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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6]*복음과 하나님
로마서 1장 16–17절 / 이찬수 목사
우리는 [로마서 1장] 말씀을 가지고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앙갤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사절, 또 파송된 자,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앙겔로스라’는 단어 앞에다가 ‘좋은 또 선한’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부사 ‘유’를 붙여서 만든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원래 이 단어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 혹은 그 같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던 보상’ 뭐 이런 뜻으로 통용되던 단어였는데 유앙갤리온을 오늘 성경이 차용을 해서 이것을 ‘복음’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기쁨의 소식, 혹은 복된 소식 이렇게 유앙갤리온을 우리가 차용해서 복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 성경에 보면은 이 복음을 ‘굳 뉴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40장9절]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사야 61장 1-3절] “1. [주]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창조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고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결박된 자들에게 감옥에서 놓임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요, 2. 또 {창조주}의 받아 주시는 해와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을 포고하고 애곡 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게 하려 함이며 3. 또 시온에서 애곡하는 자들에게 정하여 주되 곧 그들에게 재 대신 아름다움을 주고 애곡 대신 기쁨의 기름을 주며 근심의 영 대신 찬양의 옷을 주게 하려 함이라. 그리함으로 그들이 {창조주}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 불릴 것이요, 이로써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
이런 식으로 구약에 예언된 많은 예언의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취해 주신 일, 이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여러분에게 “교회당에서 복음, 복음 그러는데 그 복음이 도대체 뭡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10초짜리로 대답해 줄 답이 있고, 5분짜리로 해줄 답이 있고, 1시간짜리로 해줄 답이 있는데요. 이것을 10초짜리로 딱 한마디로 엑기스로 “복음이 뭐냐고요?” 그러면서 설명하려면 이렇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는 사건
“복음이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해 완성된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렇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한마디를 더 붙이자면 “복음이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해 완성된 구원의 기쁜 소식인데, 이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아주 잘된 정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과 관련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뭐냐면 “이 복음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이 쓴 책 중에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나?] 이런 제목의 책에 보면은 이 부분을 참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정리하니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더 와 닿습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문제 복음의 문제에서 이 ‘하나님의 주도성’을 이것만큼 잘 설명한 설명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구원의 3 시제를 칭의, 성화, 영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러분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칭의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성화는 내가 열심히 땀 흘려서 이루어 가는 것이래서 이 칭의와 성화가 조화를 이루어서 완전한 영화를 이룬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큰일 날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칭의와 성화 영화는 이건 다 한 개념이에요. 제 몸이 하나이듯이 이 칭의, 성화, 영화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거를 이 복잡한 현대를 사랑하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것을 잘 분류해서 설명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칭의, 성화, 영화라는 개념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칭의, 성화, 영화라는 이 개념 속에 꼭 머리에 담고 기억해야 되는 것은 이 모든 과정 과정에 하나님이 주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이 개입돼 있다는 거요. 제가 지난주에 이 물 컵을 가지고 그 성화의 대해서 설명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그랬나?” 이런 분이 계시다면 사랑합니다. 그런 분이 계셔서 제가 오늘 여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성화의 대해서 잘 설명해 놓은 책을 제가 소개 할 수 있는데요. <제이씨 라일>이라는 분이 쓴 [거룩] 이라는 책에 보면은 바로 이 칭의와 성화의 대해서 설명을 참 잘 했는데요. 그 책에 보면 이 칭의와 성화의 공통점과 또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하는데 들어보십시오.
자 먼저 차이입니다. “칭의 있어서 우리의 행위는 전혀 의미가 없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 필요하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우리의 행위가 대단히 중요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싸우고, 깨어, 기도하며, 애쓰고, 수고하며, 노력하라고 명하셨다.” 이렇게 칭의와 성화를 이제 그 차이점을 설명하고는 그 다음에 공통점을 한 번 들어보세요. “그러나 둘 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서 비롯된다. 신자들이 의롭다함을 얻거나 성화되는 것은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거예요.
<팀 체스트> 라는 분이 쓴 [나도 변화 할 수 있다] 이런 제목의 이 책에 보면 바로 이 <제이씨 라일>에 설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보완해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의례 성화의 과정이 바위를 언덕으로 올리는 일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고되고, 더디고 집중하지 않으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성화는 실제로는 돌을 언덕 아래로 굴리는 일과 더 비슷하다. 왜냐하면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은 항상 성공을 거두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잘 내려가는 바위를 내가 자꾸 위로 올린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나를 변화 시키지 마세요. 죄가 아직 더 좋으니까요.”
이 성화의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여러분! 성화라는 것은요, 내가 몸부림쳐서 바위를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화라는 것은 위에서 바위를 아래로 굴리는 행위래요. 인간적으로 보면 내가 바위를 굴렸어요.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중력이 있고, 거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성화를 구현해 나가려고 바위를 위에서 아래로 굴리는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이 사실은 개입하고 계시는 것처럼, 성화도 마찬 가지 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이 칭의, 아닌데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해서, 감격해서, 하나님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으로 보답해 드리려는 이 애씀이 있으면, 하나님은 거기에 힘을 덧입혀 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구원의 문제! 이 복음의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하나님의 주도하심! 이 사실을 아예 머리에 각인을 시키셔야 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17절] 말씀도 바로 이런 맥락으로 살펴보셔야 되는데요, 참 중요한 구절이니까 우리 한목소리로 같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로마서 1장17절] 같이 읽습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17절 말씀은 로마서 말씀 전체를 축약해서 한 구슬로 만들어 놓은 액기스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 17절 말씀! “루터 같은 경우 바로 17절 말씀 때문에 그 인생이 변화가 됐고, 루터가 바로 이 말씀을 깨달아 가지고, 종교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그 혜택을 오늘 우리 모두가 다 누리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구절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말씀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데요. 그런데 17절을 보면 여기에 중요한 두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게 무슨 목적이냐는 거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포인트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왜 하나님은 이걸 요구하시느냐? 하는 거요.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이 두 개념을 이제 이번 주와 다음 2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오늘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게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사실 신앙생활은요, 여기에 나와 있는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하는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이 신앙의 색깔이 결정이 된다고 그렇게 말씀 드려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게 참 중요한 개념이다 보니까요.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보고 책을 보고 하니까요. 너무 많은 학자들의 견해가 펼쳐져 있더라고요.
이것을 다 설명하려면 오늘 설교시간 갖고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다 정리를 해보니까요. 딱 크게 두 파트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이게 해석이 되는가? 하나는,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 오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해석이 있어요. 또 다른 큰 줄기는 뭐냐?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위”로 그렇게 해석을 하는 분류가 되더라는 거예요. 이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 이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는 견해 속에는 이것을 영어로 말함은 [저스티스] “이 심판의 요소가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이 하나님의 의를 요구하시는데, 그 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인생들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 그것이 뒤따른다.”고 하는 개념이 이 말씀에 내포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움을 하나님께 행하신 의로운 행위로 해석하는 여기에는 무슨 말씀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력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절대로 구현해 낼 수 없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행위를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의해 이룰 수 있다는 이 하나님의 대안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두 갈래로 해석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 두 갈래 중에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하나님의 공의로 생각하는, 그래서 영어로 저스티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의를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쪽으로 흐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뭘까요? 그 구원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고행을 하는 거예요. 중세가 바로 여기 해당이 됐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지 않기 위하여, 이 자력 구원! 몸부림을 쳐서 구원의 다다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이게 중세의 모습이요. 불행한 것은 아직도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든 내가 하나님 잘 믿어 보겠다고 발버둥 쳐야지만, 그래야 심판을 면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뭔지 알지요?
루터가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전에 있었던 삶의 특징이 그거예요. 날마다 두려운 거예요. 왜?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우리 자력에 노력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행을 행하면 행할수록 절망밖에 없는 거예요. 많은 성도들이 지금 이런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니까 애가 가다가 자빠져 가지고, 무릎에 피만 보여도 본능적으로 생각이 “지난 달 십일조를 빼먹었더니 바로 치시는 거 아닌가?” 이런 두려움으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어떨 때는 또 이걸 부추기는 교회가 있어요. 제가 바로 이 지역이에요.
분당 지역에 어떤 교회 이야기를 듣고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성도님이 그 교회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그 교회에 있을 수 없는 그런 아픈 상처를 경험하고, 이제 가족이 의논해서 교회를 옮기기로 한 거예요. 그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심방 와서 들려준 메시지가 뭔지 아십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메시지를 받고 나면? 자기 생활에 모든 게 다 걸려요. 아침에 회사 출근하는데 지하철이 방금 지나가서 지하철 놓치면, ‘이게 저주의 시작인가?’ 항상 마음속에 공포를 가지고 살아요.
루터의 회심이 뭡니까?
루터가 그랬다니까요. 어떻게든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고,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무서운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 인간이 이룰 수 없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벌 준비만 하고 계신 하나님! 그런데 여러분! 루터가 깨달은 게 뭡니까? 오늘 제가 믿고 받아들이는 복음은 뭡니까? 복음은 그런 식으로 우리 인간이 애써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범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구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안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그분을 내가 의지하고 그분을 붙잡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있도록 대안을 주신 것! 이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쪽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잘 살겠습니까? 저요, 후자를 믿는 쪽이에요. 제 노력과 선한 어떤 도덕성을 가지고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깨끗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왜? 안 그러면 저주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고,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이렇게 자격도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시고, 감히 분당우리교회 목사로 강단에서 세우시는 이 은혜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나요.
여러분이 감격이 있는 사람이, “내가 뭐 나쁜 짓 한다고 하나님의 벌 안 주신다.” 이런 생각으로 그걸 악용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애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내가 가진 도덕성, 노력, 몸부림, 고행, 이런 것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내게 주신 이 복음, 이 구원의 기쁨!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에 이르도록 해주신 이 구원의 비밀을 발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바로 17절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복음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 인생이 달라졌어요. 루터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당을 다녔는데 불행한 것은 그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그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거예요. 로마 카톨릭에서 그 당시에 가르쳤던 하나님의 의로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저스티스’ 아닙니까? 그래서 그가 수도사가 되고 하루에 7차례씩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부르는데 마음에 기쁨이 생기지 않고 더 불안한 거예요. 더 공포가 찾아오는 거예요.
이래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이룰 수 없다는 걸 확인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대한 분노가 생기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요구하고, 못한다고 벌주시는 하나님! 나는 그런 하나님을 증오한다.” 라고 루터 내면의 갈등이 많은 거예요. 그랬던 그가 [로마서 1장 17절]에 이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그 심령이 달라졌는데요. <롤란드 베인톤>이라고 하는 이 <마틴 루터>에 대한 글을 많이 쓰신 분인데요, 그분이 쓴 책 중에 [마틴 루터의 생애] 라는 책에 보면, 이런 변화를 일으킨 루터에 기쁨을 루터가 한 말을 그대로 거기에 인용하는 게 있는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나에게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로움’였다.” 지금 루터가 말하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이 ‘의로움’ 라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요, 따라서 불의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처벌 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서는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오하고, 그분에게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바울을 붙잡고 늘어지면, ‘그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있을까?’ 하고 계속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곰곰히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그다음 의인은 믿음으로 통하여 산다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 의라는 걸 터득했다. 그다음 들어보세요.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열린 문을 통해 나그네 이런 기분이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의로움’ 때문에 내 속은 증오로 꽉 차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으며, 더 큰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바울서신에 이 대목이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저는 로마서 공부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 루터가 깨달았던 이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억압과 눌림으로부터 주님 앞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8-9절]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감격이 우리에게 필요한데요.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닫는 게 왜 중요한가 하면 이런 말씀들 속에 내포 되어 있는 이 복음의 하나님의 주도성! 이 복음의 하나님의 주도성을 잘 인식하게 될 때 우리 인생에 놀라운 여러 가지 영향력이 미쳐서 변화가 일어났어요.
제가 이번 주 다음 주에 이 부분들을 살펴 볼 텐데 오늘은 그중에서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깨닫게 되면 얻게 되는 두 가지 변화 중에 첫 번째가 뭐냐? “복음이 주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장7-8절]에서 이 바울의 감격을 여러분도 한 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7.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로마서 8장31절]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장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 모두는 약해 가지고요, 다 죄책감이 있어요. 저에게도 많습니다. 철없던 10대 때 멋도 모르고 저질렀던 수많은 어리석은 짓들, 20대 때 혈기 왕성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악들, 30대 때, 40대 때, 50대 때, 오늘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 대면 속에 참 부끄러운 기억들이 마귀에게 이게 먹이가 되어 가지고, 끊임없이 정죄를 당합니다.
여러분 자력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고행으로, 구원을 얻기에 몸부림치던 루터에 전 단계적인 삶을 사는 우리 모두는 이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네 까짓 게 목사야?” 사람들이 너를 모르니까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앉아 있지, 네가 한 그 수많은 과거의 악한 짓들을 기억이 안나?“ 여러분! 이렇게 사단이 저를 정죄할 때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우울해 질 때마다, ➤[로마서 8장1-2절]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저는 사단에게 응수합니다.
제가 사단이 말하는 부끄러운 짓을 안 했기 때문에 아니에요. 사단의 참소가 다 옳은 이야기에요. 왜 그런데 제가 ‘정죄함이 없다’ 선포 합니까?” ➤[로마서 8장2절]에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루터가 경험한 이 놀라운 복음의 깨달음이 제게도 있다가 보니까,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에도 무릅쓰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말씀을 전하는 종이 되었고, 그 은혜가, 감격이, 저에게 있기 때문에 다시는 마귀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짓 하지 않기 위해서 누가 보던지, 보지 않던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려고 몸부림 치고 있는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뿐이겠습니까? 모든 구원의 감격을 가진 사람들이 다 몸부림치는 게,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님 앞에 깨끗하심을 가지고 나가려고 애쓰는 몸부림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먼저 회복이 되어야 되는 것이 이 구원에 대한, 복음에 대한 감격의 회복이에요. 그래 보니까 유명한 수학자라고 하는데요. <아르키메데스> 라는 분이, 공중목욕탕에서 우연히 [유체 역학의 원리] 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요. 그분에게서 이 발견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이분이요, 지금 공중목욕탕에서 벌거벗고 목욕하고 있는 걸 잊어버렸어요. 그 진리를 깨닫고, 너무 기뻐서 벌거벗은 채로 목욕탕을 뛰쳐나가서 “유레카! 유레카!” 우리말로 하면 “난 이제 알았다. 난 이제 알았다.” 덩실덩실 춤을 췄다는 그런 유래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늘 초라한 나 자신, 그리고 나를 억압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 정죄당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 삶 속에 복음의 빛이 비춰질 때 우리에게도 일은 소리쳐 감격하는 기쁨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루터가 1545년 라틴어로 출간한 [루터 전집 1권 성원]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로마서 1장17절] 말씀에 집중하였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 즉 믿음으로 사는 의로움이 라는 것을 알았으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그 의로움이 복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그 순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새로운 느낌을 받았으며 성경 전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갔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로움’ 라는 말을 굉장히 혐오, 혐오로 배척했으나 이제는 사랑을 가지고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가장 달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루터의 감격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최근에는 칼럼을 읽는데요.
칼럼을 쓰신 그 분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때 큰 스님들을 만날 때마다 다 물었다. 이 칼럼 쓰신 분이 물은 거예요. ”깨달음의 맛은 어떤 맛이냐?“고 앞뒤 둘러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세속인으로서 출가 수행자가 맛본 깨달음의 맛이 진짜 궁금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쇠로 된 나무에 꽃을 피워 내듯 평생을 비범한 삶을 산, 성성들이 아니던가? 먼저 꾸지람이 날라 온다. “깨달음의 맛이 어떤 맛입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 비범한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스스로 맛을 봐야지. 귀로 그 맛을 봐서 뭐하게?” 라는 호통이다.
여러분! 저는 이 칼럼을 읽으면서 내가 설교 시간에 이것을 인용하면서 두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하나는, 저도 이 스님처럼 호통을 좀 쳐야 되겠다. “그 루터가 복음의 맛을 본들 여러분이 그걸 느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잘 안 되네요. 제가 하니까? 다시~ “스스로 맛을 봐야지, 루터가 맛본 그 감격을 우리가 설교로 듣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예요. 복음의 기쁨은 스스로 맛을 봐야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그 복음의 감격을 노래하는 걸 읽는 게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또 하나! 여러분! 지금 여기서 승려들은 자기 스스로 도를 닦으며 묵상하는데도 세상에 쇠로 된 나무에 꽃을 피워 내듯,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큰 맛을 느끼고 이렇게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가 지금 우리를 의지해서 하는 묵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주에 주인 되시는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그분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얕고, 얕은 그런 가벼운 삶을 살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께 회개하고 반성해야 되는 게 내가 지난주에 무슨 거짓말하고, 죄짓고, 누구 속여 먹은 것 때문에 아니에요. ‘왜 그 깊으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저는 이렇게 얕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가?’ 이 가장 큰 회개 거리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 내면 안에 참으로 구원해 주시는 이 감격! 이 감격이 회복되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깨달으면 얻는 두 번째 변화가 무엇이냐? ”그 감격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회복된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기억이 나는데요. 자 [로마서 1장14-15절] 보세요. ➤“14. 나는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빚진 자니라. 15.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분량대로 나는 또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은 이 “너희” 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데요? 이게 기회 되면 전하고 아니면 말고가 아니요. 13-16절을 보세요. ➤“13, 형제들아, 이제 나는 너희가 이것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처럼 어떤 열매를 얻기 위해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이제껏 막혔도다.) 14, 나는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빚진 자니라. 15,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분량대로 나는 또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다.”
복음 전하는 대상
여기 지금 로마에 있는 “너희”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에게 바울은 지금 가서 말씀 전 하기를 원하며,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너희가 누구냐?”가 [8절]에 나오는 데 깜짝 놀랄 너희예요. 8절 보세요. ➤“8 먼저 너희 모두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의 믿음이 온 세상에 두루 전하여졌기 때문이라.” 이렇게 된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 “부산에 사는 예수님 안 믿는 우리 큰 언니한테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지금 ‘새 생명 축제 가을에 하는데 여기에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하려고 복음 전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사람 잘 믿는 정도가 아니고, 믿음의 소문이 원근 각지로 퍼져나가는 그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갈망한다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찌 서울에 어느 교회가 믿음이 좋다는 소문이 막 계속 번져 나가는데, 바울이 “내가 너희들에게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생각해 보니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그렇게 믿음이 좋은 소문이 난 그 교회당 안에 여전히 복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섞여 앉아 있다는 거예요.
요즘 매일 자력 구원, 고행, 이런 거나 생각하고, 매일 죄책감에 빠지고, 이런 분들에 대하여 바울이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누구예요? 오늘 여기에 여러분 본당에 와서 예배 하려고 막 40분 전부터 와서 대기하고, 이런 분들에게 해당되는 게 두 번째예요. 그렇게 믿음의 열심히 뜨겁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복음의 감격을 다 잃어버린 거예요. 기계적으로 와 앉아 있는 거예요. 그때 신혼 때 지하 단칸방에서 부부가 울며, 불며 손을 맞잡고 “여보, 우리 단칸방 생활이 불편하지만, 주님만 계시다면 우리는 괜찮지 않느냐?” 그 기쁨의 노래를 부르던 그 감격이 다 없어져 버리고, 기계적으로 그저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바울이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주일날 지각하지 않고 교회 나오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하고, 주중에 성경 잃는 그 Q.T 하는 게 너무 중요하지만, 그 모든 행위 이전에 날 구원해 주신 그래서 십자가 지신 주님의 대한 구원의 감격! 이 감격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이 감격이 회복이 될 때 바울처럼 이거를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루터가 종교 개혁을 왜 했습니까? 왜 목숨 걸고 그런 일을 했느냐? 자기가 [로마서 1장17절]의 비밀을 발견하고 나니까 너무, 너무 주변 사람들이 불쌍한 거예요.
이게 아닌데? 진리는 이게 아닌데? 그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 불쌍하니까 종교개혁을 단행한 거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 전도라는 것은 막 그냥 쥐어짜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 안의 감격이 흘러 내 안에 향기가 흘러, 이것이 전해지는 게 전도에요. 제가 여러분 지난주일 날 그 “애듀 투게더” 말씀드렸잖아요. 그 어려운 집 아이들을 데리고, 세상에 6-7년, 씨름을 해서 6명이 이번에 대학 시험 봤는데 다섯 명의 합격하는 놀라운 쾌거를 이루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가슴 뜨거운 사연
지난주에, 제가 그 과정에서 수고하시는 그 선생님들 봉사자 집사님들 얘기를 듣고 너무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그중에 한 집사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니까요, 이 분은 2009년도부터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세요. 6년째 하세요. 어느 날 설교를 듣는데, 그 때 설교 주제가 “하나님께서 우리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만 좋으라고 주신 것 아니다.” 뭐 매일 설교가 그런 것 아닙니까? 유난히 그분이 그날 그게 와 닿았대요. 그러면서 이 한 메시지가 자꾸 귀에 쟁쟁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나가 놀아라, 나가 놀아라!” 무슨 목적인지 알지요? “교회에서만 자꾸 그렇게 봉사한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섬겨야 된다. 나가 놀아라! 자기가 매일 선교다 밖에 안 했는데 계속 나가 놀아라! 나가 놀아라!” 이게 무슨 뜻인가 고민을 하는데, 그 다음 주 주보에 나온 게 ‘에듀 투게더 봉사자 모집’이었어요.
이분 생각에 “이거구나!” 나가 놀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쳤는데요, 세상에 자기 아내 되시는 분이 간증 쓴 글을 보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자! 부인이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중등 학생을 맡아서인지 부담 없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학생들이 고3이 돼서, 수업 준비를 밤늦게까지 몇 시간 준비해서 가요. 출장 갈 때는 고등수학 책을 한 보따리 가지고 가서 수업 준비를 하기도 하지요. 바쁘고 힘들 텐데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는지?”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회사 일 때문에 바쁜데 출장을 가서도 고3 애들 가르치려고, 그것도 그냥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호텔에 들어가서, 고등 수학 가지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연세가 좀 있는 이 중요한 신사 분의 모습이 여러분! 어떻게 받아들여지십니까? 이게 자기 아내가 봐도 이 구원에 이 열정이 바쁘고 힘들 텐데 어디서 이런 열정이 나오는지? 어디서 열정의 나온다고 그러지요? 난 알아요. 원래 복음의 속성이 그런 거예요. 내 안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이 되면, 그 구원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거예요.
또 최근에요, 우리 교역자 한 분이 제게 심방하고 나서 이제 메일을 보내왔는데, 그 메일을 보고 더욱 슬프기도 하고, 너무너무 감격이 되기도 해서 멍하니 한동안 그 매일을 보면서 제가 그렇게 망연자실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부부가 같이 택배를 하시는 참 성실하신 분이 계세요. 그 와중에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시고 이러는데요. 너무 슬픈 일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두 분이서 열심히 택배를 위해서 일을 하시는데 그 수고하시는 그분들에게 다른 운송 차량이 덮쳐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아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지면 억장이 무너져요. 그런데 이제 그 교구 목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위로해 드리느라고 갔다가 자기가 은혜 받고 와서 그것을 못 견뎌서 저한테 메일로 보낸 거예요.
자! 메일 내용이에요. 이제 그 남자 성도님 아내를 잃은 남자 성도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보험회사 측에 “가해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 고 요청했는데, 계속 마음속에 미움이 사라지고,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 주 목사님 [로마서] 말씀을 통해 “크리스천답게 살자” 이 내용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용서하지 못할 그 사람을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강하게 들어와 그 마음에 순종하여 주중에 가해자를 직접 만났다고 합니다. 만나보니 어린아이와 장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38세의 젊은 분이었는데, 가해자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용서할 테니 식구들이 모두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으면 좋겠다.” 그 말씀을 하고 오셨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가해자 아내와 장모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는데 멍해지더라고요.
아침 1부 예배가 끝나고, 이 메일을 보내주신 우리 교역자가 다시 메일이 왔어요. 이 설교를 듣고 들어보세요. 목사님 그 성도님께서 가해자 가정을 만난 이후에 몇 주 후에 그 성도님에게 연락이 다시 왔습니다. 가해자 가정이 가까운 교회로 등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래와 같이 문자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가해자 가정이 지난 주 교회에 등록을 하였네요. 할렐루야!” 여러분! 복음은 쥐어짜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요. 저는 이 집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집사님 가정을 위해서 기도 합니다. “하나님! 인간인데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인데, 문득, 문득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올 때마다, 복음이 바로 작동되어 그 마음을 만져주시는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우리 그 가정 식구들이 다 누리게 해 주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눈물로 축복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일로 아파하고 계세요? 누구를 용서하지 못해 마음이 힘드세요? 무슨 일로 ‘루터’가 복음을 제대로 깨닫기 이전에 그 눌림과 두려움과 공포와 하나님을 향한 울분과 분노! 이렇게 빠져 계세요? 여러분에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 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남이 감격했다는 그것 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니? 그게.” 여러분이 은혜를 누리고, 여러분이 감격하고, 여러분이 삶 속에서 맛보는 이 복음의 능력이 너무 감격이 커서, 그 가해자를 용서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끊임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예레미야 23장 29-30절]입니다. ➤“29. {창조주}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 같지 아니하냐? 30. {창조주}가 말하노라. 그런즉, 보라, 각각 자기 이웃에게서 내 말들을 도둑질하는 대언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 이 복음의 뜨거움을 아십니까? 복음의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능력을 아십니까? ➤[예레미야 3장22-23절] “22. 타락한 자녀들아, 너희는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타락한 것을 고쳐 주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로 오나니 주는 {창조주} 우리 [하나님]이시나이다. 23. 작은 산들과 수많은 산들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것은 진실로 헛된 일이니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창조주} 우리 [하나님]께 있나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성경을 손이 드셔야 돼요. 여러분! 지난 1월-2월 우리 교회에서 신약 1독 운동을 했는데, 1월 달 집계를 보고, 2월은 아직 안 봤지만, 추정하건데 여러분! 지난 두 달 동안에 우리 교회 성도님 중에 신약성경을 1독 내지 2독 하신 분이 2천 명이 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열기를 이제 구약 통독으로 연결할 거예요.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오디오 성경을 제공합니다. 듣는 귀를 따라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읽기가 쉬워요. 올 한 해에 모든 성도님들 신구약 1독 목표로 꿈으로 잡고 나아가서 식어버린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감격을 상한 심령으로 고통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복음의 능력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첫댓글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