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오낙률의 시 세계 생명체 순환과 자문(自問)의 시학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삶과 생명체의 순환 현대시의 발상 동기는 그 시인의 다양한 체험을 근간(根幹)로 해서 획득한 정서에서 발현된 상상력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지향하려는 의식의 분사(噴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시인이 소유한 내밀(內密)한 인생 여정이 현실 생활(real life)과 결합하면서 생성하는 다채로운 이미지가 새로운 주제를 형상화하는 경향으로 발전하는 작품을 많이 대할 수가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사유(思惟)의 원류는 한 시인의 의식(consciousness)의 흐름에 따라서 많은 변화를 가겨오는 현상을 목도(目睹)하게 되는데 이는 그 시인에게 내재된 체험이 현실적인 문명 세계와 마주치면서 부상(浮上)하는 인식이 때로는 성찰로, 어떤 곳에서는 갈등으로 변전(變轉)하는 상상의 현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오낙률 시인이 상재하는 세 번째 시집『노예』를 일별하면서 이와 같은 상상력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잠재(潛在)한 의식의 범주(範疇)가 그의 숙성된 체험이 여과(濾過)하면서 진정한 그의 진실로 승화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낙률 시인은 대체로 일반 사물에서도 지적 혜안(慧眼)으로 자연 섭리와 동행하는 인간의 심성(心性)에 관해서 많은 상관성을 구명(究明)하는 일종의 자연과 인간의 상호 보완적인 생존법을 메시지로 전하는 시법(詩法)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는 우선 현실적인 삶과 생명체의 순환에 대한 의문이 그의 정서에서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작품「어느 시인의 대화」에서 그가 의도(意圖)한 진솔한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오시인!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시인이시여! 마음이란 대상을 비추는 그릇속의 맑은 물과 같습니다. 그 마음이란 것을 아름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에 비칠 대상을 아름답게 하면 마음에 아름다운 영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이렇게 의문형으로 문장을 구성하면서 ‘마음’(mind)의 행방이나 지향점을 탐색하는 지적인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소유한 어떤 심리적인 문제의 해결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심성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시적인 진실의 정립을 도모하려는 철학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마음’을 ‘대상을 비추는 / 그릇 속의 맑은 물’이라는 해법을 제시하고 그 ‘대상을 아름답게 하면 / 마음에 아름다운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결론을 적시하여 ‘마음’(spirit)의 경지가 숭고한 정신의 세계(혹은 영혼)와 동일한 정서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묻습니다. 인간에게서 신(神)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의 신은 모두다 약한 자들의 희망일 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한다. ‘신(神)이란’ 존재는 ‘약한 자의 희망일 뿐’이라는 해답이다. 일찍이 레바논의 시인인자 화가인 K. 지브란이 말하기를 ‘생명, 사랑, 아름다움은 자유롭고 테두리가 없는 하나의 자아(自我)속의 세 형제, 즉 사랑과 사랑이 낳은 모든 것과 반항과 반항이 낳은 모든 것과 자유와 자유가 낳은 모든 것--이 세 가지가 신의 천성이었습니다. 신은 유한한 의식세계의 무한한 마음이었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신과 공존하는 경지, 그것이 바로 ‘약한 자의 희망’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삶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삶이란 물의 순환활동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생명으로 존재할 때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꿈을 꾸게 됩니다. 그렇다면 삶다운 삶이란 무엇입니까?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기를 좋아하고 가장 낮은 곳에 자리 해야만 가장 높은 곳까지 가장 큰 순환의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는 다시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있다. 그는 간단하게 ‘물의 순환’이라는 즉답으로 응수(應手)한다. ‘삶=물의 순환’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물이 생명으로 존재할 때만 / 희로애락의 꿈을 꾸’는 생명의 순환이다. 이러한 ‘생명’은 다시 이 ‘물’의 섭리에 따라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또 ‘가장 높은 곳까지 / 가장 큰 순환의 원을 / 그릴 수 있’다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물’의 이미지가 ‘낮은 곳’이라는 통념적인 어조(語調)보다는 노자(老子)가 언급한 바와 같이 ‘낮은 위치’는 인간의 행위와 자연 세계는 공통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성인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라는 진리를 ‘순환의 원을 / 그릴 수 있’음으로 묵시(黙示)적으로 현현하고 있다. 그러면 오시인, 인연(因緣)이란 말 중에서 삼천 겁의 인연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의 생명체에서 흩어졌던 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또다시 생명체를 이루는 데는 그만큼의 순환을 반복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다시 ‘인연’에 관해서 물어본다. 그것도 ‘삼천 겁의 인연’의 ‘의미’는 ‘흩어졌던 물들이 / 한 자리에 모여 / 또다시 생명체를 이루는’ ‘순환’의 ‘반복’으로 적시하고 물과 생명체의 상관성에서 모색하는 ‘인연’이 생명체의 순환이라는 스스로의 해석을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독일의 문호 H. 헤세의 말을 들어 보자. ‘깊은 물속에 잠기듯이 감정의 밑바닥까지, 인연이 쉬고 있는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인연을 아는 것은 사고(思考)요, 사고를 통하여서만 감각은 인식이 되어 소멸되지 않을뿐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 되어 그 속에 있는 것이 빛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그의 글「싯다르타」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이 인연, 특히 ‘삼천 겁의 인연’은 불교적인 인연설에서 말하는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에 관한 인연이 복합적으로 연계(連繫)되는 생명체의 복원이 아닌가 하는 그의 가치관 재생이나 상상력의 종합적인 정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지옥(地獄)은 또 무엇입니까? 순환활동을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땅 속에 갇힌 물들의 거처를 말합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지하에 갇힌 그들을 구출하여 순환 시켜야하는 삶의 목적을 지녔습니다. 또한 오낙률 시인은 ‘지옥’에 대한 의문도 증폭되고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땅 속에 갇힌 / 물들의 거처’가 ‘지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 순환활동이 중지된 물이 곧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 존재의 생명체는 ‘지하에 갇힌 그들을 구출하여 / 순환시켜야 하는 삶의 목적’이 있다고 화자는 어조를 높이고 있다. 영국의 극작가 B. 쇼는 그의 글 「인간과 초인」에서 말했듯이 지옥은 명예, 의무, 정의 그 밖에 무서운 덕의 고향인 것이다. 지상의 나쁜 일은 모두 이러한 이름 아래 범해진다는 것과 같이 침체한 인간들이 갈구(渴求)하는 ‘삶의 목적’은 ‘지하에 갇힌 그들을’ 하루 빨리 자연 섭리에 의한 순환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땅 위의 갖가지 생명들은 맨 처음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양지바르고 높다란 곳에 물 한 양동이를 올려놓은 뒤 그 물이 햇볕에 다 졸아들 때쯤 그 속을 들여다보십시오. 흙이 생겨있고 갖가지 낮선 생명들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도 그는 이러한 마음과 신, 그리고 삶, 인연을 통해서 생명체의 순환을 유로(流路)하고 있었으나 이 ‘생명’에 대한 선문답(禪問答)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물’과 ‘햇볕’과 ‘흙’에서 ‘갖가지 낮선 생명들이 / 그곳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있다. 그렇다 오낙률 시인의 시적 원류에는 이러한 생명의 고귀한 감응(感應)에서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탐구하게 되는 진실이 바로 ‘갖가지 생명들은 / 맨 처음 어떻게 생겨났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명징(明澄)하게 적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 오 시인께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가장 바람직한 장례법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한평생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연명합니다. 사람의 육체도 목숨이 다할 때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평생 /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 연명’하는 인간들에게 부여된 ‘사람의 육체도 목숨이 다할 때’ 떠나는 ‘장례법’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찍이 장자(莊子)가 「양생주편(養生主篇)」에서 ‘개개의 육체는 죽으면 없어질른지 몰라도 인류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섶을 인간의 육체에 비유한다면 그것을 태우는 불은 생명이다. 섶이 타 없어지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이 섶에서 저 섶으로 이어져서 영원히 타오르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생명의 영원성은 바로 ‘또 다른 생명을 위해 / 제공해야’ 하는 ‘장례법’을 메시지로 적시하고 있다. 오낙률 시인은 이렇게 삶과 영혼 등에 관해서 남다를 집착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진지하게 탐색하는 존재의 문제가 바로 삶과 생명의 순환가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몸뚱이를 위해 / 몸뚱이를 내다파는 / 삶들이 / 몸뚱이를 위해 / 영혼을 내다파는 삶들보다 / 더 슬퍼야하는 까닭은 무엇이냐(「인입전선(引(電線)」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영혼을 내다파는 슬픔의 존재와 그 생명성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소주잔 기울이며 / 한풀이 하는 / 무녀 같은 삶이 있다-중략-사월에 산다고 / 다 봄 맞은 놈이면 / 세상에 / 봄 아니 사는 삶 / 어디 있겠는가.(「사월」중에서)’와 같이 ‘한풀이 하는 / 무녀 같은 삶’도 결론적으로는 우리 인간들의 애환이 오낙률 시인의 심저(心底)에서 용암(鎔巖)으로 흐르는 강렬한 생명성의 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계절에 관한 서정적 진실 오낙률 시인에게서는 계절의 순환도 역시 생명체 순환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자연 섭리에 순응하고 있다. 우리들이 감응하는 계절적인 이미지는 다채로운 양태(樣態)로 채색(彩色)되어 작품 속에 포괄하는데 이는 사계(四季)의 변화가 곧 우리들의 심경(心境)뿐만 아니라, 실생활까지도 많은 변화가 동반하기 때문이다. 임도 안 오고 봄 떠나 가내 만장처럼 강물에 꽃잎 띄우며 강가에 앉아 울지도 못하는 새야 네 울면 가던 저 봄 뒤돌아볼까 어디 철늦게 피는 꽃 있어 그 아래 저 봄 쉬어가도 좋으련만. --「봄 떠나 가네」전문 우선 이 ‘봄’에서 감응할 수 있는 이미지는 ‘쉬어가도 좋으련만’이란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성에서 탐색하는 생명체의 순환이다. ‘만장’(그는 ‘장레식 때 상여 뒤에 따라가는 깃발’이라고 주(註)를 붙였음)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생몰(生沒)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 만장(輓章)에 새겨진 슬픔이나 아쉬움 등이 전제된 생명성의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옛말에 ‘생(生)과 사(死)에 관한 문제의 해답을, 자기 이전에 살고 있던 지혜 높은 사람들에게 얻는다 해도 그 모든 해답의 선택과 인지(認知)는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이는 생과 사의 문제는 결국 순환에 의한 순응의 섭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견이다. 별빛은 별빛은 언덕에 앉아 봄에는 수도 없이 꽃이 필적에 그때도 그립더니 아직 그리워 가을에 들국화는 피었다지요. 무서리 내릴 때면 너무 그리워 저리도 샛노랗게 피었다지요. --「들국화」전문 다시 오낙률 시인은 계절 봄과 가을을 통해서 감응하는 그리움의 세계를 동경(憧憬)하고 있다. ‘들국화’라는 사물이 그의 심적인 원천(源泉)에서 형상화하는 것은 그가 이미 내면에서 천착(穿鑿)한 그리움으로 분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네가 울면 가던 저 봄 / 뒤돌아볼까’라거나 ‘무서리 내릴 때면 / 너무 그리워 / 저리도 샛노랗게 / 피었다지요.’와 같이 의문형 어법으로 그가 탐구하는 영역에 대한 해법을 찾고 있다. 이처럼 그가 그리움에 대한 집착은 연작시 「그리움」에서 적나라(赤裸裸)하게 현현되고 있는데 ‘이다지 / 누가 그리운 / 누구는 또 /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1」중에서)’거나 ‘고향은 / 생각할 때 / 그립다지만 / 봄임은 / 절로 그리워 // 그 달이 / 저 달 될 줄 / 몰랐어요. // 그 봄이 / 이 봄 될 줄 / 몰랐어요.(「그리움. 2」전문)’ 또는 ‘간 봄에 / 붉은 것은 / 꽃이었고요, / 가을에 붉었으면 / 단풍인데요, // 그도 저도 때 아닌 / 한여름 밤에 / 빨갛게 웃고 있는 / 얼굴 하나는, // 잊어 드리려 / 잊어 드리려 / 스무 번도 더 먹은 / 마음인데요..(「그리움. 3」전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적인 이미지의 투영에서 다채로운 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3. 기원의 의지와 화해 오낙률 시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주제의 특징은 기원이나 갈구(渴求)의 의지로 만유(萬有)의 사물들과 화해하는 시법을 이해할 수 있는데 우선 다음과 같은 ‘까닭’을 알 수 있다. 어디 붉은 색깔만 보아도 쓸어안고 싶은 것은 보내고 남은 자들의 비통한 슬픔이요 내 눈에 붉은 것이 다 사랑이 아니었던 것은 그들에게 나를 못다 드린 후회스런 까닭입니다. --「후회」중에서 그는 ‘가을이면 / 저 혼자 안으로 뜨겁다가 / 하얗게 재로 변’하는 ‘숯불이 있’지만, ‘남아 있는 피의 온도로 / 혹독한 겨울을 감당해야하는 / 까닭’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을 ‘쓸어안고 싶은’ 갈구의 의지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그가 자성(自性)으로 ‘후회’라는 어조로 마무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원의 선율은 다음 작품「올 가을엔」전문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계절 감각에서 추출한 어조 곧 ‘.......싶다’라는 보조형용사가 내포하는 어휘가 바로 그가 간절하게 소망하는 기원의 절정이다. 올 가을엔 예쁜 독사진 하나 가지고 싶다 빛바랜 미소하나 힘없이 나부끼는 그곳에 빨갛게 단풍들어도 떠나지 않을 잎 새 하나 새로이 매달고 싶다. 그는 이밖에도 ‘잠간 짬내어 / 다시 오고 싶은 이곳(「전통문화 체험관」중에서)’이나 ‘풍년을 기원하듯 / 제례도 있고(「장례식」중에서)’ 등의 어조와 같이 그가 ‘기원’이라는 어휘를 직접 사용해서 그가 창출하려는 기원의 의도를 표출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낙률 시인이 그의 정서에서 그의 시적 진실로 창조하려는 심연(深淵)에는 앞의 작품「어느 시인의 대화」에서와 같이 의문형 화법으로 시적 상황을 설정하거나 도입하여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는 그의 독특한 시법은 어쩌면 그가 구현하려는 시적 진실을 해체하고 핵심을 명징하게 구명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그대는 / 칠월에 오시어 / 조용히 연꽃으로 웃는가.(「연꽃」중에서)’, ‘자네는 막걸리 / 나는 소주 / 그렇게 / 마시면 될 일 아니냐.(「농부」중에서)’, ‘사월에 산다고 / 다 봄 맞은 놈이면 / 세상에 / 봄 아니 사는 삶 / 어디 있겠는가. (「사원」중에서)’ 그리고 ‘혼자 된 슬픔에 / 우는 여인과 / 혼자서 / 소주잔 기울이는 / 남자와의 차이를 / 그대는 / 골몰히 생각하느냐.(「노예」중에서)’ 등과 같이 많은 작품에서 의문형으로 어조를 조정하는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오낙률 시인의 시집 『노예』 읽기를 마무리한다. 그가 천착하는 생명성은 우리 시인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면서 탐색하는 시적 명제(命題)이다. 이 명제가 시간성과 병행하면서 분출한 시인의 체험과 깊은 교감을 통해서 진실로 현현될 때 우리들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정화(淨化-catharsis)의 경지를 음미(吟味)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어조대로 ‘신경통처럼 도지는 / 봄의 고문을 견디는 / 관능의 슬픈 노예’는 언제나 ‘소주잔’을 마주하는 관능에 젖어 있다. 이것이 ‘소주잔 기울이며 / 한풀이 하는 / 무녀 같은 삶’인지도 모른다. 오낙률 시인의 심저를 관류(灌流)하는 시적 원천(源泉)은 이처럼 삶과의 융합을 위한 절규의 진실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일찍이 영국의 시인 T. 엘리엇의 말대로 시는 ‘무엇이 진실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들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명언에 동의하게 한다. 이는 오낙률 시인의 시정신이나 정서의 원류에는 실제 생활과도 괴리(乖離)된 현실적인 그의 ‘관능’이 어떤 사물이나 관념과 교감하면서 우선 회의(懷疑)와 의문을 제기하면서 해법을 탐색하는 관습적인 어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은 창조의 산모(産母)이며 발전의 도약대라는 어느 평자의 말이 실감나게 한다. 여기에서 그의 자문의 시학이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된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을 위해서 그의 생명체는 더 진솔한 순환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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