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일: 근원을 묻는 물음에는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한 후보의 “행복하십니까?”라는 물음이 유행어가 되었던 것은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행복하십니까?”라는 물음은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절박한 질문입니다. 인류는 지금 물질적으로는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개인적, 집단적으로 불안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니까요. 우리만 보더라도 “잘 살아보세”를 노래하며 돌진해왔지만 지금의 삶은 오히려 더 불행해 보입니다. 이 깊은 불안과 불행 속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벗어나려고 했던 가난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난의 영성’ 혹은 ‘자발적 가난’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삶에 어떤 위기나 균열이 생겼음을 암시하는 것이겠지요. 가난의 영성을 이야기하는 오늘의 토론은 우리 삶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행복의 길 찾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소비주의 문명과 가난의 영성
정경일: 토론의 첫 주제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오늘날 왜 가난의 영성이 이야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의 생활을 포박하고 있는 소비주의 문명에 대한 성찰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길희성: 개인적으로 ‘가난의 영성’이라는 주제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끊임없이 매혹적인 주제이고, 실천을 못할수록 더욱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주제입니다. 가난의 영성은 사회자가 얘기했듯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사람을 거기에 집착하게 만들고, 사람을 물화시키고 종살이하게 만들기에 거기로부터 풀려나고 싶은 마음이 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자유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물질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전통이 대부분 일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대상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물질을 사랑하면 그 물질과 동급이 되는 것이고, 심지어 그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섬기게 되는 비참한 결과까지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물질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래도 낫겠지요. 하지만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을 가장 자유롭게,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영구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제 자신도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그런 자유가 실현되지 않음으로 해서 오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풍요 속의 가난’을 겪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1960년대 미국의 히피 문화가 번성했던 것도 부모 세대들이 누린 것만큼의 풍요를 누리려면 굉장히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하고, 경쟁하여 얻으려는 풍요가 그만한 노력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는 회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잘 산다는 것은 재산을 증식해 부유하게 사는 것인데, 그렇게 사는 것이 실제로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생활이 어느 정도 충족되니까 배부른 소리 한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실질적으로도 가난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사실은 지혜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자발적 가난에 영성적, 종교적 의미를 더한다면, 가난의 영성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경일: 풍요가 보장해 주지 못하는 인간의 자유를 자발적 가난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오히려 부자유하게 하는 현재의 소비주의 문명은 지속가능한 인류 역사의 어느 한 단계로 볼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파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로 볼 수 있는 걸까요?
한상봉: 자본주의 내지는 소비주의 문명이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인지 아닌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최근에 칼 융의 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가 주장하는 것 중에 ‘대극의 일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극단으로 치우치다 보면 자기 안의 무의식적인 어떤 차원에서 그것을 바로잡고 평형을 이루기 위한 다른 극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도 그런 힘들이 작용한다면, 소비주의 문명이 아무리 파국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희망적일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발적 가난이 최근에 많이 이야기되는 이유도, 그 반대쪽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길희성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조금 바꾸어 보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한 말이 된 것 같지만, 사랑을 상대방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게 되면 굉장히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 무엇에게 투신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소비주의 문명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요소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입니다. 조금만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돈이나 소비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물질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독점하려는 의식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옵니다.
대형 매장에 가 보면 사람들의 눈이 온통 무엇을 살 것인가에 다 집중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물건을 조금이라도 싼값에 사기 위해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대형 매장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나 분위기는 상당히 위압적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무엇을 사는가, 어느 공간을 주로 찾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이 정해집니다. 보통 서민들이 살 수 있는 것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면 이 무한 소비시대 속에 적은 자산을 갖고 있는 이의 슬픔 같은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부유하지 못한 이의 존재감마저 훼손시키는 것이 소비주의 문명의 현실입니다.
정경일: 소비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경험하는 슬픔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비애 속에 나오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게 뭔가 하는 질문이겠지요. 어제 우연히 “풍요롭고 건강한 삶, 웰빙 라이프!”라는 인터넷 광고를 보았습니다. 이번 토론 주제가 생각나 클릭해 보니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아바타를 위한 상품 목록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스파, 펜션, 살사 댄스, 그린 티, 산림욕, 휘트니스, 아로마 테라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삶의 질을 따지자는 게 결국은 소비주의로 흐르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가난의 영성과 관련하여 이 웰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김기돈: 강화도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 최근 그 지역에 소 점포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김포 쪽에 대형 마트가 여러 곳 생겨서 강화도 사람들이 차를 타고 대형 마트 쪽으로 다 가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대형 마트 쪽으로 나 있는, 사람이 다닐 수 없는 큰 길이 강화도의 길을 다 죽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과 대화하면서 대형 마트로 난 길이 사람이 자기 호흡을 느끼며 걸어갈 길을 앗아버리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소비주의 문명의 한 현실이지요.
언제부턴가 미디어를 통해 ‘소비 집단’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접하게 되는데, 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대신 그 사람의 소비로 인간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웰빙이라는 말도 소비의 관점에서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존재하기’라는 말뜻과 달리 잘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즉 소비할 때 행복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잘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소비의 차원에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다양하고 총체적인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데, 그런 부분들을 모두 생략하고 단지 소비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만듭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총체적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비주의 사회는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것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뺏어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습니다. 그냥 부채를 갖고 더위를 이겨냅니다. 사실 외부 온도와 똑같이 사는 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온도를 내리려고 하면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 에너지를 누군가로부터 뺏어 와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소비하면 할수록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선진국의 소비를 위해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것의 대가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소비주의 문명입니다.
정경일: 존재감을 잃게 하고 인간과 자연의 우애적 관계를 파괴하는데도 불구하고 소비주의를 계속 좇아가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필요의 문제일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물음도 생깁니다.
길희성: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필요’라고 하는 것에는 가수요, 인위적인 수요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때는 필요 없다고 여겼던 것들도 이제는 다 필수품처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린아이들도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핸드폰이 없는데, 누가 핸드폰 번호 물어볼 때 없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지금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필수품처럼 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필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이런 필요를 확대 재생산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야만 경제가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이 경제 문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하여튼 불필요한 물건에 대한 무한한 탐욕을 조장하는 사회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화장실만 보더라도 우리가 어렸을 때는 비누 하나, 수건 하나 있으면 다 되었는데,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도 스프레이부터 시작해서 열 가지 정도는 갖춰 놓고 삽니다. 우리도 모르게 상품 숭배, 물신주의에 빠져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에릭 프롬이 이미 간파했듯이, 소유나 존재냐 하는 문제에서, 현대인은 기본적으로 소유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지배적 존재 양식으로 되어가면서 인간도 물화, 즉 비인간화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커다란 문명사적 비판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상봉: 끝없이 필요를 확대하는 소비주의가 우리 몸의 뼛속까지 배어 있어 일종의 종교가 되어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가끔 서울에 올 때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주부들에게 낮 시간에 뭘 하며 지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쇼핑센터에 간다고 합니다. 이런 쇼핑센터 순례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합니다. 가난한 집 아이일수록 ‘신성화된’ 상품을 사는 순간 자기가 더 ‘거룩’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비함으로써 신성화된 상품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이 세계를 완전히 망가뜨리더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종교화된 소비주의 시스템을 짚어내지 않으면 비전이 없습니다. 아이들만큼은 대형 매장에 데려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정경일: 쇼핑센터에 데려가지 않는다 해도, 소비주의적 생활방식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은데요.
길희성: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더라도 광고에 나오는 상품들은 모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 않습니까?
김기돈: 중요한 것은 필요와 불필요를 나누는 기준이 일방적으로 강요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호흡과 속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저는 고속철도가 일반철도보다 많이 비싸기 때문에 그다지 타고 싶지 않습니다. 철도청에서도 고속철도와 일반철도 모두 이용 가능하다고 하고요. 그러나 열차의 시간 편성을 보게 되면 일반철도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골라 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고속철도를 타라고 등을 떠미는 사회입니다. 삶의 방식이나 상품을 선택하는 기준도 내게 있지 않습니다.
정경일: 저는 고속철도가 이 좁은 땅에 놓이는 걸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가 정말 이상합니다. 속도를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죠. 인터넷도 그렇습니다. 한동안 어느 인터넷 업체에서 ‘미친 속도’를 자랑하는 광고를 했는데, 끝없는 가속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지나친 속도가 우리의 숨을 더 가쁘게 하는 건 아닌지요.
차옥숭: 저는 학교가 지방에 있어서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운전을 할 경우에는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오히려 길이 한산할 때도 많아요. 평일에 서울로 올라올 때 일정한 속도로 국도를 타게 되면 여유롭게 주변의 산과 들, 그리고 사람 사는 마을들을 볼 수 있어 운전하는 시간이 휴식 시간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천안에서부터 고속도로를 타게 되면 그때부터 속도만 생각하게 되지 주변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정해진 속도로 달려야 할 뿐 내가 원하는 속도는 유지할 수 없어요. 답답해지지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주변을 돌아보면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길희성: 소비주의 문화의 그늘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소비를 위해 우리가 소중한 삶의 경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노동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남이 만들어 놓은 상품의 형태로 우리에게 오지만, 과거로 갈수록 자기가 물건을 직접 만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삶의 경험을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노동이 전문화, 분업화되어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노동의 소외, 인간의 소외가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문명의 발달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이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경일: 한편으로는 가난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 구조적 가난을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절대빈곤 혹은 강요된 가난에 대해서도 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김기돈: 빈민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빈곤 문제를 다양하게 논의해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항상 이야기되는 주제 중 하나는 가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었는데, 정부가 말하는 것은 늘 소득 수준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 지표를 가지고 계산하고 말하기가 가장 쉽거든요. 최근 UNDP(유엔개발협력기구)의 한 회의에서 빈곤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도 누가 가난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그 사람의 소득을 기준으로 가난의 지표를 정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저생계비라는 구체적 액수를 기준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것이 그렇게 소득 지표만 가지고 말해질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인간 빈곤’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의 박탈여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가난에는 심리적, 문화적, 교육적 요인이 다 결부됩니다.
지금도 저희 동네에서는 100여 명의 결식아동들이 매일〈사랑의 밥집〉을 찾아옵니다. 이처럼 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정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소비주의 현상이 심화될수록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기회 자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수치적 지표 이외의 요인을 고려하여 볼 때 가난은 여전히 구조적 문제입니다.
길희성: 자발적 가난과 강요된 가난은 이분법적으로가 아니라 연결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가난하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가난을 선택해서 사는 자발적 가난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 삶의 조건마저도 박탈당할 수밖에 없게 하는 강요된 가난을 해결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소비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비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소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경제도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우성들 아닙니까? 얼마 전 이헌재 부총리가 부유층이 소비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이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딜레마입니다. 모두가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며 소비를 극소화해서 살면 좋겠는데, 소비가 줄게 되면 공장이 돌아가지 않게 되고, 그러면 실업자가 양산되고, 또 다시 소비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돈을 쓸 수 있는데도 안 쓰면 현 체제 내에서는 오히려 큰 일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소비가 미덕이 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일단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들의 소비방식은 상당히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선진국들 중 독일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소비 방식입니다. 이 두 나라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근검절약이 밴 사람들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저축만 하지 소비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 경제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 미국 사람들은 앞의 두 나라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소비합니다.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소비 방식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비 방식은 소위 때려 부수는 소비입니다. 지금의 전쟁 특수 같은 소비입니다. 주기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는 고약한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니까 그만큼 다시 생산하고 복구하게 되어 경제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능력 이상의 소비를 하는 삶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소비 방식도 있어야겠지요.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자발적 가난과 남을 위한 소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소외계층을 위한 소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비, 빈곤 국가들을 돕는 소비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발적 가난을 통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 그 삶의 방식에서 남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면 경제에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상식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
차옥숭: 한 가지 짚어 보고 싶은 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흔히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경제적인 재화가 결핍된 상태를 가난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치를 생명에 둔다면 소브리노의 주장처럼 역사 속에서 생명을 말살하고 죽이는 사회적인 조건과 환경 역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가난일 것입니다. 길희성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람직하지 않은 소비 중에, 전쟁을 통한 소비는 인간의 생명을 말살하는 소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불의한 가난입니다.
정경일: 자발적 가난과 소비의 필요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무튼 길희성 선생님이 말씀하신 “남을 위한 소비”는 자발적 가난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길희성: 자기를 위한 소비는 최소화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투자를 하는 소비를 말하는 것이지요.
정경일: 더 많이 누리려고 하지만 오히려 덜 누리게 되는 역설이 소비주의 사회에 있겠지요. 토론자들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가난의 영성, 자발적 가난은 행복하지 않은 현실로부터 벗어나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하는 대안인 것 같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우리의 악습을 살펴보고 개선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의 이상과 가난
정경일: 한상봉 선생님은 시장에서의 소비 행위가 종교적 의례행위처럼 되어 있다고 지적하셨는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종교가 시장의 원리를 좇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의 상품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소비주의를 부추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선도하고 있다는 인상까지 받게 합니다. 하지만 세계 종교 창시자들의 삶과 사상을 보면 공통적으로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셨던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와 권력으로부터 끝없이 탈주해가는 이들에게서 위대한 종교적 각성이 나왔던 것이지요. 종교의 이상과 가난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길희성: 이웃종교는 차치하더라도 기독교는 가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가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의 과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과제입니다. 기독교는 본래 하느님나라를 향한 ‘길의 종교’입니다. 도상의 종교, 순례자들의 여행하는 종교인 것이지요. 여행하는 사람들은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 안 됩니다. 재산이라는 것은 사람이 현실에 정착하고 안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우리를 묶어두는 것입니다. 소유와 재산은 사회구조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종교, 여행을 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공간성에 집착하고 현실 세계에 안주하는 종교들과 다르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재산은 현실 안주의 정신성을 대표하는 대명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지요.
구약시대에는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명령이라는 예언자의 윤리적 외침이 있었지만, 가난 자체를 이상화하거나 부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부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가르침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복을 말씀하셨고,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서』14장 33절)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도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공동체도 가난의 이상을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가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기독교의 존재양식, 기독교적 실존, 영성 자체의 주제입니다.
순례자의 종교인 기독교에 있어서 소유는 현실 사회체제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한 입장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스리랑카의 신학자 피어리스 신부의 이야기대로, 윤리적 차원에서의 ‘가난한 자를 위한 투쟁’(struggle for the poor)과 영성적 차원에서의 ‘가난해지기 위한 투쟁’(struggle to be poor)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두 투쟁이 같이 가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옥숭: 기독교인이 선택하는 가난은 영적인 가난도 의미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의 포기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기꺼이 내어놓는 마음가짐, 삶의 태도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가난은 기독교인이 선택하는 주요한 삶의 자세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수도공동체들은 가난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가난을 이해하고 실천했습니다. 우선 가난하게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의미에서의 가난, 즉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는 물질적인 가난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기는 헌신으로서의 가난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같이 살려는 의지로서의 가난입니다. 대체로 수도원 전통은 이런 것들을 지켜왔습니다. 가난, 겸손, 경건,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 전통에서 소중하게 살려 나가야 할 덕목들입니다.
정경일: 기독교가 출발한 자리에 가난의 이상이 있었고 그 영성 전통을 지켜온 수도공동체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의 교회가 과연 가난했던가요? 오히려 교회는 점점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쳐 온 게 아닌가요?
김기돈: 저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저는 빈민선교를 중심으로 했던〈낙골교회〉에서 13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가난하고 작은 교회였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은 “우리는 가난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방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교회 건물이 있었거든요. 우리의 물음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우리 교회는 가난한가, 그런 공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교회일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교회 내의 소비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또 다른 소비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너무 많은 소비구조를 만들다보니 역설적으로 큰 교회들은 가난합니다.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큰 교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리가 IMF 기간 동안 실업자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을 때 어떤 교회는 새로 커다란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져 부도 직전까지 갔습니다. 우리는 그 교회에 다니는 무의탁 노인이나 결식아동들을 돌보았습니다. 또 장애인 할머니들이 그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다고 해서 교회에 모셔다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너무 부자이다 보니 너무 가난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너희는 새로운 존재라고 선포하는 성서의 뜻과 달리 철저히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가고,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존엄하게 여기는 공동체를 말씀하셨지만, 교회 안에서 오히려 사람을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자는 이야기가 얼마나 통할 수 있을는지 회의가 들 정도입니다.
부산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교회개혁을 주제로 장로님들이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두 시간 동안 토론한 결과 장로들이 앉는 교회 의자를 낮추자고 결정했답니다. 회중석보다 30센티미터 더 높던 장로석을 10센티미터 정도가 되도록 낮추는 게 개혁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가 자기 소비 구조를 깨고 공간과 숫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늘 고민하게 됩니다.
정경일: 4세기의 종교개혁가요 설교자였던 존 크리소스톰은 가난한 이들도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우리는 가난한가?”를 질문해왔다는 것이 의미 깊게 들립니다.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보여 주기 때문일까요?
방청석(최만자):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에 너무 빠져 있다는 비판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먹고 살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을 구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의 물질적 갈망에 대해 교회가 줄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김기돈: 이 세계가 가난한 이유는 모든 인류가 소비할 수 있는 식량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차지는 독(毒)차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독차지함으로써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메시지는 함께 고르게 가난해지자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나눔의 네트워크, 선한 사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상봉: 저는 종교가 갖고 있는 여러 측면 중에서 구복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가곤 했는데, 새벽이면 어머니의 기도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새벽에 누구 때문에 기도하셨겠어요? 술 먹고 들어와 자고 있는 자식, 사람 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거예요. 그것도 어찌 보면 구복적인 기도죠.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그것이 종교의 살아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세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부자들이 죽어서도 그것을 계속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치고 이것저것 나서는 것이 역겹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쌓아온 부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쓴다면 그들의 미래는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보장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거든요. 부자들의 죄와 악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들만 복을 누리며 살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길희성 선생님께서 구조적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과 가난해지기 위한 투쟁이 기독교 정신의 골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투쟁은 선택적 투신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가난해지기 위한 투쟁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고 봅니다. 투쟁해서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자발적 가난이라면 그냥 기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난해져야 한다고 했으니까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으로는 오래 가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 안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말한 가난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부자로 살게 그냥 놔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마음이 편해야 나쁜 짓을 안 하니까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해도 여전히 속을 끓이며 옆 사람을 박박 긁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데 너희는 사는 게 왜 그러냐며 원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세상을 통합시키는 힘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갈라놓는 힘입니다. 투쟁이라는 경우로 좋은 끝을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은 투쟁의 결과라기보다는, 어떤 중요한 것을 추구하며 살다보니 나오는 결과여야 합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의 자발적 가난은 가난해지려고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다보니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예수를 너무 사랑하여 그 분의 운명에 동참하며 살다보니 가진 돈도 없어지고 가난해지는, 결과로서 가난이 따라와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자발적 가난도 그 사람의 팔자이지 자신의 의지로 강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발적 가난은 자신의 의지를 너무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이 나를 정말 가난으로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문득 하느님 체험을 하고 삶의 태도와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로만 가난을 실천하려는 것은 때로는 추상적인 논의에 머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경일: 자발적 가난은 이끌려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체험적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해지지 않을 기회가 더 많은 사회에서 우리의 의지적 선택도 여전히 중요하지 않을까요?
길희성: 자발적 가난이란 말 자체가 조금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강요된 가난과 구별하기 위한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자발적 가난에는 윤리적 차원과 영성적 차원이 함께 있습니다. 가난이 은총이고 결과이더라도 또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도 있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와 초대 공동체의 삶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삶인 동시에 윤리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가난이 저절로 은총으로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우리의 고민이고 교회사 전체가 증언하는 모습이었다고 봅니다. 제가 인용한 피어리스 신부의 ‘struggle’이라는 말은 몸부림, 애씀, 노력의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저절로 됐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이 몸부림의 목적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함입니다. 그런 내적 싸움 없이 행복하다는 사람은 가난의 영성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여전히 가난해지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분명히 예수의 ‘래디컬’한 가르침을 배반한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 운동도 타락한 교회에 대한 개혁의 흐름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수도원들도 결국 나중에는 비대해져서 다시 수도원에서도 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2세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의 가난, 사도들의 가난을 직접 실현하고자 하는 뜻으로 수도회를 설립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이 수도회조차도 여전히 소유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가난하게 살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돈을 많이 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회가 자꾸 부자가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방침이 만들어졌습니다. 교회법적 용어로 도미니움(dominium, 소유권)과 우수스(usus, 사용권)를 구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회는 소유권을 수도회는 사용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교회가 소유권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도 있겠지만 수도회 쪽에서는 일단 문제를 그렇게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사용권을 얼마만큼 행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다시 생겼습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프란시스코 성인의 가난한 삶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소위 ‘영적인 형제들’(spirituals)의 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가난한 사용, 청빈한 사용을 말한 반면, 나머지 온건파들은 적당한 선에서 사용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도회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게 살면 자기들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겁니다. 그들은 각종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불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튼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은 역시 은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청빈의 삶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될 것입니다.
차옥숭: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난을 삶으로 실천하신 이용도 목사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이론으로 가난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가난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자발적인 가난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쩔 수 없이 가난했던 분입니다. 물론 나중에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을 때에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한 동안은 인기 있는 부흥강사였지만 어느 곳에서 돈을 받더라도 그 돈을 집으로 가지고 온 적이 없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주변에 늘 가난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에서 강사비를 받으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항상 빈손으로 돌아왔던 거지요. 그리고 길을 가다 거지를 만났을 때 외면하고 집에 오면 그것이 괴로워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또 길에서 만난 거지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와 얼굴을 닦아주고 옆에 재우면서 느꼈던 아픔과 기쁨을 울면서 일기에 쓰고 계십니다. 진정한 가난의 영성을 몸으로 실천한 것이지요. 이용도 목사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마음 자세는 하느님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분을 대하듯 가난한 자들을 대하셨던 것이지요.
그분은 이런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면서 기쁨과 평화를 많이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을 ‘나의 여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용도 목사님도 가난을 ‘나의 애처(愛妻)’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삶 속에서 겸손하게, 구체적으로 가난을 실천하신 분이지요.
정경일: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조금이라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한 인원과 법이 필요하게 될 거라면서 절대적인 무소유를 주장했지만, 그가 죽은 지 10년도 안 되어 무소유 원칙의 완화를 놓고 수도회가 분열되었던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종교의 이상을 지켜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한편으로는 프란치스코나 이용도, 또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들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분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난의 영성 속에 삶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 동료 기독인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나누는 것도 우리가 가난의 영성을 배워가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난의 영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정경일: 얼마 전 환경운동가 박경화 씨가『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이라는 책을 내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장 반(反) 생태적인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래디컬’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방법론의 모색은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는 데도 어떤 암시를 주는 것 같습니다. 과연 가난의 영성, 자발적 가난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방청석(정대현): 가난의 영성, 자발적 가난이라고 할 때 저는 승용차 안 타고 지하철로 출근하는 것, 50평에서 30평으로 줄여 사는 것, 중형차 대신 경차로 바꿔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상봉 선생님은 자발적 가난은 결과라고 이야기하셨고, 사회자는 가난한 자의 존엄을, 김기돈 목사님은 큰 교회의 가난을 얘기하면서 건물로부터의 자유 같은 이미지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길희성 선생님은 소유나 소비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소비나 소유를 어떻게 영성적 활동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요? 소비나 소유를 그렇게 환원할 수 있을 때 가난한 자마저도 존엄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기돈: 개인이 승용차 타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정부의 캠페인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이 세계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지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뿐 아니라 세계가 개인과 교회에 이미 끝없이 질문해왔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걸 듣지 못했던 것일 뿐이지요. 그러기에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실마리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는 과제는 함께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예배만 드리는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공간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공간을 다른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은 자유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능성들도 근본적인 질문을 들을 수 있을 때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청석(김정회): 산업화 이후 소유와 자본이 굉장한 부를 창출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은 예수께서 사셨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산업사회의 모델을 유지하면서 예수의 가난의 영성을 따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산업사회의 모델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방청석(최만자): 우리의 사는 형태를 1960년대 방식으로 돌리기만 해도 생태계 문제의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지만, 요즈음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이 되어 있습니다. 또 서점에 가 보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가르치는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전에는 부자라는 사실이 괜히 미안했는데, 이제는 부자 되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좋은 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난의 영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또한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단순화시켜야 할 텐데, 나 혼자 단순화시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을 테지만, 이런 변화를 사회구조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길희성: 지금의 우리 사회는 당장이라도 소비를 촉진해야만 실업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근검절약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현 경제 시스템은 소비를 촉진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계 경제가 그런 식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의 심각한 환경문제 등은 문명사적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복잡한 현실의 극복이 몹시 어려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중간노선을 취해서 생각해 본다면, 모든 이가 소비를 안 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자기를 위한 소비는 자발적으로 줄이고 대신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하여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문제가 완화될 수 있겠지요.
김기돈: 요즘 세상을 ‘글로벌 카지노 시대’라고 말합니다. 국가조차 초월하는 정체불명의 자본들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이를테면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 같다는 것입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30년에서 50년 안에 석유가 고갈 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세계는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에너지 고갈시대를 예견하며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일어난 비극이지요. 이런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 사람이 실천하는 가난의 영성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절망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선택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구호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시대의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럴수록 종교적 가치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철저하게 가난의 영성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대안이 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 고르게 가난해지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래서 ‘가난해지기 위한 투쟁’이라는 표현도 나오게 되는 것이겠지요.
한상봉: 한 사람의 의인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기 존재가 대안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의 공력으로 기울어져가는 지구의 축이 그나마 더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겠지요.
결국 출발은 자기로부터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약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나온 것 같은데, 저는 절약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 절약의 이유를 따져봐야 합니다. 대부분 절약하는 사람들은 돈을 모으거나 벌기 위해 절약하자는 겁니다. 낭비하지 말고 돈 벌어서 부자 되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절약하자는 말과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자는 말은 뉘앙스가 다를 뿐만 아니라 가치관도 다릅니다. 절약이 의미가 있으려면 소박한 삶을 위하고, 또 절약의 결과로 얻어지는 재물을 타인을 위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위한 소비냐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예금 통장에 들어있는 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 중에도 복음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부를 가지고 특별히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예수의 명령에 응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차옥숭: 얼마 전 칼 라너의 은총론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무상적 자기 전달’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기에 인간은 원천적으로 성화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은총이 우리 일상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체험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나만을 위해 나를 채우는 것 아니라 나를 비워 남에게 베풀 때, 당신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빈 자리 안에 비로소 육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영성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상한 신비체험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를 비워내고 타인을 받아들일 때, 자기 중심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는 은총을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신비일 것입니다.
길희성: 자발적 가난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본질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가난의 영성이 본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따라야만 하는 이상입니다. 저는 그것이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또 현대사회에서 물신숭배에 빠지지 않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적 청빈과 가난이 필요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도 내적 가난이 외형적 가난으로 이어져야지 그저 마음만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유롭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지요.
정말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한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 사회보장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 있어 그런대로 괜찮은데 우리나라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또 경제적 개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서 각자 알아서 자기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나마 혈연 공동체 같은 여러 공동체들도 다 깨어져 버려서 믿을 사람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결국 자기 혼자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오히려 낫습니다. 사실 수도자들이 부러울 때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공동재산을 가지고서 공동생활을 하거든요. 부족하긴 해도 죽을 때까지 노후대책도 다 서 있습니다. 물론 신부님들은 사유재산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최소한으로 돌봐주기는 해도 신통치 않거든요. 그러니까 주식투자도 하고 그렇습니다. 수도자들과는 다릅니다. 아무튼 수도자들은 공동체가 있어 많은 걸 해결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이라는 공동체가 있어 최소한의 보장이 되지요.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보장받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적당한 타협적 입장에서 부에 있어 청지기 윤리, 관리자 의식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도미니움이 아닌 우수스의 윤리, 물질의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그것을 우리가 관리하고 있다는 청지기 윤리는 우리 보통 기독인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또 지금 당장 나눔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자기가 늙어서나 혹은 죽을 때에 착한 청지기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권장할만한 일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자식에게 유산 안 남기기 운동하는 사람들을 훌륭하게 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지요. 문자 그대로 무소유로 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그런 정도의 청지기 윤리만이라도 잘 지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경일: 엑카르트가 디오게네스를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점점 자유를 잃어온 셈이지요. 오늘 토론자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난의 영성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길, 행복해지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결국 자이툰 부대 선발대가 이라크 아르빌로 떠났습니다. 인간의 생명 자체가 위협당하는 전쟁과 폭력의 세계 현실에서 가난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 퍽이나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냐는 의문도 있겠지만, 깊이 보면 이 가난의 영성, 자발적 가난의 실천이야말로 전쟁과 불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하는 근원적 해결책임을 깨닫게 됩니다. 루이스 멈퍼드가 “풍요로운 경제의 가장 큰 적은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헨리 데이빗 소로”라고 했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삶이 자발적 가난의 영성에 기초할 때 전쟁과 폭력의 원인도 사라질 테니까요. 이런 성찰을 담은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어 드리고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집 건너편 고속도로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세어 보면 10분 동안 백 대가 넘을 때도 있다. 저 많은 자동차 때문에 중동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생각하니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다. 20년 전 빌뱅이 이 집으로 이사 와서 4년 동안 전깃불이 없어 호롱불 켜고 살았는데 그것 때문에 답답하다는 생각은 못했다. 오히려 밤에 별빛과 달빛이 더 밝아 좋았는데 지금은 밤하늘 별빛도 많이 흐려져 버렸다. 세상엔 하늘에 별이 있고 달이 뜨고, 봄에 꽃 피고 새 울고, 여름엔 숲이 우거지고, 단풍잎이 예쁜 가을이 있고, 이것만 해도 살아가는 기쁨이 있는데 제발 모두 욕심 그만 부렸으면 좋겠다. 이따금 눈물 흘리는 건 괜찮지만 남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해 가면서 살아서는 안 되지 않니. 조금 적게 먹고 조금 춥게, 그리고 조금은 외롭게 살아야만 세상은 깨끗해진다고 본다.”
조금 적게 먹고, 조금 춥게, 조금 외롭게 살기.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는 길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