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격랑의 역사를 증언하다
역사를 긴 물줄기로 보면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겠지만, 어느 지점을 지날 때는 크게 여울지기도 하고 가끔은 심하게 소용돌이치며 흘러간다. 이런 갑작스러운 격랑에 대해 역사가들은 냉철한 머리로 전후좌우를 살피며 그럴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분석하고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있었던 당사자들이나 이를 목격하고 전해들은 시인들의 경우는 보다 감성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살과 기름이 다 빠져버린 역사책을 읽는 것보다 비록 순간적인 상황이라도 얼음속에서 발견한 작은 살점과도 같은 이런 생생한 증언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진시황 암살기도 사건 (기원전 3세기)
진시황릉 병마용총(시안)
진(秦), 초(楚), 연(燕)을 비롯하여 7국이 할거하던 전국시대를 평정하여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통일을 이룬 직후에는 전쟁에 패한 많은 나라와 백성들의 원한이 깊어 수없는 암살기도 사건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특히 시인들의 붓끝에 자주 오른 2건의 암살기도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로 하자.
1) 형가(荊軻)에 의한 암살 기도
진시황에 패해 나라를 빼앗긴 연(燕)나라 태자 단(丹)은 수소문 끝에 장사 형가(荊軻)를 만나 암살계획을 세운다. 진시황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골육지책으로 번호기란 사람의 목과 진시황에게 받칠 땅의 지도에 칼을 숨겨 진시황에게 가까이 가는데는 성공했으나, 그를 안내한 진무양이 당황하고 떠는 바람에 발각되어
거사에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런 형가의 용맹에 대해 도연명(陶淵明, AD 365~427 東晉)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이 읊었지만, 도연명의 시는 너무 길고 사건 전말을 상세히 기술하다시피 하여 여기에서는 생략키로 한다. 대신 도연명 보다 후대인 당나라 초기 낙빈왕(駱賓王)이 지은 시가 짧으면서도 극적인 표현이 돋보이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그 역시 唐의 왕권을 가로 챈 측천무후(側天武后)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공모자들과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易水送別 / 駱賓王(650~684 唐)
역수에서 이별하고 보냄
此地別燕丹(차지별연단) 여기서 연나라 태자 단(丹)과 이별할 때
壯士髮衝冠(장사발충관) 장사 형가(荊軻)의 의기는 충천하였었지
昔時人已沒(석시인이몰) 옛날의 그 사람은 이미 갔건만
今日水猶寒(금일수유한) 지금의 역수 아직 그대로 차도다
태자 단(丹)과 역수에서 헤어지며 형가(荊軻)는 결의에 찬 얼굴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충성을 맹서하였다고 한다.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바람 쓸쓸하고 역수(易水)의 강물도 찬데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부환).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2) 장량(張良, 자는 子房)에 의한 암살 기도
장자방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최고 브레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의 수하로 들어가기 전에는 전국7국 중 하나인 한(韓)나라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韓)나라 5대에 걸쳐 승상을 지냈다고 한다. 진(秦)이 한을 멸하자 그는 자객들과 사귀면서 한의 회복을 도모해 박랑사(博浪沙:지금의 허난성(河南省) 原陽 남동쪽)에서 진시황제를 공격했으나 진시황이 탄 마차를 잘못 알아 실패했다. 전설에 따르면 하비(下邳,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雎寧縣 북쪽)에서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도인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얻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나라 이백(李白)이 지은 시를 소개한다.
經下邳圯橋懷張子房 / 李白(701~762 唐)
하비의 이교를 지나며 장자방을 회고한다
子房未虎嘯(자방미호소) 장자방이 아직 이름을 떨치기 전
破産不爲家(파산불위가) (진에 패한 후) 재산을 파하고 집안을 돌보지 않으며
滄海得壯士(창해득장사) 세상에서 널리 장사를 얻어서
椎秦博浪沙(추진박랑사)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내리쳐 공격하였네
報韓雖不成(보한수부성) 비록 한(韓)나라의 원한을 값지 못했지만
天地皆振動(천지개진동) 천지가 온통 진동했었다지
潛匿游下邳(잠익유하비) 그 후 (부근) 하비에 몰래 숨어 지냈으니
豈曰非智勇(기왈비지용) 어찌 지혜와 용기가 없다 하리오
(후략)
항우 패하고 유방 천하를 얻다(기원전 202년)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을 멸하고 자웅을 다투던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마지막 싸움이 된 해하(垓下)의 전투에서 항우의 군대가 곤경에 빠진다. 人口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역사의 현장,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四面楚歌)가 들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항우가 그의 애첩 우희(虞姬)에게 애닲은 심정을 시로 읊는다. 얼핏 힘만 세고 무식하기만 할 것 같은 항우에 대한 선입견이 무색해 지는 시이다.
垓下歌 / 項羽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계세)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었건만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부서)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烏騅馬)*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가 가지 않으니 어찌 할거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희야 우희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오추마는 항우의 애마
그날밤 군영을 탈출한 항우는 오강(烏江)에 당도하였다. 오강(烏江)만 건너면 당초 군사를 일으켰던 강동(江東)인데, 수많은 강동(江東)의 자제들을 죽여 놓고 혼자 살아 돌아가는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31세.
한편, 이 싸움에서 승리한 유방(劉邦)은 천하를 얻고 금의환향하며 부른 노래,
大風歌 / 劉邦
大風起兮雲飛揚(대풍기혜운비양) 바람 크게 불고 구름 일어 날도다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천하에 위풍을 떨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천지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아직 한시의 형식이 정립되기 전이라 5언시 7언시, 그리고 4줄짜리 절구(絶句)나 8줄짜리 율시(律詩) 등의 법칙도 없을 뿐더러 운(韻)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즉 3줄짜리 시에 글자 수도 첫줄에는 7자, 2, 3째 줄엔 8자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지니지 못했으며, 소하(蕭何)처럼 완벽하게 나라 살림을 꾸리지 못했고, 한신(韓信)처럼 전쟁에 능하지 못하지만 세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불세출의 영웅이 아닌가. 득의절정의 순간에 그가 그리려는 큰 그림이 언뜻 보여지는 호쾌한 시이다.
한(漢)나라 미녀 왕소군 흉노 왕의 첩으로 보내지다 (기원전 1세기)
역사서에는 비록 기록이 미미하지만 왕소군(王昭君)을 오랑캐 왕의 첩으로 보낸 일에 대해 唐나라의 유명하다는 시인들은 물론이고 宋, 明의 묵객들 조차 그녀의 슬픔에 대해 다투어 노래하고 있다. 이런 소소한 사건(?)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중국 4대 미인중의 하나를 오랑케에게 빼앗긴 것이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였기 때문은 아닐지. 왕소군이 오랑캐 땅에 있을 때를 읊은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은 작자인 동방규(東方虯, 唐 초기)는 몰라도 이 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서는 이백(李白)이 지은 '소군의 원통함(昭君怨)'을 붙여 본다.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왕소군 玉안장을 닦아내고
上馬啼紅頰 (상마제홍협) 말위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 흘러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녀지만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적벽대전(AD 208년)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吳, 魏, 楚 100만 대군이 맞붙어 단기간내에 결판을 낸 삼국시대 최대의 전쟁이 적벽대전이 아닐까. 중국사람들이 본래 과장이 심하고 삼국지연의도 정사가 아니지만 2000년도 전에 일어난 엄청난 전쟁임에는 틀림이 없다. 적벽대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판소리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하니 중국에서야 말해 무었하랴. 여기에서는 선비삼절 즉 詩, 書, 畵에 모두 능해 중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宋나라 소동파의 시를 소개한다.
赤壁懷古 / 蘇東坡(1036~1101 宋)
적벽대전을 회고하며
大江東去浪淘盡((대강동거랑도진) 양자강 물은 동으로 물결따라 사라져갔네
千古風流人物(천고풍류인물) 아득한 옛날을 풍미하던 인물들과 함께
故壘西邊人道是(고루서변인도시) 옛성 서쪽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三國周郞赤壁(삼국주랑적벽) 삼국시대 주유(周瑜)의 적벽대전 터라고
亂石穿空(란석천운) 험난한 바위 절벽 하늘을 뚫을 듯 솟아있고
驚濤拍岸(경도열안) 기슭을 부숴 버릴 듯한 파도
捲起千堆雪(권기천퇴설) 천 겹의 물보라로 휘감아 올린다 江山如畵(강산여화) 강산은 그림 같은데
一時多少豪傑(일시다소호걸) 그 시절 호걸은 몇몇이었던가!
遙想*公瑾當年(요상공근당년) 아득히 당시의 주유(周瑜)를 떠올리니
小喬初嫁了(소교초가료) 소교가 처음 시집왔을 때
雄姿英發(웅자영발) 영웅의 풍채 당당했었네
羽扇綸巾談笑間(우선윤건담소간) 하얀 깃 부채에 비단 두건 제갈량과 담소하는 사이
强虜灰飛煙滅(강로회발연멸) 강력한 조조의 군대는 연기처럼 사라졌네
(후략) *公瑾(공근)은 주유의 자
살수대첩(AD 612년)
612년 수양제는 113만 명에 달하는 수륙군을 직접 통솔하여 원정에 나선다. 그러나 바닷길로 평양성 부근에 도착한 수군 4만은 고구려군에게 궤멸되고, 요하(遼河)을 건너 요동성을 포위한 육군은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별동대 30만이 우회하여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게 된다. 수나라 군대는 군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을지문덕의 유도작전에 말려 평양성 30리 밖까지 접근했으나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희롱한 5언시(五言詩)를 보내고 거짓으로 영양왕 조회를 약속하자 수나라 군은 철수하기 시작한다. 고구려 군은 이들을 추격 수나라 군이 살수를 건널 때 맹공을 가하여 거의 궤멸시켰다. 그 결과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도착한 수나라 군의 수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수나라는 이런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613, 614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거듭된 원정으로 이반된 민심이 반란으로 이어져 멸망하고 만다. 을지문덕의 5언시,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신출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기묘한 셈은 지리를 통달하였군요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족지원운지) 족한 줄 알면 그만두기 바랍니다
안록산의 난(755~763, 唐)
흔히 성당(盛唐) 시대로 일컬어지는, 양귀비와 당 현종의 이야기가 저잣거리는 물론이고 동내 우물가 여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는 등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바로 그 시기에, 8년간의 안록산의 난은 온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이 난리통에 궁궐있는 장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등 다섯 성 등에도 참흑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이 난리에 연루되어 시선 이백은 귀양을 가게 되고 시성 두보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난한 고생을 하게 된다. 두보의 명시 '봄에 바란다(春望)' 를 감상해 보자.
春望 / 杜甫(712~770, 唐)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망가졌으나 산하는 남아있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네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시절이 서러워 꽃이 눈물을 뿌리게 하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이별 한스러워 새소리에 마음마저 놀란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전란이 석 달이나 계속되니
이 시속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온 통 나라가 다 망가져 남아 있는건 산과 강 뿐이고, 궁궐과 도성도 폐허가 되어 풀과 나무 만이 무성하다는 말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평시에는 사랑스럽던 꽃에도 눈물을 뿌리고 즐거워야할 새 소리에도 놀래는 시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난리는 계속되고 집에서는 소식도 없어 불안한데 흰머리는 더 짧아지고... 그럼 두보의 다른 시 한수 더 소개한다.
哀江頭 / 杜甫
곡강가에서 슬픔에 잠겨
少陵野老呑聲哭 (소릉야로탄성곡) 소릉의 늙은이가 소리죽여 울면서
春日潛行曲江曲 (춘일잠행곡강곡) 굽이도는 봄 강가를 남몰래 걷고 있다
江頭宮殿鎖千門 (강두궁전쇄천문) 강머리 궁전의 모든 문들 잠겼는데
細柳新蒲爲誰綠 (세류신포위수록) 실버들과 창포 새잎 누굴 위해 푸르런가
憶昔霓旌下南苑 (억석예정하남원) 옛날 천자의 찬란한 깃발 남원에 내리면
苑中萬物生顔色 (원중만물생안색) 정원 안의 만물도 생생히 빛나더니
昭陽殿裏第一人 (소양전리제일인) 소양전 으뜸가는 그 미인(양귀비)은
同輦隨君侍君側 (동련수군시군측) 수레를 함께 타고 임금을 모셨지
(중략)
明眸晧齒今何在 (명모호치금하재) 맑은 눈 하얀 이 그 미인 지금 어디 있나
血汚遊魂歸不得 (혈오유혼귀부득) 피에 얼룩져 떠도는 영혼 돌아오지 못하네
淸渭東流劒閣深 (청위동류검각심) 푸른 위수 동으로 흐르니 검각은 멀어져 가고
去住彼此無消息 (거주피차무소식) 가신 임금 양귀비 모두 소식 몰라라.
人生有情淚霑臆 (인생유정류점억) 인생은 유정하여 눈물이 가슴 적시는데
江草江花豈終極 (강초강화기종극) 강가의 피고 지는 풀과 꽃이야 어찌 이를 알리오
黃昏胡騎塵滿城 (황혼호기진만성) 날은 저물고 적 기병들의 먼지 성안에 자욱한데
欲往城南望城北 (욕왕성남망남북) 성남으로 가려다가 북쪽을 바라본다.
두보가 시의 성인(詩聖)이라 불리며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백성들과 나라를 사랑하는 투철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백이 하늘에서 귀양나온 신선(謫仙) 또는 시선(詩仙)이라 하여 뛰어난 재주를 흠모하지만 두보 만큼은 존경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구절은 그의 수많은 시 속에 녹아있으니... 그럼 한 수 더,
歸雁 / 杜甫
돌아가는 기러기
春來萬里客(춘래만리객) 봄이 와 있는데 만 리 밖의 나그네는
亂定幾年歸(난정기년귀) 난이 그쳐 어느 해에나 돌아갈까
腸斷江城雁(장단강성안) (성도) 강성의 기러기 남의 애를 끊으며
高高正北飛(고고정북비) 똑바로 높이 북쪽으로 날아가는구나
(두보가 53세(764년) 때 피난지인 성도에서 지음)
|
첫댓글 듕귁 탐사 전문가 권호성샘 모시고 언제 한번 건너가서 역사탐방 함 합시더 백아르도 마시고 산동,광동,북경요리도 먹고요!
글울 읽다보니
쬐금씩 알던 옛 역사들이 주마등처럼.......
아! 적벽대전......주유와 제갈 량이 손바닥에 불 火 자를 쓰고
제단에서 동남풍을 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