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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포구 현황(현존)
□ 중구, 서구, 동구
1. 남포(南浦)
남포동(南浦洞)의 앞바다의 지명이 남포(南浦)라는 말로 쓰이지 않았고 자갈치 바닷가라 했다. 남포동을 일제시대 남포정(南浦町)이라 했다.「포」은 「물가 빈」으로「남쪽 물가」란 뜻으로 일본인들은 남빈(南濱)라 했지만 우리말로는 빈(濱)자를 그리 쓰지 않고 물가 포(浦)자를 써서 남빈정(南濱町)을 광복 후에 남포동으로 고쳤다.
부산에서 가장 서민적인 바다인 남포의 개척은 개항 이후의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남빈 해수욕장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 소요되는 채소와 고기와 쌀과 신탄(장작과 숯)들이 남해안과 김해지역에서 배를 통하여 남빈으로 들어왔다.
또한 생활일용품도 대마도를 거쳐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때도 어항과 상항(商港)구실을 함께 했다. 지금의 남포동에 있었던 해산물상조합에 들어갈 생선과 건어물도 들어오고, 대청동에 있었던 정미시장에 들어갈 나락[벼]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남빈매립 공사가 1932년~1940년까지 8년간을 이은 이 공사는 남부민동 방파제공사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충무동 앞과 자갈치시장을 5개의 공구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그렇게 공구를 나눈 것은 순차적인 공사로 항구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의 이곳 남항은 그러한 어항과 상항(商港)의 역할만이 아니었다. 영도다리가 축조되고, 오늘까지도 남포동과 영도 사이로 오가는 도선장이 있지만 영도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나루터로서의 역할도 켰다. 자길치의「치」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발치」「아래치」「저만치」와 같은 토박이말의 접미사「치」가 붙어「자갈치」가 된 것이라 한다.
2. 부산포
부산포(釜山浦)는『동국여지승람(1481)』에는 부산(산의 이름) 아래 있다는 포구로 지금의 좌천동의 증산(甑山) 아래가 된다. 지금은 하나의 행정동으로 있으나, 부산포의 거듭된 발전으로 부산포의 얼안이 넓어지면서 오늘날의 부산항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부산포에는 수군진영인 부산진이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된 그 부산진의 포구가 지금은 매축이 되어 건물들이 들어서 그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지금의 정공단 자리가 옛 부산진성의 남문으로 보고 있다.『래영지(萊營誌, 1850)』산천조에 “초량항(草梁項)은 본영(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남쪽 30리, 절영도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부산 아래 부산포에는 항거왜호가 있었다고 했다. 이 왜호는 항상 머물고 있는 왜인의 집이란 뜻으로 왜의 상인이 장사로 와서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던 곳이다. 그때 장사로 오는 배는 부산포로 들어왔다. 지금의 좌천동 바닷가를 부산포라 했을 당시는 동래현과의 거리가 가까운 바닷가가 되어 우리나라 사신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면 이곳(영가대)에서 배를 띄웠다. 부산포는 군사․무역․외교상의 역할을 한 셈이다.
부산포에 있던 왜관이 지금의 수정동으로 옮겨가고, 용두산 주위로 다시 옮겨가도 처음 부산포에 있었던 왜관이라 해서 조선쪽에서는 부산왜관(釜山倭館)이라 하고 일본쪽에서는 부산화관(釜山和館)이라 했다. 따라서 부산과 부산포란 이름은 용두산 얼안까지 확대되어 갔다. 부산포 앞바다 부산진지성 부근에는 조선시대 일본의 국왕사의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에서 파견하는 통신사들이 출발하면서 해신제를 지냈던 영가대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5년 경부선 철도부설공사로 철거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동래부지(1740)』에는 동래군 동평면에 속하였다고 한다. 부산포의 개항이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국제항으로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1876년의『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제2조에 3개항(부산․원산․인천) 개항을 명문화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1868년 이전에 1개의 부산면이 120년이 채 되지 않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광역시로 발전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부산포도 두모포와 마찬가지로 바다가 매축되면서 그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3. 모지포(毛知浦)
모지포(毛知浦)는 서구 암남동 혈청소(국립동물검역소) 앞에 있는 해안으로 감천만에 열려있다. ‘몰치포’라고도 불리는 모지포는 본래 모짓개에서 비롯된다. 암남공원의 서쪽 끝인 모지포말 부근에 만입된 작은 포구로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배후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암남동 조개무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조선후기(1850년경)에는 이곳에 10여명의 어민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가 안쪽에는 모지포 마을이 자연마을로 남아 있다.
모지포 앞바다에는 두도(頭島)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서구 암남반도 남동쪽에 있는 섬으로 동백나무, 삐죽이, 해송 등이 자생하고 있으며, 섬의 면적은 19,080㎡이다. 또한 무인등대가 설치되어 항해하는 선박의 길잡이가 되고 있으며, 1972년 12월 20일 건설부 고시 제555호로 도시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섬은 육지와 가까워 낚시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많이 잡히는 고기로는 노래미, 뽈락 등이 주종을 이룬다.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위에는 온통 바다새들의 배설과 둥지로 회색빛으로 변하였다. 이 섬을 흔히들 갈매기의 천국이라 일컫고 있다. 홍수 시에는 낙동강물을 따라 떠내려 온 쥐, 뱀이 물위를 헤엄치며 배회하다가 섬에 올라와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명 대가리섬 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남 구
1. 감만포(甘灣浦)
감만포(甘灣浦)는 남구의 문현로타리에서 바닷길을 따라 우암동을 지나면 감만동이다. 그 감만동 앞바다가 감만포이다. 이 감만포도 매축으로 구조가 바뀌어 지난날의 지형을 헤아리기 어렵지만 원래는 자연이 형성한 만으로서의 포구였다. 조선초기 수군제도가 창설되자 경상좌도수군의 총사령부 격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이 감만포에 설치되었다. 그 뒤 태종 때 수군절도사영이 울산(蔚山)의 개운포(開雲浦)로 옮겨졌다.
이후 개운포로 옮겨졌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해운포(수영)로 옮겨져 왔다. 해운포로 옮겨온 수군절도사영은 인조 13년(1635) 수영강의 물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토사(土砂)로 병선의 움직임과 장선(藏船)에 지장이 있어 다시 감만포로 옮겼다. 그러나 감만포 맞은편에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1607~1678)이 위치하게 되었다.
두모포왜관이 가까워 군사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하여, 효종 3년(1652) 다시 감만포에서 해운포(수영)로 절도사영을 옮겼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 두 차례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자리가 감만포다. 이 감만포를 감만이라 썼다.
감은「이길 감」또는「찌를 감」이고 만은「오랑캐 만」인데 이는「평정할 이」또는「동쪽오랑캐 이」자다. 오랑캐를 무찔러 평정한다는 뜻이 되다. 감만이는 수군절도사영이 있게 되자 수군영에서 수군이 가진 임무인 오랑캐를 무찔러 평정한다는 수군 본분을 밝힌 곳의 이름이 되고, 포구의 이름이 된 것으로 본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1592년 9월 1일, 양력 10월 5일)에서 왜적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격멸시켰다고 그리 이름하였다는 말이 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왜군의 포로를 수감했다가 처리한 곳이어서 그리 이름하였다는 말도 있다. 옛 감만포는 여러 차례 매립을 통하여 오늘날의 감만컨테이너부두가 조성되어 부산항의 수출입 물동량 처리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 백운포(白雲浦)
백운포(白雲浦)는 신선대와 용호2동 송두말 사이에 있는 포구로서 서쪽과 동쪽 끝은 화산암류의 기반암이 나출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주먹한 크기의 둥근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천주교묘지공원을 뒤로하고 있는 이 포구는 예로부터 수려한 자갈해안으로 오륙도를 바라볼 수 있는 경승지로 이름나있었나 최근에는 거의 매립되어 해군 제3함대의 군부대가 이전하였다.
백운포 인근에 있는 신선대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9호로 남구 용호동 산 18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황령산에서 뻗어내린 산등성이가 부산만에 몰입하여 형성된 우암반도의 남단에 해당되며, 이곳은 화산암질로 된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그렇게 크지 않은 해식애와 해식동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속설에 의하면, 신라말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이곳에서 노닐었다 하며,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 이란 큰 바위에는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 왔다고 하며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으로 덮혀 경관이 빼어나고, 자생하는 식물은 사스레피나무, 섬쥐똥나무, 송악 등 낙엽활엽수가 혼재되어 있다. 이들 숲에는 메비들기, 떼까치, 황금새 등 많은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광복 후에는 협소하나 수려한 모래사장과 경치 때문에 해수욕장으로 활용되었으나, 절경의 옛 자취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한때는 일부지역이 군사작전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개방되었다. 옛 백운포에는 해안매립을 통하여 신선대컨테이너 부두가 조성되어 부산항 수출입 물동랭을 처리하는 중심 부두역할을 다하고 있다.
□ 해운대구
1. 미포(尾浦)
미포(尾浦)는 해운대해수욕장 동쪽 끝에 있는 포구로 와우산이 바다에 몰입되면서 형성된 암석포구로 곳곳에 암반이 넓게 나타난다. 주변에는 호텔과 여관 그리고 크고 작은 횟집들이 들어서 있는 이곳은 옛날 양장구․성게․고등이 많이 잡히기로 유명하였고, 망성어․감성둠 등의 낚시터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해운대(海雲臺)는 부산의 해운대구 중동일대의 수려한 사빈해안과 배후의 송림숲, 동백나무로 유명한 육계도인 동백섬 등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의 명승지이다.
해운대의 유래는『동국여지승람(1481)』『동래부지(1740)』에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말기 유학자이자 문필가로 이름난 최치원 선생이 지금의 동백섬 일대를 거닐다가 이곳의 절경에 심취하여 동백섬 남쪽 암벽에 자신의 자(字)인 해운(海雲)을 따서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새긴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달맞이고개는 해운대해수욕장(백사장 길이 1.55㎞) 동쪽의 미포에서 청사포로 넘어가는 와우산 능선을 지나 송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짙은 산림으로 드리워진 이 고개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어우러진 해운대 저녁달의 월출 경관은 일찍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이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바다에서 뜨는 달의 경관이 어찌 해운대나 부산 바닷가 뿐일까 마는 동해안에서 뜨는 달은 월출의 한때 뿐이요 서해안에서 보는 달은 월몰의 한때 뿐이다. 그러나 해운대는 동해와 남해의 어울묵으로 월출의 장관에서 월몰의 경관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달맞이고개(와우산)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쟁반같이 둥근 달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월출(月出)의 장관도 장관이지만, 출렁이는 파도속에 녹아 내리는 황금색 달빛은 가히 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미포와 접해있는 와우산에는 월출 못지 않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달맞이고개는 해운대해수욕장(백사장 길이 1.55㎞) 동쪽의 미포에서 청사포로 넘어가는 와우산 능선을 지나 송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짙은 산림으로 드리워진 이 고개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어우러진 해운대 저녁달의 월출 경관은 일찍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이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바다에서 뜨는 달의 경관이 어찌 해운대나 부산 바닷가 뿐일까 마는 동해안에서 뜨는 달은 월출의 한때 뿐이요 서해안에서 보는 달은 월몰의 한 때 뿐이다. 그러나 해운대는 동해와 남해의 어울묵으로 월출의 장관에서 월몰의 경관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달맞이고개(와우산)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쟁반같이 둥근 달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월출(月出)의 장관도 장관이지만, 출렁이는 파도 속에 녹아내리는 황금색 달빛은 가히 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대보름날이면 달맞이 축제가 열리고 있어 달맞이고개나 해운대 백사장에서 달구경을 위해 모여드는 시민의 수는 수만을 해아리지만 해운대 바닷가 달구경의 진미는 달집태우기와 함께 동․서해안에서는 볼 수 없는 한밤내내 바다를 수놓으며 그려 가는 살아 있는 묵화를 보는 듯한 그 정치에 취한다.
2. 수영만(해운포)
수영만(水營彎)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 水軍節度使營 : 좌수영 또는 수영이라고도 부름)이 설치되기 전에는 해운포(海雲浦)로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어류가 풍부한 어장이었다.
1413년(태종 13) 경상좌도 수군도안무처치사본영(慶尙左道 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이 부산포에 설치되었고, 1466년(세조 12) 군제개편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 水軍節度使營)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수군절도사영을 옮겼다가[일부 학자들은『부산부사원고(1937)』자료를 인용 이전시기를 태종 때로 보고 있으나,『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진영이 부산포에 있다는 기록과 다른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전시기를 성종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임], 1592년 동래 남촌면(현 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겨왔다.
1636년(인조 14) 사천(絲川, 수영천)의 범람으로 하구의 수로가 매몰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감만이포(현 남구 감만동 앞바다)로 옮겼으나, 두모포왜관(현 동구 수정시장 부근)과 가까워 군사기밀의 유출이 우려되어 1652년(효종 3) 다시 동래 남촌면으로 옮겼다. 그 후 1895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진영(鎭營)이 폐지될 때까지 지금의 수영구 수영동에 존속하였다.
조선시대 해운포(수영만)의 하구는 지금처럼 협소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 만(灣의) 형태가 되어 있었는데 수영강과 해운대 우동천에서 흘러내린 퇴적물이 해운포만을 메운 것이다. 1740년 편찬된『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해운포(海雲浦)는 동래부(東萊府) 동쪽 10리로 지금의 수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정보단지 조성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샌텀시티 자리는 수영강과 온천천에서 실려 내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형성된 충적평야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 인근 주민들을 강제 징용하여 1944년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군사물자 수송을 위한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전쟁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였다.
1958년 1월 30일(대통령령 제1341호)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되어 오던 시설을 개․보수를 하여, 1958년 8월 30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항공기가 취항하는 부산비행장으로 개항되었다. 1963년 9월 3일 부산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으며, 부지 면적은 1,094,133㎡였고, 활주로 2,012m에 폭이 45m였다. 당시 활주로 길이와 강도로서 B-727기종까지 취항이 가능하였으나 계기 착륙장치(ILS) 시설이 없어 악천후 시에는 항공기 취항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당시 수영비행장의 1일 수용 능력이 2,400명 정도로 대형항공기 출항 비행장으로서 규모가 작아 격증하는 관광객과 수출화물을 감당하기 곤란하여, 1976년 8월 1일 김해국제공항이 개항되면서 모든 기능이 이전하였다. 수영비행장은 군용비행장으로 이용되다가, 1996년 2월 16일 군용항공기지에서 제외 되면서 비행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96년 4월 8일 부산시와 육군본부간 국유재산 매매계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시에서 인수하였다. 1996년 7월 31일 옛 수영비행장에 대해 건설교통부에 도시기본계획변경 승인신청을 하여 동년 12월 18일 승인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였다.
부산시는 1996년 8월 2일 수영정보단지개발주식회사 설치조례를 제정하였고, 8월 14일 SK그룹과 수영정보단지개발 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다. 동년 12월 10일 수영정보단지개발(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1997년 1월 13일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서 공식적인 발족을 하였다. 2000년 5월 6일 센텀시티(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 옛 수영비행장에는 정보단지인 센텀시티 조성공사가 한창 추진되고 있다.
수영비행장 앞쪽 해변은 수영해수욕장으로 해운대해수욕장 보다도 해수욕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수영해수욕장은 수영강의 강물과 바닷물이 어울린 해수욕장으로 지금의 시립미술관 앞에서 경동아파트 부근까지 길이가 1㎞에 폭이 30여m로 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았다고 한다. 또한 앞바다에서는 멸치잡이가 성행하였다. 여름 방학 때면 부산시내남녀 중학교 학생들의 하계훈련 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미 제5공군 사령부가 수영비행장에 주둔하면서 해수욕장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폐쇄되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유치되면서 요트경기장 조성을 위해 1982년 6월부터 해운대구 우동 984번지 일대 수영만 해면을 매립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9월 21일 체육부와 올림픽위원회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요트경기장 입지로 선정되면서, 1983년 2월 14일 시공사로 대우건설이 선정되고 1983년 6월 15일 요트경기장 건설공사가 착공되었다. 1985년 8월 13일 체육부와 올림픽위원회, 국제요트경기연맹이 세부시설 규모를 협의로 공사를 추진하여 1986년 4월 30일 요트경기장이 준공되었다.
1982년에 매립된 수영만 매립지에는 국제경기시설이 부산요트경기장을 비롯하여 부산시립미술관, 올림픽동산, 국민생활교육관, 교육시설, 공공기관과 주거 상업지역에는 아파트와 근린생활시설물이 조성되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각종 시설물의 기반시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3. 청사포(靑沙浦)
청사포(靑沙浦)는 해운대와 송정사이에 있는 포구로 갯바위로 된 해안에 수려한 사빈이 펼쳐지고 배후에 송림이 우거져 보기 드문 해안 경승지를 이룬다.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은 일찍부터 맛 좋기로 이름나 있고 이 때문에 청사포는 횟집촌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청사포에는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다. 갓 시집 온 여인이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몇 달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해난사고를 당한 남편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여인이 멀리 수평선을 향해 눈물지으면서 기다리던 큰 소나무와 그 아래 바위가 지금의 수령 350년의 망부송이요 망부암이다. 청사포(靑沙浦)의 본래 이름은 청사포(靑蛇浦)로 전해진다. 남편을 간절히 기다리던 여인을 용왕이 보낸 푸른뱀(靑蛇)이 찾아와 여인을 용궁으로 안내하여 남편을 만나보게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청사포에는 망부송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해운대구 청사포에 금술이 좋은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인의 성이 임씨(김씨라고도 함)였다. 그 임씨는 남편이 바다로 고기잡이로 하러 나가 돌아올 무렵이면 오늘날의 망부송 앞 바닷가에 있는 바위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그 바위 옆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 아득하게 먼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남편되는 사람은 이승이 아닌 저승의 바다속 궁정이란 용궁으로 가서 이승을 바라보니 아내가 바닷가 소나무에 올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더란 것이다.
남편으로 보아서는 가슴이 저미는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용왕님께 하소연하고 용왕은 그 임씨 부인과 남편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푸른뱀인 청사(靑蛇)를 이승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승의 임씨 부인은 용궁에서 보낸 청사를 맞아 청사를 타고 용궁으로 가서 남편을 다시 맞아 부부의 정을 다시 일구었다고 한다.
지금의 청사포의 이름은 이 전설에서 보이는 청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뒤에 사(蛇)라는 글자가 좋지 않아 사(沙)로 바꾸어 청사포(靑沙浦)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씨 부인이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다를 바라보던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부산지명총람』제3권에서 발췌).
□ 사하구
1. 감내포
감내포(甘內浦)는 감천만 안쪽에 자리 잡은 포구로 감천만의 옛 지명에 해당된다. 왼쪽과 오른쪽에 대한해협으로 뻗어간 송도반도와 두송반도 사이의 좁고 긴 포구로 일찍부터 천연의 항구로 이용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본래 이; 포구는 깨끗한 모래와 자갈들이 깔린 한적한 해안이었으나 이곳에 1962년 부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이곳이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되면서 현대적인 항만으로 바뀌었다. 감내포는 고려시대에 부산포와 다대포로 오가는 뱃길의 길목 역할을 한 곳으로 왜구의 출몰이 잦았었고, 조선시대에는 천마산성과 서평포진 사이의 요지로서 바다에 출입하는 배와 사람들을 검문하는 수문의 구실을 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감천항은 부산의 수산물전지기지로 수산물가공단지가 조성 중에 있다.
2. 다대포
다대포(多大浦)는 지리적으로 좋은 포구의 조건을 갖추어 다대포 또는 다대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낙동강 하구가 되어 낙동강의 토사가 다대포 서쪽바다와 강을 메워 몰운대 북쪽지대에 다대포해수욕장을 가졌다. 다대포는 지금도 어항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낙동강 하구이자 옛부터 일본과는 가장 가까운 거리가 되어 지난날은 국내외의 수군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군사의 요충지였다. 다대포는 지정학적인 영향 아래 외침을 받은 바도 잦았지만 그 외침에 대한 방비 또한 소홀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다대포에 본격적인 수군영이 설치되었다. 그 수군 만호영이 있었다. 사실은『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병선은 9척, 군사는 723명이었다. 다대포진영의 성의 축성은 성종 때로 보아진다. 원래 수군은 군량과 군용품을 배에 싣고 배위에서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해상에서는 수군이 전쟁을 맡고 적이 육지에 오르면 육군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니 계속되는 배에서의 근무로 배의 훼손이 심하고 군사의 고생도 많았다. 적을 맞아도 싸움을 육지에 떠넘기기 위해 피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성종 15년 수군도 포영의 축성을 하게된 것이다.『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다대포진영은 장림포에 있다가 지금의 다대포 본동쪽으로 옮겨갔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침입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무너뜨리고 연이어 서평포진을 무너뜨리고는 다대포진영으로 침공해 왔다. 이때 윤흥신 다대첨사는 아우인 윤흥제와 함께 군민을 이끌고 선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군민과 함께 전사했다. 그 윤흥신 형제와 군민을 모신 제단이 윤공단이다. 광복 후에는 한때 다대포가 일본에서 밀수를 해 오는 밀수선의 근거지가 되고 이곳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3. 보덕포
보덕포(保德浦, 補德浦)는 오늘날의 사하구 장림1동 안장림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바닷가 포구이다. 보덕포는 부덕포 또는 버득포로도 불리우고 있으며, 운봉산 북서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낙동강 하류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다.
신평․장림공단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보덕포는 고기잡이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포구로 이름나 있었다. 오늘날은 포구의 이름만 전할뿐 옛 모습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4. 서평포
서평포(西平浦)란 구평동의 성개를 말한다. 지금의 성포(城浦)를 성(城)이 있어서 성개라 했는데 그 성개의 북동쪽 바닷가가 지난날의 서평포 포구가 된다. 지금의 구평동 본동은 구서평이라 하다가 구평이 된 것은 서평포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서평포의 서평을 구평이라 한데는 신평동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구평동에는 토성의 자취가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 그 토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성포에 석성을 쌓기 이전의 성으로 보인다. 이곳 성포인 서평포에 수군진영이 설정된 것은 삼포의 왜란(1510년) 뒤의 중종 17년(1522)부터다. 그 이전은 부산진첨사영에 속한 작은 보성(堡城)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병 일부는 서평포진을 함락시키고 다대포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부산지방의 임진왜란은 갑작스런 일이 되어서 서평포진 전투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임진왜란으로 성이 무너져 진영의 역할을 할 수 없어 다대포진으로 옮겼다가 다대포진이 좁아서 1668년(현종 9) 다시 본래의 서평포로 옮겼다. 부산포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서평포 앞바다서 왜선 9척을 격퇴시키고 불지른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곳 서평포도 격전지였던 것 같다.
5. 성 포
성포(城浦)는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서평포의 동남쪽에 있었던 개[浦]로서 지금의 구평아파트와 (주)우주정밀공장 사이의 지역에 해당된다. 성개라고도 불리는 성포는 포구의 뒤쪽에 토성(土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성은 일부가 최근까지 남아 있었으나 토성의 축조연대와 진성(眞成)의 설치시기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토성의 축조상태와 여기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토기파편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에 축조된 토성일 가능성이 높다. 감천만의 서안에 위치한 이 포구는 1970년대 이후 감천만의 개발에 따라 매립되면서 지금은 지명만 남아있을 뿐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6. 장림포
장림포(長林浦)는 지금의 장림1동 안장림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바닷가의 포구로서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형태를 갖춘 반농반어의 취락을 형성하고 있어서 한 때는 어장으로서 각광을 받았던 곳으로 멸치와 낙동강 하구로 고기잡이가 활발하였던 곳이다. 또한 한때는 김생산지로서의 이름을 날렸던 곳으로「장림 김」이라 하면, 알아주는 특산품의 생산지였다.
이 포구는 응봉산과 봉화산에서 발원하여 보덕포를 거쳐 낙동강 하구 밖 바다로 흘러드는 장림천의 하구일대에 발달한 거대한 포구로서 조선시대에는 국방의 요새이자 제염업이 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경상도지리지』와 『동래부지』에 따르면 이 곳은 다대포에 다대진이 설치되기 전 진(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충무공전서』에는 우리 수군이 장림포 앞 바다에서 왜선 6척을 발견, 5척을 불살랐다는 기록을 보아 국방상 해안의 중요한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경상도속찬지리지』와『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드는 가마[鹽盆]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포구 일대가 넓은 염밭으로도 이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80년 전까지만 해도 하단포 및 다대포와 함께 낙동강 하구 밖 바다의 어로 활동의 중심지였던 장림포는 장림․신평공단의 조성으로 매립되면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 강서구
1. 안골포
안골포는 강서구 눌차동과 송정동 사이에 있는 포구로 길이가 4.2㎞의 큰골이 있는데 800톤 정도의 큰배가 다닐 수 있는 항로이다. 이곳은 옛부터 군사상 주요한 지점으로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진해 용원으로 오가는 정기도선의 항로이기도 하다.
1592년 8월 28일(양력 10월 3일) 이순신 장군은 가덕도(加德島)의 천성(天城) 선창(船艙)에 모든 함대를 집결하여, 김해․양산강 방면의 수색 및 정찰(서원포에서 고성․진해․창원병영 등지에 주둔한 왜적이 24․25일 사이에 모두 도망쳐 김해강에 정박해 있던 왜적이 몰운대 밖으로 도망하고 있다는 첩보 입수하였다.
1592년 8월 29일(양력 10월 4일) 이순신 연합함대 가덕도 천성을 출발하여 양산
강․김해강 하구의 왜적 잔당을 소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 곳에는 21 세기 환태평양의 중심, 항만․물류도시로, 대륙과 해양의 관문으로 도시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2011년까지 컨테이너 24선석 규모의 첨단항만 시설을 갖춘 부산신항만 건설을 위한 방파제 및 부두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으며, 배후 복합 물류단지 및 배후도시 355만평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2. 외양포
외양포(外洋浦)는 대항동에서 천수말로 이어지는 해안일대로 앞쪽으로 병산열도와 거제도, 진해만으로 이어지는 수로의 길목이다. 이 해안에는 일제 때 일본군의 작전 포진지와 땅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항동 남쪽 1㎞지점에 잇는 수리산 정상은 일제 때 일본해군의 관측소가 있었다.
관측산으로 부르고 있다. 세바지에는 동남간을 바라보는 지세에 따라 여러 곳에 굴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굴들도 일본군의 작전용이었다. 외양포는 옛부터 군사요충지로 이용되어 왔으나, 이 곳에는 21 세기 환태평양의 중심, 항만․물류도시로, 대륙과 해양의 관문으로 도시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2011년까지 컨테이너 24선석 규모의 첨단항만 시설을 갖춘 부산신항만 건설을 위한 방파제 및 부두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으며, 배후 복합 물류단지 및 배후도시 355만평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 수영구
1. 남천포
남천포(南川浦)는 수영구 남천동 삼익아파트와 옛 동국제강(지금의 거의 매립되어 LG아파트가 들어서 있음) 사이에 있는 포구를 이른다.『동래부지(東萊府誌, 1740) 산천조에는 “남천포는 부(府, 동래부) 남쪽 20리에 있으며, 물을 막아 고기를 잡는 어량(魚梁)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60~70년대에는 이곳에서 어업을 생계로 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도시화로 주변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해안이 매립되면서 지금은 어촌계의 명맥만 이어지고 있다.
□ 기장군
1. 무지포
무지포(無知浦)는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신암(新岩)마을과 대변리(大邊里) 일대앞 바다를 말한다. 무지포의 무는 물이고, 재는 성(城)의 옛말로서 물재가 되고 한역하면 수성(水城)이 된다. 또한 무차포(武次浦)라고도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기장현 산천조에 “무지포는 현의 남쪽 4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곳에 많은 횟집이 줄비하게 있고, 매년 봄이면 기장멸치축제로 유명한 대변항이다. 기장멸치축제는 매년 4월 말경에 개최되고 있다. 대변항은 연화리 죽도와 대변리의 파래장 끝 사이에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만으로 발달하였다. 대변항 입구에는 대변등대가 잇고, 안쪽에는 크고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묘박지가 갖추어져 있다. 철따라 가자미, 멸치, 장어, 곰장어의 어획물이 물양되고 있으며, 미역의 위탁 판매량도 많다.
조선시대에는 주사창 또는 전선창이라 불리던 수군이 주둔하던 군항으로 종 9품의 수장인 주사(舟師)와 그 아래 별장, 병선장, 군기감관, 선직이 각각 1명씩 있었다. 지금도 수협 건물 뒤 언덕배기를 주사대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주사를 모시던 사당과 전선창터 및 주사장터가 남아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오늘날의 수영구 수영동에 있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여의 이동 장소로도 논의되기도 했다고 한다.
2. 이을포(= 이천포)
이을포(伊乙浦)는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伊川里) 앞바다에 있는 포구로 지금은 이천포로 불리어지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기장현 산천조에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고 기록할 만큼 이름난 포구였다. 이을포는 얼개로 이을개라는 말을 줄여서 얼개가 되었다. 이을개는 잇은개[連結浦]라는 말로 곧 어량(魚梁)이다. 어량이라는 것은 속어로 얼개라 하는데 강물이 한 군데로만 흐르도록 막아놓고, 그곳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이다. 오늘날의 일광해수욕장이 되었다. 이을포는 뒤에 이름이 이천으로 바뀌었다.
강송정에서 학리 어구까지 커다란 원을 이루며 펼쳐져 있는 백사장과 둥글게 밀려오는 하얀 파도가 잘 어울리는 일광해수욕장. 수평선의 양끝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 여느 해수욕장과는 달리 한 눈에 오목한 어항모양으로 들어오는 일광해수욕장은 그래서 장엄하다거나 광활하다기보다 아늑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광해수욕장은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강송정의 포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갈매기의 군무가 아름다워 옛부터 '평사낙구(平沙落鷗)의 승경(勝景)'이라며 차성팔경의 하나로 꼽고 있다.
예전에는 백사장 오른쪽 끝에 자리한 학리마을에 이름 그대로 학이 노송 위를 무리지어 날았다고 하니 학의 자태와 흰 갈매기가 어우러져 비경을 자아냈으리라. 하지만 이것만으로 일광해수욕장이 가진 숨겨진 묘미를 다 느낄 수는 없다. 옛부터 일광8경을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보고 있다. 해질녁 학리 포구에서 돛단배가 붉은 낙조 속으로 흰 돛을 올리고 무리지어 출어하는 광경이 장관을 이룬다는 학포범선(鶴浦帆船)이 일경이요, 일제 강점기 때 매립으로 지금은 없어져 버린 용두머리(야산)를 휘감고 이천천이 굽이쳐 흐르는 광경이 장엄하다는 용두활수(龍頭活水)가 이경이요, 일광해수욕장 뒤쪽으로 아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달음(월음)산의 허리에 감긴 안개가 장관이라는 월음요운(月陰腰雲)이 삼경이요, 지금 한국유리 남쪽 바다에 있는 안위소라는 작은 만에 파도가 사방에서 밀려와 우물정자를 이루는데 그 속에 잠긴 달이 온갖 시름을 잊게 한다는 완월정파(玩月井波)가 사경이요, 강송정에서 바라보는 동해 바다에 떠오르는 일출이 장엄하고 신비롭다 하여 해상조일(海上朝日)이 오경이요, 소나무 숲 너머 시커먼 갯바위에 부딪치는 성난 파도가 장관이라 하여 송동노도(松東怒濤)가 육경이요, 일광바다 바로 뒤에 버티고 앉은 일광산에 해 떨어질 때 낙조가 아름다워 일광낙조(日光落照)가 칠경이요, 강송정옆 갈대밭에 겨울의 언 강물위를 한가로이 노니는 겨울새의 풍광이 멋스러워 강송동수(江松冬水)가 제팔경이다.
그 옛날 돛단배는 모두 동력선으로 바뀌고 공장과 각종 어업시설로 솔숲도 많이 사라졌으며, 강송정 앞 갈대밭도 없어졌지만 인간의 얄팍함을 비웃듯 산과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다. 전국에 내노라하는 곳은 많지만 굳이 이곳이 김수영 감독의 영화'갯마을(1965년. 원작 오영수)'의 무대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닌 듯 싶다. 바다를 한 옆으로 끼고 달리며 자그마한 마을과 아담한 역들을 통과하며 맛보는 운치가 그만인 동해남부선의 자그마한 '일광역'에 내려 곧장 앞으로 100미터쯤 가면 일광팔경을 만날 수 있다.
3. 가을포(= 송정포)
가을포(加乙浦)는 지금의 해운대구 송정동에 속해 있는 송정천과 그 하구일대는 옛날에 갈대밭이었다 지금은 송정포라고 부르고 있다. 갈개를 한자로 가을포라 표기하였다. 오늘날의 송정해수욕장이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기장현 산천조에 “가을포는 현의 남쪽 10일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원래 송정은 한적하고 조용한 반농 반어촌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 부산시 편입 이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상점 등 제법 큰 건물이 들어서 있고 여름철이면 피서객을 상대로 한 민박을 하는 집이 많다. 송정해수욕장은 1965년 7월 9일 개설되어 매년 7월초부터 8월말까지 개장되는데 면적은 100,000㎡에 달하여 도심속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서편의 백사장이 군부대 하계 휴양지로 일반인의 이용이 자제되어 왔으나 1993년부터 전 백사장을 일반시민에게 개방되어 많은 피서객이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송정 해수욕장은 송정천에서 운반된 양질의 모래와 백합 등의 조개껍질이 풍화작용으로 이루어진 백사장으로 완만한 경사와 수심이 얕아서 수영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동편에는 송림으로 덮힌 죽도가 튀어나와 동편 해안에 300m정도의 백사장과 서편 해안에 2㎞정도의 폭 50m 백사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최근 동편 백사장은 물장장(物場場)이 축조되었다.
송정해수욕장의 사장은 해운대해수욕장에 비해 0.4㎞ 더 걸고 면적은 약 40,000㎡정도 더 넓다. 송정은 낭만과 운치가 있는 해수욕장으로써 해운대 신시가지의 건설로 송정과 연결되는 도로가 개설되어 앞으로 이용객이 더욱 증가될 것이며, 위락시설이나 숙박시설이 크게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자연 그대로의 소박함이 오히려 격조를 높이고 있다.
4. 동백포
동백포(冬柏浦)는 기장군 일광면 동백리 앞바다를 말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기장현 산천조에 “동백포는 현의 동쪽 9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백포는 달음산(해발 587.5m)에서 발원하여 대한해협으로 흘러드는 동백천의 하구를 중심으로 반달모양으로 휘어들어간 포구이다. 해안은 검은 자갈로 이루어진 너비 5~10m, 길이 200m의 자갈해안이었으나, 지금은 어항의 방파제, 물양장, 도로 의 개설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옛날부터 이곳 포구는 이름나 있었지만, 지금도 어촌의 어항과 함께 횟집이 늘어서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동백리의 동(冬)은 동(垌)이 본래의 뜻이다. 동(垌)은 저수지로서 동막이 동이다. 저수지의 제방을 막는 것을 동막이라 하는데서 온 막을 동이다. 백(栢)은 마을이 있는 골[谷]을 박골(朴谷)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5. 공수포
공수포(公須浦)는 기장군 기장읍 시량리 공수마을 앞바다를 이른다. 비옥포(非玉浦), 비옥포(飛玉浦), 비조포(飛鳥浦)라고도 하는데 비오리라는 물새가 많다는 뜻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기장현 산천조에 “동백포는 현의 남쪽 10리에 잇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수포는 지금의 국립수산과학원이 있는 앞바다로 인근에는 기장팔경의 하나인 시량대와 용궁사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시랑대(侍郞臺)는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동암마을 남쪽 해변에 있는 암대(岩臺)로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용녀(龍女)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원앙대(鴛鴦臺)라 불리었다. 이곳은 오색 찬란한 원앙새 같은 비오리(기러기목 오리과의 새)가 원앙대 아래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큰 무리를 짓고 까마귀 떼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하여 비오포(飛鳥浦)라 고 하였다.
1733년(영조 9년) 권적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좌천되어 기장현감으로 부임하여 원앙대의 경치를 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고 전하는데,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마다 조개들과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아낙네들이 쌀 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비오리의 군무는 오색찬란하며,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은 달빛은 과히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인지라, 권적은 속인들이 부르던 원앙대를 자신의 벼슬인 시랑을 따 ‘시랑대’라 하고 세 글자를 바위에 새기고 시(詩)를 남겼다.
시랑대의 경치가 얼마나 절경을 이루었으면 멀리 중국에서도 해동국(海東國) 조선의 시랑대를 못보고 죽으면 한이 된다 했다고 한다. 고종 31년(1894) 기장군수 홍문관 교리 손경현(孫庚鉉)이 이곳에 놀러와서 ‘학사암(學士嵒)’이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6. 기포
기포(碁浦)는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伊川里) 이동마을 앞 바다를 일컫는 말로 지금은 이동포로 불리기도 한다. 이동(伊東)마을은 속명으로 바돌개라 한다. 바둑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검은 바둑돌이 많이 깔려 있었다 한다. 흑색 셰일층 암반이 마모되면서 검은 바둑돌 크기의 자갈해안으로 너비3~5m, 길이 500m의 해안을 이루고 있었으나, 이동포의 물양장 축조와 한국유리공장 건설로 인하여 지금은 한국유리공장 동쪽해안에 일부만 남아있다.
7. 독이포
독이포(禿伊浦)는 기장군 문동리(文東里) 앞 바다를 이르는 말이다. 독이포의 독(禿)은 민둥 禿이다. 마을 뒷산에 민둥산(禿伊山)이라 하고, 갯포를 민둥개라 하였다. 민둥이란 어감이 좋지 못하여 발음이 비슷하고 좋은 글 문(文)자로 바꿔서 민둥이 산을 문산(文山)이라 하고 문리(文里)라 하였다.
8. 월래포
월래포(月來浦)는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 앞바다를 이르는 말이다. 월내리(月內里)는 고대지명에 어래산(御來山)․어라산(於羅山)․울산(蔚山)․올산(兀山)은 사방에 나무와 흙으로 둘러친 우리, 울타리의 표기이다. 월래해수욕장으로 탈바꿈하였다.
옛부터 임랑해수욕장은 월내해수욕장과 함께 임을랑포라 하였다. 임을랑포라는 지명은 주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으로 임책(任柵)의 옛말이다. 차성팔경의 하나이다. 백설 같은 백사장이 1킬로 넘게 넓게 깔려 있고 남쪽에는 임랑천의 맑은 물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다속에 잠긴다. 백사장 주변은 노송이 큰 가지를 펴고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관광객이 제법 붐비고 있지마는 아직은 호젓하고 조용한 곳이다.
옛 사람들은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낮에는 천렵을 하고 놀다가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 동산에 달이 뜨고, 임랑천에 달이 있고, 천파만파 잔잔한 물결 속에 수천수만의 달이 잠기고, 백사장에 달빛이 서리고 님의 얼굴이 달덩이 같고 내 마음이 달과 같다 하여 차성팔경의 하나로 손꼽는다.
9. 화사을포
화사을포(火士乙浦)는 기장군 장안읍 고리(古里)마을로 이를 줄여서 화포(火浦)라 하였다. 화사을포의 화(火)는 불이고, 사을(士乙)을 살(光)이고 포는 개로서 불살개라 하였다. 화사을포는 화철령(火鐵領)이 뻗어 바다에 접한 곳으로 새벽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갯포의 찬연한 광경을 불살개로 불렀다 한다.『경상도읍지(1832)』에 수록되어 있는『기장읍지』산천조에는 “화사을포(火士乙浦)는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가 이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리원자력 발전소 1호기는 1971년 11월 기공하여 1978년 4월 준공식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원자력 발전시대의 막을 올리게 되었다. 1983년 7월에는 2호기, 1985년 9월에는 3호기, 1986년 4월에는 4호기가 준공되면서 시설용량은 총 313만 7,000㎾에 이른다.
부사의 사라진 포구
1. 하단포
하단동의 하단 나루터가 하단포(下端浦)이며, 바다 아닌 강의 포구로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기슭의 정비가 덜된 상태의 낮은 수심과 주위의 갈대숲과 작은 배들로써 옛 포구 같은 정취를 남기고 있다. 하단(下端)이란 이름은 동래군 사천면을 편의에 따라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때 생겼다. 그때 상단이라 하면 지금의 사상지역을 말하고, 하단이라 하면 사하의 넓은 지역이었다.
하단은 낙동강 하류의 끝자리로 사천면의 하단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들고 보니 평림리라 불리던 이름이 하단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하단포에서는 김해 대동면과 강서구 명지와 녹산․을숙도로 오고가는 소요객과 낚싯꾼을 실어 날으는 정도였다. 이곳에는 소요객을 위한 고시래기회와 재첩국과 대합조개 구이가 명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근대화의 물결은 한적한 낭만의 곳으로 바뀐 하단에도 밀어닥쳤다. 대티터널이 1971년 4월 15일에 뚫어지고, 1973년에는 당리와 하단지구의 구획정리사업이 이루어지고 낙동로가 확장 정비되고 때로 간선도로가 1973년에 개설되면서 도로망이 갖추어졌다.
1988년에는 낙동강 하구둑이 하단을 기점으로 구축되었다. 하단은 1970년대부터 그 동안의 침체를 벗어나면서 쾌적한 삶의 터인 신흥도시로 바뀌어 옛 포구인 강마을의 한적함과 낭만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2. 구포
구포(龜浦)라는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는 구포의 구(龜)에 대한 풀이로 인한 것이다. 하나는, 구(龜)를 검〔神〕으로 해석하여 구포는 ‘굿개’이며 곧, 고대(古代)의 제사인 ‘굿을 하는 나루’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양산군지(梁山郡誌)』에 나오는 구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감동진 일명 구포’라 하는데 여기서 구포를 감동나루라고 한 점에서 구포는 굿개로 볼 만하다. 또 하나는 구(龜)는 ‘갑우, 거뵈’를 훈차한 것으로 보아 구포를 ‘갑우내 또는 거뵈 개’이며 ‘갑우, 거뵈’는 ‘갋’으로 현재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낙동강은 갑우내가 되며, 구포는 갑우내에 있는 개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낙동강의 본 이름은 갑우내이며 낙동강의 상하에 구천․구미와 같은 지명이 있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 이름인 ‘낙동’은 어떻게 명명된 것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데, ‘낙동’이란 낙양의 동쪽에서 온 말이다. 낙동강의 상류인 상주가 해동(海東)의 낙양으로 불리었는데 ‘강’이 상주의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낙동강’이라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3. 석포
석포는 등하천 옆에 있던 포구로, 등하천에 돌이 많아 돌 ‘石’자와 포구 ‘浦’자를 합하여 석포라고 불렀다. 돌개라고도 부른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산천조에 의하면, 석포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석포라는 지명의 유래는 상당히 오래 된 것 같다. 목장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된다.
『동래부지(1740)』산천조에 의하면, 석포는 부의 남쪽 23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759년에 간행된『동래부지』에는 옛날에 목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옮겼다고 하였다.『동래부지(1740)』방리조에는 “석포리는 남촌의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27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래영지(萊營誌, 1850)』산천조에 “석포는 본영(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남쪽 13리에 잇다. 옛날 목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옮겨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4년에 간행된『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에 의하면, 남하면 관내에 석포동이 있다. 당시 석포동의 호수는 10호이다. 10호 모두가 정씨인 점이 주목된다.
석포에는 오래 전부터 동래 정씨가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1530년 무렵 동래성의 수문장인 정복덕의 아들 정춘세가 동래에서 수영을 거쳐 용소마을로 이주해 와서 살았다 한다. 석포는 천제등(부산공고 뒷산 일대)과 전선등(남부운전면허시험장 일대)사이에 있던 한적한 포구였다.
4. 분포
용호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분개(盆浦)라고 불렀다.『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분포리는 남촌의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28리 거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용호1동과 용호3동 윗쪽인 LG아파트(구 동국제강)가 들어서 있는 자리 근처를 분개라고 하였다. 바닷물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 모양의 염전이 있는 갯벌이란 뜻으로 분개라 하였다.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분포이다.
분개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구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석포마을의 동쪽에 사분개 염전을 시작한 것이 분개 염전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바다가 자연 매립되어 남쪽으로 해안이 이동함에 따라 지금의 용호동쪽으로 염전이 옮아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전분이 24군데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6곳의 염전구역으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염전 명칭은 거득분, 신분, 강개분, 보리분, 광개분, 등분 등 6곳이었다. 지금은 분개라는 이름만 전할 뿐, 염전과 3곳의 제염공장에서 광복 후까지 상당기간 소금을 생산해 온 분개염전은 택지개발로 주택가로 바뀌었다.
5. 재송포
재송동(栽松洞) 앞 수영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던 포구이다.『래영지(萊營誌, 1850)』산천조에 “재송포는 본영(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동쪽 5리에 있다. 소나무 수만 그루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포구는 조선(造船)골 이라는 지명이 재송동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배가 드나드는 바다였으나, 수영강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로 메워지면서 포구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토사의 퇴적으로 생긴 것이 옛 수영비행장으로 오늘날의 셈텀시티이다. 재송포의 위치로는 샘텀시티 내의 포스코 아파트가 있는 부근으로 추정된다.
6. 전포
전포동(田浦洞)은 서면의 동천이 지금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흘러 바다로 들고 있다. 그러나 먼 옛날로 올라 갈수록 동천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자리는 서면의 북쪽인 육지쪽으로 올라온 자리였다. 말하자면 바다가 지금의 서면의 육지 깊숙히 들어서 있었는데 홍수 때면 서면 주위의 산에서 쏟아지는 물이 토사를 실어내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메워진 자리가 갯가가 되고 논밭이 돼 간 것이다.
그 논밭으로는 벼와 보리, 채소들이 재배되었다. 지금은 전포동의 평지는 시가지가 돼 있지만 그때는 갯가의 밭인 밭개였다. 그 밭개가 밭 전(田) 갯 포(浦)의 전포리가 된 것이다. 이 지역의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전포동(田浦洞)의 노막리 또 농막리까지 조수가 들어 배가 많이 정박하였다고 한다. 1949년 전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인구 증가로 전포1동을 전포1,3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전포2동을 전포2,4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농막마을, 밭게마을, 부산의용촌, 오수골마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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