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교복 - 친구를 만나고

[리버티]

 어제 저녁, 내 친구 박세길 작가를 만났다. 그가 작년 초부터 나에게, 필생의 역작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말했던 바로 그 책이 며칠 전 나왔다. 세길은 한달 전부터 책이 나오면 만나자고 전화를 몇 번 걸어왔다. 나는 그의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고 3 담임선생님과 모교 26기 3학년 2반 동기 몇몇이 함께하는 모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길은 그런 나의 제안을 간단히 축출하고 나와 계룡산 식당주인, 그리고 그 셋이서만 만나자는 뜻밖의 의사를, 완강하게 밝혔다. 저자가 그렇게 하자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계룡산 식당주인에게 지면에서는 말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고, 어제 오후는 마침, 김홍섭 법사가 나와 마작가에게 의뢰한 백일장 심사가 시민대학 근처의 불교관련 사무실에서 있었다. 나는 매사 순발력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어제는 달랐다. 세길에게 심사가 끝날 무렵인 오후 다섯시 반쯤 구 도청 앞으로 오라고 하였고, 김법사에게는 그가 계룡산 식당 주인의 대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세길을 같이 만나자고 꼬득였다. 플라톤의 분류대로라면, 민주정이나 과두제의 그것보다 명예정의 지도자가 되기를 염원했을 김법사는,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를 비롯해 사회과학 분야의 베스트 셀러 작가인 세길이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나의 반 거짓말에 너무도 기쁘게 속아넘어가 주었다. 

 초중고생들이 쓴 60편의 원고를 심사하는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와 마작가가 협력한 덕분도 있었고, 고산사라는 제목에 고 : 고랭지 산 : 산나물, 사 : 사천원 혹은 고 : 고생하고 산 : 산을 타고 사 : 사망하고, 라든가 부처라는 표제를 굵은 싸인펜으로 원고지 칸도 무시한 채 크게 갈겨 쓰고 부 : 부처님  처 : 처음처럼 이라고 쓴, 필자들 자신은 백일장에 나와 평화, 자연, 문화 따위의 무갸운(!) 주제에 대한 집필부담을 삼행 혹은 이행시로 줄이고, 심사위원들에게는 심사부담을 단 몇초로 축약해 준 고마운 원고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년에 이어 나와 마작가에게 한 시간 심사에, 최저시급이 팔천원 정도로 올랐다고는 하나 이틀 정도는 알바를 해야 받을 수 있는 심사비를 챙겨주는 김법사에게 깊은 우정을 느꼈고, 세길과 김법사 그리고 내가 같은 고등학교의 같은 반에서 수학했다는 전력에도 새삼 긍지를 가졌다.

 돈을 벌었고, 우정을 확인했고, 필생의 역작을 완성한 친구가 서울에서 오고 있었다. 구 도청 앞에 나가 세길을 기다리는 오후 다섯시 반은 더 없이 청명했고, 여유롭고 문화적으로 산다는 실감을 몇꼽배기로 안겨준 그런 시간이었다. 마침내 세길이 내 시야에 나타났다. 중구청 지하철 역에서 내려, 도청 앞으로 오라는 나의 가이드를 충실히 따로온 세길은 등산백을 어깨에 지고,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책을 막 출간한 저자다운 의기를 내뿜으며 나에게 걸어왔다. 구 도청과 시청 사이 커다란 원반형 화분에 담긴 측백나무가, 철제 울타리 아래 머리깎인 사철나무와 향나무가, 그리고 토로소처럼 몸통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몸을 밀고 걸어오는 사회과학 베스트 셀러 저자의 배경을 우리가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의 자연으로 퇴행시키고 있었다. 이런 퇴행에의 실감은 아주 깊은 신비감과 충일감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그  언제나보다 깊은 연대감을 품고, 나에게 다가오는 세길을 향해 손을 들었고, 글쓰기 실력보다 외모가 좀 처지는 그도 나에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악수를 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광천식당 두부두루치기와 소주를 먼저 먹고, 한시간쯤 뒤에 흙과 마루로 가 김법사와 도킹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세길은 그러나, 자기는 두 군데를 다니며 두 가지를 받아들일 위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왜인지 흙과 마루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그답지 않게 숨기지 않았다. 

 [두번째 프레임 전쟁이 온다] 

 세길은 막 나온 그의 새 책을 딱 두 권만 가져왔다. 나와 김홍섭에게만 공짜로 주겠다는 의지가 책을  넣어온 등산백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다는 그의 말에 담겨 있었다. <류달상 작가 혜존 늘 건강하고 빛나시기를 박세길 합장>이라고 쓴 책 헌정사를 보면서 나는 그에게 [단상]을 보내며 뭐라고 썼는지 기억해내려고 했으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에 내 책을 내면 헌정사를 쓰는데 생각을 더 보태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세길은 [두번째 프레임 전쟁이 온다]가 그의 인생과 맞바꿀 책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세길과 김법사 그리고 마작가, 안옹과 함께 한 세 시간 가까운 술자리 내내 내 마음을 울렸다. 책 한 권에 인생을 담다니. 나는 그가 전에 없이 무거워 보였고,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책 한 권에 인생을 담는 사람은 어떤 글쓰기의 시간을 살아냈을까. 글감옥이라고 표현한, 그의 수사는 이제 너무나 진부하여, 그 말만으로는 세길이 보낸 시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출간을 축하하는 덕담도, 책이 나오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연들도, 그저 오고간 기표들일 뿐이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셨고, 그런 내내 내가 자기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세길도 눈치채는 것 같았다. 어느 시점부터 서울에서 온 세길보다 늘 보던 김법사와 안옹과의 대화에 내가 더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오던 중 갑자기 고등학교 적 세길의 모습이 생각났다. 다른 건 아니고, 그의 바랜 교복이었다. 회색까지는 아니고, 검정에서 회색의 중간쯤, 햇살이나 시간이 뺕어간 무채색의 농도를 그는 늘 무연한 듯 입고 다녔다. 그 무연함은 내가 이 나이까지 지녀보지 못한 천성이었다.

 일행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던 중, 야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벽걸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 근처 네네치킨으로 갔다. 거기서 맥주 두병을 더 마시며 우리 팀이 끝내 NC를 스윕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혼이 굶주린 사람처럼 술이 더 고팠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은 없다. 내 영원한 마지막 주막인 태양수퍼에 들러 한번도 사 본 적이 없는 4캔 만원하는 외제 맥주를 집어들고, 계산대에 가서 안면이 익은 주인 아저씨와 야구 얘기를 나눴다. 그는 스윕은 못했지만 위닝시리즈(2승 1패)도 대단한 것이라며, 손을 들어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나도 지체 없이 손을 높이 들어 나보다 키가 크고 손도 큰 그를 향해 화답했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으나, 낮에 내가 먹으려고 사다 놓은 크림 빵은 없어지고 대신 부추빵과 다른 종류의 빵들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나는 캔 맥주 하나와 부추빵을 챙겨들고 내방으로 와 세길의 책을 펼쳤다. 맥주를 마시며, 술을 마실수록 술이 깨는 기이한 감각으로 백 페이지 가량을 넘겼다. 김영삼을 보수의 원조로 보는 새로운 시각과 예전의 세길의 글에서 볼 수 없었던 감각적인 문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다소 긴 듯한 통시적 고찰들, 출범한 지 일년 밖에 되지 않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시의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두른 듯한 진단들이 독서에 지루함과 의아심을 안겨준다는 느낌, 그리고, 맨 정신으로 그가 야심차게 제시하고자 했던 두번째 프레임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몽롱해지는 육체적 진실 앞에 굴복하고 잠을 수락하고 말았다. 세길에겐 여러모로 미안한 일이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세길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왔을까. 맥주 다섯병을 마시고 돌아온 지금이지만, 어제 사온 외제 맥주 한 캔을 더 마시고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한화 야구는 올해 들어 천지개벽을 했는데 세상은 바뀌기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드라마는 운동장에만 있고,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희망으로부터도 속고 살아야 하는 걸까. 왠지 빨리 잠들고 싶다. (*)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