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과거시험대책은 어떠했을까
과거시험으로 가는 길
촛불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절의 강당에는 이따금 한숨소리만 들릴 뿐 모두들 조용한 침묵으로 자기 앞의 종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 날씨였지만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절의 강당은 바깥의 따가운 햇볕과는 다르게, 시원한 바람이 이따금 스며들었다.
그래도 수십 명이 앉아 있는데다가 무언가 모를 열기가 이들을 감싸고 있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덧 땀이 흘러내렸다. 밝은 대낮인데도 절의 강당 앞 쪽에는 붉은 빛의 커다란 양초를 켜놓았고, 방 안으로 파고드는 약한 바람에 촛불의 심지는 껌벅거리면서 점차 짧아져만 갔다. 그에 따라 가끔씩 머리를 들어 촛불이 타들어 가는 것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사람들의 표정도 굳어져 갔다.
어린 나이의 이규보도 강당 한 구석에 않아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심호흡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시구를 짜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 그리고는 하얀 종이 위에 붓이 흐르듯 날아갔다. 아직 초가 반쯤 남아 있을 때, 그는 일어나 자신의 답안을 제출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를 감싸 안을 때, 가슴 속에도 청량갈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 안에 남아있는 나머지 학생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내심 부러운 눈치였다. 이윽고 붉은 초가 다 타들어 가 촛농만이 남자. 시험관 중 한 사람이 일어나 조그만 종을 쳤다.
답안지들이 걷히고, 모두들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웅성거리면서 학생들이 강당에 다시 들어오자 시험관은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일어섰다. 일등은 역시 이규보였다. 모두들 예상했던 일이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관복과 모자를 쓴 이규보의 장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그러나 시끄럽고 떠들썩한 연회가 아니었다. 나이에 따라 차례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화답하는 그런 연회자리였다. 연회는 종일토록 계속되다가 저녁때에야 끝났다.
위의 장면은 흔히 각촉부시라고 불리는 일종의 문장 시험에서 이규보가 일등이 되었던 장면을 그려 본 것이다. 이규보가 살았던 고려 중기에는 사립학교에서 하고라고 하는 일종의 과거시험대비 여름수련회를 산 속에 있는 절에서 가졌다. 이 때 치러진 각촉부시란 시험은 촛불이 다 타기 전에 글어 지어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급히 짓는다고 해서 급작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형식에 맞추어 빠르게 문장 짓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관료를 꿈꾸는 이규보의 과거시험 준비
이규보(1168- 1241)는 무인정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나 주로 최씨 정권기에 활약한 대표적 문신 관료였다. 우리들에게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왕편)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인 이윤수가 호부낭중이라는 중앙 정부기관의 벼슬을 지내기 전까지도 경기도 여주에 기반을 둔 토호집안 출신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지방에서 거주하던 토호집안은, 자신의거주지에서 일부는 향리가 되어 그 지역사회를 지배하기도 하고, 또 일부사람들은 서울인 개경에 진출해 중앙관료로 출세하면서 서로 인적인 연관을 지녔다. 이 때 중앙관료로 진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 할 것도 없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무술실력을 인정받아 무관으로 진출하는 길도 있었다. 이럴 경우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탁월한 무술실력으로 국왕이나 중앙권력자들의 눈에 띄어 발탁되면 더욱 쉽게 출세할 수 있었다. 특히 이규보가 활약했던 시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무인정변을 주도한 정중부나 이의민 등은 그런 경우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문관의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그러기에 부친의 음덕으로 벼슬을 시작한 고위 관료의 자제들마저도 또다시 과거시험을 보았던 것이다.
하물며 중앙정계에 배경이 별로 없는 지방출신은 더욱더 과거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규보의 집안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의 연보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이규보)의 처음 이름은 이저였다. 기유년(1189) 사마시를 보려고 할 때, 꿈에 노인들이 검은 베옷을 입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 사람이 이르기를 “이들은 28수이다”라고 했다. 공은 깜작 놀라 두 번 절하고 물었다. “제가 이번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가?” 그러자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살마을 가리키면서 “저 규성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즉시 그에게 나아가 물었으나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꿈에 깨였다. 조금 후에 다시 꿈을 꾸었는데, 그 노인이 찾아와, “자네는 꼭 장원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이는 천기인 만큼 절대로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규보로 바꾸고 시험을 치렀는데, 과연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처럼 이름을 고칠 정도라면 다시 과거 합격에 대한 바람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성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1살 때 숙부인 이부가 그를 관청에 데려가 동료들 앞에서 자랑삼아 글짓기를 시킬 만큼 신동이었던 이규보도 과거시험준비를 위해서 14살이 되자 당시의 명문 사립학교인 9재학당에 입학하였다.
해동공자라 불렸던 치충이 세운 이 학교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많은 문신관료를 배출한 곳이었다. 그래서 고려 후기 유명한 문신인 이제현은 이곳을 ‘위로는 재상집 자제에서 아래로는 지방의 과거응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9재 학당에 이름을 걸고 성인의 길을 익혔다’고 했으며, 또한 조선시대 문신인 서거정도 “이곳에서 뛰어난 문장가가 많이 배출되어 중국에서도 시서의 나라라고 칭송하였으니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최충위 공이다”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곧 과거에 합격하는 지름길 이었으며, 그 만큼 자신의 출세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 출신의 관료가 정부기관 곳곳에 깔려 있었으며, 이들이 대부분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으므로 출제경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합격한 후에도 곳곳에 있는 선배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출세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좋은 학교출신이란 것이 명예롭고 중요시 여겨졌으므로, 이 학교출신들은 설립자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의 무리라고 불렸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사립학교 외에 공립학교도 있었다. 수도 개경에는 최고 학부인 국자감과 중등학교인 학당이 있었고, 지방에는 중등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규보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사립학교가 과거시험공부에 보다 유리하였으므로, 당연히 사립학교에는 중앙관료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주로 입학하였다.
한편 이규보가 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한 교과목은 대부분 유교의 경전이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9가지의 경서와 3가지 역사책을 가르쳤다. 9가지 경서란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주례>, <의례>,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이고, 3가지 역사책은 <사기>, <한서>, <후한서>와 같은 중국역사책을 말한다. 이런 책들을 정해진 해석에 따라 암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주역>은 글자 수가 24,107자, <예기>가 99,010자, <춘추좌씨전>은 무려 196,845자나 되니, 머리 좋은 이규보도 암기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 시부등과 같은 문장 짓는 수업도 받았다. 경전이나 역사책에 나온 고사 성어나 음률 등이 문장을 지을 때 기초가 되었으므로 경전에 대한 암기 5년 동안에 술기는 중요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규보는 뛰어난 글재주를 자랑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여름에 치류어진 수련회인 하과에서 그는 계속 일등만을 했던 것이다.
네 번 재수 끝에 턱걸이
하과에서 계속 일등만 했던 그도 16살 때 처음 치른 시험인 사마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본고사는커녕 예비시험에서도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8살 때 두 번째로 본 사마시에서도 합격하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가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수원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절치부심하면서 2년 동안 공부했지만 그는 세 번째 시험에서도 역시 낙방하고 말았다.
1차 시험에서 세 번이나 낙방한 일은 천재소년이라 불리던 그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던 것 같다. 그의 연보에는 이에 대한 변명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즉 “공은 이 4, 5년 동안 술에 쏠려 멋대로 놀면서 마을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기만 일삼느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아서 계속 응시 했어도 합격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요즘 재수생의 방황을 엿보는 듯하다.
22살 때 치러진 사마시에서야 그는 비로소 일등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 입학 이후 관료로 가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과거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인 예부시가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는 1차 시험의 합격자 중 33명을 예비관료로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시험은 제술업과 명경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제술업을 통과하는 것이 관료로 진출하여 승진하는 데 가장 유리하였다. 제술업의 합격 기준이 주로 문장능력이었으므로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반면에 명경업은 유교경전의 애해 능력을 시험 하였다. 예부시의 이 두 시험은 오늘날의 2차 고시와 비슷하며, 흔히 대과라고도 불렸다. 이 밖에 법률지식이나 통역, 천문, 지리학 등에 밝은 사람을 뽑는 기술고시가 있어, 잡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교를 선발하는 무과시험은 없었던 것이다.
이규보가 응시한 시험이 바로 제술업이었다. 그는 사마시에 통과한 이듬해에 예부시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합격 등수는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에도 합격 등수가 현직 관료로 보직을 받는 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낮은 등수에 실망한 그는 합격을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한 아버지의 꾸지람과 주변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리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합격통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이유는 과거시험의 문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험에 쓰이는 형식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불만이었다. 그는 시험에 쓰이는 형식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불만이었다. 그로 인해 글 짓는 감성과 세상사는 도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그가 중국 당나라 유학자인 한유가 벌였던 고문체 복귀운동을 고려에서 실천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규보가 시험을 올바로 볼 리가 없었다. 그는 과거시험장에서 시험관 중 하나가 그를 부르자, 큰 잔으로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곧 취해서 휘갈겨 쓴 글을 찢어 버리려 하였다. 옆 사람이 그의 글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불합격했을 것이다. 당시 고시관이던 이지명이 그의 시구를 좋아해서 낮은 등수로나마 합격시켜 주었다.
이처럼 어렵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고 해도 곧바로 관직에 등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는 합격 후 3, 4년 내에 지방관으로 임용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규보가 살던 무인집권기에는 심지어 30년 가까이 임명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이나 정상적인 관료승진절차를 거치지 않고 권력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로 추천되어 지방관으로 진출하는 사람이 당시에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규보처럼 중앙의 권력자들과 줄이 닿지 않았던 사람들은 임용되기 어려웠다. 이규보 역시 23살에 합격하였지만 정작 관직에 임용된 것은 9년이나 지난 32살 때였다. 그 동안에 그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칭하면서 술과 시, 그리고 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되짚어 보는 과거시험의 의미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대체적으로 문신관료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였다. 그러나 무인집권기와 같은 정치적 격동기에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 이규보처럼 전형적인 문신관료들은 무인들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던 정치제도를 가능한 한 정상화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이규보가 추구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할 수 있는 관료를 선발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과거제도의 정상적 운영이었다. 말하자면 행정능력이 있으면서 백성과 국왕을 위해 올바른 관료가 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고려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제도 자체를 이 목적에 맞도록 개정 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한 개인의 출세를 보장하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분상승을 가능케 하는 국가고시가 존재한다. 모든 국민에게 ‘기회균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이 시험의 통과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고생하며 매달리고 있다.
또한 대학입학시험도 고시공부와 사정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좋은 대학출신이 이 사회에서 쉽게 출세한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 된 지는 오래 전이다.
따라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아니 최근에는 영재교육바람에서 보듯이 아예 갓난아이 때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아무도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식을 그러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