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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신문 원고접수처 큰형님이 걸어오신 길-조교동에서 목동까지-
ROCK 추천 0 조회 165 11.07.12 00:13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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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7.12 16:50

    첫댓글 홍록 스테파노가 쓴 <조교동에서 목동까지>라는 글 감명깊게 잘 읽었다. 마치 과거로의 긴 여행을 한 번 다녀 온 듯 지나간 날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고 있구나. 수고가 참 많았다. 큰형님의 70년의 생애는 바로 우리 집안의 최근세사요, 하나의 역사가 아닐까 보냐는 의미에서 나는 그런 쪼로 글을 풀어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시간과 세월을 요약 정리한 것에 대해 거듭 수고 많았다는 격려를 하고 싶구나. 그런데, 마포 도화동 시절은 1968년도 주민등록제도가 최초로 시행될 무렵인데, 이재명 신부님의 서품식이 아니고 아마도 부제품을 받을 때가 아닌가 싶네. 서품식은 대구 계산동성당이겠지.

  • 11.07.12 01:59

    신촌의 창천동시절 큰형님이 동아방송에 집필하시던 프로그램 이름은 아마도 <토픽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나 싶네. 그리고 버스가 돌진하던-그 때 내가 부상을 입고 아현동의 연합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하루를 못 참고 나와 버렸다고 큰형님께 얼마나 야단을 맞았던지...그리고 방촌동 숙부님이 미국에 다녀 오시던 그 무렵으로 할머님도 올라 오셨고 "인생은" 이 함께 살았지- 김명희씨 집에서 창천동 김희태 동국대 교수집(야구 하던)으로 이사 간 것이 아닐까. 그 후 도화동으로 이사 갔고 말이야. 그렇다면 위의 글의 순서들을 일부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아무튼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웠다는 기억 뿐이네 그려.

  • 작성자 11.07.12 02:24

    위의 지적사항들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지난 이야기가 되고 말았네요. 확실히 추억은 미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계속 지적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 11.07.12 23:08

    위에서 지적하 바 대로 많이 수정하기는 하였는데 서울생활의 시대상 나열에 일부 혼선이 있는 듯 하여 거듭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위 두 번째 답글에서와 같이 우리가 정릉에서 신촌으,로 이사온 것은 신부님이 연세대학교에 다니게 되신 것이 이유(너를 위해 성북동으로 이사 간 사실을 포함하여 "맹형삼천"이라고도 하였지)였고, 그 첫번째 집이 김명희씨 집으로 버스가 돌진하던 집이었었지. 그리고 거기에 하숙생으로 살아 가던, 나중에 누님의 친구가 된 이필녀씨는 당시 유행하던 가수 최희준의 히트곡 "하숙생"의 첫 마디를 뽑아 큰형님께서 그녀를 호칭하기를 "인생은" 이라고 명명한 것이고, 버스가 돌진할 무렵 내가 부상을 당하여

  • 11.07.12 23:26

    아현동 연합병원에 입원하던 중 당시 재수생이라 예비고사를 봐야 하는 등 마음이 바빠 단 하루 만에 제 발로 퇴원하는 바람에 큰형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은 게지. 보상 한 푼도 받지 않고 나왔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 다음 이사간 곳이 김희태 동국대 교수의 집으로 연세대 바로 앞에 위치하였고, 여기 빈 공터에서 야구 공던지기 놀이를 하기도 하였더랬지. 그리고 그 다음 이사간 곳이 바로 마포의 도화동 언덕위 의 가게집이었고, 네가 경신고등학교에 입학하자 큰형님께서는 너를 위해 지대가 높은(밥하는 할머니를 고용했던) 성북2동 큰 집으로 이사하였고, 그 다음 이사한 곳이 삼선교 근처의 성북1동 이층집 독채가 아니었나 싶네 그려.

  • 11.07.12 23:55

    그리고 머리를 힘차게 밟은 사건이 일어난 곳은 성북2동 언덕 위의 큰집(남산동이 아님)으로 나를 오인하여 베드로형님의 친구인 김인철씨의 머리를 그만....그리고 술 시중 부분에서 "체질적으로.."는 "체질적인"으로 고치는 것이 어떨까 싶고,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사 시기를 조금 더 수정 보완함이 어떨까 싶네. 이것도 활자로 남게 되면 바로 역사가 될 터여서 사실대로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임을 양해해 주기 바라네. 아무튼 수고가 참 많았네 그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신촌 로터리 부근에 가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즉 김희태씨 집에서 바로 마포로 간 게지

  • 작성자 11.07.12 23:55

    여러 가지 지적들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사 건에 대해서 저의 기억으로는 연대앞 김명희씨 집이 레오신부님 연세대 다니신 관계로 정릉에서 바로 이사온 곳이고 버스가 돌진하는 사고가 난 후 욘대 앞 굴다리에서 신촌로터리 방향으로 200M전방에서 우측 골목으로 150M들어가 우측 독채집이 동국대 교수셨던 김희태씨 집이었지요. 그 때 박사도 받으셨고... 큰형님 한 잔 크게 취하시고 오시면 집으로 들어 오지 않고 돌을 던지셨고.... 이곳에서도 야구 연습을 했지만 연대앞 집의 비포장 도로에서 최초로 맨손으로 공받기가 시작되었다는 기억입니다. 김희태씨 집 앞에서는 좀 더 진화해서

  • 11.07.13 00:05

    그럴지도 모르지. 신촌에 처음 이사간 곳인 김명희씨 집은 당시 연세대학교의 담장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에 가서 운동을 마구 할 때이기도 하였고, 약간은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집 앞에서도 야구 공던지기는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도 하였던 게지. 그리고 김명희씨 집은 모래내 방향의 코너집이었기 때문에 당시 버스회사 조수가 새벽을 이용하여 운전 연습을 한다고 버스를 몰고 나왔다가 우리집을 쾅! 박았던 게지. 당시 한국일보에도 보도가 되어 석상근 큰고모부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담벼락이 허물어진, 모포를 걸쳐 놓은 집에 할머님이 오셔서 참담해 하시던 모습도 생경스럽기 짝이 없군 그려.

  • 작성자 11.07.13 00:03

    야구글러브와 뺏도 구비하여 공받기를 하였고 연대앞에서도 공간이 넓어 방망이를 휘둘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머리를 밟은 사건은 남산동에서도 있었고 성북동에서도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분명희 남산동 윗쪽 방에 누워 계시던 분의 머리를 밟는 것을 똑똑히 제가 보았습니다 그 때 형님은 밖에 있어서 현장을 못 보셨겠습니다 이 때는 제가 신촌으로 형님 찾으러 갔다가 흥의씨와 유병영이 형도 어느 당구장인가 식당인가 다방인가에서 만나고 언제 귀가하시겠다고 해 놓고 또 다시 안들어 오셨고 (아마 한 달 이상 외유를 했을 듯...40일도 더 되게) 바로 그 때 홍운형님도 한 동안 안 들어 오시다 그 날 따라 오랜 만에 큰형님

  • 작성자 11.07.13 00:27

    과 제가 자는 동안 새벽에 홍운형님과 인철씨가 들어와 자고 있었슴. 그 때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주무시는 폼이 형님과 똑같아 나도 홍대형님이라 생각하고 한 두시간 두고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형님이 윗방으로 가시더니 발로 힘차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리 밟으시더군요.두 세차레 짖이기시면서... 그러니 형님은 이 사건에 대헤 제가 나중에 설명을 드렸을텐데 무심코 들어셨거나 듣고도 잊어신 것 같습니다 성북동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잊어 버렸다가 지금 말씀 하시니 다시 기억이 나는군요. 이런 일로 수태 얼굴을 붉혔었지요. 암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산동 일은 제게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김희태씨 집에서 도

  • 작성자 11.07.13 00:25

    화동으로 갔다가 경신고가 멀고 버스노선이 불편하여 성북동으로 이사를 간 것에 대해서는 일치하네요 동네 순서가 그러면 안 틀린 것 같은데 순서가 틀린 곳을 다시 정확히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그리고 제대로 밟은 것은 남산동 시절이고 성북동은 그에 비하면 살살 밟은 편에 속합니다 좀 빗나가기도 하고.... 하 ~하 ~ `하~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하~ 자꾸 웃음이 나와서 참질 못하겠네...

  • 11.07.13 00:51

    그,래, 네 설명을 자세히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구나. 남산동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이제서야 기억하게 되는군. 나도 지금 한참 웃다가 답글을 달고 있는데, 이런 사실들이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아니 될 터인데..그리고 서울생활 중 우리 모두 함께 자취하던 시절과 큰형님 결혼 이후 이사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이 드네. 맨 먼저 정릉-신촌의 창천동 김명희씨 집-창천동 김희태씨 집-그리고 도화동 가게집-성북2동 언덕 위의 100평이나 되는 집-삼선교 근처 성북1동 독채 이층집-남산동-약수동-응암동(신양극장 뒷편)-녹번동-응암동(개천가)-반월(지금의 안산) 예술인 아파트-목동...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네. 그럼, 수고 하시게나.

  • 11.07.13 00:54

    홍록의 그 많은 기억과 그리움 가득한 마음 충분히 알겠구나. 큰형님과 함께 했던 우리들의 지난 날을 떠올리게 하면서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한다. 수고 많았다. 그런데 글이 너무 길다. 록이가 쓴 글의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42장이다. 우리 구남매지 타블로이드로는 4면 전부를 할애해야 하는 량이 된다. 우리 구남매지에서 글 하나 분량은 200자지로 8장이라도 약간 긴 편이다. 그러니 현재에서 1/4로 줄여주면 좋겠다. 그러니 지나 온 이야기는 간략하게 줄이고 아버님과 어머님의 맏이에 대한 말씀과 록의 지금 큰형님에 대한 심정을 중심으로 줄여주면 좋겠다. 위의 글에서 마지막 부분 중심이 되겠지. 제일 먼저 수고 많았는데 미안하다.

  • 11.07.13 01:02

    지금 쓴 글은 그대로 이 '가족신문 원고 접수처'에 남겨 주기 바란다. 곧 가족문집을 만들 예정이 있어 그 때 충분히 소화하도록 하자. 또 '6.25 한국동란은 '6.25 한국전쟁'으로, '식구'는 '가족'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세세한 문제는 지금의 원고를 줄인 다음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편집을 책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주문을 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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