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
3.소리의 원융무애성
소리의 원융무애성을 세 가지로 대변해 살펴본다. 첫째 진공묘유(眞空妙有), 둘째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 셋째 법화의 공가중(空假中) 삼제원융(三諦圓融)의 견지에서 고찰해 본다.
원융무애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으로 시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연기하는 존재여서 그 연기가 무애(無礙)함을 의미한다. 실재를 현상적 차원에서 보면 차별상을 지니지만 실재의 본성은 평등하다. 모든 현상[色]은 이치[空]에서 생긴 것으로 이치를 여읜 현상은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은 나타나는 현상과 본래 이치가 서로 걸림이 없고 나아가 차별적 현상의 사물 상호 간에도 원융무애한 것이다.
1)진공묘유의 속성
소리의 원융무애성을 진공묘유의 속성에서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인연가합(因緣假合)의 작용으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변화하며 작용한다.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 원어인 'Śūnyatā(空)'의 뜻과 더 일치한다. 진공(眞空)은 말 그대로 일체의 색상(色相)을 여읜 '참다운 공'을 말한다. 또한 공을 근원으로 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진리이지만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존재하는 묘유(妙有)이다. 비어있으나 묘하게 존재하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즉, 진공묘유한 존재는 본래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으며, 공과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오히려 진공에 머무르지 않고 조화롭게 표현되기 때문에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소리의 진공묘유적 견지는 연기적 관점과 더불어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의 당체(當體, 本體)는 연기공(緣起空)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당체즉공은 분해해 보면 없어지는 분석공(分析空)이나 필경공(畢竟空)과 달리 현재 있는 그대로를 보는 공개념이다. 당체즉공의 관점에서 보면 발생이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雙遮], 발생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雙照]. 즉 실천의 공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진공묘유적 견지에서 소리는 다음의 예시로 대변될 수 있다. 대금을 연주하면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듣고 황홀감을 느끼고, 그 소리를 갖기를 원한다. 대금과 연주자를 데려오는 것으로 그 소리를 가졌다고 한다면, 과연 이것은 소리라고 할 수 있는가? 황홀했던 그 소리는 대금이라는 악기[因]와 대금의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연주자[緣]가 만나서 발생하게 된 현상일뿐이지 독립된 실체를 갖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존재하며,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 즐거움을 느끼거나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하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소리'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리를 인식하는 대상을 변화시키는 작용은 분명히 있다. 이것이 바로 진공묘유이다.
2)상즉상입(相卽相入)의 속성
소리의 원융무애적 견지를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에 견주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즉'은 모든 현상의 체에 대해서 한쪽이 공이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색으로, 동시에 공이나 색이 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양자가 서로 융합하여 일체화(一體化)해서 장애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상입'이란 서로 대립하지 않고 걸림없이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소리는 상즉하기에 겉으로 듣기에는 각각 다른 소리 같지만, 그 본체는 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입하기에 현상계에서 색과 색의 융합으로 그 본체를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음악공연의 경우 분명히 가수나 연주자 그리고 관객 사이에는 공유되는 질서와 원리가 존재한다. 신나는 음악에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할 때, 연주자는 관객의 환호로써 존재하고 관객은 가수의 노래에 의해 그 자리를 지킨다. 서로를 상의상관(相依相關)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이때 가수와 관객의 관계는 사사무애가 된다.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사(事)는 이(理)로 환원된 사인 동시에 개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삼라만상이 사사무애 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수가 내는 음성들이 모여 화음을 이룬 중창이나 합창, 합주도 소리의 원융무애함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 一切中一 一卽一切 一切卽一)'라 설하는 화엄의 사상은 개별적 존재들로 구성된 전체가 시간적・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연기하는 무애함을 밝히고 있다.
3)삼제원융의 속성
마지막으로 소리의 원융무애성을 공가중(空假中) 삼제원융(三諦圓融)에 견주어 보면 다음과 같다. 공가중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게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 하고, 이 세상의 고정불변하는듯한 온갖 것은 연기하여 일정 기간 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가(假)라 한다. 공과 색의 양변을 떠나면서 그 양변을 포용하기 때문에 중(中)이라고 한다. 이에 비추어 설명하면 진공상태를 비롯한 매질이 없는 상태에서는 고요뿐이라는 점을 공제, 인연 따라 연기하여 드러낸 소리의 진동 및 파동 등을 가제라 할 수 있다. 공제인 고요와 가제인 진동 및 파동을 포용하여 인간의 음성인 언어나 음악, 의료, 전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소리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중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소리의 본질인 공제가 표현방식에 따라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기에 가립한 것이다. 소리는 공과 색을 함께 포섭하고 있으므로 공가중 상호 간의 삼제원융이고, 원융무애인 것이다. 소리와 소리가 만났을 때 소리가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는 원인은 소리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시방의 모든 사물을 고찰하면 아주 미세한 양성자나 중성자에서부터 광대한 천체에 이르기까지 일체 현상계가 인과 연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에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소리의 실체도 이와 같다. 소리는 상의상관성으로 연의 작용에 의하고 공과 색이 서로 융합하며 또한 현상계에 드러난 번뇌와 환희의 소리들 간에도 서로 방해함이 없이 원융무애하다.
세상의 무수한 존재들은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같지만, 하나하나가 우주적 질서에 의해 체계를 이루고 있다. 삼라만상이 무질서한 상태인 것 같아도 이 현상의 배후에는 정교한 질서가 있다. 내 안에 세계가 있고 세계는 나를 감싸고 있다. 일즉일체 일체즉일인 것이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소리가 현상계에 드러난 모습도 이와 같다.
<불교에서 소리의 공능에 관한 연구/ 이태영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