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30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4일(신유) 10번째기사
심 유격이 왜적과 휴전을 하자 윤두수가 몰래 병사·감사에게 포획하게 하자고 청하다.
○左相尹斗壽啓曰: “今見巡察使狀啓, 沈遊擊與倭賊, 約以五十日不戰, 而多有出城刈草之賊, 禾穀布野,
亦有斫伐而來。 不可固守其期, 而不爲斬射。 且五十日不爲之戰, 則師老糧竭。 密諭于監兵使處,
使之捕獲。” 上從之。
좌상 윤두수가 아뢰기를,
“지금 순찰사(巡察使)의 장계를 보니, 심유격(沈遊擊)이 왜적들과 50일동안 휴전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성에서 나와 풀을 베어가는 왜적들이 많으며 들에 널려 있는 곡식도 베어 간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기한을 고수하여 그들을 참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50일동안 전쟁을 하지않으면
군사는 지치고 군량도 고갈될것입니다. 비밀리에 감사·병사에게 하유하여 포획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보조해석]
윤두수가 왜군 고니시와 명나라 심유격이 맺은 50일간의 휴전을 깨고 왜군을 공격하자고 고하니
선조가 승락하는 내용이다.
징비록에서는 마치 류성룡이 고한 것처럼 주장하고 드라마화하였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왜곡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선조가 휴전을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 왜곡의 도가 정도를 지나쳤다.
선조 26년 1593년 1월 9일.
선조 3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9일(갑자) 1번째기사
평양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다
○甲子/午時, 平壤捷音至。 上曰: “今來報捷之人, 給以銀兩, 在此將官, 當遣大臣ㆍ承旨問安,
且於李提督處, 亦當致謝問安。”
오시(午時)에 평양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이르렀다. 상이 일렀다.
“지금 승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는 은냥(銀兩)을 지급하고 여기에 있는 장수와 관리들에게는
대신과 승지를 보내어 문안하게 하는것이 마땅하며, 또 이 제독에게도 치사(致謝)하고 문안하라.”
유 원외와 원 주사가 평양을 깨뜨리고 국왕을 뵙기를 바란다고 정원이 아뢰다.
○政院啓曰: “卽者, 劉員外、袁主事, 送家人言曰: “賴聖天子威靈, 國王福氣, 已摶破平壤, 擒拿賊將,
請面見國王。” 上曰: “似當見之。 但地勢狹窄, 接見非便, 措辭優待。”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유 원외(劉員外)와 원 주사(袁主事)가 가인(家人)을 보내어
‘성천자(聖天子)의 위령(威靈)과 국왕의 복스러운 기운을 힘입어 이미 평양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적장을 사로잡았기에 국왕을 뵙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는 것이 타당할듯하다. 다만 지역의 형세가 좁아 접견하기가 불편하니 말을 잘하라.”
하였다.
선조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9일(병신) 1번째기사
비변사가 강화에 있는 최원의 군대를 김경로를 시켜 황해도로 인솔하자고 청하다.
○丙申/備邊司啓曰: “使金敬老去江華, 分領崔遠軍, 討黃海賊, 而更思之, 則往還間, 日月必久。
多聚兵丁於三縣, 而無統領可當之人, 使敬老爲三縣軍民之將, 使與都元帥東西夾攻, 或往黃海道海邊,
與其處武將, 驅逐海州之賊。” 答曰: “日月必久之論, 極爲宜當。 三縣定將及黃海募兵爲當。
但軍官從事官, 亦當抄出於崔遠軍, 而崔遠見有旨, 必不肯從何如?” 回啓曰: “使敬老不率崔遠軍,
而募兵黃海, 討黃州、鳳山之賊。 若不然則率三縣軍, 使討平壤賊, 且召崔遠領軍以來。
” 答曰: “募兵爲可, 崔遠軍召來亦難。”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경로(金敬老)로 하여금 강화로 가서 최원의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황해도의 왜적을 치도록
하였습니다만, 다시 생각하니, 오가는 사이에 날짜가 오래 걸릴 것입니다.
많은 병정이 삼현(三縣)에 모였으나 통령(統領)에 합당한 사람이 없으니, 경로로 하여금
삼현 군민의 장수를 삼아 도원수와 함께 동서에서 협공하게 하거나,
혹은 황해도 해변으로 가서 그곳의 무장(武將)과 함께 해주(海州)의 왜적을
몰아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라는 의논은 매우 마땅하다. 삼현의 장수로 정하는 것과 황해도에서
모병(募兵)하는 것이 합당하다. 군관(軍官)과 종사관(從事官)은
당연히 최원의 군대에서 뽑아 내어야 될 텐데,
최원이 이 유지(有旨)를 보면 반드시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좋겠는가?”하였다.
회계[回啓-다시 돌려 장계를 올려 문의]하기를,
“경로로 하여금 최원의 군대를 거느리지 않고 황해도에서 모병하여
황주(黃州)·봉산(鳳山)의 왜적을 토벌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삼현의 군대를 거느리고
평양의 왜적을 무찌르게 하고, 최원을 불러 군대를 이끌고 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병하는 일이 좋겠고 최원의 군대를 불러오는 것은 역시 어렵겠다.”하였다.
[보조해석]
1592년 6월 5일 수원 행고산성에서 왜군 고니시에 패한 전라 병마절도사 사령관 최원은
담양 부사겸 창의사 김천일, 광주 목사 권율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간다.
강화도 출신인 권율의 조언으로 강화도로 들어간다.
강화도에서 최원의 1만 대군과 전주성에서 차출된 김천일의 1천 특별 사수부대, 금산사 주지 처영의
1천 승병부대가 1년여간 묶여 있게 된다.
왜 수군의 한강 진입 차단작전을 김천일과 함께 벌여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전라도 주력군인 병마절도사군이 강화도에 묶여 버린다.
권율은 광주로 돌아간다.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은 강화도에 묶여 있는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1만 대군 중에서
군관과 종사관을 중심으로 행주대첩을 치루는 중심 축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황해도 황주, 봉산 이남에서 활동한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와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가 있다.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가 전주성에서 6천 병력을 이끌고 수원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한양 탈환 작전을 벌이기 위해 시흥으로 병력을 전진배치시킨 후,
4천을 이끌고 강화도 최원의 휘하 군관, 종사관 및 자원병 8천명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평양에서 퇴각하여 한양을 점령하고 있었던,
사령관 우희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군 3만명은
행주에 집결하는 조선군이 명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먼저 조선군을 치기 위해
행주로 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93년 3월 당시에는 임진왜란 책임을 물어 동인정권이 물러나고 서인정권이 전쟁을 지휘하는 시기이다.
좌의정 윤두수, 영중추부사(정승을 지낸 관리에게 하사하는 직책) 정철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시기이며,
정철은 1592년 7월 이후 도체찰사가 되어 강화도로 들어가 최원 병력을 둘러보고
왜 수군의 한양 입성 차단 작전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충청남도 연기>논산 연산, 연무로 내려가
1592년 10월 청주성 수성 전투를 총 지휘하였다.
3월 당시 류성룡은 평안도에서 도체찰사로 군량 조달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김경로, 이시언을
지휘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1593년 10월 24일 한양환도 사흘(27일)후, 동인 영수 이산해, 류성룡은 정철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라고 사주 공작하여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서인정권이 물러나고
동인 정권이 다시 들어선다.
성천자의 위령은 명나라 황제의 위엄과 명성을 말한다.
선조 3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22일(정축) 6번째기사
황해 감사 유영경이 좌방어사 이시언이 적을 베었다고 치계하다.
黃海監司柳永慶馳啓曰: “正月十一日, 天兵先鋒, 已過黃州, 倭賊望風奔還京城。 左防禦使李時言,
初九日, 追擊遁賊, 斬一百八名, 擒一名, 輸送于天將。”
【태백산사고본】 17책 34권 35장 A면
황해 감사 유영경이 치계하였다.
“1월 11일에 명나라 군사 선봉이 이미 황주(黃州)를 지났는데 왜적이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경성(京城)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좌방어사(左防禦使) 이시언(李時言)이 9일에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여
1백 8명을 베어 죽이고
1명을 사로잡아 명나라 장수에게 수송하였습니다.”
[보조해석]
이시언은 1592년 8월 6일 성균관 사예, 8월 20일 헌납, 10월 18일 사헌부 장령을 거쳐
1593년 1월 황해도 좌방어사를 맡는다. [전시에는 직책이 수시로 바뀌면서 진급하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
그 이후 경상도 관찰사, 여주 목사, 충청도 병마절도사, 형조 판서, 개성유수, 도총관, 우찬성(종1품)을 거쳤다.
한현,이몽학의 난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도원수 권율, 중군장 이간과 함께 난을 진압하였다.
인조 당시 남인 이괄의 난 때 반란군과 내통할 기미가 보이자 서인정권은 이시언을 잡아 참수형에 처한다.
대북(광해군지지)에서 소북(영창대군지지)으로 분열하는 유영경은 부산 출신 전주 유씨로
임진왜란 초기 전주성으로 들어와 영남의 전황을 시시각각으로 장계를 올려 보고하는 인물로
낙동강 동안(경상좌도)을 대표하는 소북 영수가 되어 영남의 남인을 대변하였으며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낙동강 서안(경상우도) 대북파에 의해 광해군 등극 초 계축옥사로 사사된다.
이시언은 평양성 탈환 전투(1593년1월9일)이후
1593년 1월 22일에 왜군을 추격하여 1백8명을 사살한다.
이시언 직속 상관이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였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장계라는 것은 의주에 가까이 있는 장수가 먼저 올리거나, 공적 치하에 관심이 많은 장수가
먼저 올리기도 하는데 원칙적으로 보고 라인을 무시하고 올린 것이다.
이순신이 승리한 전투에대해 원균이 먼저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올리려 하던 것을
이순신이 먼저 선수 쳐서 올린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라도 장수들은 동인 정권 시기 때는 대체적으로 승전한 전투에 대해 장계를 올리는 것에
참으로 인색하였다.
승전 장계를 올리면 오히려 동인이 장악한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1년전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호남 주기학파 문무관들이 5~7품계 직급 강등당하며 고향지방으로 모두 좌천됨].
김경로는 남원 출신으로 황진과 함께 1576년 무과에 급제하고 1587년 함북 경성 판관으로
니탕개의 난을 토벌하였다.
비변사에서 비변랑을 거쳐 임진왜란(1592년4월13일)발발 1년전
1591년 2월 김해 부사로 좌천되어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조방장으로 출전하였다가 개전 초기 지리멸멸하였다.
1592년 7월 7일 금산 이치로 이동하여 왜군 수십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황해도 방어사(종3품 당하관)로 고니시가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할 때
이시언등과 함께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격퇴시켰다.
김경로는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 이후 전라도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방어사는 정3품 당상관).
전주성으로 들어가기 전 행주대첩이 승전하는데 황주, 봉산 이남에서 왜군을 대대적으로 물리치며
교란시키는 장수가 김경로이며 행주대첩이 승리하는데 큰 역활을 하는 장수이다.
강화도에 묶여 있는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1만대군 중 무과 급제자인 군관과 종사관들을
행주산성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김천일 수원 부사겸 창의사의 1천 사수부대,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스님의 1천 승병과 함께 아주 큰 역활을 하는 장수가 김경로이다.
선조가 삼도의 군민을 거느리는 병마절도사 사령관 재목으로 삼으려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방어사 김경로는 전주성에서 명나라 군을 인도하기 위해
담양으로갔다가 명나라군 부총병 양호(양원)부대와 순창에서 합류하고 임사미등과 함께
남원성으로 이동하여 왜군 고니시 군을 상대한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 전라 우방어사 오응정등과 함께 남원성 북문을 지켰으나
8월13일 전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양원이 50~100여 명을 이끌고 탈출하자,
8월 16일 전라 병마절도사 이복남, 전라 방어사 김경로, 전라 우방어사 오응정 산성별장 신호등과 함께
자신들만 살아나오자, 남원성밖 벌판의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 종사관에게 불을 붙이게 하고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만인의 총)
불에 타죽는 이복남, 김경로, 오응정, 신호 등은 조선의 진정한 전사였다.
징비록 사극에서 김경로가 황해도 우방어사로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명령을 받는다는 구실로 왜군 최고 사령관 우희 다수가를 공격하지 않고
포위를 풀어주는 역적으로 방송하였다.
우희 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를 사로 잡기 위해 공격하는 것은 허구이다.
김경로를 모독하는 왜곡된 징비록 사극을 보여주고 말았다.
철저하게 서인(특히 전북 출신 장군)에 대해 왜곡 편파 기록한 잡서라고 주장하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이런 이유는 전주의 정여립이 진안으로 들어가 양광도 동인정권을 호남동부, 영남지방(경상우도)으로
가져오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보복 조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조선 건국이후 동인 정권은 영남 사림파를 제거하고 줄곧 양광도 동인(주리학파)이 차지해 왔다.
호남동부, 경상서부 낙동강 서안지방이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여립학파, 조식학파 연합으로
양광도 동인권력을 가져오려다가 정여립(부산 정씨)학파가 기축옥사로 제거되어 실패하고 만다.
또한 징비록 사극이 얼마나 역사 왜곡이 심한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시각이며
징비록 역시 모순이 아주 많은 개인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행주대첩에서 김천일 창의사(종2품) 1천 사수부대,
김제 금산산 주지 처영스님의 1천 승병부대 등과 함께 왜군 3만명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 군대가 황주, 봉산 이남에서 교란작전으로 큰 역활을 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행주대첩에서 우희 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왜군 3만명 중
1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다.(아군 사상자 130여 명/중대대병력)
장성 출신의 변이중이 고흥에서 만들어온 화차부대와 화포에 폭탄을 달아 쏘아 터트릴 수 있는
비격 진천뢰 사용으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조선군 본군 주력군 1만 2천은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이기 때문에 관군을 승전장으로
내세워야 한다면 선거이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전장에서 남원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보다도 한참 뒤떨어진
개인 비망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수가있다.
호남의 동인 조경남은 전장터에서 의병장으로 싸우면서 이치, 웅치, 슬치, 남원성 전투,구례 석주관 전투를
직접 겪으며 진중에서 기록한 진중 역사서이다.
진중에서 신립의 탄금대 전투도 기록해 놓았다.
조경남은 구례 석주관에서 최후를 맞이한다.(구례 석주관칠의 묘)
석주관 전투를 치루기 전 왜군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조선 백성 200여명을 구출하고
이원춘, 왕득인 등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였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영남 의병장 중 정인홍의 공이 으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시언은 1596년 한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할 때 도원수 권율과 함께,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참여하여 진압한다.
한현 ,이몽학의 난으로 부여, 홍성, 청양, 예산, 공주 등 10주군현인들이 전멸당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것이다.
도원수 권율은 공주 공산성 전투를 포기하기에 이르른다.
도원수 권율은 전라, 충청 순안어사 이시발과 함께 공산성 청약작전 계획을 세우고
충남민과 공주민의 집과 농작물을 불태우고 군민들을 공산성에 모두 쓸어 넣고 싸우려 하였다.
고대시대나 있을 법한 청야작전을 계획한 것은 무모한 전략이었다.
이미 진주대첩, 진주 제2차 전투, 행주대첩에서 오랜 동안 써먹은 수법이라
대포로 무장한 왜군에게 통하지 않을 시기였다.
김덕령, 한현, 이몽학에게 충남민들은 감사해야하는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은 왜군도 대포로 무장(1593년 행주대첩 이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 진주성 재함락, 전주성 전투,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패하는 것임].
이에 비해 1597년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류성룡과 함께 동인 주리학파에서 남인으로 분열하는
이시언은 인조 때 이괄의 반란군에 가담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서인 정권은 이시언을 잡아
참수형에 처한다.
p/s
이것은 마치
허균의 홍길동 전을 보면 한성부 홍화문에서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부친에게 버림받고 쫓겨나며 아비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서인 정권의 권력 독점을 돌려 비판하고
동인 정권을 세우려는 속셈으로 만들어지는 홍길동 전과 유사하다.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창경궁 홍화문까지가 서인의 대표적인 거주 지역이며,
반대로 동인 거주 대표지역은 홍화문에서 성북구 정릉지역까지 임)
-각지방에서 중앙에 진출하면 당파 세력 형성을 위해 자기 구역으로가서 거처를 마련한다는 말이다.
허균은 서인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고 동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홍길동 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허준의 동의보감 드라마도 이와 유사하게 펼쳐진다.
영남 지방의 동인 출신 유이태는 훨씬 후대의 정조시대 인물이며 허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의태는 가공 인물이며 정조시대 유이태(劉以泰 혹은 劉爾泰)라는 내의원 소속의 의원이 있었다.
평안북도 용천 군수의 서자로 태어난 허준이 인삼을 불법 밀매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쫓겨나면서,
산청으로 들어가 유의태에게 의술을 배워 해부학을 이수하고 의료의 대가가 되어 성공하는 내용이다.
산청은 허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시대 역시 가공이며 유의태 역시 가공 인물이다.
유명 인물을 전부 동인과 결부시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드라마로 반복해서 보여주면 사람들은 정말로 그게 사실인줄 알고 역사적 사실로 인식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동인이라는 것과 서자라는 것,그리고 영남이라는 허구만 남게 된다.
서자의 권익을 대변하였다는 것과 그 허구가 진실이 되어 진실 왜곡법의 역사, 소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동인 정권과 서인 노론 정권은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로서 신분 질서를 엄격히 유지하고,
예학과 반상의 법도[법학/신분 질서], 강상의 법도[예학, 주자가례, 제사, 문화, 풍속]를 강조했던
정권이었으며, 주기 철학을 탄압하였고 조선시대 역사를 그 반대로 왜곡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남인학파의 정권은 주리철학+도교철학/ 제자백가 철학을 융합시킨 변종 개혁 철학파로
주기 철학을 몰락시킨 어처구니 없는 학파이며, 주자학 강화무장으로 정신문명을 고대기로 회귀시킴.
장희빈의 인현왕후 주술, 저주의식 사건을 보면 남인 철학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음].
서인 기호 학파중 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학 개혁, 혁신학파인 주기학파만이 고대, 중세의 관습 ,악습, 폐습, 풍습, 관의복 복식,
신분질서, 정치, 군사, 문화 제도 혁파, 지나친" 예학"과 허례허식 등
도교 철학[주역/역술, 풍수지리, 주술, 토정비결, 예언, 예언서, 도술, 저주의식 등 도교 풍습],
굿, 점 등 샤머니즘, 곰,호랑이 숭배사상의 토테미즘, 기복 불교신앙 등을 타파하여
근대식 개혁을 하려 하였던 학파였으며, 주자학 내에 있는 도교적인 정이학, 정주학, 예학을 퇴출시켜
근대화시키려 하였던 근대 이성철학파였다.
이는 부인할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명종 이후 선조 때부터 호남지방에서는 주기학파의 영향으로
신분 질서가 가장 유연하였다.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대동계를 만들어 대군 양성론을 펼쳤던 정여립 학파의 기축옥사가 더해져
신분질서의 유연함이 가속화되었다.
현재도
주기학파의 영향으로 가장 먼저 교복 자율화 ,두발 자유화가 가장 오래 진행되고 유지해왔으며,
이 시간에도 두발 자유화, 복장 자유화, 직 간접 체벌방지법 등을 위해 진보 교육감에 의해
줄곧 추진해오고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그리고 권율은 안동 권씨이지만 강화도 출신으로 서인이다.
동인이 서인을 마음대로 지휘할 수도 없었다.
서인은 서인이 지휘하는 체계라는 것을 몰랐나 보다.
동인이 정권을 잡고 비변사를 장악해도 서인 대표가 참여하여 동인 영수가 어떤 결정을 하게 되면
서인 대표가 서인 문관이나 무관에게 명령을 내려 지시를 하게 되는 구조라는 것을 몰랐나 보다.
이런 구조가 아니라면 정권을 잡아봐야 명령 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였다.
동인이 서인을 지휘한다는 것은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전라도는 서인지역이며 호남 동부지방은 혼재 지역이었으나,서인 관할 하에 놓인 지역이었다.
아무리 높은 동인 출신이 지휘한다고 지휘가 되는 지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서인 정철이 1592년 7월 이후 도체찰사가 되어 강화도를 거쳐 최원 병력을 둘러보고
왜수군의 한양 입성 차단 전략 체계를 구축하고 충청도 연기~논산 연산,계룡~연무로 내려가
10월 청주성 수성 전투를 총 지휘한다.
징비록 드라마에 조정에서 선조를 보필하고 있는 정철이 나오는 것은 모순이라는 이야기이다.
종 2품 도관찰사는 평시에 행정 권한을 가진 자고 전시에는 감영에 속한 군도 지휘하지만,
지휘소에서 전략 지휘만 한다.
정 2품 도순찰사는 평시에 각 병영을 돌며 군무를 순찰하고 비변사에 보고하는 직책이며,
군수물자, 인력징발권을 가지고 전시에 지휘소에서 군행정적인 전략 지휘를 한다.
실제 전투는 군령권을 가진 종 2품 도병마절도사, 도방어사, 의병장 등이 전투를 치루는 것이다.
절제사는 세조 때 이징옥의 난 여파로 오위 진무소가 설치됨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임시로 부활된 직책이었다.
시장에 해당하는 부윤의 지휘를 받는 지방군인 종5품 도사 병력[대대급]과
전주진과 경주진에만 있는 종3품 지방 절제사군, 해안 취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고
성안에서 수성전을 펼치는 종 3품 첨절제사군을 임시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왜란 때 부활된 직책이었다.
[전주진, 경주진 절제사만 정3품].
종 2품 전라도 절제사는 조선 주력군인 종 2품 전라도 병마절도사 군대나
5만 의병을 총 지휘하는 종 2품 의병사령관 창의사가 아닌 지방군을 지휘한 것이기 때문에
1592년 7월 7일 이치, 웅치, 슬치전투에서 절대 최고 승전장이 될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 2품 전라 충청 순안어사겸 도순찰사(정2품), 전라관찰사 이광 역시 직접 전투를 치루지 않아
승전장이 되지 못하고, 이치의 고경명, 웅치의 정담, 슬치의 양대박, 이치 제1차 전투 창의사 고경명(패전),
이치 제 2차 전투 황진이 승전장으로 오르는 것이다.
광주 목사(종2품), 전라도 절제사 권율은 지방군을 지휘한 것이기 때문에
최고 위치에 있을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광주 목사만 종 2품. 원래 목사는 정 3품임/무관이 목사직을 맡으면 종 3품임.
선조 시기 전주 인구보다 광주 인구가 많아져 전라 감영을 바꿀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송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상급 상고, 항고 문제 (3심)를 직접 광주목에서 처리하게 하려고
광주 목사를 종 2품으로 올리는 것임)
1593년 3월 14일에 벌어지는 행주대첩 역시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보성)가 4천을 이끌고
주력으로 전술을 지휘하며 싸우는 전투이기 때문에 선거이가 관군 장수로는 가장 먼저
1순위로 승전장으로 올라야 하는 것이다.(행주대첩 이후 선거이는 전라 수군절도사로 공식 임명됨).
전라 관찰사,도순찰사 권율은 2순위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라 감영에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는 관찰사 병력은 800여 명이고
독립된 조선 주력군을 가진 4천 의병과 최원의 8천병력으로 구성된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 군대는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병력으로 전투에서 주력으로 싸우는 35, 31 2개 사단에 해당하는 군단병력이다.
강화도에서 1년여 간을 묶여있던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1만 대군은 행주대첩이 벌어지기 전에
8천 병력을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 수원 부사겸 창의사 김천일(1천 사수부대)의 설득으로
선거이에게 보내주고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의 1만2천 병력이 주력군으로 승리하게 된다.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종 2품]은 임진왜란 초기 동인정권 때 평양으로 북진하는 왜군을
황해도로 나가 막으라는 명령에 강화도를 이탈할 경우 탈영자가 속출한다는 이유를 대고 나가지 않는다.
동인정권으로부터 호남의 주기학파가 모두 밀려났기 때문에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1년전인 1591년 2월 서인 정철이 주색을 가까이 했다며 모함을 받아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 등의 공작으로 강계, 강진, 강릉 등으로 유배와 좌천을 반복하고
서인정권에서 동인 주리학파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선전관, 비변사의 비변랑 등 군사 핵심 요직에서
호남 주기학파 세력이 고향지방과 남인지역으로 5~7품계 직급 강등당하며 좌천된다.
[강한 놈(정철/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당수격)을 쳐냈다는 의미로 평북 강계,전남 강진,
강원 강릉으로 유배를 보낸 것으로 판단됨].
정담, 황박장군(관직을 버리고 낙향, 웅치 제1방어선 주장), 황진, 이복남, 김경로, 고득뢰, 송대창,
송상현, 선거이, 이순신(종6품 정읍 현감) 등이 고향지방과 남인지역으로
주기학파 세력이 좌천되면서 임진왜란 때 맹활약을 펼친다.
[이순신은 종3품 장군급에서 종6품으로 7품계 직급 강등당하며 정읍 현감으로 좌천되는 것임]
최원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이후 개전 초기 왜군이 전주성을 지나치며 이치를 지나
여산 방향으로 북상하자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출정하여 왜군 척후 선봉연대를 기마전으로 물리친다.
"기병대로 정규군 최초로 승리하는 전투가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여산전투이다."
왜군의 척후 선봉대는 현재의 연대급이며, 용인전투에서 와키자카 척후 선봉대(수군) 규모가
1,600명이었으므로, 본군을 엄호하기 위해 양측면으로 나가 정찰하는 규모가
연대급임을 알 수가 있다.
최원은 선조 어가 호송 반대와 한양 출병 반대를 주장했던 순창의 조인, 남원의 형대원을
완주군 화심 웅치아래에서 1천여명을 진압했다는 이유 때문에 호남인에게 외면을 받아
그의 공은 평가절하되었다.
[1583년 회령을 중심으로 동하국 잔당인 여진족 니탕개의 난 때 신립의 휘하 부장들 대다수가
태인 이항(일재/남고서원)의 제자 주기학파 무관 세력이었고 1591년 2월 주기학파 무관세력이
고향 지방으로 직급 강등당하며 좌천되고 동인 주리학파 세력으로 교체되자,
신립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황토 뻘로 인해
8천 기마군단이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는 것임].
-기마전을 포기하고 조령 문경새재에서 매복 유격전으로 승부해야했음.
전주성으로 들어가는 길목도 웅치, 이치, 슬치 세갈래 길이나 되고 소로까지 하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치 사령관 고경명의 7천여 병력, 슬치(양대박, 지장군),
웅치 전선 1천여 병력으로 황박, 정담, 이복남 등이 막아내는 것임.].
이에 비해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은 1천 기병을 가지고 최초로 기마 전술을 펼쳐
적을 유인하는 선봉 전방부대(방탄 마구를 씌운 철갑 기병)가 적진 유효사거리 언저리에서
적진 앞을 옆으로 달려가면서 몸을 숙여 적진 반대 방향으로 몸을 숨기면서 탄약을 소진하게 만들고,
사격이 연신되는 틈을 이용하여 양측면 매복 기마 공격으로 왜군 척후 선봉연대를 궤멸시는
장엄한 승리를 거두는 것임.
기마전은 처음부터 백병전을 벌이는게 아니라 전방 선봉 기병대의 교란으로 화약이 떨어지게 하거나
화약을 재 공급하는 시간차를 이용하여 조총 사격이 연신되는 틈에 활의 유효사거리에서
매복 한 부대가 적진 앞을 2열 종대로 어긋나게 달려가며 적진으로 화살을 날려
무너뜨리는 전법을 말하는데, 고구려 개마무사 전법을 사용하는 전술을 말함.
반대 쪽의 매복 기병대는 궁창 기병대로 마지막 궁수 기병대가 지나가기 전에 적진 앞으로 돌진하여
적이 많을 때는 교대로 다시 한번 궁기병이 활 공격을 시도하거나 적진이 무너졌다고 판단했을 때는
창기병이 창의 유효 사거리 적진 앞을 1열로 뒤따라 지나가며 창을 1발씩 쭈욱 던지며 달려가고,
중간쯤 지나갈 때 맨 마지막에 처음 유효 사거리 밖에서 적의 실탄을 소진시키며 교란하던
선봉부대인 궁검병이 돌진하며 가담하여, 백병전을 벌여 검술로 마무리하는 기병 전술을 말함.
궁수기병대는 적 측후방으로 돌며 다시 화살을 날리면서 선봉대가 중앙으로 돌진하면
양측방에서 화살을 날리면서 다시 재돌진하고 그 뒤를 이어서 창검병이 뒤따라가며 궁수 기병대가
화살을 날려가면서 좌우로 빠지면 바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무너뜨리는 전법.
여산지방에 개활지가 있기 때문에 기병대로 싸울 만한 곳까지 지나가도록
인내전략을 펼친 것이 분명함.
12년 넘게 전라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원이 1천 기병대로 최초 승리하자,
신립도 8천 기마군단으로 승리해보고 싶었을 것임.
무인들이 가장 성공시켜보고 싶어하는 전법이었기 때문임.
무인들은 이런 승리에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 보려고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
"신립은 독자적으로 숙여진족 니탕개의 난(1만 5천)을 재현해 보려다가 실패하는 것임.
신립이 사령관으로 니탕개의 난을 기마전술로 승리하여 무인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지는 이유였음."
이후 최원은 왜군의 평양 북상을 막으라는 황해도 출병 거부로,
1592년 10월 이후 직급 강등당하고 좌천되었다가 1593년 3월 서인정권 때 휘하 병력 2천을 이끌고
최경회, 황진과 함께 진안 죽도 죽산성, 성주봉 성주성 전투에서 후쿠시마 군대를 괴멸시키고
동향면 성산리 성산전투에서 대패시킨데 이어,
장수군 장계면 육십령을 넘어 달아나서 거창, 지레 사랑암에서 쉬고 있던 왜군을 괴멸시킸으며
영덕, 영해까지 추격하여 왜군 2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개선하여 다시 상호군[정3품]으로 승진하였다.
최경회 남원 부사는 울산까지 화약이 떨어진 왜군을 추격하여 울산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영덕, 영해부사를 겸해 개선한다.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학파 원균 등 다른 장수들은 어민, 왜군 수급을 베어 전공 올리기에 급급해하였다.
[내륙에 살던 국민들이 방납의 폐단과 바다 특산품을 내지 못해 세금을 피하려고 남해안으로 옮겨가,
해상 생활로 연명하며 계절에 따라 어군의 이동으로 이섬, 저섬을 옮겨다니며
생활하는 어민들이 있었는데, 이런 어민들을 왜군 수급으로 위장하여 전공 올리기를 하는 것이었음].
이에 비해 호남의 주기학파 최원, 최경회, 황진은 200여 명의 포로를 잡아 개선한다는 차원에서
최원의 정신세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체계를 비교적 잘 갖췄음을 잘 알 수가 있다.
최경회가 후쿠시마를 활로 사살하고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한쌍 중 반쪽하나인 언월도를 획득한다.
한양으로 포로를 보내자 선조는 왜군을 죽이지 않고 조선인으로 살게 만든다.
이후 여주 목사로 갔다가, 전쟁시기에 하급 관원을 발로 찼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1596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1597년 1월 12일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도성 훈련도감 후위대장으로 승진하여 도성수비에 들어가게 된다.
최원이 서인중 주기학파 세력이라 필요없을 때는 조그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좌천시키다가
동인정권 때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천안 직산까지 북상하여 수도가 위기에 빠지게 되니,
다시 수도로 불러들여 재기용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주 목사, 전남 광주 목사가 지방 목사직으로서는 요직이었음.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는 좌천되는 지역.
왜 후위대장으로 앉혀 놓았냐 하면 권력만 탐하고 몸을 사리는 자기 당파 세력의 장수에게 맡겼을 때는
왜군이 대군을 몰고 왔을 경우 달아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자기 당파가 아니라도
승전 경험이 있고, 왕과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장수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맡기는 것임].
여주는 세종의 영릉 등 서인정권의 기반이며,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척결하기 위하여
원경왕후 민씨 가문을 중심으로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등 4형제가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여
그 반작용으로 야당인 동인세력이 이서군, 이천, 경기 광주, 충북, 강원 영월, 경북 서북부등으로
뻗어가면서 성장하는 곳이고, 서인, 동인 훈구세력의 중심지로 여주, 이서군(동여주~이천 부발읍 일부)
도자기로부터 나오는 세수가 많아 요직이었음.
서인 세력 중 개혁파인 주기학파 세력이 전장터에서 전공을 세워 서인(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동인 주리학파 세력의 상징적인 심장부나 다름없는 여주 목사로 가니 태클을 건 것이 틀림이 없음].
반대세력이라도 능력있는 장수를 도성 주변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남원성, 전주성을 점령하고 충청남도 강경군 직산~천안 직산까지 북상하였며,
호남 관의병군의 후방 지원을 막고 묶어두기 위해 경남 진주성을 재함락시키고, 천안 직산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양측이 큰 출혈을 일으키고 조명연합군이 패하여 안성 이북으로 물러났다.
안성에서 조명 연합군이 증원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천안 직산전투로 인한 희생자가 많아 부산으로 철군하기에 이르른다.
왜군은 하삼도(전라, 충청, 경상도)만 할지하여 얻을 요량으로 더 이상 북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