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백색마인(白色魔人)
①
홍무(洪武) 14년 11월 8일
태산(泰山) 성인봉(聖人峯).
이곳은 당금 무림을 관장하는 곳이다. 무림연합총맹(武林聯合總盟)이 있는 곳으로 구파일방을 위시하여 전 중원의 무림세가, 백도무림의 제파들이 공동으로 성지로 여기고 있는 곳이었다.
무림맹이 이곳 태산에 그 총본영을 둔 이유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무림의 대파는 대부분 하남 일대에 모여 있으므로 중원에서 다소 떨어진 태산에 영지를 정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잠룡신도(潛龍神刀) 공손일도(公孫一到).
그는 무림맹 서열 육위의 인물이었다.
직위는 총순감(總巡監)으로 직책상 순찰당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들어온 보고를 받고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낙양지부에서 올라온 것으로 낙양 일대에 순찰로 보냈던 상관중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였다.
실상 공손일도는 평소 상관중에게 불만이 많았다.
상관중은 명문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평소 오만했을 뿐더러 특히 강호사공자와 은연중 파벌을 형성하여 무림맹 내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강호사공자는 소장파에 속했으며 그에 비한다면 공손일도는 노장파에 속했다.
정사대전 이후 소장파의 득세는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강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류(時流)를 타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지만 그는 노장파가 피땀흘려 세운 무림의 평화를 소장파들이 아무런 공도 없이 혜택 만을 누리려 하는 것에는 질색이었다.
사람이 미우면 모든 것이 비뚤어지게 생각되는 법이다.
그는 상관중의 실종이 별다른 일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재미를 보기 위해 마음대로 공무를 이탈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사공자 중의 또다른 일인인 무당 출신의 백유성(白流星)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다.
일명 백도제일검(白道第一劍)으로 불리울 만큼 백유성의 무학은 출중했다. 이제 그를 빼어난 후기지수로 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당의 검법을 통달했을 뿐더러 성격도 침착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강호사공자 가운데 은연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백유성은 반론을 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백유성은 완강하게 말했다. 공손일도는 화가 났다.
이 놈이 건방지게.......
그러나 백유성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상관형의 성격을 모르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로 알리지 않고 행적을 감출 인물이 아닙니다."
"......?"
"상관형은 성격이 까다로울 뿐더러 매사에 가리는 것이 많으므로 수발들 수하들조차 대동하지 않고 사라질 리가 만무입니다. 음식이나 옷, 심지어는 목욕물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찌 임의로 홀로 잠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사고가 생긴 것입니다. 철저히 조사를 해보야 합니다."
"......."
공손일도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의 원로였다. 그 역시 설명을 듣고 백유성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나서서 이 일을 조사해 주겠나?"
백유성은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백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그는 이번 사건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으로 받아 들여졌다.
상관중은 그와 친했다. 강호사공자는 언제나 함께 붙어다녔으며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상관중이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직감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별 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②
기련산(祈蓮山).
무림맹 기련분타의 타주인 방무력(方戊歷)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는 기련산 중에 괴인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수하들과 함께 왔다.
직책상 관할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수하 삼십 명과 함께 이곳에 왔다.
기련산은 방대했다. 그래서 수하들을 나누어 기련산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반나절쯤 지났을까? 그는 동쪽으로부터 향전(響箭)의 신호를 받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향전은 수하들이 웬만한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에는 함부로 발사하지 못하도록 당부한 것이었다.
그는 경공술을 발휘하여 향전이 쏘아 올려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향전이 발사된 곳에 도착한 지금 그의 눈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십여 명의 수하들이 땅바닥에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장발괴인이 한 수하의 품을 뒤지고 있지 않은가?
"멈춰라! 넌...... 누구냐?"
그의 입에서는 절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섬칫한 예감이 든 것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기련분타 내의 최고 정예고수들이었다. 그 딴에는 이번에 예감이 좋지 않아 정예고수 만을 대동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 전부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괴인의 무공이야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심 두려움이 치밀어 음성이 떨린 것이다.
괴인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꾀죄죄한 몰골에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어 용모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괴인의 한 쌍의 눈을 보는 순간 방무력은 심장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괴인의 눈은 마치 비수를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헉!"
방무력은 그 눈빛을 접한 순간 마치 칼날이 자신의 심장에 날아와 꽂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때였다.
괴인은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서, 서라. 나는 무림맹 사람이다. 그대는...... 정체를 밝혀라!"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아니 방무력은 순간적으로 괴인의 얼굴에 흰 선이 그어지는 것을 보았다. 괴인이 웃고 있는 것이다.
그는 괴인이 손을 쳐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괴인의 손바닥이 얼음처림 투명하게 하얗다는 것과, 괴인의 손바닥 중앙에서 혈옥의 반점이 그를 향해 전광처럼 날아왔다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악!"
그는 자신의 비명을 꿈결 속인 듯 들었다. 자신의 비명을 자신이 듣게 될 줄이야.......
아득히 멀어져가는 의식 저편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먼저 가거라....... 그리고 곧 뒤따라 갈 놈들에게 내 이름이나 가르쳐 주거라. 내 이름은 백리진강(百里眞强)......."
피.
피바람이 분다. 그 피바람은 기련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련산으로부터 시작된 혈풍의 향방은 곧장 남하(南下)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괴인이 일으킨 피바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면 그를 본 자는 전부 죽었기 때문이었다. 사신(死神)인가? 그는 죽음을 몰고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는지 모른다.
아니, 죽인다기보다는 도살을 한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가 꼭 무림맹의 인물들 만 골라서 죽인다는 사실이었다.
기련분타는 다만 첫 희생양일 뿐이었다.
이후 남하하면서 드는 불과 보름 사이에 무림맹 여덟 개 지단이 그의 손에 의해 혈해(血海)로 화하고 말았다.
- 크크ㅋㅋ! 무림맹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그는 이렇게 광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맹은 하늘 아래 무림의 성역이었다. 누가 감히 무림맹 전체를 상대로 이런 광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사대전 이래로 무림맹은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흑도무림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괴인은 공공연히 무림맹을 타파하면서 가공할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괴인의 무공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려 팔십구인의 고수들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황하변의 십리평(十里坪)이란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무림맹 산하의 정예고수 팔십구인이 치밀한 계획 끝에 그를 포위하고 합격했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다.
아비규환...... 생지옥...... 목불인견......!
결과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팔십구인의 고수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싸움의 결과를 알게 된 것도 싸움이 끝난 한참 이후였다. 어떤 형태의 싸움이 벌어졌는지는 아는 자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괴인이 검이나 도 따위의 병장기는 사용하지 않고 일종의 마공(魔功)을 사용했다는 것을 시신의 상태를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죽은 자들의 시신에는 선명한 장인(掌印)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장인은 기이하게도 흰색이었다.
백색장인(白色掌印)의 공포!
이후로 무림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 백색마인(白色魔人)을 만나지 말라! 그를 만나느니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나는 것이 낫다.
그 노래 아닌 노래는 바로 정체불명의 인간도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름도, 내력도 알 수 없는 괴인. 그는 이제 백색마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중원천하는 혹한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겨울의 추위보다 더욱 추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특히 강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더욱 추운 겨울이었다.
더더욱 무림맹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올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바로 백색마인 때문이었다.
③
홍무(洪武) 14년 12월 7일.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한파는 성도 장안(長安)을 온통 쓸쓸한 풍경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파가 닥치면 사람들은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안 시내는 갑자기 인파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장안 전체가 흥청거리는 것이었다.
장안 북쪽에는 한 채의 보(堡)가 있다.
- 당가보(唐家堡).
강호인치고 그 이름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당가보는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무가였다.
사천당가는 독자적으로 명문의 서열에 든 지 오래였으며 당금의 무림맹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로 그 당가보로 향하는 길이 온통 메워지고 있다시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가보에 혼례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혼례를 치르는 사람은 당가보의 차기 가주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보다는 강호사공자(江湖四公子)의 일원이 혼례를 치른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했다.
천수관음(千手觀音) 당수문.
바로 그가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의 혼인 상대자 또한 쟁쟁한 명문의 규수였다.
역시 무림맹의 일원인 화산파(華山派)의 여제자 비선옥봉(飛仙玉鳳) 여옥환(呂玉環)이 그의 신부감이었다.
양가의 가문이 쟁쟁한 터라 혼례식에 참여하려는 하객들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더구나 강호에 적을 두고 있는 자라면 이번 기회에 무림고인들의 얼굴을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사천으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이같이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가보가 아무리 전통있는 명가라고는 하지만 이 많은 하객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당가보에서는 장안 시내의 객점을 거의 전세내어 하객들을 이곳에 묵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와글와글.......
가는 곳마다 화제는 이번 혼례였으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두 사람의 혼인이 천생연분이니, 미래 무림의 주역이 될 사람들의 가화니 하며 축배를 들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는 화산 여제자 비선옥봉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여옥환.
그녀는 명가의 여고수였다. 무공 또한 쟁쟁할 뿐더러 미모의 수려함이 강호삼미(江湖三美)에 속한다고 했다.
그녀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당수문이 결합하게 되면 그들의 후세는 더욱 뛰어난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말들을 나누며.......
등용객점(騰龍客店).
두 평 남짓한 방 안에는 사인이 마주 앉아 있다. 바로 장천림 일행이었다.
그들은 간신히 이 방을 빌었다. 시내의 객점은 거의가 초만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비좁은 방도 평소의 다섯 배나 되는 많은 은자를 주고서야 간신히 빌릴 수 있었다. 조천백이 입을 열었다.
"혼례를 올리는 곳치고는 지나치게 경계가 심해. 아무래도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요즘같은 태평성대에 사천당가쯤 되는 곳에서 이렇게 초긴장이라니......."
그렇다.
비록 외부적으로는 들뜬 분위기였으나 실제 당가보는 초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가보의 식솔들은 물론 많은 고수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하객들은 대부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객점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석회림이 심각하게 반문했다.
"혹시 상관중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 아닐까?"
조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거야."
그 말에는 장하영도 동감이었다.
"내가 당시 잘 마무리 해놓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없다."
이때 장천림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아보기는 했나?"
조천백은 싱긋 웃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탁자에 펼치고 보니 그것은 지도였다.
"간신히 지도를 그렸지. 하지만 곳곳에 매복이 심해서 자세하지는 못해."
석회림은 못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말을 장하영이 받았다.
"어쨌든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거사일은 삼일 안에 잡아야 한다."
장하영. 그는 전술과 병술의 전문가였다.
그는 옛 친구들과 합류한 후 적극적으로 강호사공자를 척살하는 일에 동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척살하는 계획은 그가 맡아 수립하는 입장이 되었다.
장천림이 물었다.
"당수문에 대한 사항은?"
"여기 있다."
조천백이 또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
"당수문의 특기인 천수신전(千手神箭)에 대한 것을 조사해 내지 못했어. 그것은 워낙 그의 극비절기인지라...... 무엇보다도 그의 천수신전에 당한 사람 중 살아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 더욱 난점이야. 그러니 그에게 당한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
조천백의 말은 계속되었다.
"짐작컨데 천수신전은 어떤 자세, 어떤 각도에서도 발사할 수 있는 것으로 회선전(廻旋箭)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천수신전.
그것은 천수관음이라는 별호가 있게 한 당수문의 최고 성명절학이었다.
사실 당가의 무공은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당가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무공보다는 그 가문 전래의 암기술에 있었다.
암기라면 석회림이 전문가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건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신체 다섯 부위에 장착되어 있는 일종의 소전(小箭)일 것이라고 생각해. 즉 팔꿈치, 무릎에 각각 두 개씩, 나머지 하나는 입 속에 있을 거야."
"입 속?"
장천림을 위시하여 모두 놀랐다. 입 속에도 활을 장착할 수 있단 말인가?
석회림은 담담히 말했다.
"너희들은 잘 모를 거야. 하지만 암기란 항상 상상을 벗어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지. 더욱이 당가 정도 되면 그 정밀성은 가히 최고에 달할 거야."
"으음."
장하영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장천림을 바라보았다.
"천림, 자신 있나?"
그의 질문은 장천림이 염려가 된다는 뜻이었다. 장천림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에게 접근하기만 하면 자신이 있네."
"접근이라......."
이때 다시 석회림이 말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그의 신전이 전문적으로 호신기공을 파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맞으면 혈맥을 상할 뿐 아니라 독(毒)까지 발라져 있다고 생각해야 돼."
장천림은 싱긋 웃는다.
"그 정도는 두렵지 않네."
그는 불귀곡에서 많은 무공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영약을 복용하여 웬만한 기독은 영향을 받지 않는 몸이었다.
장하영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촉박해. 만일 열흘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그 말에 장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그럴 시간이 없어. 놈이 혼례를 올리기 전에 해치워야 해. 놈같은 철면피가 정상적인 혼인을 하게 할 수는 없다."
장천림의 어조는 굳어 있었다.
"......."
"놈에게 제대로 복수를 하자면 놈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모두 느끼게 해야 돼. 생각같아서는 놈의 정혼녀를......."
장천림은 말 끝을 흐렸다. 그러나 방 안의 삼인은 더이상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독 장하영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천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장천림은 말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소.......
두 번째야.
네 원수의 곁에 와 있다.
④
7월 10일.
혼례식은 삼일 후인 7월 13일에 치루어질 예정이었다.
신부(新婦)는 그 이전에 당가보에 갈 수 없었다. 본래 혼례는 신부의 집에서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번만은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그것은 여옥환이 화산파 출신이라는데 사정이 있었다. 화산파는 도가(道家)의 수도장이었으므로 그곳에서 혼례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혼례는 당가보에서 치르기로 합의된 것이었다.
여옥환은 혼례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당가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혼례 당일이 되어야 당가보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장안에서 가장 큰 객점인 영원루(永遠樓)라는 곳이었다.
이 영원루는 화산파에서 온 하객들이 통째로 전세내어 쓰고 있었다.
하루하루 날짜가 흐를 수록 축제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여옥환이야말로 안절부절이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매일매일 화장과 목욕을 하며 치장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비록 강호의 여인이라고 하지만 이런 일에는 당연히 여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혼야가 되기 전까지 신랑을 볼 수 없는 것이 중원의 풍습이었다.
그녀는 혼례 때까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자 더욱 상대방인 당수문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홀로 거울을 들여다 보며 당수문과 처음 만난 그날을 상기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였던가......?
당수문은 강호사공자의 일원인 화산파의 천인검객을 만나기 위해 화산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동문 사형인 북리웅풍에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복리웅풍은 문을 닫아 걸고 이 년 전부터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그 일로 심리적인 타격을 심하게 받은 양 완전히 도사(道士)처럼 변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방문해도 만나주지 않았다.
당수문이 화산을 방문한 것도 그를 설득하여 무림맹으로 입맹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복리웅풍은 그를 만나는 것마저도 거절했다. 여옥환은 그 문제를 두고 당수문과 몇 차례 상의하다가 그만.......
'아아! 그날 밤 달은 무척 밝았어.......'
동경 속에 비친 여옥환의 얼굴에는 은은한 도화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곤 했다. 두 사람은 한창 청춘이었다. 중천에 뜬 그날 밤의 달빛이 그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화산 후면의 폭포수 아래 바위가 있다. 그 바위 그늘에서 그들은 첫 입맞춤을 나누었을 뿐더러.......
그날 그만 넘어서는 아니되는 선(線)까지 넘고야 만 것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굳게 언약했다.
물론 그 둘의 혼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화산과 당가의 사돈 관계는 양파로 볼 때도 크게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사문의 존장들도 환영이었으며, 당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래서 혼인은 급진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가씨."
문득 밖에서 시비의 음성이 들렸다.
"응? 무슨 일이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밖에 당공자께서 와 계셔요."
"당공자님이......!"
그녀는 펄쩍 뛸 듯이 일어났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혼례 당일까지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곳까지 찾아 오다니......?
여옥환은 곧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후훗,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그녀는 얼른 거울을 보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어여삐 보이려는 것이 여인의 심정인가.
그녀는 머리를 다 매만지고도 다시 거울을 몇 번이고 본 뒤 말했다.
"어서 모셔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황삼을 입은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당가보의 차기 보주가 될 위인, 천수관음 당수문이었다.
"수문. 어떻게 여길......?"
짐짓 놀라워 하면서도 여옥환은 만면에 가득 웃음이었다. 그녀는 달려가 당수문의 목을 끌어 안았다. 당수문도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왔소."
"호호호호....... 이제 사흘 후면 당신의 아내가 될 터인데 그 사이를 못 참는단 말이에요?"
"후후! 그때는 그때고......."
당수문은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덥썩 움켜쥐었다.
"아이."
여옥환은 허리를 비틀었으나 싫지는 않은 듯 코먹은 소리를 내며 더욱 그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이미 갈 데까지 가본 남녀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편 문 밖. 그곳은 객점의 별원 후원이었다.
두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당가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바로 당수문을 수행하고 온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시비 두 명이 각각 소반을 받쳐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나누더니 시비들에게 다가갔다.
"하하! 화산의 아가씨들은 전부가 아름답구려."
"후후! 아가씨들도 결국 곧 당가의 사람이 될 것이 아니오? 그 전에 우리 친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 않소?"
시비들은 두 손으로 주안상을 받쳐들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도 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춘은 통하는 데가 있는 법인지.......
시비들도 두 청년이 싫지 않았다. 당가라면 무림의 명문인데다가 청년들의 얼굴도 준수하였던 것이었다. 그녀들은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두 청년은 다가가더니 슬쩍 시비들의 뒤로 돌아가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졌다.
"어멋......."
"무슨 짓을......."
그러나 청년들은 대담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시비들이 손에 소반을 들고 있어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한 듯 서슴없이 손을 움직였다.
각자 시비들의 뒤쪽에 바짝 붙어 엉덩이를 더듬고, 한 손으로는 앞가슴을 주무르는 것이 아닌가?
"아, 아니......!"
"어머멋!"
시비들은 한창 물이 오를 나이였다. 그녀들은 가뜩이나 혼례다 뭐다 하여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준수한 청년들이 접근하자 애당초부터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자 그만 마음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공범의식이랄까?
두 시비는 똑같은 처지를 당하자 은연중 그 현실을 즐기려는 마음이 들고 있었다. 더구나 시비들은 소반을 든 핑계로 청년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변명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두 시비는 청년들에 의해 으슥한 회랑 벽 쪽으로 밀려갔다.
"하하....... 우리끼리 재미를 보는 것도 좋지 않소?"
"후후!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람들이 아니오?"
두 청년은 이렇게 지껄이면서 시비들을 회랑 구석으로 밀고 들어갔다. 마침 이곳은 객점에서도 가장 후미진 별원이었으므로 외인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외부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한은 말이다.
청년들은 기술은 훌륭(?)했다.
그들에게 있어 순진한 시비들을 녹이는 일이야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회랑 구석으로 시비들을 몰아 붙인 그들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시비들의 옷을 풀어 헤치고 아직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는 처녀의 가슴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거기까지 가면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시비들은 그만 온 몸이 녹아 내리는 듯한 쾌감을 느끼며 청년들의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주안상을 들이는 일조차 까맣게 잊은 채.......
"수문......?"
여옥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수문이 옷을 벗는 것을 보며 그녀는 깜짝 놀란 것이다.
"얼마 후면 혼인인데......."
그러나 그녀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수문이 옷자락을 내던진 후 곧장 그녀의 몸을 짓눌러 왔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아무리 정숙한 척하여도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 데야 어쩔 수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겉으로는 나무라는 척 했으나 그가 몰래 당가를 빠져나와 이렇게 자신을 찾아준 것을 지극히 기뻐하고 있었다.
당수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로 침상에 쓰러진 여옥환의 옷을 벗겼다. 이윽고 그녀의 옷이 떨어져 나가고 백옥같은 나신이 드러났다.
알맞게 발달된 육체였다. 이미 남자를 겪은 여체였기에 여자로서의 성징은 뚜렷이 발달해 있었다. 두 개의 유방은 만지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으며, 피부는 묻어날 듯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기름진 아랫배에 은밀히 형성된 삼림은 짙게 우거져 있었다.
당수문은 왠지 서두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희도 생략하고 막바로 입성했다.
"흑......."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바람에 여옥환은 활을 맞은 사슴인 양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그 눈에는 한 가닥 무서운 의혹이 맺혔다.
"당신은......?"
그러나 곧 이어진 당수문의 격렬한 율동에 그녀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녀의 육체가 침상에 반쯤 밖으로 걸쳐진 채 무섭게 흔들렸다.
그녀는 손을 쳐들어 당수문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수문의 공략은 철저히 그녀의 육체를 뒤집어 엎어 버린 것이었다. 여옥환은 입을 딱 벌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했으나 그것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채 그만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아흑......."
당수문은 한 손으로는 유방을 쥐어짜듯 비틀고 있었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움켜쥐듯 잡고 있었다.
그의 허리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마치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속도는 여옥환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섭도록 강한 쾌락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아악악......!"
여옥환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처음 폭포수 아래에서 당수문과 정사를 벌일 때도 이런 충격은 없었다.
그때는 처녀였으므로 달콤한 느낌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마치 죽음같은 절망적인 쾌락이 온 몸을 휩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수문의 무서운 힘에 의해 반쯤 침상 밖으로 삐어져 나갔던 상체가 쳐들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반월처럼 휘며 당수문의 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여나 그가 움직임을 중지할까 두려운 듯 그녀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허리를 아래 위로 꺾으며 당수문의 움직임에 맞추어 전신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당수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자세를 바꾸더니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았다. 그는 다리를 잡아 벌린 후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닿게 했다. 그로 인해 여옥환은 거꾸로 된 기이한 자세가 되었다.
그런 상태로 당수문은 또 다시 입성했다.
"악!"
머리가 바닥에 밀려 부딪쳤으나 여옥환은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고통보다는 악마적인 희열이 온 몸을 휘감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세찬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그러나 육체적인 욕망과 이성은 별개의 논리를 가지고 그녀를 어두운 타락과 함정의 구렁텅이를 향해 몰아 넣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의 눈은 크게 부릅떠졌다.
소반은 땅에 뒹굴어져 있다.
두 명의 시비는 머리칼이 온통 헝클어지고 치마는 물론 옷차림도 엉망이었다. 그녀들은 난생 처음으로 이같은 경우를 당했다.
회랑 구석에서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정사는 시비들의 인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 것이다. 일이 끝난 후 그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명의 당가 청년들이 그녀들을 한 순간에 탕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옷을 추스릴 때였다.
"부탁이 있소. 아가씨들."
"흐흐흑! 당신은 누구죠?"
여옥환은 오열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바탕 격렬한 정사가 끝난 후 아직도 전라의 모습이었다. 침상 위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그녀는 당수문을 보며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당수문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그토록 불꽃을 내며 이글거리던 열기는 이미 싸늘히 식어 버리고 없었다. 그저 무심안(無心眼)일 뿐이었다. 하나의 물건을 보듯 그는 여옥환의 벗은 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옥환은 그의 눈길을 받자 비스듬히 벌려진 다리를 약간 오므리며 입술을 떨었다.
"난 알아요...... 당신이 그가 아니라는 것을...... 흑! 그런데 왜?"
당수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알면서도 날 받아들인 이유는?"
여옥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그건...... 아아!"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신비한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뚜렷이 손자국이 남아 있는 유방이 노출되었다.
당수문은 차갑게 말했다.
"그 자와 나를 비교하면 어떻소?"
그 말에 여옥환의 몸이 굳어졌다. 너무나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리 여옥환의 얼굴이 두껍다고 해도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못되었다.
"당신...... 어쩌면 그런 질문을......!"
여옥환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원망스럽게 뇌까렸다. 당수문은 옷을 다 입은 후 돌아서며 말하고 있었다.
"오늘 일은 그대의 입으로 누구에게든 말하지 않을 것으로 믿소. 그것이 본인을 위하는 일일 테니까."
"......!"
그렇다. 여옥환은 그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그가 당수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도 마력적인 쾌감이 그녀의 이성을 초월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또한 그 누구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이때 당수문은 옷을 다 입고 미련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여옥환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자...... 잠깐! 이름 만이라도......."
당수문, 아니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서지도 않은 채 물었다.
"무엇 때문에?"
여옥환은 입술을 악물었다. 너무도 수치스런 일이었으나 지금 그녀의 마음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라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잖아!
마침내 그녀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요?"
사나이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 나왔다.
"훗! 가끔 외도라도 하겠다는 건가?"
일이 이쯤되면 뻔뻔해지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여옥환은 몸을 일으켰다. 사지를 움직이자 전신 곳곳에 아직도 노곤하게 남아있는 쾌락의 여운이 그녀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했다.
그녀는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으나 몇 걸음 걷는 동안 둔부를 묘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사나이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이미 그녀는 변해 있었다.
"호호......! 당신은 나를 타락한 여인으로 만들었잖아요. 모든 게 당신 책임이에요. 흐응, 설마 날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요?"
여옥환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녀는 사나이의 듬직한 등에 자신의 유방을 밀착시킨 채 뺨을 비벼댔다. 그러자 다시 전신이 뒤틀리는 듯한 쾌감이 되살아 났다.
'이런 느낌 처음이었어! 절대 이 사람을...... 놓지 않을 테야.'
한편 사나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수문. 들었느냐? 네가 혼인하려는 여인이 지금 한 말을? 네가 이 자리에서 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그는 서서히 돌아섰다. 그러자 여옥환이 그의 목을 휘어감으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합쳐졌다. 여옥환은 사나이의 입술을 무섭게 핥으며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정녕 무서운 것이 여인의 변심(變心)이련가? 이제 화산의 명문 여제자 여옥환은 희대의 요녀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사나이의 손이 여인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옥환은 콧소리를 내며 한 쪽 다리를 들어 사나이의 허리를 뱀처럼 휘어 감았다. 사나이의 손이 둔부를 강하게 움켜 잡자 그녀는 아! 하고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사나이의 눈 아래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유방이 흔들렸다. 뒤로 젖혀진 여옥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또다시 열풍을 기대하는 듯이 그녀의 눈이 가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사나이이의 손이 둔부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앞으로 미끌어 지더니 유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유방이 사나이의 손 안에서 뭉개졌다. 그러자 여옥환은 마력적인 쾌감에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사나이의 손은 더욱 강하게 유방을 움켜쥐었다. 여인은 눈꼬리를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나이의 손이 떨어지더니 손가락 하나가 빳빳이 뻗으며 유방 한가운데의 옥당혈(玉堂穴)을 찔렀다.
"악!"
여옥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어 그녀의 몸은 뼈가 없는 듯 스르르 아래로 무너졌다.
"......?"
여옥환은 바닥에 널브러지며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사나이의 매정한 음성이 떨어졌다.
"내 이름은 장천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