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11.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다 (눅 3:1-6)
◆ 세례요한의 사역 시기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누가복음이 우리에게 매우 특별함은 시기와 숫자들을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이 언제부터 활동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디베료 황제 (티베리우스 AD 14-AD 37) 통치 15년에 요한은 사역을 시작했다. 디베료(티베리우스)는 AD 14년 9월 부터 황제가 되었으니 통치 15년째라면 AD 28-29년 경일 것이다. 이때 요한이 사역을 시작했다. 이 자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년도를 추측하는 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연도는 다니엘의 69 이레 예언(단 9:25)을 계산할 때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으니 세례요한과 나이가 같거나 한 살 늦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때 여전히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하셨다.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충분히 무르익고, 소문이 널리 퍼져서 전 유대를 거쳐서 나사렛까지 미칠 때 즈음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오실 것이다.
◆ 세례 요한의 등장
세례 요한의 등장은 당시 유대 사회에 아주 큰 소식(Big news)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배우는 성경은 모두 선지자들이 쓴 글이었고, 랍비들은 선지자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는데, 바로 전설로만 들었던 그런 선지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다. 수많은 백성이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서 빈들(광야)로 나갔다(마 11:7).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역사를 통해서 자기 조상들이 얼마나 선지자들을 핍박했는지를 잘 아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만큼은 선지자를 제대로 대접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23:30) 말만 들어도 감동이다. 심지어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잘 꾸미고 단장했다(마 23:29). 그러나 막상 선지자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책망하자 즉시 적대감을 가지고 대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자기들을 칭찬하는 조건에서만 인정하는 편협한 무리였다.
많은 사람이 목사에게 조그마한 것만 지적받아도 자존심 상해하며 반발하고 교회를 떠난다. 이런 오만한 마음을 가진다면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 세례 요한의 외침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함은 어떤 의미일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은 회개인가, 세례인가? 세례가 죄 사함을 받게 한다고 하면 그는 이단이다. 세례가 속죄제를 대신한다는 말이 가당하겠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
그러나 회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악을 행하여 죽을 운명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돌이켜서 다시 의를 행하면 그는 죽지 않고 다시 살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셨다(겔 33:14-16). 심지어 그가 돌이키면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겔 33:16)
많은 사람이 회개란 자기 죄를 통한히 여기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아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부분일 뿐이다. 회개란 방향 전환이다.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그것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결국은 돌이키지 않고 자살로 인생을 끝낸 가룟 유다와 반면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히려 깔깔 웃으면서도 진정한 방향 전환을 함으로써 구원받은 삭개오의 예가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오, 돌이키지 않으면서 가슴만 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것에 매우 익숙해 있다. 돌이킬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한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며 겸손을 가장한다. 그래도 세례받고 심지어 임직까지 했으니 확실히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용없다. 그것은 죄 사함을 가져오지 않는다. 지금 삶의 방향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라. 방향이 주님이 아니라면 나는 회개해야 할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회개 없이 예수님만 믿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하는데, 이상한 논리다. 회개 없이 교회는 다닐 수 있지만,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진짜 믿는다면 그는 회개한 사람이다. 회개란 나 중심적인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회개해야 할 때다.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세례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어떤 비법임을 전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고 전한 것이다. 세례는 회개에 대한 내 결심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세례 요한의 강력한 외침은 온 유대를 진동시켰다. 그가 외치는 이 사역은 결국 그리스도 되신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절정을 이룰 것이다. 존귀하신 그 분이 오신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주 예수여,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제 신앙이 진실함을 잃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 예수님을 향한 이 방향에서 절대로 빗나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1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눅 3:7-14)
◆ 독사의 자식 vs 아브라함의 자손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의 자식'은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하는 욕설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을 인용해서 욕설을 정당화하는 목사도 있는데, 말도 안 된다. 요한이 사용한 '독사의 자식'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구원은 떼놓은 당상이며, 복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요한은 정신이 번쩍 나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정신 차려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다. 불순종과 죄에 찌든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일 뿐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목사니, 장로니 하는 타이틀에 기대고 있는 자부심, 또는 자신의 벌려놓은 여러 사역에 대한 자만심, 이런 것들에 속아서 자신이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에게 실상은 '마귀의 종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은근히 기대고 있는 헛된 자부심, 자신에 대한 환상, 자만심... 회개는 이런 것을 깨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욥처럼 대단한 위인도 결국 자기 안에 숨어있는 자만심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 외에 기대고 있는 모든 자부심을 다 치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은커녕 독사의 자식이라는 호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
자신들을 자각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이 외치는 말이다. 이런 질문은 회개의 의지를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요한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나누어줄 것이며, 먹을 것도 그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나누는 삶을 말한다. 세리도 군인들도 당시 부정한 관행을 따르지 말고 정직한 관료가 될 것을 요구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정당한 요구다. 그러나 절대로 쉽지 않은 요구다. 오늘날에는 옷 한 벌의 가치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 옷의 가치는 대단했다. 그런데 여러 벌 있는 자가 남에게 한 벌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두 벌밖에 없는 자에게 한 벌을 남에게 주라는 것은 무척 부담이 되는 요구였다. 대단한 나눔이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집 두 채 있는 자는 한 채를 남에게 주라는 정도의 부담이다. 이런 큰 부담을 지불해야 받는 구원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런 대가를 치르는 구원이 과연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생 얻는 방법을 물어본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요구하자,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마 19:21-22). 이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생을 얻기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세례 요한처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를 요구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행 2:38, 행 16:31).
그리고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삭개오처럼 웃으면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하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렇게 평소에 반듯한 생활을 했던 부자 청년은 심히 고민하고 주저했던 일이었는데, 오히려 탐욕스러웠던 삭개오는 단숨에 실행해버렸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자신의 구원을 돌아보자. 과연 내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새로운 마음이 된 후에 예수를 믿었는가? 아니면 예수를 믿으니 새 마음이 되고, 새 삶이 되었는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고, 믿음을 권면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예수께 뿌리를 내려야 함을 강조하자. 믿음은 내 세계관, 내 가치관, 내 인생관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동이 나오게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만 믿어서는 안 되고 행동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그렇다. 믿음은 행동을 낳는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도박과 같은 중독에 걸린 자에게 중독에서 벗어난 후에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어서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도박이 재미없어진다. 우리 주님은 지독한 중독에서도 능히 구원하시는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자. 그분을 사랑하자. 그분께서 나를 바꾸시도록 하자. 탕자는 단장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능력이 없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것과 싸우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이것저것 등을 해야 할 텐데’라며 푸념하는 것으로 자신이 꽤 믿음이 있는 체하는 위선을 버리고 그냥 예수님께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항복하자.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법을 배우자. 믿음이 산을 옮기는 것을 체험하자.
주 예수여, 에수께서 저의 구주이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저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습니다. 저의 자만심, 열등감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제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13.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눅 3:15-20)
◆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사람들은 혹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요한은 명백하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밝혔다. 구약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세례 요한보다 한 단계 아래였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선지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인지 한마디로 말했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기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과대평가 받고 싶어서 이것저것 자랑을 늘어놓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나면 자기를 자랑할 의욕이 사라지고, 남이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워진다. 말도 못하게 위대하신 분이 나를 위해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더는 자기를 자랑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천문학자들이 거대한 우주를 관찰하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작은 자인가를 깨닫고 잠시나마 겸손해진다고 한다. 하물며 우주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자랑하겠는가?
◆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는 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6)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 성령과 불은 별개인가, 같은 것인가? 어떤 사람은 성령은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며, 불은 불신자들에게 퍼붓는 심판이라고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성령과 불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
NIV는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에 의하면 성령과 불 앞에 모두 with라는 전치사를 붙임으로써 성령과 불이 별개인 것처럼 했다. 그래서 성령은 알곡에게, 불은 쭉정이에게 임한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엔(with, in)'이란 전치사가 하나다. 즉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이다. 이것을 보면 성령과 불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불이 혀처럼 갈라져서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하셨다(행 2:3).
불은 심판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히 12:29), 우리 안에 불결한 것을 태워버리는 정화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사 4:4). 그러므로 양쪽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 성령과 불이 하나인지 별개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이시다.
성도 중에는 물 세례만 알고 성령 세례를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지면서 세계관과 가치관이 바뀌는 체험을 한다. 사실 그것도 성령의 역사이며, 거듭나게 하는 은총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단순히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을 넘어서서 사람을 영적으로 능력있게 한다. 그래서 누가(Luke)는 성령 세례를 '위로부터의 능력'(눅 24:49)이라고 정의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는 정말로 참지 못하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성령 앞에서는 모든 철학과 각종 이론이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기독교를 미워하고 온갖 이론으로 공격하던 자도 성령을 받게 되면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중학교 교사 시절에 아침에 교문에서 등교지도를 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들에게 전도하고 있었다. 전도지 한 장 없이 그냥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얘들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다. 예수님을 믿어라'하는 짤막한 말로 전도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전도하는 저분은 도대체 왜 저럴까? 저런 전도가 효과가 있겠느냐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성도 중에는 평생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다가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어떤 사람은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모든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성령이 계시다(롬 8:9). 단순히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성령 세례라고 정의한다면 그 말도 맞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위로부터의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아기였을 때 시므온도 성령이 그 위에 계셔서 예언했다(눅 2:25).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임한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는 참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침묵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복음 사업에 단순히 돈만 보내주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오!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 세례를 받자. 그래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자. 성령 세례라는 말이 부담스러우면, 다른 말로 불러도 좋다. 위로부터의 능력을 받자.
우리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얼마든지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누가(Luke)는 이렇게 우리에게 주님 약속의 말씀을 전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이 약속은 놀랍다. 우리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 세례를 약속하셨다. 어찌 주저하겠는가?
주님,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게 해주십시오.
14. 예수께서 물 세례, 성령 세례 받으심 (눅 3:21-22)
◆ 예수께서 세례받으심.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다. 그런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셨을 때 세례요한은 당황했다. 요한은 세례 베풀기를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4-15)
즉 주님께서 세례받으심은 개인적인 회개나 죄 사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다. 어떤 분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줄 때 온 백성들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다고 주장한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씩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동물을 속죄제로 드렸다(레 16장).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몇 가지 점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일단 세례는 안수와는 구별되며(히 6:2), 또한 요한은 주님께서 세례 받고 난 후가 아니라, 세례받기 전에 이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증거했다(요 1:29). 즉 이 말씀은 주님의 대속이 세례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함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오신 분이심을 표현한 것이지 당장 죽어야 할 어린 양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그러한 죄를 넘겨받고 그 죄의 짐을 지고 3년이나 사역하셨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세례요한이 인류를 대표한 대제사장 노릇을 했다는 것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순간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이며, 이때 인류의 죄를 짊어지게 하신 분은 세례요한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후에 나타날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본다. 물 세례, 성령 세례를 차례로 받으심으로써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사는 자들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삶은 바로 성도 된 우리들의 표준이다.
◆ 성령이 임하심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게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런데 질문이 생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 아니신가? (마 1:18) 그리고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사신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다고 함은 이전에는 예수님 안에 성령이 안 계셨다는 말씀이 아닌가?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인간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논리로 성령을 논하면 안 된다. 성령은 내 안에 계시지만, 동시에 위로부터 다시 부어주시는 영으로 강림하실 수 있다. 내 안에 계시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 안에도 계실 수 있다. 어떤 영적인 존재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은 영적인 존재이면서 매우 특별하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성령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설명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메마르고 차가운 신학 논리에 갇혀서 그 풍성하고 강력한(powerful) 성령의 능력을 놓쳐버렸다.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께 또 성령이 임하셨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심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안 계셔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함은 성령이 충만하도록 구함이며, 위로부터 풍성한 능력이 임하길 구함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실지라도 성령 부어주심을 구하는 일이 조금도 모순된 일이 아니다. 내게는 이미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더는 성령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과 충만을 계속 갈망해야 한다.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울고 웃게 하며, 지적인 설교로 감탄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회개하게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논리에 갇혀있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라. 지금 당장 영적으로 메말라 있는 사람이 무슨 토론이 필요한가? 더욱 풍성하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구하라. 신학 지식을 쌓음으로써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주님, 성령을 부어주십시오. 더욱 충만하게 부어주십시오. 매일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삼겠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게 해주십시오.
15. 예수님의 족보 (1) (눅 3:23-26)
◆ 예수님의 사역 시기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의 나이는 서른 살 즈음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30세로 고정한 데서 오류가 생겼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30세가 아니라 '30세쯤'이라고 했다. '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세이(ωσει)는 '대략'이란 의미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000명을 먹였다는 기록에서 발견되는 단어다(마 14:21). 5,000명쯤 먹였다는 것이 정확하게 5,000명은 아니지 않은가?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정확한 연대가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시기가 디베료 황제 15년(AD 28~29)이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이므로 예수님의 등장 시기는 AD 29년 이후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해는 역사적으로 AD 33년으로 알려졌는데, 나는 이것이 맞다고 본다. 예수님의 탄생 연도는 잘 몰라도 십자가 처형 연도는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알았고, 수백 년간 로마 당국에 기록으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이것을 로마 당국에 보고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기간이 3년이므로 이것을 적용해서 계산해 본다면,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해가 AD 30년이 된다. 이 때 예수님의 나이는 몇 세이셨을까? 분명히 30세는 훌쩍 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해가 헤롯 치세 때였으며, 헤롯의 사망 시기가 BC 4년이므로 만일 헤롯이 죽은 그 해 초에 태어나셨다면, AD 30년에는 예수님의 나이는 34세이며 만 33세가 되신다.
어떤 분은 이런 것을 골치 아프게 왜 이렇게 따지느냐고 항의할지 모르나 이 년도는 성경 다니엘의 69 이레 예언을 계산할 때 매우 의미 깊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사역 시기는 삼십 세가 아니라, 삼십 대라고 기억하면 되겠다.
◆ 예수님의 족보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이 족보를 연구하면서 이 기록이 유프라테스강에서 발견된 오래된 비석보다 더 중요한 고고학적 가치를 가짐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누가는 이 족보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나 혹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장로였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서 얻었을 것이다. 나는 누가(Luke)가 이 족보 기록을 남긴 것이 무척 감사하다. 이 족보 때문에 구약의 난해한 예언 하나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내일 다루겠다.
많은 사람이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를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읽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심지어 어떤 무지한 성도는 사도바울이 족보 이야기를 피하라(딛 3:9)고 한 것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족보 연구하는 것을 금하기도 한다. 어떻게 바울의 말을 여기에 적용하는가? 사도바울이 금한 족보 이야기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함이 아니라 당시에 조상들 잘난 것을 배경으로 으스대고 싶어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연구하고 또 연구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요셉의 위는 헬리요.
(23)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내림차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서 아브라함, 아담,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는 오름차순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는 헬리'라고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 1:16)라고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요셉의 아버지가 다르고 할아버지가 다르다. 한두 명이 틀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틀리다.
따라서 하나는 요셉의 족보요, 하나는 마리아의 족보일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요셉의 피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요셉의 족보는 의미가 없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요셉의 아들이라고 소개할까? 누가는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이라는 말로 당시 문화에서 어쩔 수 없음을 암시한다. 다만 누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이 족보를 마리아의 족보로 이어간다.
즉 요셉의 아버지는 헬리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위는 헬리라고 한 것을 보면 누가의 지혜로운 의도가 들어있다고 본다. 배우자의 직계 존속도 족보상으로는 '위'이므로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름 앞에 '투(του)'라는 소유격 정관사를 붙인 것으로 끝낸다. 즉 'the son of Heli'가 아니라 그냥 'of Heli'다. 개역개정 성경이 '위'라고 번역한 것이 적절하다.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라는 말씀에서 이 주장은 지지를 받는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둘 다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하나라도 없으면 곤란한 기록이다. 이 족보들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 숨어있다. 나는 이 두 족보를 비교 연구하면서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 이 부분은 내일 다룰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이 오류투성이라고?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자들이 어디서 들은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이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라고 내밀 것이다. 절대로 인간의 머리에서는 이런 책이 나올 수가 없다.
주님, 이러한 귀한 기록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이 성경을 사랑합니다.
16. 예수님의 족보 (2) (눅 3:27-38)
◆ 스알디엘에 얽힌 비밀
(27)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누가복음의 족보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만, 마치 고고학적으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유물이 발견된 것처럼 여겨진다. 참으로 귀한 자료다. 왜냐하면 이 자료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예언 중에 완전히 빗나갔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말씀이 빗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된 것임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오늘 묵상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할 것이다. 이 족보 연구가 일부는 개인적인 추정에 근거하지만, 나는 이 족보 연구를 통해서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를 깨닫게 되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마태복음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는 판이하면서 일부가 같다. 일단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일치하고, 다윗의 아들부터 다르게 내려온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로부터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이다(대상 3:5).
그런데 마태복음의 족보는 솔로몬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이어지는 왕의 족보이며, 누가복음의 족보는 솔로몬의 형인 나단으로부터 이어지는 혈통의 족보다. 두 족보 모두 다윗의 족보지만, 계열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다르게 내려오던 족보가 갑자기 스알디엘에서 일치한다. 이게 무척 혼란스럽다. 도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생각해보라. 내 십사 대 자손과 내 동생의 십사 대 자손이 동일인이 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한쪽은 외가, 한쪽은 친가 쪽 족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동정녀 탄생이 아닌데, 500년 전의 조상의 족보를 갑자기 외가 쪽으로 바꾸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그런 자료가 남아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 '네리'와 '여고냐' 중 한 명은 분명히 양아버지다. 그렇다면 혈통적 족보와 법통적 족보가 따로 가능하다. 더구나 법통적 족보가 왕의 족보라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개인적인 견해로는 스알디엘은 분명히 둘 중 하나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여고냐(고니야, 여호야긴)는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이므로 왕의 아들이 평민의 양자로 들어갈 리는 없으니까, 스알디엘은 친부가 네리, 양부가 여고냐였을 것이다.
이 추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 예레미야 22장 30절의 여고냐를 향한 예언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 예언이 성취되려면 여고냐의 자식은 없어야 맞고, 스알디엘은 양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예언과는 다르게 성경에는 여고냐의 자식이 무려 일곱 명이나 소개되어 있다(대상 3:17-18). 성경에서 이렇게 명백하게 틀린 예언을 찾기란 어렵다.
여고냐는 18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서 3개월간 통치하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무려 37년이나 감옥에 있다가 나왔다(왕하 25:27). 그동안에 유다는 망하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시드기야의 자식들이 몰살됨으로써 예기치 않게 여고냐는 유다의 최후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다가 나왔을 때의 나이가 55세다. 비록 감옥에서 나왔을지라도 여전히 바벨론 포로 생활인데, 그런 자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을 확률은 희박하다. 그런데 자식이 스알디엘을 비롯해서 무려 일곱 명이라니! 이것은 무척 난제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네리라고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다. 즉 여고냐가 자식이 없었던 것이 맞고, 스알디엘을 비롯한 그의 자식들은 모두 양자였음을 시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예레미야 33장 17절에는 앞의 구절과 모순되어 보이는 예언이 실려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와 여고냐가 모두 죽거나 자식이 없을 것이며 어떤 왕의 후손도 왕위에 앉을 수 없을 것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 여전히 왕위에 있을 것을 예언한다. 이 예언이 맞으려면, 법적으로는 왕의 자식이면서 혈통으로는 왕의 자식이 아니지만 다윗의 자손은 분명한 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이 바로 스알디엘이다.
스알디엘은 다윗의 아들 나단의 자손이면서 법적으로는 여고냐의 자식이 되어서 유다의 왕통과 다윗의 혈통을 모두 이은 자다. 그래서 족보상에서 스알디엘의 등장은 참으로 놀라우며,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 누가복음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선지자들을 많이 핍박했고, 악한 자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 왕들은 하나같이 악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런 자의 혈통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서 경건한 계열을 준비한 것이다. 이 계열에서는 선지자를 핍박하거나 피를 흘린 사람이 없다.
그런데 스알디엘은 혈통적으로는 그런 경건한 계열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유다 왕통을 이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의 공통 조상이 되어서 이 혈통과 왕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어받게 했다. 이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 스룹바벨
예수님의 족보 중에 또 관심을 가져야 할 인물은 스룹바벨이다. 스룹바벨은 유다 족속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왔을 때, 유다를 이끌었던 자다. 그는 스알디엘의 아들로서 족보상으로는 유다의 마지막 왕 여고냐의 손자이며 당시 바사왕국으로부터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자다.
그런데 스룹바벨은 성경에서 여러 군데에서 스알디엘의 아들로 소개되는데, 딱 한군데서 스알디엘의 동생 브다야의 아들로 나온다(대상 3:19). 그래서 일부 주석가들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계대결혼법(형이 죽으면 동생이 후사를 잇는 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여고냐의 아들들이 모두 양자인 것으로 추정된 마당에 그 동생을 통한 계대결혼은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어서 내게는 무척 난제였다.
그러나 이 고민은 70인역 성경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70인역에는 역대상 3장 19절에서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성경에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사본상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는 다윗의 아들에게서 갈라졌다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서 합쳐지고, 스룹바벨의 아들에게서 다시 갈라져서 요셉과 마리아에게까지 이른다. 나는 이 족보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경을 의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 그 위는 하나님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누가복음의 족보는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까지 이른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족보가 하나님에게서 끝난다. 결국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체험하게 된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실수가 없으십니다. 성경에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성경을 주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