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우롱죄 지방 출장 가는 은주 누나 때문에 며칠 동안 내가 집안 일이나 가게 살림을 맡게 되었다. 가게 일은 한나절이면 되지만 여름 내내 피서 한 번 못 가고 가게 일에 매달려온 누나가 모처럼 시골집이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을 만나고 올라올 계획이었다. 혼자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여자지만 대단한 데가 있었다. 여러 해 겪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은주 누나 만큼 자기 일에 확신을 갖고 사는 여자도 드물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없이 시집 가라고 졸라도 한번 실패한 자신의 인생을 두 번씩 도전하지는 받아낸 돈은 이제 제법 커져서 어지간하게 돈 있는 사내들도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 서울 근교에 조그만 학교를 갖게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다는 집념 때문에 더 조를 수도 없었다. 주변에서 은주 누나의 혼사 문제를 거드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혼자 사는 여유 있는 여자라는 점 때문에 비싼 대접을 받는 모양인데도 은주 누나는 한사코 거부해 왔다. "어련히 알아서 해 주겠냐만 내가 올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한다. 거느리는 사람들도 나 없다고 헤이하게 둬서도 안 되고." 엊저녁부터 이어지는 잔소리였다. 모처럼의 외출이어서 걱정이 많은 물가에서 노는 어린아이 취급을 할 때가 있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떤 때는 역정이 날 만큼 신경이 쓰일 때도 있었다. "제발 믿고 떠나. 이젠 애들이 아니올시다." "내가 예민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넘어가라." "나도 제법 예민한 사내라구. 맡겨만 주시면 신명을 바쳐 보전해 드릴테니 염려 말고 다녀오십쇼. 하루에도 시외전화 여러 통씩 해대서 손해보지 마시고 편히 다녀오십쇼. 거덜내진 않을 테니까 믿어 보십쇼." 나는 일부러 존칭어를 써 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사람 같다."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나도 가능성이야 있지. 투서질 해 대는 사람만 없다면 날고 기며 해먹던 소질이 있으니까. 놔먹게 내버려 두기만 하면 그까짓 지구를 덩어리째 못 먹는 놈이 어디 있어. 나도 하나님이 한쪽 눈만 질끈 감아 주면 미국이고 소련이고 안 가리고 달싹 먹을 배짱은 있다구." "말하는 거 보니까 투서질 먼저 배워야겠다." "누나도 잘하면 출마까지는 하겠어." "수 틀리면 나설까 한다. 우리처럼 제대로 살아 보려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기 죽이는 자리라면 나라고 못 나서겠니?" "그거 정말 말 되네." "개떡이고 떡고물이고 뭐가 붙어도 붙는 장사도 잘 안되고 그러니까 우리가 벌어서 엉뚱한 사람 목구멍에다 넣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러다간 누나도 뭘로 몰릴라." 누나는 또 여러가지 당부를 하고 나서 채비를 했다. 마악 현관을 나서려는 참에 문 틈으로 엽서 한 장이 떨어졌다. 얼른 주웠다. 전화요금 납입청구서였다. 누나가 대수롭지 않게 내게 넘겨 주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얼마냐?" "누가 국제전화를 썼냐? 그게 아닌데 그래." 전화요금 청구서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정용 전화고 크게 전화 쓸 일이 없어서 고작해야 일만 몇천 원이고 전화요금이었는데 이번 달 청구서에는 무려 십 팔만여 원이었다. 도수료 및 시외도수료, 기본표 삼천 원뿐인 요금 계산에다 전화세 및 방위세가 합산되니까 이 집은 밥만 먹으면 전화를 걸고 틈만 나면 시외전화를 자동으로 걸어 댄 꼴이었다. 납기 후에는 이십만원 가까운 전화요금을 물어야 할 판이었다. "쟤가 썼나?" 나는 어이 없어서 일하는 계집애를 가리켰다. 계집애가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그렇게 미친 줄 아세요?" 계집애가 앙칼지게 말했다.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아무리 철없는 계집애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전화질을 해 대면 어떤 전화요금 납입청구서는 뭐가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 된 것이었다. 더러 신문의 민원 기사 속에서나 보았던 일을 당하는 것 같았다. 민원 기사 속에는 더러이긴 하지만 터무니 없는 전화요금이나 전기, 수도 사용료 때문에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런 경우에 구제해 주는 방법이 있긴 있겠지만 참으로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몇 차례고 찾아가서 사정하고 매달려서 해결을 해야 할 걸 생각하면 참담한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니?" 누나도 한심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그렇게 전화질이나 해 가며 사는 "걱정 말라니까 그래.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 놓을까." "싸우거나 그러지 마라. 뭐가 잘못 됐겠지." "알았어." "경대 서랍에 영수증 모아 놓은 것 있으니까 잘 찾아봐.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영수증을 죄 모아다가 내밀고 터무니없는 거라고 따지는 수도 있을 거 아니냐?" "글쎄 염려 말라니까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사실 자신은 없었다. 한 번 청구한 것을 그 사람들이 쉽게 고개를 끄덕여 줄 리도 없을 것 같았고 왔다갔다 시간께나 빼앗길 것을 예상하면 울화부터 치밀었다. 편치 않을 것 같아 큰소리는 쳤지만 마음은 영 개운치 않았다. 신문기사를 보면서 평생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내 발등에 이런 청구서가 떨어지고 보니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할지 짐작이 되었다. 문제는 직접 청구서를 들고 들어갔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 줄 것인가였다. 전화세와 방위세가 어떤 근거로 그리도 많이 붙어 있는지 밝혀진 게 없었고 이렇게 억울한 사연이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밝혀 놓은 것도 없었다. 더구나 납기 내에 청구서대로 내지 않으면 일할이라는 엄청난 바가지를 쓰게 되어 있는 근거도 밝혀 있질 않았다. 일할의 가산금이라면 엄청난 고리대금업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승낙해 준 사람들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사장이 붉은 도장을 찍어 보낸 것이고 서울중앙사서함 6151호의 전자계산소에서 컴퓨터로 계산해서 보낸 것이어서 황당한 요금 청구서라고 보여지진 않았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애써 감추고 서울역으로 차를 몰았다. 은주 누나의 눈치를 보니 별로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표를 끊고 개찰할 때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다. 앉을 자리가 마땅찮은 곳이 서울역이었다. 시원한 걸 마실 만한 곳은 사람이 들끓었고, 대합실은 무섭게 더웠다. 선풍기 한 대 없는 대합실이어서 사람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천장을 쳐다보니 대형 선풍기를 매달았던 자국만 남아 있었다. 돼. 새마을호 탈 정도만 돼 봐. 이렇게 덥지 않아도 되잖아." "새마을호 대합실은 시원할까?" "그렇겠지 뭐." "그럼 거기 가서 좀 있다 올까?" "속보이게." "글쎄 말이다." 은주 누나는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역 광장에 길게 펼쳐진 햇빛 가린 곳도 폭염으로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탈 테면 타고 말 테면 말라는 배짱으로 운영하면서 껌뻑하면 적자니까 요금 인상한다고 떠든단 말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은주 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합실은 가마솥처럼 더웠다. 피서 인파가 아직도 많아서 대합실은 만원이었다. 젖먹이 꼬마들은 응건하게 땀에 젖어 칭얼거렸고 얇은 티셔츠 차림의 여자들은 비 맞은 것처럼 속살과 찰싹 붙은 모습이었다.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 서울역장 내 눈에 뜨인 글씨였다. 이런 글귀는 가마솥 같은 서울역 대합실 곳곳에 붙어 있었다. 울컥 치미는 분노가 일었다. 서울역장이 분명히 승객을 가족처럼 모시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승객을 가족처럼 모시고 있지 않았다. "누나, 지금 누나 자신이 생각해서 서울역장이 누나를 가족처럼 생각한 것 내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철천지 원수처럼 팽개치겠습니다' 라고 고쳐 써야겠다. 사기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마 서울역장 가족은 세상 없어도 새마을만 타나 보지." "아마 연습삼아 써서 붙여 본 게 아닐까? 얼마나 대한민국 사람들이 잘 속아넘어가는지 시험하느라고." "그게 꼴 뵈기 싫으면 자가용을 타고 다니라 이거겠지 머. 돈이 없으면 입도 뻥긋하지 말고 기차를 타라 이거 아니겠니?" 은주 누나도 이래저래 속이 좋지 않았는지 평소 같지 않게 말장단을 쳐 주었다. 차라리 승객을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표어나 써붙이지 않았으면 버젓하게 표어만 걸어놓고 있어서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저건 명백하게 국민우롱죄 아닐까?" "우롱해도 되는 특권을 가졌겠지 머." "오늘은 계속 말 되는 소리만 하네." 짧은 시간이었는데 온몸은 땀투성이였다. 젊은 사람이라면 그냥 참을 수 있겠지만 노약자와 젖먹이 아이들은 멀쩡한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선풍기 한 대 없는 것은 에너지 절약을 위한 조치라 할 수 없는 일이라 치면, 역사의 벽걸이 선전용 상품 광고판의 전깃불과 쓸데없이 켜져 있는 조명등은 무엇이라고 변명을 해아 한단 말인가. 짜증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묘한 생각을 했다. 이럴 때 서울역장이나 철도청장을 국민우롱죄로 정신병자 취급해서 정신병원으로 보낼지도 모른다. 곱게 옷을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이 땀으로 목욕하는 서울역 대합실 곳곳에 사람 약올리는 표어는 눈에 뜨일 만큼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가족처럼 대우받지 않았다. 은주 누나가 개찰구를 통해 빠져 나간 뒤에 나는 역사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경부선 대합실 오른쪽에 또 하나의 푯말이 붙어 있었다. 불편한 사실이 있으면 신고하라는 내용과 신고처 전화번호가 그 밑에 큼지막하게 씌여 있었다. 23국에 2501번과 22국에 0670번이란 두 개의 전화번호였는데 22국에 0670이란 전화번호 밑에 역장실이란 글씨가 또렷하게 보였다. 일 년 전에 세 자리 숫자로 바뀐 걸 알고 있었다. 서울역 근처의 회사나 친구들 전화번호가 분명히 세 자리 숫자였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명색이 서울역인데 일 년 전에 써 붙인 안내문을 그대로 두었을 리 없고, 아마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일부러 서울역 전화번호만은 그대로 옛날 국번을 사용케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한국전기통신공사나 서울역 관계자나 대단한 애국자일 것이다. 시민이 불편해 할까 봐 그런 잔신경까지 쓸 정도라면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표어가 거짓은 아닐 것이다. 백 원짜리 동전으로 십 원짜리를 만들어 바꾸어 들고 공중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옛날에 써 붙여 놓은 안내판을 그냥 방치했다는 게 드러났다. 일부러 새마을 대합실에 들어가 보았다. 쾌적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벽걸이 선풍기가 꽤 자발맞게 돌아가고 있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타고 다니는 기차의 종류에 따라 대접받는 게 다른 거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한다 하더라도 서울역 대합실은 정말 살벌한 곳이었다. 여유 있는 역 광장에 수종이 좋은 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 수도 있고 임대를 주어 민간업자가 시원한 곳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울역 앞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줄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벌한 서울의 도시계획에 편승해서 보다 더 살벌해진 몰골을 그렇게 드러내 놓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가게로 돌아와서 전화번호부를 뒤져 서울역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역장님 좀 바꿔 주세요." 내 첫마디였다. "어디시죠?" 고운 여자 목소리였다. "드릴 말씀이 있는 시민입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가요?" "역장님께 직접 드릴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먼저 말씀하셔야죠." "시민이 불편해서 역장님께 직접 신고하라고 방을 붙여 놨더군요. 그러니까 직접 말씀 드려야잖겠습니까?" "우선 저한테 먼저 말씀하세요." "지금 역장님께서 역내 순시 나가시고 안 계세요." "이해가 안 됩니다. 순시를 자주 다니시나요?" "자주 다니세요." "그렇게 자주 다니시는 분이 대합실에 선풍기 하나 없어서 승객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걸 그냥 두고 보실 리도 없고 써 붙인 안내문 전화번호가 일 년도 넘은 옛날 번호 그대로일 수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순시를 그리도 잘 하셔서 그 모양입니까? 써 붙이긴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더군요." "도대체 지금 뭣 때문에 전화를 하셨나요?" 목소리가 아주 냉랭해졌다. 나는 이 걸 알았다. "납득이 갈 만하게 역장님이 안 계시면 책임자라도 바꿔 주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사정해도 여직원은 중간책임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버티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여직원 생각에도 이렇게 쓸데없는, 밥먹고 할 짓 없는 사람의 전화질을 상대할 간부직원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도저히 괘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다시 돌려 다른 직원을 바꾸어 달라고 졸랐지만 전화 받은 직원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높은 사람을 바꾸어 주면 도리어 그 직원이 우리나라 공직자들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하긴 정부에서 세수입을 위해 아직도 인체에 해롭다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 국민 건강을 해치는 상품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전매청이란 직체를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갑시다'라는 글귀를 작은 글씨로 마치 가능하다면 읽지 말라는 투로 써 붙어 놓고 이 해악한 담배를 정부의 관할하에 판매하고 있다.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엄청나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국고 수입을 위해 어떤 폭리를 취해도 상관 없고 국고 수입을 위해 어떤 위해물질을 국민에게 팔아도 된다는 것일까? 기호품이긴 하지만 명백하게 해로운 직체가 아닌 자유경쟁으로 담배의 질을 높이게 하고 공정거래가 될 수 있도록 가격도 당연히 인하해야 할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다른 건 다 문제를 삼으면서 전매청의 폭리를 아직까지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었다. 국민의 편이라고 떠벌리는 국회의원들도 그렇게 말재간이 좋으면서 아직 담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하긴 누가 말해도 코방귀를 뀔 수 있는 힘이 국고 수익이라는 명분 아래 시행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이렇게 배짱 좋은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국민을 위한답시고 어깨에 힘 주고 사는 공무원을 보신 적 있냐구요? 필리핀이나 얼추 그렇고 여보슈, 여긴 엄연한 민주주의가 숨쉬는 대한민국이란 걸 까먹지 좀 마슈. 몇 해 전인가 텔레비전에서 담배를 놓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논쟁을 삼은 적이 있었다. 담배가 해롭다는 걸 알면서 자꾸 피우는 문제와 금해야 할 곳에서 피워 대는 못된 습관을 한쪽에서 지적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에게는 조금 육체적으로 해롭더라도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을 수도 있고 정신집중이나 사람마다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옹호한 쪽의 인사가 어느 날 느닷없이 전매청 고위층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받았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 인사는 담배를 했다. 그렇게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 전매청 당국자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오히려 용감하게 '이 담배는 피우면 피울수록 몸에 해로우니 되도록이면 피우지 마십시오'라고 담배 포장지 전면에 붉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 붙일 용기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 어떤 면에서 인체에 해로운지를 약 포장지처럼 상세하게 써 붙여서 국민들이 가능하면 담배를 줄이게 해야 할 것이다. 국고 수입을 위해서 국민 건강을 해치기로 말하자면 마약이나 대마초를 정부에서 호된 값으로 팔아야 되고 수도나 전기요금을 대폭 올려 폭리를 취해도 국민은 대책 없이 당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팔고 사는 일엔 적절한 이윤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하물며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는 담배를 그렇게 많이 이윤을 남기고 그것이 명백하게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사는 세상이어서야 무슨 살 맛이 있을까? 국민에게 해로운 물질을 정부에서 팔아먹은 우스꽝스런 시절도 있었다는 걸 역사책에 기록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도 책임 있는 발언을 해 줄 사람과 통화할 수가 없었다. 찾아가서 따져 봐야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나는 오기가 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를 바꾸어야만 했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를 그쪽에서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못된 짓인 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책임 있는 사람과 통화할 재간이 없었다. 시민이 신고를 하면 잘못 됐으니 뜯어고치겠다든지 알아보고 조치를 하겠다는 답변만 들어도 할 말이 없을 터인데 그들은 아예 상대조차 않으려고 했다. "A일보 민원 기사 담당자입니다." 나는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고분고분해졌다. "방금 시민의 제보가 들어와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서울역에 써붙인 공고가 옛날 전화번호 그대로라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또 선풍기가 새마을호 대합실에만 있고 통일호 대합실에 없다고 합니다." 직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대꾸했다. 주시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만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들으니까 아까 어떤 미친 놈이 전화질을 해 대더니 결국 신문사에다가 전화를 해서 피곤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들이 잘못한 것을 지적했는데 미친 놈이라고 해 대는 그들의 자세가 영 미덥지 않았다. 책임과장이란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다시 내 소개를 하고 어쩌고 하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것 같아 시치미를 떼고 말을 시작했다. "시민이 신고해도 안 받고 일 년 전에 사용하던 전화 안내를 그대로 걸어놓는 내 다그치는 목소리에 과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시민의 신고를 받고 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조금 전에 들으니까 그 시민에게 미친 놈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당한 시민을 미친 놈이라고 해야 옳습니까?" "아닙니다. 잘못 들으셨을 겁니다." "잘못 들었다 칩시다. 시민이 진정사항이 있다고 전화를 하면 제대로 바꿔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역장을 바꾸라면 역장을 바꿔주는 게 민원 안내 아닙니까?" "역장님께서 일일이 민원을 받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럼 민원 안내판에 역장실이라고 쓰지 말았어야죠." "그거야 형식 아닙니까?" "형식요?" "그냥, 서울역의 최고 책임자니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고 칩시다. 도대체 시민이라고 하면 투덜거리고 미친 놈이라고 상대도 않다가 신문사 전화라니까 이렇게 친절하게 받아 주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야......" 과장은 할 말이 없는지 얼버무리기만 했다. "내가 신문사가 아니라고 말하면 지금부터 불친절할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일 년도 넘은 전화번호를 아직도 걸어놓고 도대체 무슨 민원을 받았단 말요? 서울역엔 일 년이 넘도록 단 한 건의 "안 들어올 리 있겠습니까?" "민원 사항을 건의한 사람이 전화번호가 틀렸다는 걸 밝혔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승객들의 안전수송만 생각하다 보면 다른 일에 소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 칩시다. 서울역장이 그렇게 순찰을 자주 한다는데 어째서 여태 그 지경입니까?" "죄송합니다." "내 생각 같아선 당신들 그런 태도는 국민을 우습게 아는 태도요. 그래서 책임자들을 데려다가 볼기를 치고 싶소. 아니면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란 표어를 뜯어내고 '국민을 우롱할 테니 타고 싶으면 타쇼'라고 써 붙이게 하고 싶소." 하겠습니다. 민원 안내판을 지금 당장 다시 써 붙이겠습니다. 그리고 선풍기 얘긴데 워낙 대합실이 커서 벽걸이 선풍기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대형 선풍기를 세워 놓으면 위험하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손가락을 집어 넣기나 하면 더 큰일이 아닙니까?" "듣기로는 외국에서 비싼 기계를 들여다 현대시설을 갖추는 모양인데 그보다는 우선 승객들이 편리하게 역사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오." "그렇지요." "알면서 왜 안 답니까? 그거 직무유기 아니오?" "여러 가지를 서울 지방철도청에 건의를 했지만 안 들어 주는 걸 우린들 어쩝니까?" 서울역 대합실에 무릎 꿇고 앉아서 땀 뻘뻘 흘려 가며 반성 좀 해야겠군요. 제발 국민 무서운 줄이나 좀 아쇼." "당장 시정할 테니 제발 기사를 내보내지 말아 주십쇼. 부탁입니다. 확인해 보면 아시겠지만 정말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우릴 믿어 주세요." "내가 신문사 사람이 아니라도 같은 말을 하시겠소?" "정당한 건의일 땐 언제나 우리가 명심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도 말 좀 합시다. 난 가엾게도 신문사 기자가 아닌 서울 시내에 살고 있는 보통 시민입니다. 신문사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말이 안 통하니까 별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통 시민이든 특별한 받아들이는 습성 좀 가져 주쇼. 지금 마음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으리란 건 압니다. 또 한편으로 신문사가 아니어서 마음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을 것도 압니다. 시정 좀 하십쇼. 그리고 역장더러 정신 좀 차리라고 해 주쇼. 민원 안내판 고치고 시설 점검하자면 역장이 소리깨나 지를지 모르지만 소리 지르면 정말 그땐 직무유기 행위라고 충고 좀 해 주쇼. 그리고 또 참고로 말씀 드리겠는데 내 전화번호와 주소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드릴 테니 내 말이 추호도 거짓이거나 공갈을 쳤으면 경찰에 연락해서 잡아 넣어도 좋다고 전해 주십쇼. 준비 됐습니까?" 나는 잠깐 뜸을 들인 뒤에 상세하게 일러 주었다. 그쪽에서 여련히 적어 나가는 것 "자, 오랫동안 시달렸을 테니까 좀 쉬시고 우리 봉사 좀 하며 삽시다. 끊어도 됩니까?" "그러시죠." 힘 없는 목소리였다. 아마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복잡한 세상 살아가는데 그까짓 일을 꼬장꼬장 따지는 사내가 아직도 있다는 게 불쾌할지도 모른다. 기차를 타기 싫으면 고속버스를 타고 그것도 싫으면 자가용을 타고 다닐 일이지 통일호 타고 다니는 주제에 까탈을 부릴 게 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나님. 내가 서울역과 원수 척진 게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서울역장과 철도청장과 으르릉거린 적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표 사려고 아우성칠 때나 한여름에 고장난 선풍기 때문에 고생할 때, 또는 한겨울에 냉동창고 같은 때를 빼면 나는 그 못생긴 기차마저도 싫어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 불쾌한 것은 국민의 공복이어야 할 많은 고위 공직자들의 뻣뻣한 태도입니다. 아마 입으로는 국민의 심부름꾼이고 겸손을 떨면서 행동으로는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대다수의 고위층들 가슴 속에 있는 그 건방짐이 미워서입니다. 하나님. 어째서 그들은 약한 쪽에 강하고 강한 쪽에 그리도 약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소신도 없고 줏대도 없고, 남의 눈치나 보면서 자리보전이나 하려고 몸 사려 가며 사는 꼴이 가여워서 이러는 겁니다. 하나님. 고위층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살피느라 고통스럽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그들이 더 높은 곳의 눈치를 살피느라 고통스럽다면 얼마나 가여운 일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투덜거린다고 나무라지 마십쇼. 어느 분의 소설 제목처럼 제발 고위층이란 작자들에게 줄창 귀를 뚫어 놓고 된소리라도 옳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는 가슴 좀 가지라고 일러 주십쇼. 하나님. 어느 분의 꽁트집 제목에 "쪼다 파티"라는 게 있더군요. 제발 우리 나라에서 뭔가 한다 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쪼다 파티를 하라고 일러 주십쇼. 그게 하나님 당신의 직무올시다. 점심을 일찌감치 먹고 전화요금 영수증을 담당부서를 찾았지만 억울한 사람이 많은지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전화국의 새파랗게 젊은 직원에게 혼나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젊은 사람에게 말대꾸 한 마디 못하고 계면쩍게 웃었다. 나는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담아 들었다. "할아버지, 이렇게 염치가 없어서 어쩝니까? 전화를 많이 써야지 기본료만 내면서 무슨 부탁이 부탁입니까? 그럴 바에야 뭐하러 전화를 달았습니까?" "한푼이라도 아낄 참이니까 그렇잖소. 늙은이가 자식 눈치 봐가며 살라니까 별수도 없고...... 또 쓸 일도 없구요. 받기만 하면 됐지...... 걸 데도 흔찮고 "그러니까 반납하면 되잖아요. 뭐러 가지고 계시면서 우릴 귀찮게 그래요." 더 이상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성큼 한발을 앞으로 빼고 직원에게 말했다. "여보쇼. 당신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당신은 뭐요?" "당신 말하는 거 들으니까 무조건 전화를 많이 사용하라고 윽박지르는데 그게 나라 위하는 거요? 아니면 뭐든지 적게 쓰는 게 현명한 거요?" "......" 그 말 한 마디에 머쓱해진 직원이 눈길을 엉뚱한 쪽에 놓고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 한심한 친구야. 정신 좀 차려라. 통화 적게 했다고 할아버지를 혼내고 앉아 봐!" 내 목소리는 작았지만 사내는 머리를 잔뜩 숙였다. 그러더니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풀이 팍 죽은 사내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안 되는 소리로 잔소리를 했으면 그냥 두지 않을 참이었는데 그런 자리 앉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숙이고 들었다. 내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고 지난 일년치의 전화요금 영수증을 같이 내밀었다. 영수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번에 나의 전화요금 청구서를 훑어보던 여직원이 힘 없이 말했다. "컴퓨터는 거짓말을 안해요. 납기일까지 하세요. 다음분." 한마디로 딱 잘라 버리고 다음 순서의 민원인을 맞았다. 이런 민원이 꽤 있는 모양이어서 여직원의 얼굴은 짜증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허망한 대접을 받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굳이 따져 물으려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여직원은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이봐요. 친절하게 알려 주면 병 생깁니까? 어디로 찾아가라든지 어떤 서류가 필요하다든지 그런 게 있을 거 아뇨." "어디서 큰소리 치는 거예요?" "칠 만하니까 치는 거 아뇨. 당신들은 "의무 좋아하네." 여직원이 이렇게 말하고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돌아앉았다. "말 다했소?" 내 목소리가 커서 전화국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게 되었다. "당신, 왜 그래?" 건장한 남자직원 서너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반말지거리로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웃음을 보냈다. "여기서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주쇼." "어쭈, 날 더우니까 별놈 다 있네." 팔팔한 젊은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걷어차서 기어다니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가치 없는 상대라는 생각에 "당신 조동아리 그따위로 놀리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취소하시지 그래." "헛!"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왜들 시끄러워!" 나이 지긋한 사내가 이렇게 소리치자 직원들이 주춤 물러섰다. 여직원이 계장이라고 푯말이 붙어 있는 그 책상자리로 쫓아가 종알거렸다. "당신, 왜 시끄럽게 굴어!" 여직원의 말만 듣고 내게 삿대질을 했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한참 걸릴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까 남자직원에게 혼났던 그 할아버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지켜본 사람올시다. 저 젊은이가 시비를 걸고 말을 함부로 했소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소! 어디 따져 봅시다." "당신은 뭐요?" "시민의 한 사람올시다." 할아버지가 당당하게 말했다. 계장이란 사내가 할아버지의 당당한 태도에 멈칫하는 사이에 민원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불친절을 그대로 감수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와 할아버지의 목청에 힘을 얻었는지 여기저기에서 항의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당황한 계장이 직원들에게 소리를 질러 근무 자세를 똑바로 하라고 이르고는 갑자기 정중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길들여진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겸손해진 것이었다. 결국은 이런 곳에서 불만을 피해의식이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건방지던 계장이 내게 정중하게, 그러나 기분은 언짢다는 걸 노골적으로 나타낸 채 물었다. "전화요금이 느닷없이 열 배 가까이 나와서 얘기하러 왔는데 무조건 컴퓨터는 거짓이 없다고 하니 나는 그럼 어디 가서 하소연하란 말입니까?" "조용히 따지셔야지. 들어와 보쇼." 나는 못 이기는 체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의 눈초리가 퍽 냉랭했다. 만약 민원인들이 웅성거려 주지 않았거나 할아버지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일이 있으면 조용히 얘기해서 쓰겠소? 당신 한 사람만 상대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잖소." 자리잡고 앉자마자 계장이 나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한 건 미안하오. 그러나 부하 직원들의 불친절이 얼마나 심하면 다들 내 편이 됐겠소. 그리고 계장님이신데 그 말버릇 좀 고치슈." "이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그런저런 거 따지지 맙시다. 내가 온 건 전화요금이 갑자기 열 배나 더 나와서 시정해 달라고 온 거요." 계장은 내가 밀어놓은 걸 한참이나 살펴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잘못 된 거요. 컴퓨터는 거짓말을 않습니다." "고장날 수도 있잖습니까?" "고장나면 서울 시민이 몽땅 쳐들어올 거요. 고장이라면 당연히 다시 조정이 되겠지요." "전산 처리는 사람이 하잖습니까?" "이봐요. 그럼 우리가 더 받아먹으려고 일부러 그랬단 말요? 보자보자 하니까......" 버럭 화를 냈다. "화 내시는 게 더 수상하잖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조용조용히 합시다." "좋시다. 확인을 시켜 드릴 테니 나중에 군말 없도록 합시다." 계장은 남자직원을 불러 내가 내밀었던 주며 확인해 오라고 일렀다. 남자 직원이 챙겨들고 나가자 계장은 담배를 피워 물고 내게 말했다. "전화란 그렇습니다. 애들이 장난삼아 다이얼을 마구 돌리다 보면 시외전화도 걸리고 국제전화도 걸리기 마련입니다. 바로 끊으면 또 몰라도 장난하다가 그냥 내려놓은 채 시간이 흘러가면 전화요금은 한없이 오르기 마련 아니오. 갑자기 많이 나왔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경우거나 이웃집 사람이 몰래 DDD로 전화를 쓴 경우도 있소. 심지어는 세 사는 애들이 펜팔하는 미국애한테 몰래 전화를 거는 수도 있고 말이오. 아니면 어른도 시외전화를 쓰고 전화기를 잘못 내려놓아서 요금이 뛰는 경우도 있고 말이오. 우리가 수 없잖소. 전화 있는 집에 우리 직원을 한 명씩 파견해서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감시해 줄 수도 없잖소. 내 말이 억지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전화기를 잘못 놓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서 자동으로 끊기게 장치를 해 주는 건 연구가 돼야겠습니다." "어쨌거나 기다려 보쇼. 기계는 거짓말 않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일만 했다. 나는 멀거니 옆자리에 앉아서 뒤통수가 뜨뜻하게 직원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아까 나를 도와 주었던 그 할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했다는 것을 그제야 생각했다. 그 할아버지도 일을 끝내고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계장에게 말했다. "이 청구서에 이상이 없습니다. 조회하고 확인까지 했습니다." "들었소?" 계장이 내게 말했다. 득의에 찬 웃음과 조소가 함께 섞인 그런 묘한 웃음이었다. "귀가 열렸으니 듣긴 들었습니다만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 와서 뗑깡 놓구 이래? 그럼 어쩌자는 거야?" 말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말버릇 좀 고칩시다. 나는 하소연하러 온 사라이지 뗑깡 놓으러 온 사람이 아뇨. 당신들 눈엔 민원인들이 모두 거렁뱅이처럼 보입니까? 어째서 많이 나왔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면 벼락 맞소?" 이 이상 시비 걸면 공무집행 방해로 때려넣을 테니까." 그리고는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노려보고 나가 버렸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무조건 청구한대로 내든가 전화 설치를 취소하든가 마음대로 하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나중에 부당한 요금이 판정되더라도 이미 전화세 및 방위세는 반환할 수 없다는 법의 맹점과 억울한 사람이라도 청구된 돈을 다 낸 뒤에 조정을 받아야 한다는 모순을 어디다 항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십여만 원이면 거의 열 달치 전화 사용료인 셈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열 달치를 한꺼번에 물고 한마디 못하는 신세가 될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전화국장 방을 쳐들어갈 생각을 했다. 절차를 밟고 면담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국장실 문을 무턱대고 열었다. 입구의 칸막이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직원의 놀란 얼굴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책상에 앉아 있던 전화국장의 눈이 커졌다. "불쑥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온 정당한 시민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굽니까?" 내 느닷없는 질문에 전화국장은 대꾸를 못했다. "무슨 말씀이오?" "우리나라에서 진짜로 제일 높은 사람이 "몰라서 묻소? 그야 대통령 각하 아니오." "현문우답하자는 거 아니고 우문현답하자는 거요. 제일 높은 사람은 국민이오. 이제 아셨소?" "......" 영문을 몰라 나를 응시하고 있는 국장에게 나는 틈을 주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공직자는 국민의 심부름꾼이오. 아니면 국민의 주인이오?" "그럼 전화국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거요, 전화국 직원을 위해 존재하는 거요?" "또 묻지요. 공직자는 국민에게 뻣뻣해야 되는 겁니까? 아니면 친절해야 합니까?" 내가 이런 식으로 연달아 묻자 정체불명의 젊은 사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재빨리 청구서와 묵은 영수증을 국장의 책상 위에 놓았다. "찾아온 용건은 바로 이겁니다. 아래층 민원 창구에서 창피당하고 왔습니다. 사나이답고 국장님답게 처리해 주는 용기를 보고 싶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국장은 청구서와 영수증을 주욱 훑어보더니 씨익 웃었다. "무슨 뜻인가는 알겠는데, 도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대답하자면 정당한 시민이란 사실입니다." "그만 하시오." 말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자 국장은 더 이렇게 말하더니 인터폰을 들어 누군가를 올라오라고 했다. "내가 아래층에서 시끄럽게 굴어 사실대로 확인해 주지 않은 걸 미리 아셨으면 합니다. 이왕 봐 주시려면 직접 확인해 주시죠. 그렇지 않으면 전기통신공사 사장 멱살을 잡든지 컴퓨터를 깨부수든지 좌우간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겁니다." "확인해 본다고 했잖소?" 목소리가 높았다. 불쾌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래층에서 확인했는데 이상이 없다고 떠다밀었습니다. 어째서 어떻다는 설명도 없이 말입니다." "알았다잖소." 우리나라에서 누가 제일 높은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놀라게 한 내 엉뚱함에 기가 질린 것 같았다. 얼굴 마주친 적이 없는 남자 직원이 들어오자 내 청구서를 내밀며 빨리 확인해서 알려 달라고 했다. "당돌하게 찾아올 만한 사람이니까 찾아왔다는 걸 알아 주십쇼. 이렇게 굴어도 될 만한 빽이 있으니까 무작정 들어오지 빽 없이 들어왔겠습니까?" 나도 남자 직원 들으라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남자 직원이 내 아래 위를 훑어보며 나갔다. 일부러 그런 소리를 했다. 그래야 정밀하게 조사하고 확인할 것 같았다. 내 그런 말투가 못마땅한지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던 국장이 물었다. 거요?" "해 본 소립니다." "이 사람 못 쓰겠군. 알아서 처리해 준다면 그런 줄 알고 가만히 있어야지. 당신만한 빽 없는 사람이 어디 있소? 어디 와서 공갈 치는 거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빽 센 사람은 정당한 국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해 본 말입니다." "사람두 차암......" 엉뚱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국장은 안 것 같았다. 그가 일하는 사이에 나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을텐데 국장이 책상에 앉아 지시만 하지 말고 직접 하소연을 들어 보고 해결해 주는 걸 연구해 보라커니 컴퓨터란 사람이 보는 게 현명하다는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국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옆에 앉아 있는 것이 귀찮다는 표정만은 역력했다. 남자 직원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나는 직원의 묘한 표정에서 뭔가 잘 됐다는 걸 직감으로 느꼈다. "다른 건 이상이 없고 자료 입력할 때 담당자가 숫자를 잘못 읽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얘기야?" 여유만만하던 국장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직원에게 물었다. "조회를 했더니 일련숫자가 청구서보다 훨씬 못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전산판의 숫자를 옮길 때 삼(3)자와 팔(8)자를 착각했거나 팔(8)자와 영(0)자를 혼동해서 했더니 앞자리 숫자 삼을 팔로 잘못 옮겼고 뒷자리도 영자를 팔자로 잘못 옮겨 쓴 게 확인됐습니다." 남자 직원은 이렇게 잘못 된 것을 찾아낸 것이 유능한 일을 해낸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국장은 직원이 내민 메모지를 청구서의 일련숫자와 대조하며 확인을 하더니 남자 직원을 나가라고 했다. 아마 그의 심정은 한마디로 이상이 없어서 수용자가 잘못해서 이루어진 청구서이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고 으레 그렇게 판정이 나기 때문에 느긋하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리 와 봐요." 내가 국장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 "기록 착오였소. 다른 이상이 아니라 숫자를 정리하다 보니 삼자와 팔자 같은 걸 착각해서 잘못 옮기는 경우가 더러, 어쩌다 생길 수 있잖소. 여기 있는 전자계산기처럼 전산판 숫자가 생겼기 때문에 어쩌다 잘못 이기할 수가 있소. 그래서 생긴 거니까 다른 오해는 마쇼." "그렇다면 어떻게 해 주시는 겁니까?" "지시해 놓을 테니 내려가서 수정된 청구서대로 우리 직원에서 납부하면 됩니다." "보십쇼. 이만여 원밖에 안 되는 걸 이십여만 원씩 낼 뻔했잖습니까? 내가 아래층 직원 말만 듣고 대책 없이 돌아갔으면 엄청난 세금까지 물게 됐고 다시는 찾을 수 없었을 거 아닙니까? 내가 용감하게 국장님 방으로 쳐들어오지 "이제 해결됐잖소." 뭉툭한 대답이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만약 전산판을 이기할 때 잘못해서 과다하고 터무니없는 요금이 나왔을 때 귀찮든지 해서 그냥 내게 되면 다음 달 청구서 낼 때 숫자가 잘못 되어 한푼도 안 내도 그만인 경우가 있을텐데 그때 어떻게 합니까? 전화국이 실수한 걸 감추기 위해 숫자를 할 수 없이 조작할 거 아닙니까? 아직 한 번도 지난 달에 과도하게 냈으니 두어 달이나 일 년쯤 공짜로 쓰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 그 순간 국장은 당혹스런 표정을 보였다. 내 말이 전혀 엉뚱한게 아니라는 걸 감추기 위해서는 전산판을 조작해서 넘어갈 수밖에 없으리란 내 상상이 단순한 머리에서 나온 지나친 비약이었으면 싶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생각해 보십쇼. 이만 원만 내도 되는 걸 이십만 원을 냈을 때, 세금을 빼더라도 몇 달 동안은 무료로 써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무거운 세금은 이미 국고로 들어가서 다시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 선량한 수용자만 이중 삼중으로 손해 아닙니까? 직원의 단순한 이기 실수로 무지하게 억울한 사람이 생깁니다. 나 같은 경우는 지나치게 많은 요금이 나와서 항의했다 치고 두 배쯤 더 나온 사람은 대개 확인도 않고 누군가 더 그러면 다음 달엔 통상적으로 보면 요금이 기본료 정도밖에 안 나와야 할 겁니다. 그랬을 때 전화국에서 솔직하게 이런 실수를 했다고 사과를 수용자에게 해 본 적이 있습니까?" "......" "생각해 보십쇼. 공직자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아무리 깨끗한 정부를 주장해도 씨가 안 먹히는 겁니다. 국민들이 믿질 않습니다. 나는 설교하러 온 사람은 아닙니다만 제발 이러지들 맙시다.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한 뒤에 숨기려 들지 말고 빨리 시인하고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사후조치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전화요금 청구서에 이러이러한 경우엔 이러이러할 수 있으니 전화요금이 솔직하게 인쇄해서 내보낼 생각 없으십니까? 국장님 힘으로 어렵겠지요. 그렇다면 공사 사장에게 건의해서 그런 편의를 제공하는 배짱 좀 가지십쇼. 배짱 없고 소신 없이 눈치만 보면서 국장 자리 지키지 좀 마십쇼. 나처럼 숫자 판독을 엉터리로 해서 당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터인데 지금까지 터무니없이 받아먹은 그 돈은 어디다 썼겠습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해명을 해얄 거 아닙니까?" "......" 어이가 없어서인지 내가 너무 당돌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내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해서인지 국장은 말이 없었다. "시민들이 전화요금을 군말 없이 그냥 내는 것은 공직자들과 요금을 관리하는 얼마든지 속여도 국민들은 속을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내가 조사 권한이 있는 자리에 있다면 당장에 조사를 해서 국민이 더 이상 속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런 힘이 없는 서민일 뿐입니다. 부탁 하나 합시다. 한번 목숨 걸고 이 문제를 캐 볼 배짱 좀 가지십쇼. 그래서 그 자리에서 쫓겨나도라도 정말 시민을 위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시민을 위해 한몸 바쳐 보슈. 할 말이 수없이 많지만 그냥 갑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런 걸 감시하지 못할 만큼 무능했다는 내 잘못도 인정하기 때문에 그냥 가는 겁니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서자 국장이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있소?" 아주 간절한 소망처럼 말했다. "여보쇼, 국장 나리!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못 알아듣소? 배짱 좀 가지쇼. 신문과 방송에 안 나면 적당히 넘어갈 거라는 당신 배짱이 부럽소. 신문, 방송이 아직 한 번도 안 다룬 문제올시다. 이거 하나만 생각 좀 해 주쇼. 당신네 집 전화요금이 갑자기 많이 나왔을 때처럼 시민들이 찾아오면 신속하게 처리나 해 주쇼. 당신 같은 공직자가 수두룩한데 그런 사람들은 개도 안 물어갈 거요. 그러니 오래 잘 먹고 잘 좀 사쇼." "이봐요, 청년!"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소리나게 쳐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가리고 볼기를 매우 치고 싶었지만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아래층에 내려와 아까와 달리 너무 친절한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쉽게 처리를 했다. 참 간이고 쓸개도 없는 이런 부류들을 믿고 살아야 하다니...... 하나님. 당신은 아실 겁니다. 당하고 사는 서민들의 아픈 마음을. 국민을 우롱하는 공직자가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서울역이나 전매청이나 전기통신공사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나라 관공서 어디를 가나 이런 일은 숱하게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보시는 이유가 뭡니까? 행여 하나님한테도 떡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놔두시는 건 아니시겠죠. 눈깔 똘똘하게 뜨쇼. 우리나라 국민 좀 우습게 보지 마쇼. 나중에 역사 책 좀 읽어 보쇼. 당신이 어떻게 기록됐는지 말요.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