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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님이 걸어오신 길
-조교동에서 목동까지-
뜻 깊은 큰형님의 칠순을 맞아 큰형님의 삶의 궤적을 대강이나마 간략히 적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먼 옛날 영천 조교동 시절부터 최근의 목동집에 이르기까지를 열거하며 적어 본다.
큰형님은 해방 직전 왜관읍 낙산동 가마골 외가에서 태어나셨다. 본적지인 영천의 조교동 뿐만 아니라 문외동이나 창구동 그리고 성내동시절 등에 얽힌 일화들이 많으실 테지만 나도 태어나기 전이어서 그 때를 정확히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증조할머님을 위시하여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출가하시기 전의 숙부님들과 고모님들은 물론 농사를 도와시던 분들을 포함하는 그야말로 대가족이 함께 사셨다고 한다.
특히 6.25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들이 쳐들어 오는 것을 아시면서도 조교동 집을 지켜야 한다시며 할아버님 홀로 남으시고 할머님과 모든 식구들은 봇짐을 이고, 지고 또 누님과 베드로 형님 등 어린 분들은 안고, 업고, 걸려서 피난을 다녀오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큰형님은 피난 도중 친척 아저씨를 따라가는 바람에 가족들과는 떨어져 장남을 잃어버렸다며 부모님의 애간장을 끓여 드린 적이 있다.
당시 에노파 누님은 아버님의 등짐 위에 앉히셔서서 피난을 다녔는데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상황을 ' 피융~ ~ 팽! 무섭더래이~ ~ ~ ' 라고 하였다며 큰형님이 흡사하게 성대모사를 하시며 전해 주셔서 가족 모임을 큰 웃음 바다로 만든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활이나 성탄 등 대축일과 주일날이 되면 20리 길의 읍내에 있는 성당으로 가기 위해 한 끼 또는 두 끼분의 식사를 자전거에 한 짐 해서 싣고도 사람들이 이고 지고 가셨다거나 겨울철에는 식재료와 가마솥도 싣고 가서 따뜻한 식사를 하시곤 하셨다 하니 주님의 오묘한 섭리를 이 대목에서도 느껴볼 수가 있는 것 같다.
가히, 구남매들의 요람이랄 수 있는 영천극장 앞의 교촌동 시절에는, 할아버님이 주변에서 깜짝 놀랄 정도의 큰소리로 장군아! 를 부르시면 상대편에서 멍군이요! 하시며 한복을 기품있게 차려 입으신 친구분들과 껄~껄~껄~ 웃으시며 유쾌하게 장기를 두시던 모습이 인상깊게 남아 있다. 큰 길가 쪽으로는 담배와 일상용품을 파시던 가게도 내어 조부모님께서 소일하시기도 하셨는데 때로는 어머님과 우리 어린아이들은 물론 전 가족이 급할 땐 뛰어가서 손님을 맞기도 하였다. 가게 안쪽으로는 사랑방으로 통하는 길고 큰 거실이 있었는데 가족들 모임이나 손님접대는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마을분들이 바둑을 두시거나 할머님의 친구분들이 화로가에 모여 담소도 나누시고 종종 화투도 즐기시던 모습들이 떠올려진다.
당시 조부님은 수염을 늘 스다듬어시며, 으흠~ 기침도 하시며, 때로는 엄하고 단호하게, 때로는 호방하신 성품으로 사랑방에서 집안 대소사를 처결해 나가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랫도리를 잘 입지 않고 대문 앞에 앉아 무엇을 쭉쭉 당겨가며 잘 놀던 국이를 일러 국장! 또는 홍국장! 하시며 부르셨는가 하면 종종 '홍대는 이 다음에 큰 사람이 될 거야'라시며 무척 귀여워 해 주셨다. 그리고 큰형님에 대해서 말씀 하실 때에는 항상 우리 목이! 우리 목이! 우리 목이는...하시며 말씀 하시던 할아버님의 만년의 모습 또한 아련한 과거 속으로부터 찾아낼 수 있다. 아버님도 어머님에 대한 호칭이 '목어마이'이셨으니 .... 큰형님의 우리 가정 내에서의 위상과 앞날에 대한 기대 그리고 장손으로서의 사명 같은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홍대형님을 비롯하여 나와 야고보, 아기 천사로 먼저 하늘로 올라간 데레사, 그리고 요안나와 막내 마지아까지의 동생들이 태어나고 자라났던 교촌동 그 집은 ㄱ자 형태의 큰 한옥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게 자리잡은 대저택이었다고 할 만 하다. 마당에는 산더미같이 많은 빨레를 하시던 큰 물탱크가 딸린 수돗가와 계절마다 온갖 꽃들이 피고지던 꽃밭이 있었다. 양철 지붕이 있는 목재로 잘 짜여진 큰 대문으로 들어서면 펼쳐지는 등나무 울타리는 매우 운치가 있었으며... 여름에는 수세미가 타고 올라가 시원한 그늘을 선사해 주었다. 대문을 들어서며 왼쪽의 사랑채 옆에는 여름 날 수박 등 과일을 둘러앉아 먹거나 모기장을 치고 잠을 자기도 하였던 두 개의 평상들이 있었고 아랫 채에는 디딜방아가 두개 1조로 설비되어 있던 방아간과 헛간, 뒷간들도 있었다.
뒷마당도 퍽 넓었는데 채소밭과 큰 굴뚝 두 개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었다. 또 감나무와 대추나무, 석류나무 등의 유실수를 비롯 수 종의 수목들이 사방 담장을 둘러싸 있었고... 항상 자전거들이 즐비하게 서 있던 대문 앞의 오른 쪽 땅에는 아버님의 사무실로 쓰인 신식 건물도 지어졌던 꽃대궐 새동네였다.
그러한 구조의 집이었으니 어린 시절에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면 사랑방이며 대청마루 밑의 멍석 뒤, 큰방이나 부엌, 굴뚝 뒤나 헛간, 수돗가 물탱크 뒤나 꽃밭 속으로 뛰어 들어 숨기가 좋았고 술레가 숨은 사람들을 찾아내려면 시간이 퍽 오래 걸리기도 하였다.
그 시절, 교촌동 집으로는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이 집안과 동네 어르신께 인사드리러 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으며 그 때마다 어머님은 다과와 주안상을 내 오시고, 손님이 오셨다며 여러 끼의 식사까지 정성껏 대접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한 어머님과 인근에 사시던 숙모님과 친지분들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디딜방아로 떡과 콩, 보리 등의 곡식들도 찧고 메주나 고추, 마늘 등을 빻을 때도 많았으며 우리 형제들을 중심으로 온 동네 사내 아이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먼지를 일으키거나 분탕을 치기도 하여 부지깽이로 멀리 쫒겨나는 일도 있었다.
또 부엌 왼쪽으로 난 작은 뒷문으로 드나들며 가까이 사셨던 숙부님 댁에 심부름도 다녀오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여러가지 모양과 색채의 재기도 차고 구슬치기며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도 셀 수 없이 하였다. 특히 굴렁쇠 굴리기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하는 것이어서 운동도 되고 재미가 무척 좋았다. 누님이 친구들과 고무줄 놀이나 훌라후프를 즐겁게 빙빙돌리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훌라후프는 나중에 홍대형님과 내가 열심히 해 보기도 하였다. 또 집 안 팍의 마당과 영천극장 앞 그리고 때로는 뒷동산에 올라 연날리기도 하고 대보름 즈음에는 깡통 돌리기며 지신 밟기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놀이도 다양하게 하며 맘껏 뛰놀 수 있었으니.... 그 시절은 분명 우리들에게 있어 요람기였다고 해야겠다.
또 겨울이 되면 할아버님이 지켜보시며 코치를 하시는 가운데 아버님과 친척 아저씨가 굵은 철사나 철판을 숫돌에 갈아 만든 날을 끼워 나무썰매를 여러 개 만들어 주시기도 하였으며 몇 해 후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거나 수리를 하여 타러 다니기도 하였다. 더구나 성당에 부속되어 수녀님들이 운영하셨던 샛별유치원도 한 두해씩 모두 다니며 성장하였으니 그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복스런 귀공자요 귀공주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아버님은 큰형님이나 레오 신부님이 참고서나 소설 그리고 만화를 사려고 돈을 달라 하시면 만사를 제쳐 놓고 잘 내어 주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른다. 아랫 동생들은 형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한다거나 아침상을 받을 때 큰형님 레오신부님 이외에는 참기름에 익힌 계란 후라이를 먹는 차례가 좀체 돌아오지 않았던 점 외에는 조부모님 눈치를 보시면서도 자녀들의 소원은 죄다 들어주시던 부모님이 계셨기에 늘 든든하게 느끼며 생활하였고 자신감도 흘러 넘쳤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님의 회갑연을 비롯하여 숙부님들과 고모님들의 결혼으로 인한 큰 잔치 등 여러 애경사시의 정경들이 내 마음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밀려들던 하객들의 모습은 물론 대문에서부터 길가로 길게 늘어서고도 담을 끼고 돌아 골목 저 긑까지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던 불우한 분들의 모습까지...생생히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걸 보니 무척 정이 든 집이었던가 보다.
사실, 당시는 전후의 사정이라 아이들 간식도 그리 풍족하지도 않았으며 우리집도 성당에서 배급 받아온 우유를 사각진 양철 도시락에 담아 밥솥에 익혀서 단단한 덩어리로 만들어 과자처럼 먹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평상시 할머님과 어머님은 아침 저녁으로 동냥을 하러 오는 걸인들과 상이군인들 그리고 스님들에게 수시로 밥을 한 상 차려 내어 주시거나 쌀과 밥은 물론 동전 한 닢이라도 반드시 쥐어 주어 보내셨다.
또 베드로형님이 일하러 나가시는 아버님을 그칠 줄 모르고 졸졸 따라다녀 급기야는 묶여져 있었던 집안 수돗가 옆의 이름 모를 큰 나무도 퍽 인상깊게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늘 높이 솟아 힘과 기상이 넘쳐 보이던 그 나무는 퍽 넓게 옆으로 가지가 뻗어 긴 원뿔 형태를 이루며 높다랗게 올라가 집 안 경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 나무에 눈이 소복히 쌓여있던 겨울날의 풍경과 인근의 등나무 울타리와 어울려 여름날의 그늘과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의 바람막이 역할도해 주던 그 큰 나무는 교촌동 집을 떠난 후로도 오랜동안 잊혀지질 않았었다. 아마 우리 형제들이 어떤 난관에 봉착하여서도 꾿꾿이 참아 이겨내며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멋지고 훌륭한 나무의 자태를 보며 자라났기 때문이리라... 유추해 본다.
그리고 어머님이 대청에서 땀을 닦으시며 능숙한 솜씨로 반죽을 긴밀대로 밀어 국수를 수북히 썰어 내시던 모습과... 리듬을 타고 땅 땅 지축을 울릴 듯 힘차게 다듬이질 하시던 모습도 어머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또 풍로를 돌려 불을 일군 화덕에 여러 개의 인두들과 여분의 다리미를 올려두고서 먼저 달구어진 인두와 벌건 숯불을 담은 다리미로 한복에 물을 뿌려가며 다리시거나... 잠 못드시고 늦은 밤까지 재봉틀로 옷을 만드시거나 바늘로 구멍난 양말이며 여러 옷가지들을 수선하시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님은 왜 낮에도 온종일을 일하시고... 우리 아이들과 가족들이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늦게까지 못주무시고..... 서 너 시간 혹은 너 다섯 시간도 채 못 주무시고는 또 새벽에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셔서 부엌으로 나가셔야만 하나...? 하는 철학적(?)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도 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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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대청마루에서 책상과 책받침 위의 성경, 놋쇠로 된 촛대 등을 이용하여 그럴듯하게 제대를 차려놓고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미사놀이를 하였던 일이다. 큰형님과 현재의 레오신부님 두 분이 번갈아 가며 이불보나 커텐 혹은 신문지로 만든 제의를 입고 사제가 되어 미사를 집전(?) 하시고 그 밑에 형님들은 복사를 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열심한 신자가 되어 무릎을 끓고 기도를 드렸으며 과자로 된 성체를 받아 모시기도 하였다. 지금도 하하 호호 웃으며 재미나게 놀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어쩌면 늘 부엌을 지키셔야만 하셨던 어머님도 그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았을까? .... 짐작해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형님들이 방학을 마치고 상경을 한 후에는 남은 형제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기도 하였는데 나도 미사를 몇 대 집전(?)하였던 경력이 있으며... 마지아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미사 참례를 했을 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사실, 미사 하면 생각나는 것은 외갓집에서의 새벽 미사인데...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어도 외할머님 성화에 매일 새벽미사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새벽미사 가는 것이 무척 힘들기도 하였지만 아침을 열며.. 풀내음을 맡으며... 저 멀리 보이는 종탑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논 밭을 끼고 한 참을 걸어가던 그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로 마음 속에 아로 새겨져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데레사 이모님도 방학때마다 찾아가면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반겨 주시고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삼종기도 등을 외울 수 있도록 자애롭게 도와 주심은 물론 기쁨과 슬픔을 늘 함께해 오셨기에 외갓집 역시 우리 구남매들의 또 하나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큰형님도 이 곳 낙산성당에서 여신부님으로부터 '파비아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으셨는데 태어나고 첫 칠일을 지낸 다음날 세례를 받아 어머님이 대죄를 지키는 보속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 당시에는 3일 이내에 영세를 시켜야만 하였다 하니 신앙선조들과 성 베네딕또 수도원의 파리외방전교회의 포교 관할지역이었던 외갓집 일대 마을의 신앙풍토가 과연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지난 주에는 6.25한국전쟁으로 인해 덕원으로부터 내려와 왜관 성베네딕토 수도원의 모태가 되었던 낙산 성당 설립 100주년 기념 감사미사가 봉헌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한 한티와 신나무골 등지의 선조들을 사목하셨던 대구본당 초대주임 김보록 신부님의 흉상을 '83년경 외갓집 인근의 당시 사목지였던 현재의 신동 신나무골 성지에 내가 제작하고 파비아노형님이 약력을 정리하여 새겨 설치하였던 것 역시 주님의 섭리가 있어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일을 성사시켜 주신 마백락 글레멘스 전교회장님과 레오 신부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그 때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님이 축복하여 주셨고 분도수도원 이동호 아빠스님, 당시는 신동성당에 계시다 현재 낙산성당 주임이신 현익현 신부님, 그리고 부모님과 이모님도 참석하셨다. 그 날 이모님은 수도원에서 마련한 떡을 수사님들과 함께 가져와 봉고차에서 내리시며 저를 보시자마자 '니가 만들었나?' 하시며 슬며시 웃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한 요람기는 부지불식간에 막을 내리고... .... .... `60년대 초에 접어 들면서 큰형님의 대학진학을 필두로 형제들의 서울유학생활이 본격화 된다. 사실 이 보다 훨씬 전인 '50년대초 초등학교를 마치신 레오 신부님이 주님의 소명을 받들어 부산 숙부님과 어떤 친지분의 인솔하에 서울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셨던 것이 서울유학의 시작이었다. 아무튼 청운의 꿈을 품으신 큰형님의 대학생활은 하숙과 입주과외, 자취를 번갈아 하셨다 하며 한동안은 청운동 종고모님댁에서 동생들인 남종이형님과 명균이의 과외선생님으로도 활약을 하셨다고도 한다. 이후에는 큰형님이 베드로형님을 불러 올려 자취생활을 하시며 남종이형과 베드로 형님을 대상으로 입시과외 지도를 하시는 등 오장동 시절에 얽힌 일화들에는 깊은 애환과 연민이 서려 있는듯 하다.
당시 어머님은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한 번 다녀 오시려면 영천집의 이러 저러한 일들을 쉼 없이 하시고도 밤을 새워 달리는 청량리행 열차에 몸을 실은 다음에나 좀 쉬시거나 눈을 붙이셨다고 한다. 그러시고도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열차를 타고 열시간 가까이를 달려 서울에 도착 하시면 쉴 겨를도 없이 청소와 빨래며 반찬들을 해놓으시고는 바로 돌아서... 또는 수일 만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한참을 우시며... 내려오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전해 듣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어머님이 너무 슬퍼하셔서 옆자리의 승객이 사연을 물으며 진정을 시켜 주더라고... ... ... 하셨다. 그 때 어머님의 등에는 막내 마지아가 울며 보채기도 하였다 하니 어머님이 감당하셔야만 했던 고통과 성모님을 떠올리며 ... 묵상에 잠기게 된다.
그리고 베드로 형님이 신학교엘 가신후 큰형님은 정릉동으로 이주하셨는데 바로 이 시기에 약관 12세의 나이로 나의 서울생활이 시작 된다. 1965년 가을에 국전을 보러 오면 좋겠다는 큰형님의 편지를 받음으로써 시작된 김용윤씨 집 아랫채 단 칸 방에서의 자취생활은 대학을 막 졸업하신 큰형님과 나 그리고 레오신부님과 홍대형님까지.... 참 생각만 하여도 기가 막힌다. 그러나 큰형님의 그림 솜씨와 찌게 끓이는 솜씨가 무척 좋아 그런대로 지낼만은 했던 것으로 회억된다.
당시 큰형님은 수채화 물감이나 펜을 이용하여 시화와 추상성이 드러나는 과감한 필치의 드로잉 수채화를 그리시기도 하고 시범을 보이시며 설명을 곁들이시기도 하셨는데 수준이 전문 화가 수준이어서 깜짝 놀라 내가 아니라 큰형님이 이 길로 나가셔도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또 취기가 오르시면 입에 담배를 씹어 무시고 태우시며 바이얼린을 종종 키시기도 하셨는데 그 연주 솜씨 또한 대단하셨던 것으로 비쳐졌었다. 요즘 그 바이얼린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
그 때 나는 아버님이 보내주신 소년한국일보와 소년조선 소년동아 등에 게재된 수험 자료로 중학교 진학을 위해 큰형님과 레오 신부님의 열성적인 지도를 받으며 중학교 입시공부를 하곤 하였는데... 객지생활의 서러움과 부모님 생각에 화장실에 가서 남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고... 숭덕국민학교에 가서 턱걸이 연습을 하다 팔의 힘과 요령이 없어 세 번인가 밖에 못하고 봉을 잡고 늘어져 있는 순간 ... 큰형님으로부터 엉덩이를 걷어 차이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보신 레오 신부님과 홍대형님은 우습다고 웃으셨는데 나는 ...놀라기도 하며 무척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해 이 곳엘 우연히 가 보았는데 그 당시의 정경과 흔적들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이 당시 서울엔 전철과 안내양이 오라이! 하며 차체의 옆구리를 두 번 팡~ 팡~ 치면 출발하는 시내버스가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이었는데 그 전철이 지금은 신문로 경희궁 옆의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가끔 일요일에는 혜화동 로터리의 빵집에서 빵을 한 봉지 사들고 베드로형님이 공부하는 혜화동 신학교에 면회를 가기도 하였는데 당시 대신학교에는 어머님의 4촌 동생이신 김경식 보니파시오 신부님과 이정모신부님을 비롯하여 이종 4촌형님이신 이재명 바오로 신부님이... 소신학교에는 4촌형님이신 최홍덕 야고버 신부님과 영천 출신의 김상규신부님과 현재 안동 상지대학교 총장이신 조창래 신부님 등 여러 신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계셔서 객지생활 가운데 소박한 즐거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레오신부님과 함께 당시에도 유명한 미술대학이던 홍익대학교 교정에 가 본 기억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철조망이 쳐진 밭을 가로질러 올라가 본관이며 당시에는 목조건물이던 미술학부 실기실을 둘러 보았는데 지금 그 무우와 배추들이 심어진 밭이었던 그 땅은 대운동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다음이 레오신부님의 학업을 위해 연세대 앞의 창천동 김명희씨 집 아래채에 세들어 살던 시절인데... 특히 이곳에 사는 동안에는 집 뒤의 펜스 너머로 연세대 야구팀의 연습 장면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해 볼 수가 있어 좋았고 종종 동대문 야구장으로 가 연-고전 등의 전국대학야구와 제일은행의 박현식 선수나 한일은행의 김응용 선수가 뛰던 실업팀들의 야구 경기를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집 앞 공터에서 큰형님과 나 그리고 홍대형님이 연대 야구장에서 날아온 경기용 볼을 맨 손으로 던지고 받던 기억이 난다.
레오 신부님도 한 두번은 공받기를 하시다 일찍 은퇴(?)를 하셨으며 연세춘추사 기자로 뛰시랴, 공부하시랴, 과외 아르바이트 하시랴 종일 바삐 돌아 다니셔서 구두 뒷굽이 가장 빨리 삐딱하게 닳기도 하셨다. 나중에는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도 장만하여 수년간 때때로 연습을 하곤 하였는데 .. 이제는 다 지나간 일들이 되었다.
이 때 큰형님과 레오신부님이 집에서 과외지도를 해 볼 요량으로 아버님이 줄곧 보내주신 사과를 다 먹고 쌓아둔 사과상자들의 윗면에 압정으로 두꺼운 종이를 덮어 고정하는 식의 책상을 못을 빼고 망치질을 해가며 만들기도 하셨고... 홍대형님은 새벽마다 중앙일보 등 신문배달을 씩씩하게 하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큰형님과 레오 신부님이 장기나 바둑 대결을 가끔 즐기셨는데 레오신부님과 홍대 형님이 두실 때에는 큰형님이 종종 홍대형님을 응원하는 훈수를 잘 두셔서 좀 시꺼러운 장면을 연출하시곤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그 집의 넓고 부엌이 딸린 방을 더 얻기 전 까지는 추운 한 데에서 연탄불도 갈고 좁은 마루에서 마당을 등지고 서서 조리를 해 먹으며 지낸 적도 있었다. 비가 오면 씻어 쌓아둔 그릇들 위로 빗물이 고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몹씨 추웠던 겨울에 큰형님은 누구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이아몬드형 무늬가 연속으로 새겨진 파란 쪼끼를 입고 쌀을 일어 밥을 지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야채나 콩나물도 차가운 물에 얼마나 깨끗이 씻어 국을 끓이셨는지 모른다. 얼마 후 에노파 누님도 공부를 참 잘 하셨는데 밥도 해주고 공부도 한다시며 올라와 근 1년을 함께 지내게 되셨는데... 누님은 한동안 주인집 아주머니가 잠드신 후 조용히 주인집 큰 방의 다락에 올라가 자기도 하셨고... 건너방의 이필녀씨와 친교가 두터워진 후에는 그 방에서도 가끔 주무셨다.
이때 큰 형님은 우리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는 집채 중간의 작은 방에 세들어 사셨던 이필녀씨를 가리켜 당시 가수 최희준씨의 <하숙생>이라는 대히트곡의 가사에 나오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가사의 첫 마디인 <인생은>이라 호칭하셔서 고단한 생활 가운데서도 씩~ 웃으며 지내기도 하였다. 이 분을 몇 해전 조카 기석이의 결혼식때 명동성당에서 뵙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팍팍하게 열심히 살았던 시절을 증언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곳이 연대 정문 앞의 12차선 큰 길로 변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버스가 집으로 돌진하여 앞바퀴가 길가쪽의 우리 방 벽을 밀며 치고 들어오는 아찔한 사고가 나 홍대형님이 다리를 다쳐 입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수생이었던 홍대형님은 하루를 못 있고 퇴원을 하고 말아 큰형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이 때는 대구 방촌동 숙부님이 미국에서 헬기 조종과 정비에 관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실 때였으므로 할머님도 올라오셔서 무너진 벽과 지붕을 천막으로 가린 광경을 보시고는 무척 놀라워하시도 하셨다. 우리 형제들이 잠도 덜 깬 이른 아침시간이었는데.... 큰 일 날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위험에서 구해 주십사 늘 기도해 주셨던 부모님의 기도가 효험을 발휘한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며 성령님의 손길에 감사를 드렸다. 성령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
그 사고가 난 후에는 신촌로터리에 면한 창천동 김희태씨 댁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주인은 당시 동국대 교수이셨고 남향 흰색의 독채로 된 집이어서 그 전보다는 꽤 쓸만한 집이었으며 지금은 이 일대가 연대 앞의 먹자골목으로 변해 있다.
이 때는 내가 중학생 시절이었고 광화문의 동아방송국이나 인사동에 있었던 문화방송국 등지로 큰형님이 쓰신 원고를 배달하는 심부름을 종종 하기도 하였다.
큰형님은 동아방송의 성우 오승룡씨와 고운정씨가 나와서 하는 <토픽 하일라이트>라는 프로를 쓰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큰형님이 원고료를 받아 오시는 날엔 한 잔을 걸치시고 비틀 비틀 하시며 집을 겨우 찾아 오셔서는 바로 집에 들어 오시지 않고 장난으로 담장 너머로 돌을 자꾸 던져 놀라게 하였다... 던져진 돌도 처음엔 작은 돌을 픽픽 던지시다가 안에서 별 인기척이 없으면 점점 큰 돌을 던지는 주사를 부리시기도 하셨는데.... 그러다 마루의 덧문 유리창이 와장창 깨어어지기에 나가보니 대문 근처 담벼락이나 길에 누워 몸을 잘 가누시지도 못하고 중얼 중얼 넋두리를 하고 계셨다. 그러한 사태가 벌어지면 깜짝 놀란 동생들은 자다 말고 뛰어나가 부축하거나 들쳐 업고 들어오는 일도 두 세번 정도 있었다. 집에 들어오셔서도 그냥 못 주무시고 동생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나 시정사항들 등 한동안 연설을 하시다 잠드시곤 하셨다. 당시 큰형님은 시간에 쫒겨 이 방송국 저 방송국의 여러 프로그램 원고를 밤잠 못 이루시며 탈고하여 녹음 제작까지 마치시는... 다시 말해 시간과의 전쟁을 쉼없이 치루어야 하는... 직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가끔 그렇게 술로 풀어 내시곤 하셨던 것 같다 .
그러나 평소 방송국 일을 마치시고 귀가하실 때에는 명동에 들러 그 유명한 영양센터의 통닭도 사오시기도 하고... 일 주일에 얼마씩 동생들에게 약정을 해 두시고 계획성 있게 쪼개어 일정 금액을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는데 가급적 새 돈으로 주시려 노력하시던 모습이 이 글을 적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다. 그 때 큰형님은 가계부를 적어가며 살자시며 독려 하셨는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당시만 알차게 사시려던 것이 아니라 동생들이 경제에 눈이 뜨이기를 기대하셨슴을 깨닿게 된다. 나도 좀 적어 나갔지만....일기쓰기 등 무언가 기록을 잘 하시던 홍대형님이 오랜동안 계속해서 가계부를 정리하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큰형님은 수년 전 새해에도 어디서 나온 가계부와 일기장을 내게 주신 적이 있는데 모두 이러한 연유로 주셨던가 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68년경의 마포 철길옆 언덕에 위치한 도화동 시절의 기억으로는 이 재명 바오로 신부님의 부제 서품식 참석을 위해 외할머님을 모시고 데레사 이모님과 모니카 누님이 함께 상경하셔서 다녀가신 것이 가장 역사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덕을 좀 더 올라가 정상에 다다르면 용산 성직자 묘지와 성당이 있어 미사참례 다니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서울시내 경복궁과 덕수궁, 창경원, 비원 등지로 돌며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던 시기여서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만도 큰 일이었으나 그렇다 하여 빠진 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70년 5월경에는 혜화동의 고등학교까지 통학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성북동으로 이사를 가 꽤 오랜동안 생활하였다. 그 당시에는 KBS 라디오의 대북방송 <김삿갓 북한방랑기>와 <인간 승리>등의 프로를 쓰실 때로 기억되며 지대가 조금 높아 전망이 좋고 넓은 집이었으며 밥 해 주시는 할머니가 오셔서 밥을 해 주신 적도 있었다. 그 때 나는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여 중,고등학교 통합 미술부의 120여명에 이르는 미술반원들을 통솔, 지도하는 미술반 부반장과 반장을 역임하며 학교생활에 푹 빠져 있었고.... 그 때 받은 여러 미술대회의 우승기는 조회시간에 전교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의 교장선생님께 여러 번 올려 드리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받은 상장과 상패들도 무척 많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찾아서 다시 한 번 보고싶다.
당시 큰형님은 야구를 무척 좋아하셔서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고교 야구대회나 경북고와 배명고의 봉황대기 쟁탈전 등이 열리는 날에는 뜨거운 칼국수를 끓여 먹으며, 윗통도 벗고, 수건을 목에 둘러 연신 땀을 닦으시며, 200자 원고지에 큰형님 특유의 방법으로 꼼꼼히 기록까지 해 가며 야구경기를 제대로 즐기셨다. 그 후에는 삼선교 가까이에 있는 이층집 독채에서 한동안 살기도 하였다. 이 무렵 나는 고3이 되어 미술대학엘 진학해야 했으므로 큰형님의 표현대로 뼈를 깎고 피를 말리며 쓰신 원고료로 시내에서 유명한 향린미술학원을 다닐 수도 있었고 재수시절에는 동경유학도 하시고 초대 한국판화가협회장을 역임하신 이상욱선생님으로부터 고액의 렛슨비를 지불하는 특별지도도 줄곧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형제들이 협동하여 <등목>이라는 것을 자주 하였는데 집 앞 마당이나 욕실 또는 우물이 있던 집에서는 펌프질로 퍼올린 시원한 물로 형제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등에다 비누칠을 하고 찬물을 몇 바가지 끼언져 주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시원~ 하였던 것이다. 영천집의 수돗가에서 아버님도 어머님의 도움으로 늘상 하셨던 우리나라 전통의 이 <등목>을 큰형님과 홍대형님도 무척 즐겨 하셨다 이 글을 적는 지금 한여름날 영천집 수돗가에서 어머님이 활짝 웃으시며~ 어느 자식의 등 위로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부어 주시며 힘차게 쓱~쓱~ 등을 문질러 주시던 그 때 그 모습이 떠올려진다.
그리고 큰형님은 부모님이 올라 오시거나 외식 날에는 명보극장 옆의 아구탕 잘 하는 집이나 복요리 잘하는 집으로 데려가 탕요리도 사 주셨고 오장동의 유명한 함흥냉면과 명동 칼국수의 맛 또한 일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발은 편해야 한다시며 당시나 지금이나 가장 좋은 구두로 정평이 나 있는 금강구두를 여러 번 사 주신 것도 잊지 못할 소중한 일화들 중의 하나이다. 큰형님의 구두는 굽도 여러 번 갈으시며 오래 오래 신으시면서 그러셨던 것은 아닌지... 또 정릉동 시절부터 구두를 잘 닦아 드려서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 다음은 큰형님이 어떤 분의 머리를 힘껏 밟은 일로 유명한 남산동 시절이다. 이 때에는 KBS 중앙방송국이 옆에 있어 작가실의 이기복씨를 비롯 한운사, 이기명 윤혁민씨 등 작가분들이 가끔 오셔서 소줏잔을 기울일 때가 있었다. 그 때 집 아래 골목길이나 계단 위의 상점으로 뛰어가 술도 사 오고 생굴비를 씻고, 찌게도 끓여내고, 노가리를 굽거나 어머니가 잘 손질하여 보내주신 마른 명태도 담는 등 각종 안주를 만들어 내던 생각이 난다.
사실 안주 요리도 큰형님이 잘 하셨기 때문에 홍대형님과 내가 좀 서툴게 음식을 만들기라도 하면 쿠사리와 쫑크를 먹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런 술심부름을 하다 가끔 용돈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술시중을 좀 힘들게(?) 해서인지 체질적인 요인 때문인진 몰라도 나는 아직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당시 레오신부님은 공군 정훈장교로써 부산에서 근무하고 계셨는데 멋진 군복을 입으시고 몇 차례 다녀 가시기도 하셨다.
그 다음이 약수동 시절이 되나 보다. 사실 큰형님 내외분을 무척 아끼시던 안동교구의 이정모님의 부친이시자 외할머님의 동생이신 약수동 할아버지가 가까이 살고 계셔서 약수동으로 불리우지만 주소명으로는 신당동으로 기억된다. 이 때는 내가 대학 1학년 전후의 시기로써 입대영장이 나와 '74년 11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전방에 배치된 후 첫 휴가를 나왔을 때 홍대형님이 나에게 큰형님이 '록이가 고생만 하다 군에 갔다'시며 몹시 안되어 하시더라고 전해 주셔서 가슴이 뭉클해 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큰형님은 대구에 사시던 어느 참한 분의 덕분으로 노총각을 면하셨고.... 막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신 홍대 형님은 긴 긴 세월 동안의 식부생활을 면하게 되었다며 엄청 좋아 하시기도 하셨다.
대구 신천동성당에서, 서품후 이틀 되신 레오신부님 집전의 감동적인 혼배미사가 봉헌되었는데 조모님과 외조모님은 물론 일가 친척분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참석하여 축하를 드리고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였다. 사실 큰형님의 결혼은 레오신부님의 사제서품과 함께 우리 가족사의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들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응암동 신영극장 뒤의 집에서도 한 두해를 사신 후 루피나형수씨의 알뜰 살뜰한 살림솜씨 덕분으로 최초로 녹번동에 집을 장만하여 이사하셨다. 이즈음 군복무를 마친 나는 2학년으로 복학을 하여 루피나 형수씨의 제안과 큰형님의 요청에 따라 현재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있는 이상일이라는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작은 연못도 만들어 물고기를 키워 보기도 하였으며... 엘리사벳도 태어났다.
이 때 홍대 형님과 나는 형님이 근무하시던 서대문 근역의 교남동으로 분가를 하였고 형님이 결혼하신 후 나는 다시 응암동 신응교 옆의 큰형님댁으로 들어가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 시내 중학교 교사시절이던 '82년 11월 명동성당에서 아녜스와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큰형님댁을 출가하였다.
당시 큰형님은 왕성한 집필활동과 병행하여 응암동성당에서 평신도 사도직 활동에도 충실하셨으며 토마스도 얻으셨고 집을 2층으로 개축하시기도 하셨다. 이 집에서의 대표적인 일화로는 아버님 회갑을 기념한 부모님의 유럽성지순례를 전후하여 레오신부님 집전의 전 가족 감사 미사를 드리던 기억이 생각난다. 은혜로운 해외 성지순례 여행에 부모님과 함께 이모님도 함께 하실 수 있어 더욱 의미를 더 하는 순례길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울을 벗어나 안산시 반월의 예술인 아파트에서도 수년간 사셨으며 공교롭게도 홍운형님도 그 옆의 아파트에 입주하게되어 가까이 지내시기도 하셨다. 그 후로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연희동과 목동 4거리 가구골목의 3층집에서도 몇 해를사신 후 목동 1단지 아파트로 입주해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살으시기도 하신 것으로 알지만 대가족 집안의 맏이로 살아오시면서 남모르는 고통과 시련도 많으셨을 것 같다.
사실 큰형님이 서울로 진출하지 않고 고향에 정착해 사셨더라면 객지에서 이처럼 오랜 세월을 이곳 저 곳 옮겨 다니시며 고생하지도 않으셨으리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지만 맏이로써 부모님의 수고를 덜어 드리고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당위적 부담감이 매우 커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은 누누이 맏백씨는 부모 맞잡이데이... 라고 하셨나 보다.
어머님도 선종하시기 전 대구가톨릭병원 준중환자실의 병상에서 내게 "네가 앞으로 잘 되거든 큰형한테 잘 해래이... 돈도 많이 생기면 반드시 좀 갖다 드려라... 꼬옥..." 하시며 간절한 눈빛으로 당부하셨다. 이 순간 나는 그 동안 일생을 살아 오시면서 큰형님이 많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돈도 못모으시고... 장가도 늦게 드시는 등 숙명적으로 여러 면에 걸쳐서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점에 대해 안타갑게 여기시며 무척 미안해 하셨구나! 하는 것을 느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너는 앞으로 반드시 잘 될 것이다" 하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얼마나 자식들 하나 하나를 위해 간절히 지극 정성으로 기도 하시고 애를 끓여 오셨으면.....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되셨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렇지만, 나는 지나온 세월 동안 큰형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지도 못했고 오히려 더 무겁게 해드리며 살아온 것이 재삼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 형제들에게는 큰형님의 십자가를 이어서 짊어져야 하는 시대도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지만 아무리 잘 해보려 하여도 시대나 환경이 다를 뿐더러 큰형님 처럼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목3동성당 인근의 조용하고도 공기 좋은 3층집을 구입하여 네 식구가 성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칠순이신데도 주유천하 하시며 노시지도 못하시고 작가로서 그리고 한국평협회장의 직에 충실하시며 힘차게 살아가고 계시는 것이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전에는 큰형님이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의 자격으로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있었던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창립전 -빛 생명 자연-전시회에 오셔서 한국천주교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장이시며 담당주교이신 손삼석 주교님과 정진석 추기경님을 대신한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님과 함께 뜻깊은 축사를 해 주시기도 하셨고 바쁘신 시간에 내가 출품한 <산행>이라는 작품을 사이에 두고 기념촬영도 하신 바가 있는데... 이 장면이 평화TV<가톨릭 뉴스>시간에 비쳐져 우리 가족이 좀 웃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큰 교회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축사를 하시고 회의나 세미나를 이끌어 가고 계시는 모습을 평화방송TV 화면과 평화신문 그리고 가톨릭신문 등 여러 교회서적들과 잡지는 물론 약 두 해전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시에나 교회입장을 밝히는 일이 있을 때에는 일반 일간지 신문들과 각 채널 TV 등의 매스콤을 통해 수시로 접할 수 있어 지금 현재도 우리 가족들이 어느 시기에 못지 않은 좋은 시절을 지나 보내고 있구나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견지하도록 해 주고 있다.
보편 교회를 위한 무거운 십자가도 좀 있으면 내려 놓으실텐데.... 임기를 무사히 마치신 후로도 깊은 신앙심 하나로 똘똘 뭉치신 큰형수씨와 귀여운 디자이너 엘리사벳 그리고 품성이 좋고 이태리어를 공부하는 토마스와 세계 도처의 훠콜라레 가족 등 모든 교형자매님들과 함께 만년의 행복을 맘껏 누리시며 건강하게 우리 곁에 내내 계셔 주시길 기도 드린다
- 다섯째 동생 홍록(스테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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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홍록 스테파노가 쓴 <조교동에서 목동까지>라는 글 감명깊게 잘 읽었다. 마치 과거로의 긴 여행을 한 번 다녀 온 듯 지나간 날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고 있구나. 수고가 참 많았다. 큰형님의 70년의 생애는 바로 우리 집안의 최근세사요, 하나의 역사가 아닐까 보냐는 의미에서 나는 그런 쪼로 글을 풀어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시간과 세월을 요약 정리한 것에 대해 거듭 수고 많았다는 격려를 하고 싶구나. 그런데, 마포 도화동 시절은 1968년도 주민등록제도가 최초로 시행될 무렵인데, 이재명 신부님의 서품식이 아니고 아마도 부제품을 받을 때가 아닌가 싶네. 서품식은 대구 계산동성당이겠지.
신촌의 창천동시절 큰형님이 동아방송에 집필하시던 프로그램 이름은 아마도 <토픽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나 싶네. 그리고 버스가 돌진하던-그 때 내가 부상을 입고 아현동의 연합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하루를 못 참고 나와 버렸다고 큰형님께 얼마나 야단을 맞았던지...그리고 방촌동 숙부님이 미국에 다녀 오시던 그 무렵으로 할머님도 올라 오셨고 "인생은" 이 함께 살았지- 김명희씨 집에서 창천동 김희태 동국대 교수집(야구 하던)으로 이사 간 것이 아닐까. 그 후 도화동으로 이사 갔고 말이야. 그렇다면 위의 글의 순서들을 일부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아무튼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웠다는 기억 뿐이네 그려.
위의 지적사항들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지난 이야기가 되고 말았네요. 확실히 추억은 미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계속 지적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위에서 지적하 바 대로 많이 수정하기는 하였는데 서울생활의 시대상 나열에 일부 혼선이 있는 듯 하여 거듭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위 두 번째 답글에서와 같이 우리가 정릉에서 신촌으,로 이사온 것은 신부님이 연세대학교에 다니게 되신 것이 이유(너를 위해 성북동으로 이사 간 사실을 포함하여 "맹형삼천"이라고도 하였지)였고, 그 첫번째 집이 김명희씨 집으로 버스가 돌진하던 집이었었지. 그리고 거기에 하숙생으로 살아 가던, 나중에 누님의 친구가 된 이필녀씨는 당시 유행하던 가수 최희준의 히트곡 "하숙생"의 첫 마디를 뽑아 큰형님께서 그녀를 호칭하기를 "인생은" 이라고 명명한 것이고, 버스가 돌진할 무렵 내가 부상을 당하여
아현동 연합병원에 입원하던 중 당시 재수생이라 예비고사를 봐야 하는 등 마음이 바빠 단 하루 만에 제 발로 퇴원하는 바람에 큰형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은 게지. 보상 한 푼도 받지 않고 나왔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 다음 이사간 곳이 김희태 동국대 교수의 집으로 연세대 바로 앞에 위치하였고, 여기 빈 공터에서 야구 공던지기 놀이를 하기도 하였더랬지. 그리고 그 다음 이사간 곳이 바로 마포의 도화동 언덕위 의 가게집이었고, 네가 경신고등학교에 입학하자 큰형님께서는 너를 위해 지대가 높은(밥하는 할머니를 고용했던) 성북2동 큰 집으로 이사하였고, 그 다음 이사한 곳이 삼선교 근처의 성북1동 이층집 독채가 아니었나 싶네 그려.
그리고 머리를 힘차게 밟은 사건이 일어난 곳은 성북2동 언덕 위의 큰집(남산동이 아님)으로 나를 오인하여 베드로형님의 친구인 김인철씨의 머리를 그만....그리고 술 시중 부분에서 "체질적으로.."는 "체질적인"으로 고치는 것이 어떨까 싶고,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사 시기를 조금 더 수정 보완함이 어떨까 싶네. 이것도 활자로 남게 되면 바로 역사가 될 터여서 사실대로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임을 양해해 주기 바라네. 아무튼 수고가 참 많았네 그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신촌 로터리 부근에 가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즉 김희태씨 집에서 바로 마포로 간 게지
여러 가지 지적들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사 건에 대해서 저의 기억으로는 연대앞 김명희씨 집이 레오신부님 연세대 다니신 관계로 정릉에서 바로 이사온 곳이고 버스가 돌진하는 사고가 난 후 욘대 앞 굴다리에서 신촌로터리 방향으로 200M전방에서 우측 골목으로 150M들어가 우측 독채집이 동국대 교수셨던 김희태씨 집이었지요. 그 때 박사도 받으셨고... 큰형님 한 잔 크게 취하시고 오시면 집으로 들어 오지 않고 돌을 던지셨고.... 이곳에서도 야구 연습을 했지만 연대앞 집의 비포장 도로에서 최초로 맨손으로 공받기가 시작되었다는 기억입니다. 김희태씨 집 앞에서는 좀 더 진화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신촌에 처음 이사간 곳인 김명희씨 집은 당시 연세대학교의 담장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에 가서 운동을 마구 할 때이기도 하였고, 약간은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집 앞에서도 야구 공던지기는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도 하였던 게지. 그리고 김명희씨 집은 모래내 방향의 코너집이었기 때문에 당시 버스회사 조수가 새벽을 이용하여 운전 연습을 한다고 버스를 몰고 나왔다가 우리집을 쾅! 박았던 게지. 당시 한국일보에도 보도가 되어 석상근 큰고모부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담벼락이 허물어진, 모포를 걸쳐 놓은 집에 할머님이 오셔서 참담해 하시던 모습도 생경스럽기 짝이 없군 그려.
야구글러브와 뺏도 구비하여 공받기를 하였고 연대앞에서도 공간이 넓어 방망이를 휘둘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머리를 밟은 사건은 남산동에서도 있었고 성북동에서도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분명희 남산동 윗쪽 방에 누워 계시던 분의 머리를 밟는 것을 똑똑히 제가 보았습니다 그 때 형님은 밖에 있어서 현장을 못 보셨겠습니다 이 때는 제가 신촌으로 형님 찾으러 갔다가 흥의씨와 유병영이 형도 어느 당구장인가 식당인가 다방인가에서 만나고 언제 귀가하시겠다고 해 놓고 또 다시 안들어 오셨고 (아마 한 달 이상 외유를 했을 듯...40일도 더 되게) 바로 그 때 홍운형님도 한 동안 안 들어 오시다 그 날 따라 오랜 만에 큰형님
과 제가 자는 동안 새벽에 홍운형님과 인철씨가 들어와 자고 있었슴. 그 때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주무시는 폼이 형님과 똑같아 나도 홍대형님이라 생각하고 한 두시간 두고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형님이 윗방으로 가시더니 발로 힘차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리 밟으시더군요.두 세차레 짖이기시면서... 그러니 형님은 이 사건에 대헤 제가 나중에 설명을 드렸을텐데 무심코 들어셨거나 듣고도 잊어신 것 같습니다 성북동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잊어 버렸다가 지금 말씀 하시니 다시 기억이 나는군요. 이런 일로 수태 얼굴을 붉혔었지요. 암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산동 일은 제게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김희태씨 집에서 도
화동으로 갔다가 경신고가 멀고 버스노선이 불편하여 성북동으로 이사를 간 것에 대해서는 일치하네요 동네 순서가 그러면 안 틀린 것 같은데 순서가 틀린 곳을 다시 정확히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그리고 제대로 밟은 것은 남산동 시절이고 성북동은 그에 비하면 살살 밟은 편에 속합니다 좀 빗나가기도 하고.... 하 ~하 ~ `하~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하~ 자꾸 웃음이 나와서 참질 못하겠네...
그,래, 네 설명을 자세히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구나. 남산동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이제서야 기억하게 되는군. 나도 지금 한참 웃다가 답글을 달고 있는데, 이런 사실들이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아니 될 터인데..그리고 서울생활 중 우리 모두 함께 자취하던 시절과 큰형님 결혼 이후 이사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이 드네. 맨 먼저 정릉-신촌의 창천동 김명희씨 집-창천동 김희태씨 집-그리고 도화동 가게집-성북2동 언덕 위의 100평이나 되는 집-삼선교 근처 성북1동 독채 이층집-남산동-약수동-응암동(신양극장 뒷편)-녹번동-응암동(개천가)-반월(지금의 안산) 예술인 아파트-목동...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네. 그럼, 수고 하시게나.
홍록의 그 많은 기억과 그리움 가득한 마음 충분히 알겠구나. 큰형님과 함께 했던 우리들의 지난 날을 떠올리게 하면서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한다. 수고 많았다. 그런데 글이 너무 길다. 록이가 쓴 글의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42장이다. 우리 구남매지 타블로이드로는 4면 전부를 할애해야 하는 량이 된다. 우리 구남매지에서 글 하나 분량은 200자지로 8장이라도 약간 긴 편이다. 그러니 현재에서 1/4로 줄여주면 좋겠다. 그러니 지나 온 이야기는 간략하게 줄이고 아버님과 어머님의 맏이에 대한 말씀과 록의 지금 큰형님에 대한 심정을 중심으로 줄여주면 좋겠다. 위의 글에서 마지막 부분 중심이 되겠지. 제일 먼저 수고 많았는데 미안하다.
지금 쓴 글은 그대로 이 '가족신문 원고 접수처'에 남겨 주기 바란다. 곧 가족문집을 만들 예정이 있어 그 때 충분히 소화하도록 하자. 또 '6.25 한국동란은 '6.25 한국전쟁'으로, '식구'는 '가족'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세세한 문제는 지금의 원고를 줄인 다음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편집을 책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주문을 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