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해설과 묵상: 판관기
이중섭 마태오 신부(청주교구 오송 본당)
(34) 판관기 개관
판관기는 여호수아기와 마찬가지로 민담, 부족전승 그리고 영웅설화들에 관계된 역사적 단편자료들을 신명기계 편집자가 자신의 신학적 의도와 틀에 맞추어 쓴 것이다.
판관기는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부터 기원전 1030년경 왕정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이 시기는 여호수아가 죽고 사무엘 예언자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약 2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부족별로 흩어져 살던 때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제대로 된 국가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각 부족별로 흩어져 살았는데, 주변민족들이 침입하는 민족적 위기가 닥쳤을 때 특출한 인물이 나타나 백성을 구원하던 시기다. 다시 말해 부족동맹체제에서 왕정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판관기가 잘 말해준다. 판관기는 가나안 정착의 최후단계,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각 지파간의 관계와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그러나 판관기는 역사적인 자료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판관기 저자는 약 200년 동안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록하려 하지 않고, 그 시대 안에서 활동하셨던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기록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관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방민족들의 침입을 단순한 민족 분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관기의 저자는 그런 국가적 불행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배반한 데 따르는 ‘처벌’로 이해한다. 판관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거기서 보았다. 그래서 판관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준비를 해서 이방민족들을 쫓아내려 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께 부르짖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역사를 신학적으로 볼 줄 알았다. 자신들이 당하는 국가적 불행의 이유를 ‘재수가 없어서’라거나 단순히 ‘나라의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깊은 신앙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큰 곤경을 당했을 때 먼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을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을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판관기의 근본적인 관점은 역사를 신앙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에 이르는 신명기 학파 역사서의 근본적인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곧 자신들의 지난 역사를 신앙의 눈으로 돌이켜 보는 것이다. ‘왜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는지? 왜 다윗왕조가 멸망했는지?’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자 지난 600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 쓴 것이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서다. 특별히 판관기의 저자는 모든 역사적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이끄심과 손길을 본다. 자신들이 겪은 모든 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보고, 신앙의 관점에서 기록한 책이 판관기다. [청주주보, 2013년 2월 24일(사순 제2주일)]
(35) 판관기의 구조와 내용
판관기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부 1,1-2,5 역사적 서문
제2부 2,6-16,31 판관들의 이야기
제3부 17-21장 부록 (단 지파의 성소, 벤야민 전쟁)
1) 역사적 서문(1,1-2,5)
역사적인 서문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을 요약한다.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제각기 행동하고, 아주 천천히 정착하고, 패배도 경험한다. 이 서문은 판관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했던 위협적인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2장 1-5절에서 주님의 천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2) 판관들의 이야기(2,6-16,31)
‘교리적 서언’(2,6-3,6)은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가 판관들의 이야기에 서문으로 집어넣은 것으로서 신명기 학파 역사가의 ‘역사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교리적 서언은 독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암시한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원수들에게 압제를 받았
다는 것이다.
교리적 서언은 앞으로 전개된 판관들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요약한다.
① 배반 =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
② 처벌 = 이방민족의 침입과 압제.
③ 호소 = 하느님께 부르짖음.
④ 구원 = 판관이 일어나 이방민족을 물리침.
⑤ 다시 배반 = 판관이 죽으면 다시 우상숭배에 떨어짐.
교리적인 서언에 이어 판관들의 에피소드가 뒤따라온다. 소판관들은 아주 간단히 언급하는데 삼가르, 톨라와 야이르, 입찬, 엘론, 압돈이 소판관에 속한다. 그러나 대판관들을 두고는 아주 자세하고 발전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트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과 아비멜렉, 입타, 삼손에게는 교리적 서언의 공식이 비교적 잘 들어맞는다.
판관기는 판관들의 역사에서 종교적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은 이방민족의 압제를 통한 처벌을 불러들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자 주 하느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심으로 응답하신다는 교훈이다. 이 교훈은 서로 다른 문체와 내용으로 된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3) 부록(17-21장)
판관기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성행하던 무정부주의를 환기시키는 부록 두 개로 끝난다. 하나는 단 지파의 북쪽 이주와 단 성소의 기원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과 그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기를 거부한 벤야민 사람들을 거슬러 일어난 지파들의 전쟁 이야기다.
부록은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그 시대에’(판관 19,1) 성행했던 전례적, 윤리적 혼란의 예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이야기는 왕정이 시작되는 사무엘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청주주보, 2013년 3월 3일(사순 제3주일)]
(36) 판관은 누군가?(1)
판관기는 여호수아의 죽음부터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어려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람들을 ‘판관’이라 부른다. 우리말 성경은 판관(判官)으로 번역한 반면, 개신교 성서는 사사(師士)라고 번역한다. ‘판관’이라는 용어는 백성을 다스리는 법적인 역할에 중점을 둔 번역이고, ‘사사’는 백성을 이끄는 군사적 역할에 중점을 둔 번역인데, 히브리어의 ‘판관’(sopet 쇼페트)이라는 단수명사는 이 두 개의 역할을 동시에 뜻한다.
판관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분연히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민족의 침략에서 건져낸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관이 ‘하느님의 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받아 백성의 구원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민족의 압제에서 건져내고 백성을 다스렸다. 하느님의 영을 받았다는 점에서 판관은 예언자와 공통점이 있다. 판관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백성을 건져냈고, 예언자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히브리어에서 ‘판관한다’(shafat 샤파트)는 동사는 ‘위태로운 상황을 회복시키다’는 뜻이 있다. 정의를 실행하다, 빼앗긴 권리를 되찾다, 해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판관들은 국가적인 불충실과 연관되어 이방민족들의 압제를 받아 상황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한 지파 또는 여러 지파의 상황을 회복시킨 강력한 사람이다”(H. Cazelles). 이처럼 ‘판관한다’는 백성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위험에서 건져내는 우두머리의 일을 뜻하지만, ‘판관한다’는 티로나 카르타고를 통치한 판관들처럼 ‘다스리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판관기는 이스라엘의 판관들을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체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우두머리’로 묘사한다(판관 4,4; 10,2-3; 11,27; 12,7-14; 15,20; 16,31). 이런 개념은 판관을 어떤 가문이나 지파를 곤경에서 건져내려고 일어선 사람으로 제시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판관은 누군가? ‘판관들’(soptim 쇼프팀)이라는 복수명사 형태는 판관기 2장 16-18절에서만 사용된다. 여기서 ‘판관들’이라는 단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려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판관들’이라는 복수명사의 사용빈도는 매우 적다. 판관기 2장을 제외하고는 사무엘기 하권 7장 11절, 열왕기 하권 23장 22절, 룻기 1장 1절에서만 나타난다. 한편 판관기는 우리가 아는 판관 가운데 어느 특정인물을 두고 ‘판관’(sopet 쇼페트)이라는 단수명사를 쓰지 않는다. 다만 2장 18-19절에서 어느 불특정 다수 가운데 한 사람을 지칭할 때 ‘판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반면에 영웅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 ‘판관하다, 다스리다’는 동사가 자주 등장한다(3,10; 4,4; 10,1-5; 12,7-15; 15,20; 16,31). 이 동사는 주로 이야기의 외적인 틀을 이루는 부분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편집자의 손길이 닿은 증거다. 이 동사는 단순히 ‘재판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명령하다,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히브리어가 속한 셈족 언어권에서 ‘판관’이라는 단어는 권위가 있는 공적인 직책을 뜻했다. 예를 들면, 기원전 18세기 마리 문헌과 기원전 13세기 우가리트 문헌에 보면 판관은 공적인 권한을 행사한 고위관리였다. 그러나 그들의 권한은 정해진 도시나 지역을 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고대사회에서 판관제도는 부족체제와 왕정체제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정치적 제도였다.
[청주주보, 2013년 3월 10일(사순 제4주일)]
(37) 판관은 누군가?(2)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고대사회에 존재했던 이런 판관제도에 관한 정보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관의 권한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시켰고, 이스라엘 판관들의 연대를 설정하여 순차적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판관기에 나오는 모든 판관이 이런 직책을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판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행위를 언급하는 동사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다(판관 3,31; 6,15; 10,1). 이런 관점에서 오트니엘과 에훗을 ‘구원자’라고 불렀다(판관 3,9.15).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판관기 1장의 가나안 점령 이야기는 여호수아기의 정복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판관기에서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총지휘하여 일사불란하게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면모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 곧 이스라엘 각 지파의 각개약진이 펼쳐진다. 각 지파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살길을 개척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해나갔다. 판관기 1장은 유다와 시메온 지파, 칼렙과 오트니엘 가문 그리고 카인족의 활동을 말한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산악지대에 국한되었으며, 해안 평야지대와 므기또 평원, 요르단 계곡 등은 이미 이방민족들이 오래 전부터 차지하고 있어서 점령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판관시대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로 뭉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활은 각 지파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증거가 ‘판관기 1장’이다. 각 지파가 이렇게 독립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요르단 계곡은 동서교류를 차단했고, 중앙 산악지대는 각 골짜기의 마을들을 고립시켜 각 지파의 관습과 전통과 방언을 고수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지형적 여건 때문에 판관시대에 이방민족의 침입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파에 국한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위협을 당한 지파가 도움을 청하더라도 지역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들만이 나설 수 있었지, 열두 지파 전체가 한꺼번에 달려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판관기에 묘사된 판관들은 각 지파의 영웅으로 보아야 한다. 판관은 일차적으로 외부의 공격을 받은 해당 지파 출신으로서 ‘그 지파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진 판관기는 신명기계 편집자의 틀에 맞춰 이념적인 작업이 가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방민족의 침입이 어느 한 지파에게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가해진 것이며, ‘하느님의 카리스마를 받은 판관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구원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된 것이다. 그리고 그 판관의 시대가 끝난 다음 또 다른 판관이 나타나 구원활동을 펴는 일이 차례대로 일어났다고 연대기적으로 편집되었다.
요약해서 보면 판관기에 나오는 판관은 법적인 의미의 판관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영웅’들이고, 이방민족의 침입이나 압제기간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자기 지파 또는 인근 몇몇 지파들을 이끌고 전투를 행했다. 이들의 임무는 한시적인 것이었고, 아들에게 세습되지도 않았다. 어느 경우든 이들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다만 드보라의 경우에는 다스리고 구원하는 활동 가운데 법적인 직무도 있었다는 암시를 볼 수 있다(판관 4,4-5 참조). 드보라는 법적인 재판도 한 유일한 판관이었다. [청주주보, 2013년 3월 17일(사순 제5주일)]
(38) 판관의 구분(1)
판관기에 등장하는 판관은 모두 열 두 명이다. 그들의 이름과 출신지파 그리고 그들이 대적한 이방민족, 다스린 기간은 다음과 같다.
- 오트니엘(3,7-11): 유다 지파 출신. 아람 왕 쿠산 리스아타임. 40년 동안 다스림.
- 에훗(3,12-30): 벤야민 지파 출신. 모압 왕 에글론. 80년 다스림.
- 삼가르(3,31): 출신지파 불명. 필리스티아인. 판관기간 미상.
- 드보라와 바락(4-5장): 에프라임 지파 출신. 가나안 왕 야빈. 40년 다스림.
- 기드온(6-9장): 므나쎄 지파 출신. 미디안족과 아말렉족. 40년 다스림.
- 톨라(10,1-2): 이사카르 지파 출신. 대적한 족속 미상. 23년 다스림.
- 야이르(10,3-5): 길앗 출신. 대적한 족속 미상. 22년 다스림.
- 입타(10,6-12,7): 길앗 출신. 암몬족. 6년 다스림.
- 입찬(12,8-10): 베들레헴 출신. 대적한 족속 미상. 7년 다스림.
- 엘론(12,11-12): 즈불룬 지파 출신. 대적한 족속 미상. 10년 다스림.
- 압돈(12,13-15): 에프라임 지파 출신. 대적한 족속 미상. 8년 다스림.
- 삼손(13,1-16,31): 단 지파 출신. 필리스티아인. 20년 다스림.
신명기계 편집자는 고대사회에서 판관의 직책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 편집자는 ‘판관’이라는 고대사회의 용어를 이스라엘의 영웅들에게 적용시켰고, 그들의 권한을 이스라엘 전체에 미치는 것으로 확대했으며, 판관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어느 특정지파의 영웅이 이스라엘 전체의 판관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판관들의 출신지파만큼이나 사회적 위치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드보라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별로 존경을 받지 못했던 것 같고, 입타는 창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문에서 천대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이들이 이스라엘의 판관이 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위기상황에서 어느 지파를 구원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었기에 판관으로 인정받았다.
판관기에 등장하는 판관은 모두 12명인데, 현대학자들은 ‘대판관 6명’과 ‘소판관 6명’을 구별한다. 대판관은 오트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타, 삼손을 말하고, 소판관에는 삼가르, 톨라, 야이르, 입찬, 엘론, 압돈이 속한다. 판관들을 이렇게 ‘큰 사람’과 ‘작은 사람’으로 구별하는 기준은 그들의 활동이나 업적의 크고 작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 관한 편집자의 기록이 길고 짧은 것이 기준이다. 사실 판관기 자체는 판관들을 대판관 또는 소판관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판관 사이에는 차이점이 많다. 그리고 대판관과 소판관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판관’이라는 명칭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한데 모은 편집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만일 신명기계 편집자가 그들의 행적을 이렇게 한데 모아놓고 ‘판관’이라고 칭하지 않았더라면 대판관과 소판관의 공통점을 찾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청주주보, 2013년 3월 24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39) 판관의 구분(2)
대판관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이다. 그들의 출신, 특징 그리고 행동이 다양하더라도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카리스마를 받았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역사는 다양한 형태의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최종적으로 ‘구원자들의 책’ 안으로 모아졌다. ‘구원자들의 책’은 왕정시대의 전반부쯤에 북왕국에서 쓰였으리라고 본다.
이 책 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에훗 이야기, 그리고 하초르 왕 야빈에 관하여 여호수아기 11장의 영향을 받은 바락과 드보라의 이야기,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왕권 이야기, 딸의 이야기가 첨가돼 분량이 길어진 입타 이야기, 그리고 시 두 개, 곧 판관기 5장 드보라의 노래와 9장 7-15절 아비멜렉의 왕권에 반대하는 요탐의 변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구원자들의 책’ 안에서 몇몇 지파의 영웅들은 온 이스라엘을 위해 주 하느님의 전쟁을 이끈 국가적 영웅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소판관들의 이야기는 다른 전승에서 왔다. 삼가르를 제외하고는 이들이 이룩한 어떤 구원업적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출신가문과 그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 죽어서 묻힌 곳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소판관들은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를 구원한 영웅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명기계 편집자는 이들 역시 구원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판관기 안에 편입시켜 정리했고, 이들에게도 ‘판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입타는 대판관과 소판관 사이의 중간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입타는 일차적으로는 구원자였고, 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판관이 되었다. 이런 중간 역할에 대한 증거가 판관기 12장 7절에 나타난다. 다시 말해, 입타 이야기의 결론이 소판관들의 이야기와 붙어있다는 것이다.
단 지파 출신의 외로운 영웅 삼손의 경우는 특이하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구원자도 아니고, 판관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영웅담이 백성들 사이에서 이야기로 전해졌을 뿐이다. 이는 대판관이나 소판관도 아닌 인물이 ‘판관’으로 등장한 예다.
판관들의 명단에 정복시대의 인물인 오트니엘도 첨가되었다. 오트니엘은 여호수아기 15장 16-19절과 판관기 1장 12-15절에 이미 언급된 인물이다. 더 후대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삼가르도 첨가되었다. 다른 모든 판관은 출신지파가 명백히 언급되었지만 삼가르는 아낫의 아들이라고 할 뿐 지파가 분명치 않다. 삼가르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비 이스라엘 사람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꼽히게 되었을까? 그것은 판관기 9장의 아비멜렉이 판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12라는 숫자를 맞추려고 삼가르가 후대에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의 흐름을 끊는 판관기 3장 31절 삼가르에 관한 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판관들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한 것 역시 신명기계 편집자의 작업이다. 대판관들이 다스린 기간의 기준은 한 세대를 뜻하는 40년이었다. 보통 다스리면 40년이고(3,11 오트니엘. 5,31 드보라. 8,28 기드온), 많이 다스리면 그 두 배인 80년이고(3,30 에훗), 적게 다스리면 그 반인 20년이었다(16,31 삼손). 기간 미상인 경우를 빼고 판관들의 통치기간을 합치면 296년이 되는데, 이방나라들에게 압제 당한 햇수까지 합치면 판관기의 연대표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관기의 이런 연대설정은 편집의 결과일 뿐 실제기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청주주보, 2013년 3월 31일(예수 부활 대축일)]
(40) 판관기 서문(1,1-3,6)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너희의 적대자가 되고 그 신들은 너희에게 올가미가 될 것이다.”(판관 2,3)
판관기의 서문(1,1-3,6)은 가나안 정복의 끝을 말해준다. 각 지파가 각자 살길을 찾아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거기 정착하는 과정을 전해준다.
판관기 1장 1절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라고 시작한다. 이것은 판관기의 내용이 여호수아 업적의 속편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판관기를 여호수아기의 끝과 연결시키려는 편집자의 의도를 암시한다. 서문에는 여호수아기와 병행되는 내용이 많다.
판관 1장 12-15절 = 여호 15장 13-19절.
판관 1장 21절 = 여호 15장 63절.
판관 1장 29절 = 여호 16장 10절.
판관 1장 27-28절 = 여호 17장 11-13절.
판관 1장 34-35절 = 여호 19장 47절.
그러나 판관기의 서문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여호수아기의 묘사와는 대조적인 것이 많다. 판관기의 서문에 따르면 정복되지 않은 지역이 많이 남아있었다.
판관기 1장 1-7절을 보면 유다 지파는 시메온 지파와 연합해 베젝에서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을 무찔렀다고 한다. 여호수아기 19장 1-9절에 따르면, 원래 시메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남쪽 영토를 유산으로 받았지만 나중에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다. 그러므로 판관기 1장 1-7절은 시메온 지파가 유다 지파에 흡수되기 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관기 1장 8-21절은 유다 지파의 활동을 보고한다. 유다 지파는 예루살렘, 헤브론, 드비르) 그리고 필리스티아인들의 도시를 점령했다. 판관기 1장 22-26절은 요셉 가문의 활동을 보고한다. 요셉 가문은 므나쎄 지파와 에프라임 지파를 일컫는 오래된 표현이다. 요셉 가문은 베텔을 정복했다. 판관기 1장 27-36절은 나머지 지파들의 가나안 정착 상황을 보고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거기 살던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판관기 2장 1-5절은 가나안 정복을 종교적으로 서술하는 내용이다. 가나안 땅에서 첫 진지였던 길갈(여호 4,19 참조)에서 온 주님의 천사가 말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가나안에 정착한 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계약을 맺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판관 2,2), 그래서 이곳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었다는 것이다(판관 2,3). 이 말씀을 듣고 백성은 목 놓아 울었고 그래서 그곳을 ‘보킴’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비극적인 내용의 서론은 곧 등장할 판관들이 수행할 역할을 마련하는 터전이 된다.
판관기 2장 6절-3장 6절은 판관들의 이야기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로서, 여기에는 신명기 학파 역사가의 역사신학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신명기 학파 역사가가 다양한 개별영웅들의 이야기를 공통적인 주제로 묶는 기본적인 틀이 거기 있다. 그 틀은 ‘배반, 처벌, 호소, 구원, 다시 배반’이라는 다섯 단계의 도식이다.
[청주주보, 2013년 4월 7일(부활 제2주일)]
(41) 오트니엘, 에훗, 삼가르(3장)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 저희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판관 3,7)
판관기 3장 7절부터 본격적으로 판관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현대 대부분의 학자는 판관기 3장 7절-16장 31절 판관들의 이야기는 신명기계 편집자에 의해 최종적인 형태가 정해졌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이 편집자들은 개별 영웅들의 이야기를 공통된 주제로 묶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했다.
판관기 3장 7-11절은 첫 판관 ‘오트니엘’의 이야기다. 오트니엘은 과도기적인 인물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가나안 정복에 참여했고 드비르를 점령했다(판관 1,13). 그런 그가 여기서는 이방민족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군사 지도자로 나타난다. 일부 학자는 오트니엘 이야기의 역사적 신빙성을 의심한다. 그 이유는 쿠산 리스아타임은 허구의 인물이고, 또 북쪽 아람 왕이 팔레스티나 남쪽에 정착한 유다 지파를 압제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오트니엘 이야기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근거는 기원전 1200년경 아람 사람들이 이집트로 쳐들어갔는데, 그 중간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특별히 유다 지파는 이집트로 진군하는 아람 군대에 짓밟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트니엘의 이야기에는 판관기 2장 6절-3장 6절의 ‘교리적 서언’에 나타나는 신명기 학파 역사가의 기본적 관점이 잘 요약돼 있다.
1) 배반(판관 3,7) :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관계에 있는 짝인데, 유일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잡신들을 섬겨서는 안 되었다.
2) 처벌(판관 3,8)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람 왕 쿠산 리스아타임의 손에 넘겨 18년 동안 압제를 받게 하셨다.
3) 호소(판관 3,9ㄱ) :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4) 구원(판관 3,9ㄴ-11) : 하느님께서 오트니엘을 구원자로 보내 아람 왕을 이기게 하셨다.
5) 다시 배반(판관 3,12) :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를 받게 하셨다. 이어서 판관 에훗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왼손잡이 에훗은 벤야민 지파의 영웅이었다. 그는 모압 왕 에글론을 살해하고 모압 군대가 점령했던 요르단 강 너머 도피로를 차단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의 압제에서 구해냈다. 에훗의 이야기에서는 넷째 단계 ‘구원’이 아주 흥미있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삼가르는 여섯 소판관들 가운데 예외적으로 두 번 소개된다. 판관기 3장 31절에서 소개된 다음, 5장 6절 드보라의 노래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삼가르는 여러 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영웅이다. 먼저 그에 대한 판관기의 보고가 일정한 틀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판관기는 “삼가르도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했다”(판관 3,31)라고만 할 뿐 그의 통치기간에 얼마동안 평화가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방민족의 압제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 그의 활동 지역이 누락돼 있다. 더구나 그가 대적한 족속이 필리스티아인이라는 것 역시 문제점이다. 사무엘기 상하권에서 보듯이 필리스티아인은 엘리와 사무엘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지, 그 이전 판관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삼가르가 드보라의 노래에 언급되기 때문에 그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지만, 판관기가 전하는 그의 업적에는 의문을 제기한다. 삼가르의 업적은 사무엘기 하권 23장 11-12절에 나오는 다윗 군대의 영웅 ‘삼마’의 업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청주주보, 2013년 4월 14일(부활 제3주일)]
(42) 드보라와 바락의 이야기(4-5장)
“그때는 라피돗의 아내 여예언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판관이었다. 그가 에프라임 산악 지방의 라마와 베텔 사이에 있는‘드보라 야자나무’밑에 앉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재판을 받으러 그에게 올라가곤 하였다.”(판관 4,4-5)
드보라는 재판을 했던 유일한 판관이지만, 다른 대판관들과는 달리 위험상황에서 구원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군사적 영도자 바락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다. 드보라는 다른 대판관들과는 달리 침략자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했고, 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즈르엘 평야를 장악하게 되었다.
‘드보라와 바락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자료로 구성되었다. 판관기 4장 산문부분과 5장 운문부분이 완연히 구분된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많다. 4장에는 이스라엘의 적대세력으로서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지휘관 시스라가 언급되고, 5장에서는 시스라만 언급되었다. 또 4장에서는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가 바락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지만, 5장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지파가 언급되었다. 학자들은 5장 드보라의 노래가 당시 사건과 동시대의 것이라고 인정하며, 또 문서로 고정된 최초의 성경 텍스트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여기서 드보라는 당신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께 승리의 찬가를 노래한다. 같은 사실이 산문으로 된 판관기 4장에도 나오지만, 그 원천은 판관기 5장 시 부분과는 독립적이다. 아마도 원천자료가 후대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하초르 왕 야빈을 추가로 언급하며 점점 확장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판관기 5장 드보라의 노래가 역사적 사건을 더 충실히 전한다는 데 일치한다. 드보라의 노래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시 가운데 하나로서, 사건을 목격했거나 직접 사건에 참여한 사람이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만 문제는 가나안 왕 야빈에 있다. 야빈은 여호수아기 11장 1-9절에 이미 등장했는데, 판관기는 가나안 왕 야빈과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하초르 왕 야빈을 동일시한다. 아마도 서로 다른 전투 두 개가 혼동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된 것으로 추측한다. 곧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가 야빈을 거슬러 싸운 전투 이야기와 시스라를 거슬러 싸운 전투 이야기가 판관기 4장에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판관기 5장에서 유다 지파와 시메온 지파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지파는 남쪽에 살았는데 비이스라엘계 도시들(게젤, 기브온, 예루살렘)에 막혀 있어서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맞아 싸울 때 도움을 주러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지리적인 격리상태가 결국 미래의 남북분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타아낙에서 거둔 바락의 승리는 요셉 가문 사람들과 북부 지파의 결합을 더욱 굳게 하여, 남쪽 지파와 맺은 결합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약 200년 뒤 남북이 분열되는 불행한 결과로 나타났다.
[청주주보, 2013년 4월 21일(부활 제4주일)]
(43) 기도온의 소명 이야기(6장)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판관 6,13)
판관기 6장은 기드온의 소명설화다. 곡식은 보통 바람이 잘 통하는 마당에서 타작해야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 은밀한 곳, 곧 바위를 깎아 만든 포도주 틀 속에서 곡식을 털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소명을 주는 이야기다.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만, 기드온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 저희를 미디안의 손아귀에 넘겨버리셨습니다”(판관 6,13).
40대 어떤 자매님의 이야기다. 남편은 자기 집을 하숙집으로 아는지, 도대체 아내와 자녀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침에 밥 먹고 집을 나가면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밤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다. 자녀들도 크니까 어머니와 함께 하기보다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기 바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에 들어와 자리에 누우면 점심때가 지나도록 잠만 잤다. 어머니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남편과 자식들이 하는 꼴을 보며 이 자매님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중세의 기사처럼 나를 떠받들어주고, 평생 그렇게 할 것처럼 하던 남편이 이렇게 무관심한 목석으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이 나에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이 자매님은 자신이 세상에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에게 버림받고, 친구와 이웃들에게 버림받아 혼자 세상에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40대의 아줌마가 가출해서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언뜻 생각난 곳이 나환자촌이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으로 몇 번 간 적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환자촌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 다다랐을 때, 느티나무 밑에 어떤 노인이 하염없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냥 바람을 쐬러 나온 할아버지려니 했더니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묵주를 놓고 엄지발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묵주를 땅바닥에 놓고 기도하십니까”
“보다시피 나는 문둥병에 걸려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내게 엄지발가락 하나를 남겨주셔서 이렇게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지요. 이 발가락 하나 덕분에 땅바닥에 묵주를 놓고 묵주알을 돌릴 수 있으니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퍼뜩 깨달은 바가 있어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하나 남은 발가락에 감사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무엇이 불행하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족의 침략을 받아 괴로워할 때, 기드온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오히려 하느님은 더 가까이 계셨다. 우리는 종종 어렵고 힘들 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내게 관심이 없을 때,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하느님에게서도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외로운 사람은 없다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때가 사실은 하느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청주주보, 2013년 4월 28일(부활 제5주일)]
(44) 기드온의 이야기(판관기 6-8장)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너의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판관 6,14)
기드온은 해마다 계속되는 미디안족의 침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구해낸 영웅이었다. 판관기 6-8장 기드온의 이야기도 전형적인 틀에 맞춰 구성되었다.
1) 6장 1절 배반 :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
2) 6장 1-6절 처벌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칠년 동안 미디안 사람들에게 노략질당하게 하셨다.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온 땅을 망쳐놓았다.
3) 6장 7-10절 호소 :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부르짖었다.
4) 6장 11절-8장 32절 구원 : 하느님께서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기드온을 뽑아 미디안 사람들을 무찌르게 하고, 이스라엘에 평온을 되찾아 주셨다. 이 부분은 기드온의 승전을 자세히 전하는 보고문으로, 판관들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전한다.
5) 8장 33-35절 다시 배반 :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은덕을 잊어버리고 다시 바알들을 섬겼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이야기 두 개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곧 판관기 7장 1절-8장 3절과 8장 4-21절로 나눠볼 수 있다. 7장 1절-8장 3절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성전(聖戰) 사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역사성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8장 4-21절은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 제바와 찰문나에게 행한 피의 복수는 기원전 12세기의 상황과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미디안족에게 승리를 거둔 덕분에 기드온은 임금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실 분은 주 하느님 한 분뿐이라고 하며 그런 제안을 거절했다(판관 8,23).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정제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주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임금이기 때문에, 그분의 임금 자리를 넘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왕정이 하느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판관기 9장 아비멜렉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기드온 이야기의 부록이다. 스켐에 있는 기드온의 소실에게서 난 아비멜렉은 스켐 일가가 준 돈으로 건달패를 사서, 기드온의 아들 일흔 명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탐은 우화를 통해 아비멜렉의 왕국을 공박했다. 요탐은 당시 이스라엘 부족동맹 내의 보수파들이 지녔던 왕정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사실 아비멜렉의 주요 지지기반은 중앙집권 체제를 주장했던 바알 브릿 신전(판관 9,4 참조)의 사제들이었다. 아비멜렉은 3년 동안 다스렸지만, 임금이 되려던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강력한 임금을 원할 만큼 외부적인 위협이 없었기 때문에 아비멜렉의 왕권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나중에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위협하는 상황에서 백성이 임금을 요구했고, 그래서 시작된 사울의 왕권은 그런 점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주주보, 2013년 5월 5일(부활 제6주일)]
(45) 아비멜렉 임금 이야기(9장)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판관 9,6)
기드온이 스켐 출신의 여자에게서 얻은 아비멜렉은 외가쪽 스켐 사람들의 도움으로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학살했다. 그러고나서 아비멜렉은 스켐 장로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요탐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스켐의 장로들에게 우화로 그 잘못을 경고했다.
우화의 내용은 이렇다.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을 다스리는 임금의 자리를 마다했는데, 가시나무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임금이 되어달라는 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 모든 나무를 불살라버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요탐의 이 우화대로 얼마 뒤 아비멜렉은 스켐을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으며, 아비멜렉 자신도 데베츠를 포위 공격하다가 한 여인이 던진 맷돌짝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임금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임금이 되려고 시도했던 사람인데,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스켐은 유서 깊은 도시요 성소였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한 곳이 스켐이었다(여호 24장 참조). 그만큼 종교적 전통이 있는 도시였으며, 지도급 인사와 지식인이 많은 도시였다. 그런 스켐의 장로들이 아비멜렉에게 동조하여 판관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학살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세속의 권세와 영화를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행위다. 스켐의 장로들에게 ‘성(聖)’은 ‘속(俗)’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그러나 요탐은 달랐다. 목숨을 걸고 아비멜렉의 횡포와 스켐 장로들의 잘못을 고발했다.
스켐 장로들의 타협적인 태도와 요탐의 과감한 고발을 보면서, 19세기말 프랑스 사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던 드레퓌스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부유한 유태인 방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89년 육군 대위로 진급했다. 1894년 육군본부에 들어갔으며, 그 해 독일 대사관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죄로 고발당했다. 그는 프랑스령 기아나 앞 바다의 ‘악마의 섬’에 있는 범죄자 수용소에서 종신형을 살도록 선고받았다. 악의적인 반유태주의가 이끌던 언론은 이 판결을 환영했다. 특히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 신문은 드레퓌스 대위를 불충스런 프랑스 유태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드레퓌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편지의 필적이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이라는 증거를 피카르 중령이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스테라지가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풀려나고 오히려 피카르가 체포되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선봉에는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있었다.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는 ‘오로르’(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내용은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에스테라지를 풀어주었다고 고발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졸라는 반 드레퓌스파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1906년 대법원은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임을 선언했으며 그를 복직시켰다. 드레퓌스 대위는 복권되어 국가훈장(레지옹 도뇌르)을 받았으며, 소령으로 진급한 뒤 전역했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령으로 진급해 군수보급 부대를 지휘했다.
[청주주보, 2013년 5월 12일(주님 승천 대축일)]
(46) 요탐의 우화(9장)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주오.’ 하였네”(판관 9,14)
판관 기드온에게 아들이 일흔 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비멜렉이라는 자가 임금이 되려고 형제를 모두 살해했고, 막내아들 요탐만이 목숨을 건져 그리짐 산꼭대기에 가서 이런 우화를 소리 높여 외쳤다.
“나무들이 임금을 세우려고 올리브나무에게 가서 임금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자 올리브나무가 대답했다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린단 말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부탁하니 무화과나무가 대답했다네.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린단 말인가?’
그래서 포도나무에게 가서 부탁하니 포도나무가 대답했다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주는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린단 말인가?’
그래서 모든 나무가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가서 부탁하니 가시나무가 대답했다네.
‘너희가 나를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 몸을 피하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버리리라.’”(판관 9,8-15 참조).
영적으로 보면, 요탐 우화의 핵심은 ‘사람은 자신의 본모습을 살면 된다는 것’이다. 올리브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듯이,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듯이,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듯이, 사람은 자신의 본모습을 살면 된다.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자신의 본모습을 살아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사람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이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모습을 살면 된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최대한 꽃피우고 결실을 맺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길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사람은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처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권좌에 오르려는 사람은 가시나무 같은 사람이다. 가시나무 같은 사람은 권좌에 올라 자신의 부당함과 열등감을 대리만족하려 한다.
“요탐의 우화를 통해 드러난 것을 되새겨 보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모습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으며, 더구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나 자신의 본질과 소명을 살면 된다”(이성우, ‘당신은 누구요’중에서).
[청주주보, 2013년 5월 19일(성령 강림 대축일)]
(47) 입타와 암몬인들의 이야기(10-12장)
“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길앗과 므나쎄를 가로질렀다. 그러고 나서 입타는 암몬 자손들에게 건너가 그들과 싸웠다.”(판관 11,29.31).
입타와 암몬인들의 이야기(판관 10,6-12,7)는 암몬족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영웅 입타에 관한 것인데 내용이 상당히 길다. 내용이 길어진 이유는 판관기 11장 12-28절에 긴 중간삽입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입타가 암몬 사람들과 외교적 협상을 하는 내용이다. 판관기 11장 24절에 ‘크모스’가 언급되었는데, 크모스는 암몬 사람들의 신이 아니라 모압 사람들의 신이다. 암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밀콤’이다. 이런 혼동과 또 그 외교적인 내용으로 볼 때, 판관기 11장 12-28절 외교적 협상은 이스라엘 백성과 모압족의 관계를 다루는 다른 이야기에 속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 부분은 민수기 21-22장에 바탕을 둔 모압족에 관한 서술이라고 추측된다.
학자들은 입타 이야기 전체를 ‘부족전승’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입타 이야기는 판관기 11장 39-40절에 언급된 것처럼 길앗 처녀들의 연중행사를 설명하는 부족전승이라는 것이다.
입타는 대판관과 소판관 양쪽에 모두 속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소판관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동맹체 내의 어느 주요 장소에서 다스린 사람들이었던 반면, 대판관들은 법적으로 다스린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이 두 그룹은 서로 구별되는데, 입타는 두 그룹에 모두 속했고 그래서 서로 다른 이 두 그룹의 결합을 가능케 했다.
입타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암시한다. 그것은 부족동맹시대에 존재했던 지파 사이의 분열, 특별히 ‘동서분열’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미 여호수아가 요르단 동쪽 지방을 르우벤 지파와 가드 지파와 므나쎄 지파 절반에게 나누어주었다(여호 13,8-33). 이것은 모세가 이 세 지파에게 한 약속에 따른 것이었지만, 민수기 32장에 따르면 세 지파는 스스로 원해서 요르단 동편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것이 훗날 동서분열의 불씨가 되었으며, 그것이 입타 시대에 실제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팔레스티나 지형은 지중해를 끼고 남북으로 뻗은 형태인데 그 가운데를 요르단 강이 흐르면서 계곡을 형성하여 동서의 교류를 차단한다. 이처럼 요르단 계곡과 사막으로 막혀 있어 요르단 동편에 정착한 지파들은 본의 아니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요르단 서편에 정착한 지파들은 르우벤 지파, 가드 지파 그리고 므나쎄 지파 절반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소외와 분열이 결국 입타 시대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입타가 암몬 사람들을 쳐부수고 돌아오자 에프라임 사람들이 요르단 강을 건너와서 입타에게 항의했다. 에프라임 지파는 요르단 서편 지역에 정착한 지파 가운데서 가장 크고 강한 지파였다. 항의 내용은 “너는 왜 암몬 자손들과 싸우러 건너갈 때, 같이 가자고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판관 12,1)라는 것이었다. 입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백성과 더불어 암몬 자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그대들을 소집하였소. 그러나 그대들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주지 않았소”(판관 12,2). 의사소통이 안 되면 오해가 생기고 싸움으로 번지는 법이다. 안 그래도 조롱을 받아 소외감을 느끼던 요르단 동편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입타는 화가 나서 요르단 동편의 지파들을 이끌고 에프라임 사람들을 쳐 죽이고, 요르단 강 나루터를 점령해 도망가는 에프라임 사람들을 붙잡아 죽였다. 그래서 입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감히 요르단 동편 사람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입타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시대부터 뿌리깊이 내린 동서분열이 비극적으로 표출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청주주보, 2013년 5월 26일(삼위일체 대축일)]
(48) 입타의 딸 이야기(11장)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판관 11,35)
판관기 안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의 단편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기원전 1030년경 왕정이 출현하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조직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 각 지파와 가문은 나름대로 역사가 있었고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과 기억들이 모든 지파와 가문에 동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들이 그런 자료들을 모을 때 역사적인 종합보다는 ‘종교적인 종합’을 원했다. 사실 우리는 신학적인 가르침을 위해 형성된 아주 단편적인 사건들의 시리즈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한편 이런 사건과 기억들은 다양한 유형의 이야기들에 의해 전달되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통속적인 문학유형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래서 기이한 것, 희극적 또는 비극적인 것(에훗이 모압 왕을 살해하는 이야기), 예외적인 것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삼손의 모험담)이 많다. 역사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야기들에 또 다른 관심거리가 섞어들기도 한다. 특정 여인을 추켜세우는 것(판관기 4장 드보라), 특정 의식의 기원 설명(판관기 11장 입타의 딸 이야기), 제단을 세우는 것(판관기 6장 기드온의 소명설화, 13장 삼손의 탄생설화) 등.
판관 ‘입타’는 길앗 출신으로서 암몬족의 침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판관이다. 암몬족과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입타는 주님께서 도와주셔서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자신의 집 문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그러나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법. 그가 승전하고 돌아왔을 때, 대문에서 손북을 치며 그를 처음으로 맞은 사람은 그의 외동딸이었다. 입타는 하느님께 서원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외동딸을 하느님께 바쳤다.
사람을 죽여 희생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고대근동에서 흔한 일이었다. 열왕기 하권 3장 27절에 따르면,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맏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렸다. 모세오경은 이런 인신제사를 강력히 규제했지만(신명 12,29-31 참조),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런 관습이 있었음을 입타의 딸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판관기 저자는 입타가 딸을 번제로 바쳤다는 사실만 기록할 뿐, 그의 행위 자체에 윤리적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관기 저자가 입타의 인신제사를 옹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입타의 인신제사는 물론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입타가 하느님께 서원한 바를 끝까지 지키는 정신만큼은 본받아야 한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트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판관 11,35) 하면서도 입타는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지켰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약속은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해주신다면 앞으로 무엇 무엇을 하겠다.’며 약속하고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일이 잘 해결되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어떤 때는 내가 잘 나서, 내 힘으로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 드린 약속은 결국 부도수표가 된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축일에 영적 예물을 드리거나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약속한 것이 있다면 잘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영적 예물을 부도수표로 만들지 않으려면 앞으로 기도할 것을 적어낼 것이 아니라 이미 기도한 것을 적어내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청주주보, 2013년 6월 2일(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49) 삼손의 탄생 이야기(13장)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내기 시작할 것이다.”(판관 13,5)
판관기에는 12판관의 이야기가 있다. 판관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 이방민족의 침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영웅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삼손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일단 이방민족의 압제나 침략이 없었고, 다만 개인적인 사연 때문에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대적하여 화풀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기보다는 혼자 싸운 외로운 영웅이다. 삼손을 과연 판관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아무튼 삼손은 12판관의 명단에 들어왔으며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정리되어 판관기에 들어갔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 삼손 이야기는 드보라 이야기 이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손 이야기에서 단 지파는 아직도 남쪽에 머물러 있는데, 5장 드보라의 노래에서는 단 지파가 이미 북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삼손 이야기는 판관기 2-12장의 흐름을 깨기 때문에 원래 드보라 이야기 앞에 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추측된다.
삼손의 이야기는 판관기 안에서 가장 전설적인 이야기다. 삼손은 다른 판관들과는 달리 군사적인 영도자로 등장한 적이 전혀 없다. 삼손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공적을 다루며, 역사보다는 대중의 흥미를 돋구려고 쓰인 것이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어 ‘세메스’에서 온 이름이다. 삼손의 고향인 초르아(판관 13,2 참조)는 벳세메스(히브리어로 ‘태양의 신전’이라는 뜻) 근처 마을이다. 그러므로 ‘삼손’이라는 이름은 초르아와 벳세메스 부근에서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판관기 13장은 삼손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유명한 영웅이 등장하면 후대에 그의 탄생설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성경에서 모세, 삼손, 사무엘, 세례자 요한 같은 경우가 전형적인 예다. 삼손의 부모는 천사의 말을 따라 삼손을 ‘나지르인’으로 바쳤다. ‘성스러운 것으로 봉헌된 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지르’ 서약을 한 사람은 포도덩굴에서 나온 모든 소출을 삼가야만 했으며, 머리카락을 자르지도 면도를 하지도 말아야 했고, 시체를 만지지도 말아야 했다(민수 6장 참조). 나지르인들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전통을 고수하며, 가나안의 농경문화에 항거하는 표시였다. 나지르인들은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나지르 서약을 지킨 사람으로는 삼손과 사무엘, 세례자 요한을 들 수 있다.
삼손의 부모는 훌륭한 부모다. 삼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삼손을 하느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판관 13,5). 삼손은 물론 타고난 체격과 뛰어난 용맹성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영웅이 되었지만, 부모를 잘 만난 덕택도 컸다. 부모를 잘 만난 삼손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낸 영웅이 되었다. 우리 부모들은 삼손의 부모를 본받아 자녀를 뱃속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청주주보, 2013년 6월 9일(연중 제10주일)]
(50) 부록(17-21장)
“그 시대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
판관기는 분쟁과 시련의 시기를 보여준다. 판관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성읍을 건설한 가나안 사람들의 위협 속에 살았고 또 주변민족들 곧 요르단 동쪽의 암몬과 모압 사람들의 준동, 미디안 사람들의 약탈, 야포 남쪽 해안지역에 새로이 정착한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런 위험 앞에서 각 가문과 지파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이럴 때 한 ‘구원자’가 일어나 자신이 속한 가문과 지파 사람들의 호소에 귀 기울여 위험상황에서 해방시켰다. 덕분에 그는 일정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그의 임무와 활동영역은 제거해야 하는 당면한 위험상황에 한정되었다.
가끔 여러 지파가 힘을 뭉치는 경우도 있었다(판관 4-5장; 7,23). 이런 연합전선은 국가적인 자의식을 일깨웠다. 에프라임 지파는 초대되지 않았기 때문에(판관 8,1-3; 12,1-6) 비난 받았다. 드보라는 소집령에 응하지 않은 네 지파(르우벤, 길앗, 단, 아세르 지파)를 강력히 비반했다(5,15-17). 그러나 드보라가 남쪽의 두 지파 곧 ‘유다 지파’와 ‘시메온 지파’를 언급할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훗날 두 왕국으로 분열될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끔 구원자의 권위가 확고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타는 일시적인 두목 이상을 원했다(11,6.8). 기드온은 여러 도시의 우두머리처럼 행세했다. 기드온은 왕권을 거부했지만,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처럼 행세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해졌다.
판관기는 왕정 이전에 이스라엘 안에서 판을 치던 혼란을 말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끝을 맺는다. 하나는 판관기 17-18장 ‘단 지파의 이동’과 ‘단 성소의 기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판관기 19-21장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과 ‘벤야민 지파를 거슬러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단 지파는 원래 배정 받은 남쪽 지역에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게 되자 북쪽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북쪽 에프라임 사람 미카의 개인 성소에서 신상을 훔쳐 라이스에 있는 새 성소에 그 신상을 옮겨 놓았다. 라이스는 그 뒤 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벤야민 전쟁은 기브아 사람들이 저지른 못된 짓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야기는 살아남은 벤야민 남자들이 실로에서 처녀들을 납치해 아내로 삼는 것으로 끝난다. 벤야민 지파의 전쟁은 본문 뒤의 정황을 보면 사실은 남북전쟁이었다. 남쪽에 정착한 벤야민 지파와 북쪽 지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판관시대에 존재했던 남북간의 갈등과 분열을 잘 보여준다. 판관시대의 이런 분열은 결국 솔로몬 사후 남북분단으로 연결되었다.
판관기 17-21장 부록은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하지만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 중이나 유배 후에 판관기 안에 첨가되었다. 이렇게 첨가되었다고 보는 근거는 제관계 문헌에서 발견되는 어휘가 많기 때문이다.
부록에는 “그 시대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는 후렴이 여러 번 등장한다(판관 17,6; 18,1; 19,1; 21,25). 이것은 임금이 없이 일시적인 판관들에 의해 유지되던 부족동맹 체제의 위험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무질서는 임금을 세움으로써 해결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관기의 부록은 다만 부족적인 관습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의 비극적인 결과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첨가되었다. 이런 상황은 뒤이은 왕정의 시작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청주주보, 2013년 6월 16일(연중 제11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