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는 불완전하나마 16세기 말 이탈리아 피렌체(그곳은 이탈리아 최대의 상공도시였다)에서 음악애호가 바르디(Bardi, Giovanni 1534∼1612) 백작 집에서 발생하였다. 여기에서는 신진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서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 불렀다. 그것은 물론 사치스러운 오락이었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극을 연구하며 그것을 소재로 새로운 음악을 창안하려고 했다. 따라서 당시의 대위법을 전혀 무시하고 서창 풍인 멜로디에 단순한 화음의 반주를 붙인 양식으로 말하자면 화성 적인 음악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것을 가극으로 쓴 최초의 사람은 갈릴레이(Galilei, V.1533∼1591) 와 캇치니(Caccini, G. 1550∼1618)였다.
1592년 바르디가 로마로 갔기에 피렌체에 있는 카메라타의 전통은 코르시(Corsi, J.1567∼1604)의 집으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시인 리눗치니(Rinuccini O. 1563∼1621)의 대본에 페리(Peri, J. 1561∼1633)가 작곡한 오페라 『다프네(Dafne)』가 1597년에 이 집에서 상연하였다. 이 카메라타의 역사는 오페라의 전신으로 출발하였고, 그 특징은 악보보다는 가사를 중요시하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대위 법적인 양식보다는 와성적인 단선가(單旋歌; Monody)위 양식이 말의 특성을 발휘하는 점에서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작품으로는 리눗치니의 시에 페리와 캇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ice)를 1600년에 상연하여 이 작품에서 오페라의 확립을 보았다.(에우리디체는 원래 돌아올 수 없는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후세의 오페라 청중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원하지 않으므로 시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한 끝에 에우리디체를 지상의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이 작품을 오페라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다. 아무튼 오페라는 로망롤랑의 말과 같이 『오페라는 르네상스에 있어서 최후의 가지에 핀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극에 음악을 이용한 것은 옛 그리스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었다. 그리고 독백이라 하는 모놀로그(Monologue)와 대화 풍의 2중창과 합창을 포함한 그리스의 극도 오페라의 일종으로 간주되고 있다. 중세기에 있어서 극음악의 역사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주로 종교극이었다. 한편 로마교회에서는 14세기경부터 교회 안의 축제일과 설교 후에 종교극을 상연했는데 이는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종교적인 극음악의 형식으로서는 전례극(典禮劇; 11∼13세기)· 신비극(Mystery; 14∼16세기) ·기적극(Miracle) ·교훈극(Morality)·부활극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는 17세기초 피렌체에서 상연한 오페라 『에우리디체』를 오페라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당시 시대적인 경향을 보면 유럽은 16세기경까지는 모든 것을 공동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어서 인간의 개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릇 인간은 동등한 것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개인의 자유스러운 활동은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에서는 물론 시민의 음악에 있어서도 하나의 집단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인문주의가 나타나자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음악에 있어서 독창이란 것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같은 조건들이 오페라의 탄생과 발달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16세기말, 오페라를 창안한 사람들은 그리스의 극을 본보기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단선율(Monody) 양식을 배워 그리스 비극을 되찾으려 했다. 그 예로 소재에 있어서도 그리스의 신화인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줄거리를 30회 이상이나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음악이 과연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리스 극음악의 유일한 유품은 기원전 408년의 『에우리피데스(Euripides)와 오레스테스(Orestes)』중에 나오는 제창으로 부르는 코러스에 짧은 단편적인 멜로디뿐인데 그나마 초기의 피렌체의 오페라 작곡가들은 알지 못하였다.
초기 피렌체의 오페라는 모노디(Monody)양식에 의한 드라마틱한 솔로를 중심으로 하여 단순한 마드리갈(Madrigal)풍의 코러스와 발레를 첨가시킨 것이었다. 이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귀족적인 클럽의 인문주의적인 교양과 취미를 반영시켜 고전 고대의 동경에 찬 목가적인 분위기를 작품 전체를 통해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로마와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퍼지고 드디어 만토바·보로니아·베네티아·나폴리·로마 등에까지도 확대되었다.
피렌체의 오페라 운동의 계승자는 베네치아의 몬테베르디(Montenerdi, 1567∼1643)였으며, 로마 악파에 속하는 작곡가 중에는 란디(Landi, S 1600∼1660)등을 들 수 있다. 그중 란디의 오페라 『성 아렛치오』에서는 이미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를 분리시겼으며, 프로울로그(Prologue)대신 처음으로 서곡을 사용하였고 제 2막과 3막 처음에 <빠름-느림-빠름> 3악장의 심포니아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후에 이탈리아풍의 서곡으로서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초기의 한 예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오페라의 모델로서 자주 인용되는 그리스 연극을 제외하고라도 12세기부터 16세 사이에 그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다. 13세기의 <로뱅과 마리온>의 경우, 음악은 보잘 것 없는 위치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밖에 전례극이나 조크 파르티트 joc partit, 마스크 등이 있다. 피렌체의 <사육제의 노래 canti carnascialeschi>나 로마의 마스카라드(가면극), 갖가지 호화로운 축제에서는 극적 홍미가 노래나 연출, 장치 등에 비해 떨어지고 있다. 한편 1471년에 만토바에서 그룹 연주와 함께 상연되고 후에 레오나르드 다 빈치에 의해서 연출되어 재연된 폴리치아노(Poliziano)의 <오르페오 Orfeo> <페바와피토네 Feba e Pitone>(1486)는 앞서 정의한 오페라라는 장르에 보다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으나 그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페라의 탄생은 더 직접적으로 반 종교개혁에 의해서 조직된 종교극인 극적 마드리갈의 연출 또는 그 반주가 딸린 독창을 위한 편곡, 노래가 섞인 목가적인 연극인 <파스토랄 Pastorle> 등에 이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573년부터 이미 <아민타Aminta>, 이어 <해방된 예루살램 La Gierusalemme liberata>5의 여러 서사시의 노래에 의한 상연이 기록되어있다.
1590년 시인 바티스타 과리니(Battista Guarini 1538-1612)는 이 아민타를 전원 희비극으로 고쳐 만들었고 거기에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가 곡을 붙였다. 아리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오늘날 보통 최초의 오페라로 치고 있는 다프네 Dafne보다 더 오페라에 가까운 작품으로 생각된다. 다프네는 오타비오 리누치니(1562-1621)의 시에 피렌체 사람인 야코포 페리(1561-1633)가 1594년부터 1598년 사이에 작곡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 속에서 1585년 비첸차의 팔라디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부수음악>과 함께 재연되었다. 마찬가지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이며 바르디의 카메라타의 한 사람이었던 빈첸초 갈릴레이(1520경-91)는 그의 저서 신구(新舊) 음악에 관한 대화(1581)에서 음향과 5성의 마드리갈에 관해 열렬히 논하였으며 그것에 그리스 시의 순수예술을 대치시켰다. 이 모노디의 예술만이 플라톤의 에토스 이론이 갖는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모든 예술(특히 시와 음악)의 결합으로 향하는 도덕적인 목적을 가진 연극이 이후 실현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절정을 이루고 있던 폴리포니보다도 반주 딸린 독창이 시구와 더 맺어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프네와 에우리디체(Euridice)가 탄생했다. 에우리디체는 1600년 마리아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혼례를 위하여 리누치니와 페리가 작곡한 것이며, 원작자 카치니는 극보다 노래를 중시하여 개작함으로써 1602년 이 작품을 상연하였다. 이 작품은 사이사이에 춤이 삽입되고 아리아가 거의 배제된 주로 레치타르 칸탄도(recitar cantando)를 바탕으로 했다. 그 단조로움의 원인은 피렌체의 스틸레 레프레젠타티보의 원칙보다는 오히려 그 원칙을 존중한 초기 작가들의 부족한 재능 때문이었다. 마르코 다 갈리아노(1582-1643)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그는 1608년에 다프네를 개작하고 다시 몬테베르디나 로마의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 만든 이야기>를 1637년까지 계속 썼다.
오르페오(1607 만토바)로써 몬테베르디는 이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오페라를 건져냈다. 이 작품도 역시 향락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2세기 후에 오페라가 요구하게 되는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즉 오케스트라에 할당된 표현적인 역할, 이야기의 줄거리에 이어진 서곡, 에토스의 관념과 일치하는 음색의 관념, 라이트모티브를 연상시키는 형태, 인성과 악기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눈과 귀, 그리고 특히 말과 노래의 조화 등이 그것이며, 이 노래는 줄거리와 관련되어 차분해지거나 기교적으로 되거나 했다. 그러나 대본 작가는 신화를 카타르시스가 없는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최초의 걸작은 이후 2세기에 걸쳐서 이어지게 되는 카스트라토의 무성화(無性化)된 목소리에 바탕을 둔 이 추상적인 극작법을 이미 확립해 버렸던 것이다. 카스트라토는 이 작품에서 오르페우스를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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