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00인(1)
계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요한은 인치는 광경은 보지 못했지만 인 맞은 자의 수는 들었다. 그러나 그 숫자를 일러준 자가 누구인지 문맥에서 찾아볼 수 없다. 9:16에도 수를 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그가 들은 숫자는 모두 다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인침을 받은의 헬라어 에스프라기스메논(evsfragisme,nwn having been sealed)은 “입증하다”, “소유권을 명시하다”의 뜻을 가진 스프라기조(sfragi,zω)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한 번 찍은 후에 결코 취소하지 않는 영원한 날인(捺印)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소유로 인을 치신 후에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롬 11:29).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해석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실제적 유대인들이다(Walvoord, Bengel). 둘째, 영적 이스라엘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Ladd, Charles, Plumm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실제적 유대인에 관한 언어를 가지고 영적 이스라엘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출애굽의 언어로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 식의 계시록의 독특한 표현방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은 실제적 유대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종적 및 지리적 한계가 없는 세계적인 특성을 가진 영적 이스라엘 즉 하나님 백성의 전부를 가리키며 교회를 상징한다(롬 2:28-29; 9:6-7 갈 3:28-29; 6:16). 그러면 실제적 이스라엘 자손의 인침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도 개인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실제적 유대인 구원 문제를 다루는데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세 장이나 할애하였다(9-11장).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록 민족적으로는 참 이스라엘로부터 제외되었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가 아직 남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린 게 아니다.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 주역들이 사도 바울과 제자들을 비롯해서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감람나무의 접붙임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롬 11:17-24). 그들의 자리는 감람나무에 접붙인 이방인들로 대체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거룩한 민족이다(롬 11:16). 비록 그들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롬 11:25) 강퍅해 있을지라도 이방인의 구원을 시기 나게 하여(롬 11:11, 14) 결국 신앙으로 되돌아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롬 11:26).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던 밤에 얻은 새 이름으로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이겼음이라”(창 32:28)는 뜻이다. 계시록에서 성도들은 이기는 자로 상징되었다(2:7; 15:2; 21:7). 영적으로 이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이고(3절) 그들이 인을 받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리스도께 속해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 곧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불렀다(갈 6:16). 또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속이 교회에 있을 것을 두고 이르기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자면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라 하였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롬 4:11)이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이르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고 하셨다.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롬 2:28-29 롬 9:6-8).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새로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과 약속을 받을 자들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 19:28). 요한은 이러한 성경적 배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로 적용한 것이다. 각 지파 중에서 라는 문구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열두 지파는 민족적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충성된 마지막 세대를 가리킨다(갈 3:27-29). 왜냐하면 요한 당시에 지파의 의미는 이미 상실하여 무의미했기 때문이며 더구나 명단에 레위 지파가 포함된 것을 보니 지리적인 지파의 지칭이 아닌 게 분명하다. 성경에 레위 지파에게는 땅의 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문자 그대로의 지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북방 이스라엘이 주전 722/721년에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했을 때에(왕하 17:5-23) 열 지파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지역에 흩어져 열방과 동화되었고 서로 섞여져(왕하 17:24-41) 지파의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남방 유다도 주전 605년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기 시작하여 수차에 걸친 침략으로 결국 예레미야가 말한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렘 13:19)는 한탄을 보게 된다. 70년 후에 고레스의 명령으로 귀환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고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되어 나라는 없어지고 유대인들은 세계에 흩어졌다. 그리하여 실제적인 지파의 의미는 없어져 버렸다. 또한 7장에 나오는 지파의 목록은 구약의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7장에 나오는 각 지파를 문자적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것보다 상징적인 영적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게 옳은 것이다. 야고보는 마음에 교회를 생각하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약속하셨다. 엘렌 G. 화잇은 “구약에서 열두 부조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한 것처럼 열두 사도는 복음 교회의 대표자가 된다”고 하였다.
십사만 사천의 정체 규명(糾明)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44,000이라는 수는 다양한 추측을 자아낸 신비한 숫자이다. 그 신원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시대를 내려오면서 미궁(迷宮)에 빠지게 한 주제이다. 144,000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문자 그대로의 숫자와 유대인의 지파를 가리킨다(Walvoord, Seiss). 둘째, 144,000은 상징적인 숫자이다(Ladd, Swete, Alford).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십사만 사천은 종말에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 공동체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숫자이다. 13장의 짐승이 불완전을 의미하는 육백 육십육이란 상징적인 수를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완전을 의미하는 십사만 사천이란 상징적인 수를 가지고 있다. 성경문맥은 144,000이 실제적인 숫자라기보다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정렬한 영적 군대 전체를 일컫는 상징적인 숫자임을 나타낸다. 민수기 31:4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전쟁에 보낼지니라”고 하심으로 1,000은 군대조직의 기본이었다(민 1:16; 31:3-7 수 22:14, 21 삼상 10:19; 23:23 미 5:2). 144,000은 1,000x144이고, 144는 12x12이다. 하나님 나라에 사용되는 거룩한 숫자인 12는 하나님의 조직수이고 1,000은 종족의 나눔이나 군사적 단위를 나타내는 수이다. 따라서 12x12x1,000으로 되어 있는 144,000은 고대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 조직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군사적 단위로 나타낸 것이다. 즉 구약과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일컫는 수다. 따라서 인 맞은 자의 수 144,000은 1,000명 군사로 구성된 영적 교전(交戰) 중에 있는 144부대인 셈이다. 영적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군사적 용어로 묘사한 승리한 교회를 상징하는 숫자라는 걸 나타낸다. 144,000과 동일한 그룹을 9절에서 큰 무리라고 일컬었는데 “무리”라고 번역된 오클로스(o[cλος)는 군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적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의해 승리하는(12:11)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군대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장차올 큰 환난의 문턱에 서 있다. 그런데 144,000이 상징적인 숫자란 말은 실제적으로 항상 그 숫자보다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을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잠정적인 군사력을 파악하기 위해 각 지파에 군인이 될 수 있는 나이의 남자 수만 세었다(민 1:3, 19-46; 26:1-51 삼하 24:1-9). 따라서 인을 받을 여자의 수도 생각해야 한다.
재림교회 안에 144,000인의 신원에 관해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이다. 첫째, 144,000의 숫자는 각 시대를 걸쳐 내려온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연합과 백성을 상징한다. 144,000명은 어떤 엘리트 그룹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라는 것이다. 둘째, 144,000인은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종말백성을 가리킨다. 두 가지 견해 중 오늘날 첫째 견해를 지지하는 게 대세를 이룬다. 폴린, 스테파노비치, 니올 등이 지지를 한다. 1992년 대총회 발간 요한계시록도 144,000인은 구원 받을 신구약 성도 전체를 가리킨다고 했다. 두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꿈꿨던 온 이스라엘(롬 11:26)... 또한 그것은 다양한 문화와 국가에서 나온, 요한이 보는 흰 옷 입은 큰 무리(7:9), 압제로부터 생존한 사람들이다(7:14).”
둘째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에 의하면, 144,000인은 세 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마지막 인치는 시기는 셋째천사의 기별이 선포된 이후부터이며, 마지막 시대에 안식일과 연관된 인과 144,000의 언급은 그 신원이 종말백성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44,000인이 구원 받은 신구약 성도 전체가 아니라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셋째 천사의 기별인 안식일 기별을 믿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최후의 인(印)을 받은 마지막 무리라는 것이다.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이며 마지막 때 인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진실한 종들(3절)로서 재림 때에 살아있을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144,000인(2)
계 7:5-8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5-8절에서 두 가지 특징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 중에(evk 에크)를 열두 번 반복하여 인 맞은 144,000은 많은 사람들 중에 선택받은 자들임을 가리킨다. 그들은 14:4에서 “사람 가운데에서(아포 Vapo away from) 속량함을 받”은 자로 정의 된다. 아포는 “...에서부터”를 의미하는 분리의 개념을 가진 전치사이다. 주목할 것은 144,000은 성도들 가운데서 분리되어 구별된 자들이 아니라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되어 분리된 자들이라는 점이다. 둘째, 요한이 선택하여 배열한 열두 지파의 이름은 성경 다른 곳에 나오는 순서나 명단과는 다르다. 야곱의 축복순서로 언급한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열두 지파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이다. 도성 문들의 순서로 언급한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목록은 단, 아셀,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 베냐민,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지파이다. 두령들의 순서를 언급한 민수기 1:5-15의 목록은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 벤야민, 단, 아셀, 갓, 납달리이다. 이 목록들을 관찰해보면 에스겔 48장과 민수기 1장의 목록에는 창세기 49장의 목록에 있는 요셉과 레위 대신에 요셉의 장자 므낫세와 차자 에브라임이 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고 자신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을 받을 자격을 줌으로 이루어졌다(창 48:8-22). 따라서 지파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14명이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두 명을 제외시켜야 열두 지파가 된다.
5-8절의 목록을 다른 곳과 비교분석해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창세기 49장의 목록과 대조해 보면 단이 제외되고 므낫세가 포함됐다. 둘째, 에스겔 48장과 민수기 1장의 목록에는 에브라임이 제외되고 레위가 포함됐다. 다시 말해 14명중 창세기 49장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제외되고, 에스겔 48장과 민수기 1장에서는 레위, 요셉이 제외됐다. 셋째, 최종 계시록 7:5-8에서는 에브라임과 단이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144,000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당장 다음의 문제에 부닥친다. 첫째는 7장에서 열두 지파의 열거는 계보(系譜)나 지역이나 연령의 순서대로 배열한 게 아니다(창 35:22-26). 열두 지파의 순차가 전례(前例)와는 바뀌어져 있다. 7장에서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 지파대신에 유다 지파가 제일 먼저 나온다. 메시아가 난 것이 유다 지파이기 때문이다(5:5-6). 에스겔 48장에는 단지파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그러나 계시록 7장에는 단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아예 제외되고 요셉지파와 열외로 있던 레위 지파가 포함됐다. 둘째로 문자적 해석의 문제점은 지금 열두 지파의 순수 혈통을 가려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지파간의 통혼(通婚)으로 피는 크게 혼합되어 가려낼 수가 없다. 열 두 지파는 오늘날 존재하지도 않고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셋째, 각 지파에서 구원 얻을 사람이 더도 덜도 없이 일률적으로 12,000명씩이라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오늘날 12지파가 각각 순수한 혈통의 12,000명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요셉이 두 지파로 계수되었기 때문에(에브라임과 므낫세) 실제로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아니라 요셉을 제하고 13지파였다. 그 중에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는 열외지파로 구약의 열두 지파 중에 처음에는 계수되었으나 나중에는 계수되지 아니했다. 따라서 레위를 계수하면서 12라는 수를 유지하기 위해 지파들 중에 하나를 빼야하였다. 그래서 단이 제외되고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의 이름이 들어갔다. 단과 에브라임처럼 루시퍼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들은 하늘에 있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기는 자들만 하나님 보좌에 앉게 되고 영원한 유업을 받을 것이다(7:14-17). 그러므로 결국 계시록 7장의 열두 지파의 목록에서 창세기 49장의 목록과 다른 점은 단 지파 대신에 므낫세 지파가 있는 것이다. 또한 민수기 목록과 에스겔의 목록과 다른 점은 단과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과 레위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체적 이유 때문에 숫자가 문자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요한은 문자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육적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과 약속들의 수혜자들인 영적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144.000인은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대표한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144,000이라는 숫자는 교회의 연합과 완전성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족적인 이스라엘과 교회의 두 다른 구별된 백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한 백성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다(롬 2:28-29; 9:6-8 갈 3:29; 6:16 약 1:1).
단 지파는 목록에서 왜 탈락되었을까? 단 지파는 정복자를 뜻하는 녹보석 위에 그 이름이 기록된 아름다운 지파였으며 삼손이 그 지파 출신이다(삿 13:2; 15:20). 그러나 그 지파의 특징은 중상모략과 우상숭배였다. 야곱이 유언하기를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7)고 했다. 단 자손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다(삿 18:30).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경배함으로 단 지역은 북방왕국에서 우상숭배의 중심이 되었다(왕하 10:29). 이와 같은 죄 곧 음해와 우상숭배의 죄가 144,000의 목록에서 제외된 중요한 이유였다(신 29:18-20). 144,000은 참 이스라엘로 흠이 없어야 한다(14:1-5). 어떤 주석가는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202)의 견해를 따라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기 때문에 제외되었다고 주장했다. 요한은 단 지파를 명단에서 빼고 대신에 요셉의 계보에 속한 므낫세를 집어넣었다. 이로 인해 요셉은 아들인 므낫세와 함께 두 몫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에브라임은 목록에서 왜 탈락되었을까? 그것은 에브라임의 반역적인 특성 때문이다. 출애굽 당시에 에브라임지파는 므낫세와 베냐민지파와 함께 이스라엘 서쪽진영의 대표였다(민 2:18). 그리고 여호수아를 배출한 출중한 지파였다(민 13:8 대상 7:20, 27). 그리하여 에브라임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한 자요(렘 31:20), 실지로 그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그분의 장자로 인정을 받았다(렘 31:9). 그러나 그러한 영광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지파에 속했던 여로보암은 반역의 주역이 되었다(왕상 11:26). 여로보암은 사마리아를 북방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삼고 남방유다와 대치하였다(왕상 11:29-31). 그는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케 했다(왕상 12:27-30). 에브라임은 반역하여 우상숭배에 빠졌다(호 4:17; 8:9-11; 12:1). 시인은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시 78:9-10)라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관계없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호 8:12). 이사야 시대에는 에브라임은 유다를 대항하여 시리아와 연합했다(사 7:2-9). 이방인들과 잡혼 하여 혼잡하게 되었다(호 7:8). 이러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에브라임은 144,000의 목록에서 제외되었다(호 9:17).
불가승수의 무리
계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9-12절까지는 4, 5장과 너무나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여러 용어들이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는 큰 환난을 통과하고 구원을 받아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한다. 장로들은 엎드려 얼굴을 대고 경배하고 네 생물은 아멘 한다. 9-17절까지의 큰 무리와 1-8절의 144,000인의 관계에 대해 주석가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두 무리는 동일한 무리로서 144,000은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큰 무리는 하나님 보좌 앞에 서 있는 승리의 교회(church triumphant)를 묘사한 것이다. 전자는 지상의 환난을 통과하는 중이고 후자는 이미 인을 받아 환난을 통과하여 하늘에 가 있다. 따라서 앞 문단(1-8절)과 본 문단(9-17절)은 동일한 백성을 다른 각도와 다른 환경에서 본 동일한 장면이다. 9-17절은 스가랴 14:16-21의 초막절 개념을 인유했을 가능성이 있다(possible allusion).
이 일 후에 곧 1-8절에 나온 내용을 들은 후에, 내가 보니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그가 들은 것을 이제는 보게 됐다는 말이다. 요한이 목격한 불가승수(不可勝數)의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왔다(5:9; 11:9; 13:7; 14:6; 17:15). 이것은 큰 무리가 나라나 종족을 초월하여 온 세계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구원얻을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뜻이다(마 28:19 행 1:8). 하나님의 백성은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배경에서 형성된 연합체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은 자들이다(1:6; 5:9). 큰 무리라는 말로 보아 144,000은 상징적인 숫자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일곱 단어로 된 여섯 계층의 사람들 곧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6:15)과는 대조적인 사람들이다. 전자는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노래 부르고 후자는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16:15-16)고 요청할 것이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표현 속에 우리는 그것이 네 자손이 별과 같이 많겠으며 해변의 모래 같이 많겠다고 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창 15:5; 32:12)의 성취를 보는 것이다.
재림교회 주석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요약 제시한다. 첫째, 큰 무리는 144,000과 같은 무리이다. 둘째, 큰 무리는 144,000과 다른 무리이다. 전자는 “각 시대의 승리한 성도로 남아 있는 자들”이고, 후자는 특별한 무리이다. 셋째, 큰 무리는 144,000을 포함하는 구속받은 전체의 무리이다. 세 견해 중 재림교회는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1992년에 대총회의 성경연구위원회가 펴낸 계시록 연구서에는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견해를 소개하면서 첫째 견해를 지지하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즉 144,000인과 큰 무리는 다른 환경 하에 있는 동일한 그룹이라고 한 것이다. 사실 세 견해 중에 두 무리가 동일한 무리라는 입장이 더 타당하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문맥을 관찰해 보면 3절의 인을 맞는 “하나님의 종들”과 15절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그들”과 22:3의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기는 “그의 종들”은 다 같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7장에서 144,000인과 큰 무리는 동일한 무리인 게 틀림없다. 둘째, 계시록에 같은 사건을 두고 시차에 따라 “내가 들으니”와 “내가 보니”로 표현한 요한의 문학적 기교 때문이다. 전자는 기대감을 일으키고 후자는 만족을 암시한다. 즉 본 것은 들었던 동일한 걸 설명한 것이다. 요한은 인침을 받는 자의 수를 들었다(4절). 또한 그는 같은 무리를 보았다(9절). 요한은 처음에 나팔 같은 소리를 들었으나(1:10) 보기 위해 돌이켰을 때에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1:12-13). 처음에 그는 유다지파의 사자가 이겼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결국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보았다(5:5-6). 17장에서 그는 물위에 앉아 있는 음녀에 대해 들었으나 결국 붉은 짐승 위에 앉은 여인을 보았다(17:1-5). 마지막 계시에서 요한은 어린양의 아내 신부에 대해 들었으나 그는 실지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았다(21:9-12). 처음에는 듣고 나중에는 실제로 보는 그런 패턴이다. 이런 배경에서 요한은 144,000인의 수를 들었고 나중에는 동일한 큰 무리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인과 큰 무리는 다른 환경 아래에 있는 동일한 무리인 게 확실하다. 전자의 계수된 무리는 환난의 입구에 있는 지상에 있는 무리이고 후자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리는 이미 환난을 통과하여 하늘에 가 있는 같은 무리이다. 큰 무리는 앞서 말한 144,000인을 다르게 말한 용어이다. 니올(Beatrice S. Neall)은 주장하기를 계시록 7장은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첫 부분(1-8절)의 상징적인 수인 144,000인은 종말의 투쟁하는 지상의 교회이고 둘째 부분(9-17절)의 큰 무리는 하늘에 도달한 승리한 하늘에서의 교회로, 두 무리는 동일한 단체라고 했다. 또한 첫 부분은 요한이 귀로 들은 수이고 나중 부분은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무리이다. 이리하여 전자는 후자를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라 했다. 얼핏 보면 144,000인과 큰 무리는 별개의 그룹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다. 144,000인으로 말할 때는 전쟁에 나가는 군사적 한 단위로 말했고 큰 무리로 말했을 때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축제하며 찬양 경배 드리는 무리로 묘사한 것이다. 래드(George Eldon Ladd)는 “그들은 역사의 마지막 두 단계에 나타날 동일한 백성 곧 교회를 대표한다. 즉, 첫째 무리는 큰 환난의 문턱에 서있는 무리이며, 나중의 무리는 이러한 환난의 때를 통과한 후의 무리로 순교를 당했지만 승리를 거둔 자들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래드는 그들이 순교를 당한 무리인가? 라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이 문맥에 전연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래드는 나중에 말하는 그들이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라는 말이 순교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지금은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재림을 맞이할 충성스러운 성도들이다. 마태는 주께서 오시는 날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할 전체 공동체를 상징한 상징적인 숫자이다. 계시록 7장에 나오는 무리는 두 무리인가 동일한 한 무리인가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입장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녀는 계시록 7:14-17을 144,000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부활한 성도들을 포함하여 모든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큰 무리로 언급하는 듯한 곳도 여러 곳에 있다. 따라서 승천을 시점으로 하여 승천 전의 무리 즉 살아서 구원 얻는 자들과 부활한 성도들 모두가 144,000을 이루고 승천 후의 동일한 무리 즉 큰 무리로 호칭된 걸로 간주해야 된다. 니올(Beatrice S. Neall)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 지상에 두 개의 다른 백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요한계시록은 지지하지 않는다. 요한은 항상 하나의 백성만을 염두에 두고 “그 종들”(1:1), “남은 자손”(12:17), “성도들”(14:12) 등으로 지칭했다고 하였다.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든 것으로 보아 이 땅에서 승리한 자임에 틀림없다. 옷은 헬라어 스톨라스(στολάς robes)로 두루마기와 같은 긴 옷 곧 예복을 의미한다. 흰 옷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승리하는 것의 상징이다. 14절에서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다. 종려나무는 그들이 계속 승리했다는 것의 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했을 때에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환영했다(요 12:13). 초막절을 생각나게 한다(레 23:39 신 16:13-17). 오즈번은 9절이 하늘에서 초막절이 재개되어 경배하는 모습이라 했다. 예루살렘이 마카비의 지도아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에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거문고와 시편으로 승리를 축제했다. 큰 무리는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한다. 큰 무리의 이 위치는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한 대 원의 한 위치이다. 일단 보좌 앞은 하나님 앞을 의미한다. 보좌는 상징적 용어로 하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14:3). 4, 5장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보좌를 네 생물이 둘러 떠받들고 있고 그 밖으로 이십사 장로들의 보좌들이 둘리어져 있으며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둘러져 있다. 성령 하나님의 위치는 보좌 앞이다(4:5). 어린양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5:6)다가 아버지 보좌에 동석하셨다(5:7). 재림하실 때부터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보좌에 앉을 것이며(마 19:28; 25:31), 자기 보좌 가운데 계실 것이다(17절). 재림 이후 하늘에서 예수님은 목자로서(17절) 구속받은 자들을 인도하여 아버지 보좌 앞에서 찬양 경배를 드리게 할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시온산(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아버지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게 할 것이며(14:1-3), 생명수 샘으로도 인도하실 것이다(17절). 그런데 큰 무리가 천천만만의 천사들의 위치를 제치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의 자리이다. 엘렌 G 화잇은 삼림 때에 있을 그리스도의 대관식에는 그리스도의 보좌 주위 제일 가까운 곳에는 순교자를 비롯한 구원 얻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했다. 10-12절의 찬송은 5:9-14의 찬송의 재연이다.
승리한 큰 무리는 큰 소리로 외쳐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찬양을 돌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시련과 참화(慘禍)에서 승리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성취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와주신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9-10절의 근본적 핵심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도와주신 은덕이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사실 그들의 승리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개정표준역은 “구원은 우리 하나님께 속한다”고 했다.
일곱 나팔의 도입부 계시
계 8: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2-6절은 일곱 나팔의 도입부로 기능하는 계시이다. 요한이 일곱 나팔의 기원과 목적을 보여주고자 의도한 부분이다. 비록 하늘 성소에서 일어나는 장면이지만 그 결과는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도입부 계시들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계시록에 나오는 계시들은 도입부에 거의 하늘 성소의 어떤 부분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면 성소의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도입부 계시 다음에 일곱 교회에 관한 계시가 주어졌고,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 후에 일곱 인에 관한 계시가 주어졌다. 마찬가지로 일곱 나팔의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2-6절의 그리스도의 하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천사가 하늘 성소 금단에서 향을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도입부 계시들은 비록 연속적인 전체 이상보다 선행(先行)하지만 그 영향력은 전체적인 모습 속에 그대로 남아 계시의 배경을 이룬다. 4, 5장의 하늘 보좌에 관한 도입부 계시가 일곱 인의 계시에 앞서 나와 배경이 되듯이 2-6절의 하늘 증거 장막의 금 향단의 활동이 일곱 나팔의 계시를 선행하여 전체적인 모습에 그대로 남아 배경을 이룬다. 이것은 11:19이 12-14장을 위해 하늘 성소의 배경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2-6절의 도입부 계시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일곱 나팔의 전체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빛을 얻게 된다.
바클레이는 2절이 7절 바로 앞에 배열되어야 하는데 사본을 만든 사람의 실수로 지금과 같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8장 초반부는 그 배열 구성에 있어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 도입부 계시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2절)은 것을 알리고 본론을 말한 후(3-5절) 그리고 끝 부분에 이르러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6절)고 있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중보와 마침을 한 단위로 묘사하여 나팔의 전체 흐름에 배경을 삼고자 의도적으로 초입에 기록한 것으로 2절과 6절은 그 단위에 포함되는 앞 뒤 표인 것이다. 따라서 2절과 6절은 인클루시오(Inclusio)를 이루고 있다.
일곱 나팔은 몇 절부터 시작하는가? 다수의 학자들이 일곱 나팔은 1절에 일곱째 인을 뗄 때에 시작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을 논리적 연대순으로 생각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은 분명히 2절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그분께로 받는 것으로 일곱 나팔을 시작한다. 요한은 1절에서 너무나 단순 간결한 진술로 일곱 인의 계시를 완결하고 2절부터 다른 새로운 계시를 펼친다. 즉 일곱 나팔에 관한 계시의 전개이다.
그러면 8:1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1절은 단지 앞 뒤 사건을 연결하는 전환절의 기능일 뿐이다. 마치 3:21이 일곱 교회의 정점(定點)이 되지만 동시에 4, 5장의 사건들을 예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11:18이 일곱 나팔의 정점이나 나머지 부분들의 내용에 대한 요약 진술을 포함하는 것과 같다. 또한 17:18이 17장과 18장을 연결함과 동시에 음녀와 큰 도시의 정체를 같은 걸로 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절 원문에는 “내가 보매” 앞에 접속사 카이(kai. and)가 있다. 요한은 계시에서 앞 뒤 사건을 구별할 때에 주로 “이 일 후에”(메타 타우타 μeta. tau/ta after these things)를 사용하였지만(4:1; 7:1,9; 15:5; 18:1; 19:1) 1절과 2절 사이는 접속사로 연결했다. 이것은 하늘의 침묵과 성도들의 기도 사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이 상당한 상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절에서 끝나는 일곱 인과 뒤이어 나오는 일곱 나팔은 서로 유기적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관계인가? 둘은 상호 보완적이며 거의 동일한 시대에 일어나는 종교적 정치적 사건을 통해 대쟁투를 다루고 있다. 요한은 역사를 군사적인 측면에서 일별하여 제국이 어떻게 붕괴되는가를 보여주며 교회에 영향을 미친 세력들을 밝혀준다. 일곱째인과 일곱째 나팔은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종말론적 절정으로 삼는다.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는 구절은 지상 성소 매일의 봉사를 시작할 때에 나팔 담당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어 그 시작을 알리던 것에 기초된 계시의 장면이다(대상 15:24). 일곱 천사(tou.j e`pta. avgge,louj the seven angels)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어두에 정관사 투스(tou.j the)는 이미 다른 곳에 나온 천사들을 가리키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앞에 언급한 곳이 없다. 여기 외에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천사는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아 붓는 천사들뿐이다(15:1; 16:1; 17:1; 21:9). 따라서 일곱 재앙을 쏟는 천사들을 예기하여 언급한 동일한 일곱 천사일 가능성이 있다. 일곱 천사의 신분에 대해 성경은 침묵한다. 단지 에녹서 20:7에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고(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미가엘, 사라콰엘, 가브리엘, 레미엘), 또한 외경 토비트 12:15에는 라파엘이 “나는 영광스런 주님을 시중드는 일곱 천사 중의 하나인 라파엘입니다”고 말했다. 누가복음 1:19에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천사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가 일곱 나팔을 받은 천사들 중의 하나인지는 알 수 없다. 일곱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것은 요한이 아직 하늘 성소 첫째 칸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 것이다. 움직이는 하나님의 보좌는 그리스도께서 동석한 후에도 여전히 첫째 칸에 머물고 있었다. 요한의 시야에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께서 계속 중보하시는 사역의 장면이 너무나 명증하게 들어왔다.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위하여 섬긴다는 뜻이고, 채비를 갖추어 하명을 기다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다(왕상 17:1; 18:15 왕하 3:14; 5:16). 그 자리는 아주 영광스런 위치이다.
나팔에는 뿔로 만든 일반적인 나팔 쇼파르(레 25:9)와 은으로 만든 제사장들만 불던 나팔 하초체(민 10:2-10)가 있었는데 계시록에 나오는 것은 주로 일반적인 뿔 나팔이다. 번제물 드리기 전(민 10:10)과 절기 때(레 23:24; 25:9)에도 나팔을 불었기 때문에 미쉬나에 의하면 유대인의 매일의 생활에서 최소한 성전에서 21회 나팔을 불었고 절기에는 48회 불었다(수카 5. 5).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째는 명령을 의미했다. 백성을 모두 불러 모을 때에(민 10:3), 전쟁을 위한 명령을 내릴 때에(민 10:9), 종교적 축제 때에(민 10:10), 그리고 성전 봉사 때에(대하 5:12-13; 13:2-13) 제사장들은 은으로 만들어진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악기로서가 아니라 소리를 내어 알리는 기능으로서 뿔로 된 나팔을 불었다(삿 3:27; 6:34 삼상 13:3 사 18:3; 27:13 렘 4:5, 19; 51:27 욜 2:7). 속죄일에는 뿔 나팔을 불었다(레 25:9). 둘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리라”(민 10:9)는 의미였다. 나팔을 불면 하나님이 역사에 등장하여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나팔소리는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다(수 6:4-16). 계시록에서 나팔소리는 그리스도의 등장을 알리는 표이다(1;10 4:1). 일곱 나팔은 그리스도의 등장을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분이 기억하사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를 부으시고(8:13),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신다(9:4). 그 건 성도들의 탄원의 응답이다(6:10).
그들은 일곱 나팔을 받았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받았더라의 헬라어 에도데산(evdo,qhsan there were given)은 디도미(δι,δωμι “주다”)의 3인칭 수동태 부정과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다는 뜻이다(divine passive). 이 완곡어법의 수동태는 일 세기의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할까 두려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 것에서 나온 특수한 용법이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활동을 수동태로 표현한 것이다.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등을 관장하여 진행시키는 분은 아버지 보좌에 동석하여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나팔을 주신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일곱 나팔의 목적이 보복이 아니라 회개키 위함이다(9:20-21; 11:13). 천사가 나팔을 부는 것은 다가오는 심판이나 재림과 같은 대 사건을 알리기 위함이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
계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3-4절의 내용과 그 근본적 의미는 명백하다. 이 장면은 지상 성소에서 매일 행하던 제사장들의 사역을 배경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향로, 향, 금단의 언급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초점이 맞춰진다. 성소 안 향단에서 드리는 분향은 매일 두 차례 행해졌는데 그날의 첫 제사가 드려질 때와 마지막 제사가 드려질 때에 향이 드려졌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 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 지며”(출 30:7-8)라고 명하셨다.
매일의 제사에서 시간이 되면 나팔을 불었다. 제사장은 번제단의 속죄제 제물을 잡고 그 피를 제단 밑에 쏟으면 담당 제사장이 금향로에 번제단의 불을 담아 향을 가지고 성소 안에 들어가 금단에 향을 태웠다. 이때에 향연이 성소를 가득 채우고 휘장 위를 넘어 지성소의 언약궤 위 속죄소까지 이르렀다(레 16:12-13). 그런 의미에서 향단은 히브리서 9:3-4에 의하면 지성소에 속한 것으로도 간주 되었다. 백성들은 뜰에서 기도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제사장이 나올 때에 일곱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어 매일의 제사가 끝났음을 알렸다.
다른 천사는 누구인가? 문맥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를 가리킨다(Bealed, Ladd, Walvoord). 둘째, 단지 2절에 나오는 일곱 천사들과는 다른 천사이다(Mounce). 셋째, 불을 다스리는 천사이다(Maxwell). 세 가지 중 어느 견해가 더 타당한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해석의 어려움은 향을 드리는 사역이 제사장의 일이었는데 3-5절에 천사가 향을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천사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3-5절이 중보의 제사가 분명한데 그 중보자는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가끔 예수님이 천사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창 48:16 출 3:1-6). 그러나 맥스웰은 문맥의 흐름을 보아 다른 천사는 그리스도는 아니고, 5절에 나오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라 했다(14:18). 만일 그렇다면 불의 천사는 불이라는 뜻을 가진 스랍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사 6:6-7).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네 생물이 깊이 관여해 있다(5:8).
제단은 번제단을 일컫고(출 30:1-10), 제단 곁에 서서는 천사가 번제단에서 숯불을 담는 동작을 암시한다. 금향로를 가지고, 성막의 향로는 놋으로 만들어졌으나(출 27:3), 솔로몬 성전의 향로는 금으로 만들어졌다(왕상 7:50). 보좌 앞 금 제단은 향단을 가리킨다.
천사는 금향로를 가지고 번제단 곁에 서서 많은 향을 받았다. 금향로와 향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상징한다. 특별히 금향로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탄원을 담은 걸 의미한다. 누가 천사에게 향을 주었는지 문맥은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사의 시제가 신적 수동태(에도데 evdo,qh was given)이기 때문에 그 향을 주신 분은 틀림없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천사가 향을 받은 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모든 성도의 기도와 섞어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이다.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라는 말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천사가 그 기도에 향을 첨가하는 걸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 기도에다 그분의 속죄의 공로를 섞으시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인 것이다. 죄를 속하는데 그분의 피만이 공효가 있어 받으실 만한 것이 된다.
향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5:8에서는 금 대접에 가득히 담겨진 향을 성도의 기도들이라 했다. 일부 학자들이 향과 기도를 동일한 걸로 간주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3절에서는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드리는 기도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향은 그리스도의 의를 예표하는 속죄의 공로이다. 그 완전한 의가 회개한 죄와 부적절한 선한행위를 덮으시는 것이다. 천사가 받은 많은 향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와 공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죄를 회개하는 자들의 기도에 섞이는 향이다. 모든 성도의 기도 라는 문구는 모든 성도가 하늘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혜택 아래 적용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기도와 자복과 감사를 담은 향로에다 자신의 흠 없는 공로와 기도를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드리고자는 헬라어 도세이(δώσει he will give)는 제공하다, 주다라는 의미인데 드리고자 라고 번역한 것은 옳은 것이다. 다섯째 인에서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달라고 간원하던(6:10) 장면이 회상된다. 몇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도들의 기도는 다섯째 인 아래서 박해받아 순교한 성도들의 탄원의 기도를 가리킨다. 이는 제단 아래서 탄원하던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확실한 보증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인들과 나팔들이 상호 관계가 있음을 지적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지상의 장면과 거기에 응하는 하늘의 장면이 교차적으로 큰 대조를 이루며 기도가 확실히 응답된다는 보증을 해준다. 금 제단과 금향로의 언급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와 땅에서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의 가치가 얼마나 큰가를 환기시켜 준다.
필자가 보기에는 3-4절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사역하시는 걸 불을 다스리는 천사 즉 네 생물 중 하나가 조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맥에서 천사에게 많은 향 즉 속죄의 공로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주체는 그리스도이고 조력자는 다른 천사이다. 천사는 그분의 곁에서 한 손에 금향로 들고 다른 손에 향을 받아 예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간구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롬 8:34). 이 장면은 하늘 성소에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천사는 때때로 성도들의 기도에 어떤 종류의 사역을 수행한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단 9:20; 10:10). 네 생물은 성도들의 기도를 중재하는데 그리스도를 돕는다(5:8).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성도가 기도할 때에 천사가 그리스도께 향을 받아 기도와 합하여 금 향단에서 향을 올리는 걸 가리킨다. 성경에 중보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천사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조력하는 것이다(딤전 2:5 롬 8:34 요일 2:1). 향연은 성소를 가득 채운 연기인데,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와 기도를 실고 하나님을 향해 오르는 것을 상징한다. 지상성소에서 제사장은 피와 향으로 하나님께 접근하였다. 향연으로 하나님께 접근 하는 것은 중보자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중보자를 통해서만 여호와께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을 돕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5:8) 외에 천사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조력하여 향을 올리는 모습은 놀라운 일이다.
나팔로 가는 도입부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압제받는 백성들의 기도를 받아 그분의 피로 중보 하신다는 확실한 보증이다. 그리고 일곱 나팔이 그리스도의 성소사역과 관련 있음을 여기서 본다.
중보사역의 끝
계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중보의 장면이 갑작스럽게 심판의 장면으로 바뀌어 긴장감을 일으킨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향단에 향을 드리기를 마친 후에 이미 가지고 있던 향로에다 향은 없이 제단의 불만 담아다가 땅에 쏟았다. 그런데 천사가 무엇을 쏟았는지 목적어가 없다. 그러나 지시대명사 아우톤(auvto.n)은 항로를 가리킨다. 천사는 항로를 던진 것이다. 불을 땅에 쏟는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처음에 향로에다 제단의 불을 담은 목적은 하나님께 향에다 기도를 섞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은 목적은 심판이다.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모두 다 타당하다. 첫째, 이것은 일곱째 나팔 끝에 일어날 일이므로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의 완결과 은혜의 기간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일은 하늘 성소에서 인치는 사업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향로를 내 던지고 손을 들며 “다 이루었다” 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은혜의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뜻하며 무서운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다. 향로의 불에다 향을 섞지 않고 땅에 쏟은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전이 전혀 없는 무자비한 심판이 될 것을 상징한다. 이 구절은 “내가 땅에 불을 던지려 왔다”(눅 12:49)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둘째, 3-4절은 다섯째 인에서 모든 성도의 기도는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호소이다. 그래서 5절에 불을 땅에 쏟는 게 그 응답이라는 것이다. 향로에다 담은 그 불이 있던 제단은 성도들의 기도가 드려지던 곳이다. 다섯째 인에서 성도들이 제단 아래서 신원해 주기를 간절히 탄원한 곳이다(6:9-11). 제단에서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제단에서 탄원하던 순교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세상에 임하는 것을 상징한다(Mounce, Ladd, Morris). 순교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 응답된 것을 16:5-7, 17과 19:2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하지 않으시고 개입하여 해결해 주신다(출 3:7).
향로에 불을 가득 담아 땅에 쏟는 것은 에스겔서의 계시의 배경과 대비된다(겔 10:1-6).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겔 10:2). 이것은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레 26:31-34). 회개시키기 위한 형벌의 심판이지 결코 최후의 심판은 아니었다(겔 11:16-21 레 26:40-45). 그러나 은혜 시기의 끝에 임할 심판은 향연이 없는 즉 그리스도의 중보의 아무런 혜택이 없는 심판이 될 것이다. 회개는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만 들어날 것이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향로의 불이 땅에 쏟아진 결과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상징한다(출 19:16-19). 하늘에서 시작된 심판이 땅에서 마무리된다. 4:5과 16:18에는 지진이 더 추가 돼 네 가지이다. 일곱째 나팔 끝에 하늘 성소 둘째 칸이 열릴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데 거기에는 큰 우박이 더 추가 돼 다섯 가지이다(11:19). 또 다른 점은 다른 곳에서는 번개가 제일 먼저인데 여기서는 우레가 먼저다. 아마 출애굽기 순서를 따랐을 것이다(출 19:16).
|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