이 놓은 것 같다하여 쪽박산, 산 아래로 뱅돌아간다 하여 뱅도래미, 새로 생긴 마을은 새말,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던 터는 새텃말, 뱀장어가 많아 장앗들, 치달은 골짜기라하여 치골,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바위, 돌 한쪽으로 건너던 다리로 임금의 거동하던 길을 쪽다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하여 이복촌(이북굴)이라고 불렀다.
원지동은 현재 서초구의 남쪽 끝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계곡마을인 데, 탄천의 지류인 여의천이 흐르고 있다. 이 개천을 조금 거슬 러 올라가면 세원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청계산 입구 에 조그만 마을 바람굴이 있는데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원지동 관현사 입구에는 현재 유원지 주차장이 들어선 곳에 옛날 양씨와 수씨가 살았던 양수리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폐동되어 단 지 그곳 골짜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는데 지금은 묘를 쓸 수 없지만 이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마을 입구 경부고 속도로 옆에 술바위란 유명한 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날 지방에 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비들이 여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마을 왼쪽에는 개드락이라는 골짜 기가 있고, 위쪽으로는 청계산 제2야영장이, 그 오른쪽에 장사바 위와 넙적바위가 있다.
서초구 원터마을
삼남도로를 가다보면 청계산 제1야영장과 청계산기도원 입구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원터(院基)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院)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원터라 불려진 것 이다. 원지동 400번지에 일대에 원이 있었는데, 1970년대 취락구 조 개선사업으로 석축이 없어지고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다. 이 원터마을은 경부고속도로가 놓임에 따라 주민들의 일부 가 이전하였고 옛 농촌주택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내곡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로 바꾸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내곡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성동구 언주출장소가 관할하게 되었다.
옛 언주면의 일부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을 한자명으로 내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 동명의 유래인데,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헌·인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여우 등의 짐승이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내곡동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에 인릉산은 내곡동과 성남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내곡동 산 13-1번지에 헌릉·인릉이 자리잡고 있어 산 이름이 되었다.
서초구 염곡동
염곡동은 이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염통곡, 염곡동이라 하였다. 염곡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은 내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양재동에 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은 구룡산을 경계로 강남구 포이동과 분계되어 있고, 남쪽은 야산을 경계로 신원동과 잇대어 있다.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릉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정류장 이름도 탑성골로 되어 있다. 탑곡은 옛날 이곳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하여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과거 염곡동에는 아홉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동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8군데가 매몰되고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우물만이 남아 있다. 이 옻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 물을 마시거나 우물 울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염통골 또는 염통곡으로 알려진 염곡동은 집성촌으로 창녕조씨가 많이 거주하고있고 전주 이씨도 몇 거주하고 살고 있는데 전주 이씨는 420여년 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후 20년 늦게 창녕 조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전까지는 조씨가 80~90여호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갔다.
내곡동의 샘마을은 1972년에 창경궁·창덕궁 인근의 종로구 와룡동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함으로써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박석고개 왼쪽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헌릉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헌·인릉 입구 박석고개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흥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광복 후 월남민들의 개척단이 이룩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어둔골이라 하였는데 나무숲이 우거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호랑이도 자주 출현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전국에서 제일 품질이 뛰어난 수제양털이불 생산업체가 들어서 있다.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로 본촌이라 하고 또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도 한다. 평촌은 벌말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이 벌말 438번지 13호에는 김진사댁이 있었는데 전에 과거를 보던 선비들이 이 사랑방에서 숙식을 하고 갔다 한다.
취락구조개선 사업으로 대부분 성남으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 벌말은 김해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6·25동란 때 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개 위해 역과 함께 각 요로에 설치되었던 원의 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새원" 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서초구 우면동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형태의 산이라하여 불려온 우면산 기슭에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이다. 1988년에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 원지동과 함께 양재1동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양재동으로 불렀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사무소가 생겨났다. 1975년에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양재동은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고, 1992년 양재동은 1·2동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옛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양재역, 양재원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주요 상업지역이었다
우면동 형촌마을 옆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태봉(우면동 291- 1번지)이라고 하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 원산군의 태를 묻은 곳 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돌 항아리 내에 태를 담은 백자 항아 리를 넣어두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도굴해 현재는 돌 항아리만이 남아 있다.
10여년전 일본의 한 미술관련 잡지에는 이와 관련하여 "이 항아리는 2개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에서 갖고 왔다"라고 게재되어 있어 당시의 지명과 일치하고 태봉의 유래와 백자의 존재도 사실인 것 으로 확인되었다. 이 일대는 우면산에 둘러싸여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서초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1.성석연 (?~1414)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초명은 석연이었으나 국왕의 휘를 피하여 석인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자유, 호는 상곡. 아버지는 창녕부원군 여완이며, 석린·석용의 아우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지평·경연강독관을 역임하였다. 다시 조선왕조에서 강원도도관찰사·충청도도관찰사를 거쳐 경연관·사헌부대사헌·예문관대제학과 형조·호조·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준수하였으며 일에 임할 때는 공사를 분명히 가려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예조판서로서 조정의 일을 의논중에 졸도하여 순직하였다. 시호는 정평이다.
우면동 산65번지에 묘소가 있다.
2.상진 (1493∼1594)
본관은 목천, 자는 기부, 호는 송현 · 향일당 · 범허재이다. 아버지는 찰방 상보, 어머니는 연안 김씨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 매부집에서 자란 상진은 15세때까지는 학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동년배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학업에 매진하여 10개월만에 글이치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중종 14년(15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된 뒤 홍문관 부제학·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명종4년 (1549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6년동안 재상직에 있으면서 충성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치정하여 업적이 황희와 허조 다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청렴결백한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는데 어느날 집안의 창고가 무너져 내린 일이 있었다. 종들이 수리를 한다고 서두르자 공이 말하기를 “네가 비록 창고를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하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훗일 그가 죽자 명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도노덕대신(노덕대신을 애도함)”이라는 시를 짓게 하였으며 성안이란 시호를 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지금의 남대문로 3가 일대인 상진이 살던 동네를 조선말까지 상정승동 또는 상동이라고 하였는데 영조도 이곳을 지날 때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서초동 산 152-5번지 상문고교 내에 성안상공신도비가 있다.
3.정도전 (1337∼1398)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요 학자인 문헌공 정도전은 1392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1등 개국공신으로 군사, 외교, 성리학,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하였다.
태조 9년(1398)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하여 참수되었다. 정도전의 묘로 추정되는 자리가 서초동 산 23-1호 서초구청 뒷산에 있다.
4.정역(?∼1425)
본관은 해주, 자는 순지, 호는 백정으로 판례의사사 정윤규의 아들이며 효령대군의 장인으로 어머니는 대사성 설문우의 딸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우왕 9년(1383) 이방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친한 사이가 되었다.
효령대군의 장인이었으며 조선 개국 시에는 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가 한성판윤, 형조판서, 호조판서, 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근검하고 덕망이 높아 왕실과 인척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아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묘는 정곡마을(법원단지)에 있다가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정역의 신도비만 서초동 1701번지 서초로변 법원단지 입구에 세워져 있다.
(서초구의 문화재)
1.헌릉 · 인릉
종 목 사적 제194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1
시 대 조선시대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도 개혁하였으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국정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초기의 민생안정을 이룩하였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헌릉은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인석·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시대의 현릉·정릉,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었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고 비각을 세웠다. 세종 2년(1420)에 원경왕후가 죽음으로써 무덤지역을 정하였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따라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하였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문·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실은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릉·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2.효령대군 이보 묘역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1972.08.30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방배동 19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의 사당과 묘소이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 자는 선숙, 시호는 정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읽기와 활쏘기를 좋아했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원각사 창건을 감독하였고, 불교에 독실하여 승려들을 모아 불경을 강론하기도 했다.
사당에는 효령대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영조·정조 때에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3.성안공 상진 묘역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
지 정 일 1984.11.03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152-5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1493∼1564)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상진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매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중종 14년(151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명종 4년(1549)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후 명종 18년(1563) 까지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충성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였다. 성품 또한 청렴결백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그가 죽자 명종은 ‘성안’이란 시호를 내렸다.
상문고등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는 비는 꽃과 호랑이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명종 21년(15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선조 때 문장가인 홍섬이 짓고, 글씨는 송인이 썼다.
4.대성사 목불좌상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2호
지 정 일 1993.04.03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141-4외
시 대 근대
대성사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예술의 전당 위쪽에 있는 사찰로,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4년에 다시 지었다. 대성사에 모셔진 이 불상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백용성 스님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백제 제15대 침류왕 1년(384) 인도의 마라난타 대사가 설법하러 백제에 오는 동안 병이 들었는데 우면산 생수로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면산 기슭에 대성초당을 창건함으로써 이 우면산 대성사는 백제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조선 명종 때 보우대사는 이 절에 머물면서 불교 중흥을 구상했다고 한다.
대성사는 백용성 큰스님이 한용운 대사를 앞세워 천도교 손병희 교주, 기독교 길선주 목사, 기독교 이필주 목사 등과 교류하여 3종교가 합심하여 민족중흥과 종교 중흥을 도모한 성지로 유명하다.
5.원지동 석불입상 및 석탑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3호
지 정 일 1993.04.03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원지동 362-4, 362-5
시 대 고려말,조선초
청계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굴다리 입구 오른쪽에 미륵당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안에는 미륵불이 모셔져 있고 작은 규모의 3층석탑이 있다.
미륵불은 약 2m 크기의 서 있는 모습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토속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원터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며, 1년에 한번씩 주민들이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이 미륵불에 지성을 드리면 길흉화복을 계시한다 하여 일본인들이 미륵불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미륵불의 신비한 영험으로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자 일본인들은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내었는데 그 후부터 미륵불의 영험한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한다.
6.월산대군 이정 태실
종 목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0호
지 정 일 2010.03.25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우면동 291-1
시 대 조선시대
월산대군 이정 태실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태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이란 왕가에 출산이 있을 때 왕족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의미하며, 태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월산대군 이정(1454년~1488년)은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으로, 덕종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월산대군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궐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해 3월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어 전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서호의 경치 좋은 양화도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을 개축하고, 망원정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지속하였다.
1473년 조정에서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하여 덕종의 맏아들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 비 인수왕후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으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을 두루 섭렵하였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속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고 시호는 성종이 특별히 '효문'으로 내렸다.
월산대군의 태를 묻어 보관하던 태실에는 현재 태비 1기와 석함 1기가 남아 있다.
태비는 전체적으로는 규수방부형으로 비 몸돌과 비 받침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이라고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천순육년오월십팔일입석’이라고 새겨져 있어 이 비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월산군으로 봉해진 해(1460년)로부터 2년 뒤인 1462년 조성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석함은 상부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함 안에 태를 봉안하는 태항아리와 지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태항아리와 지석은 현재 일본의 아타카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반출시기는 알 수 없다.
이 태실은 조선 성종의 형이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 이정의 태를 묻은 태실로, 비록 태항아리와 지석은 도굴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오늘날 서울지역에서 원위치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태실이고, 태를 신성시하여 명당을 골라 소중히 모셨던 조선 왕실의 안태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태실 보호를 위해 민간인의 경작이나 땔감하기, 약초나 나물 캐기 등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금표 구역으로 추정되는 태봉산 전체15,249.9㎡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동 태실 주변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
(서초구의 관광명소)
1.우면산
위 치 서울 서초구 우면동 일대
우면산(해발 293m)은 서초구 서초동.방배동.양재동.우면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산모양 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면산의 부분 이름으로는 갓바위가 있는 산이라 하여 관암산, 산이 도마와 같다고하여 도 마산, 옛날에 활을 쏘던 사정이 있던 곳으로 사정산, 수정이 채굴되었다 하여 수정봉 등이 있다.
관악산 줄기였던 우면산은 남태령 고갯길 확장으로 관악산과 완전히 분리되어 도시속에 고립된 형세를 띠고 있지만 산 속의 여러 계곡에서는 맑은 옹달샘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울창한 삼림으로 다양한 동·식물군이 자연 서식하고 있다.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우면산은 많은 등산로가 태극.범바위.우면산.산골 등 20여 개소의 약수터와 연결되어 있으며, 예술의전당, 국립국악원, 대성사 등의 문화시설과 사찰이 있어 도시민들의 아늑한 휴식처로 자리잡고 있다.
2.우면산 자연생태공원
위 치 서울 서초구 우면동 산 34-1번지 일대
우면산 자연생태공원은 우면산의 양호한 자연생태와 참나무 군락지를 활용하여 도심 및 근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도시림'과 산림의 문화'를 주제로 하여, 도심속에서 자연 학습이 가능하고 생태보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 면적 318,644 ㎡ (96,389평)
* 탐방코스 길이 1,320 m (약1시간)
* 개원 2004년 7월
3.예술의 전당
위 치 서울 서초구 서초3동 예술의전당 700번지 (남부순환로 2406)
오페라 하우스, 음악당, 미술관, 서예관, 예술자료관, 야외극장을 갖추고 있는 예술의전당 은 한국 최고의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행사가 동시에 열릴 수 있 는 세계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각 장르별 특성을 살려 지은 전용공간은 완벽한 예술 체험이 가능하다. 총 5개의 공연장이 마련된 오페라하우스와 음악당은 매년 800여회의 공 연이 열리고 있으며, 7개의 크고 작은 전시실을 갖춘 미술관과 서예작품 전용 전시장인 서 예관에서는 알찬 기획의 전시들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또 예술의전당 뒤 우면산 기슭에 위치한 야외 극장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함께 이뤄 지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오페라, 연극, 무용, 뮤지컬 등의 장르의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극장을 보유 한 오페라 하우스부터, 클래식음악 연주 전용홀을 보유한 음악당, 총 6개의 전시실을 갖춘 미술관과 세계유일의 서예 전용 전시장 서예관, 그리고 문화예술과 관련된 자료를 가장 많 이 접할 수 있는 예술자료관까지 총 5개의 건물이 모여 우면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오페라하우스에는 대형 오페라와 뮤지컬, 무용공연 등이 열리는 2300석의 오페라 극장, 작 은 규모의 오페라, 연극 공연 등이 주로 열리는 700석 규모의 토월극장, 실험적인 공연물 을 연출자의 의도 대로 공연화할수 있는 300석에서 350석까지 변형이 가능한 자유소극장이 있다.
클래식 연주 전용홀로 지어진 음악당에는 2600석 규모의 대형콘서트홀과 작은 실내악이나 독주회가 주로 열리는 380석 규모의 리사이틀홀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공간으로는 미술관과 서예관뿐만 아니라, 예술자료관 1층에 자리한 디자인 미술관이 마련되어 있어 디 자인관련 전시들을 상시로 만날 수 있다.
예술의전당 바로 옆에는 별도의 기관인 국립국악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있으며 예술의전 당 각 공간 내에는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 서울예술단, 한국영상자료원, 문예진흥원, 서울심포니 등이 입주해 있다.
4.양재시민의 숲
위 치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에서 성남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넓게 펼쳐진 숲 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1983년 발표된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같은해 8월 양재동 236번지외 3필지에 녹지사업소가 개발을 착수하여 1986년 완공되었다.
약 258990.6㎡의 면적에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 칠엽수, 잣나무 등 70종 25만주의 수목이 울창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잔디광장, 파고라, 배구장, 배드민턴장, 테니스장 등의 체육시설과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 동상과 기념비, 야외무대, 충혼탑, KAL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 야외 결혼식장 2개소, 어린이 자연관찰소 등 교양시 설이 개발되어 있어 공간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양재 시민의 숲 제3구역은 특별히 서초구에서 문화예술공원으로 조성하였는데 총면적 74,385㎡에 놀이마당, 야외공연장, 각 종 기획전시장, 조각공원, 만남의 광장 등으로 꾸며져 1994년 5월에 완공되었다.
5.분재박물관
위 치 서울 서초구 우면동 205-6
우면산 기슭에 위치한 분재박물관은 2,000여평의 규모에 각종 희귀 분재와 사진 및 참고 자료들을 소장한 국내 유일의 분재 관련 전문박물관으로 1988년 개관되었다.
양재시민공원 방향 우면산 기슭에 위치하여 있다. 다양한 종류의 분재와 관련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10월에는 분재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이 곳에서는 지속적인 공연과 전시회 등이 열리고 있어 문화 자치구를 자랑하는 서초구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최근에는 양재천을 가로질러 무지개 다리를 설치하여 우면동 쪽에서 이용하는 시민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6.국악박물관
위 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초 3동 700번지
1995년에 문을 연 국악박물관은 우리음악의 역사와 음악을 한눈에 느낄 수 있도록 국악 관련 자료를 전시한 국악의 산교육장이다. 박물관에는 유리관과 중앙홀에 차분히 전시된 국악기들의 정적인 모습과 음향, 영상 등을 통해 원하는 소리와 영상을 즐길 수 있는 동적인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중앙홀에는 궁중음악과 제례음악 연주에 쓰이는 편종과 편경을 비롯하여 음악의 시작과 끝에 쓰이는 축과 어, 그리고 다양한 모양의 큰 북을 볼 수 있습니다.
7.국립국악원
위 치 서울 서초구 서초3동 700 (남부순환로 2304)
국립국악원은 문화관광부 소속기관으로 전통예술을 보존 계승하기 위한 전속예술단과 각종 공연진흥, 교육진흥 및 지원임무 등을 수행하는 행정부서,한국음악학 정립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국악연구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 전문자료관인 국악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지방국악활성화를 위해 전북 남원시에 민속국악원을 분원으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
* 남원민속국악원('92년3월 개원) - 지하1층, 지상3층 / 총 2,581평(600석)
8.국립중앙도서관
위 치 서울 서초구 반포동 산 60-1번지 (반포로 664)
국립중앙도서관은 390만여책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국가 대표 도서관으로서 국가의 지적 문화유산을 총체적,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하여 이를 후세에 전승시키는 문화 전달자로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헌정보의 총보고이다.
1988년 5월 28일 남산에서 서초구 반포동으로 신축 이전한 현재의 국립중앙도서관 건물은 본관과 부속건물(별관)로 이루어져 있다. 서초공원으로 둘러싸인 도서관건물은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분위기가 조용하여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도서관이 이용객들의 정보활용능력을 향상시키는 열린 문화공간으로 자리하기를 바라는 국립중앙도서관은 2000년 7월 1일부터 도서관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9.대성사
위 치 서울 서초구 서초3동 산 140
백제는 384년(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 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라난타는 서역과 중국을 거쳐 백제로 오는 동안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수토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우면산 생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우면산으로 자리를 옮겨“대성초당”을 짓고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곳이 백제불교의 초전법륜성지로 지금의 대성사다.
마라난타가 대성초당을 짓고 머무른 이후 근대까지 대성사는 많은 고승들이 머무르며 수행을 한 도량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때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던 용성스님은 일본에게 당한 경술국치(한일합병)의 치욕을 설욕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이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대성사는 근래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속에 대성사의 역사가 사라지고, 용성스님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찰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일본군의 만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용성스님의 법손이신 불심도문 스님께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이 대성사를 백제불교의 초전법륜성지로서 다시 중창하였다. 이는 용성스님의 10대 유훈가운데“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는 뜻을 받든 결과이기도 하다.
10.모차르트컨서트홀
위 치 서울 서초구 서초3동 1515-3번지 모차르트빌딩 2층
최신음향기술이 집약된 클래식 음악전문홀로 설계, 완공되었으며 공연장 전체가 외부소음과 진동에 방해받지 않도록 부양구조(Floating Floor System)로 되어 있다.
국제기준 공연장의 실내소음도(NoiseCriteria) NC20 이하보다도 월등한 NC5의 무소음 공연장으로 질좋은 음향 환경을 자랑한다. 또한 타원 형태의 음향적 구조와 나무, 돌을 사용한 웰빙 소재의 이중톤 마감으로 충만한 음향을 느낄 수 있다. 첨단 음향 HDTV녹화 시스템을 구비해, 여러 각도에서의 연주장면을 양질의 화질과 음질로 DVD 및 VTR 녹화를 할 수 있다. 파치올리 컨서트 그랜드피아노를 비롯해 스타인웨이, 시게루가와이 등 8대의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으며 Duo Piano Studo 등 4실의 쾌적한 환경의 방음 연습실은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연습과 마스터 클래스 등이 가능하다.
또한 70평 규모의 넓은 로비와 고급스러운 리셉션바는 소규모 일반 공연장의 고급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64인치 PDP를 통하여 연주 실황을 관람할 수 있으며 관객 구성을 고려해 마련한 충분한 여성용 화장실과 장애인용 화장실을 구비해 편의를 더했다. 의류 보관실, 휴게실 등의 시설은 쾌적하고 고급스러우며 80대 가량의 무료 주차공간은 편리한 선진 공연문화를 완성시킨다.
11.윤봉길의사 기념관
위치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숲 안
양재 시민의 숲 안에는 2,000여평의 대지위에 지하1층·지상3층으로 건립된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는데, 1988년10월에 개관하였다.
1층은 유물전시실로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수학기·농민운동기·상해의거기로 구분하여 선생이 사용하시던 서책ㆍ·문방구 등 당시의 소지품 및 훈장 등이 전시되고 있어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속속들이 일러주고 있다.
2층은 독립운동사진전시실로 무장 투쟁과 의열투쟁 중심의 독립운동관계사진 120여점을 전시하고 있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벌판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였던 애국지사들의 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3층은 강당으로 각종 행사 및 세미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매월 넷째주 화요일에는 교양강좌를 실시하여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윤봉길의사는 1908년 충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 호는 매헌이며, 봉길은 별명이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공원에서 폭탄을 투여한 뒤 12월 19일 오직 독립운동의 외길을 걸었던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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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양재천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양재동 ~ 강남구 대치동
양재천은 원래 한강으로 직접 유입되는 한강의 1차 지류였으나 한강 연안개발사업과 주변일대의 개발로 직강화되면서 탄천으로 유입되는 유역변경 및 유로변경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하천이다. 매년 5~6월 잉어들의 산란이동이 관찰된다.
(서초구의 유래)
서초구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칭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에서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서초구에는 삼성 현대 등 2개의 대기업 본사가 있는 서울의 대표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