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세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마가복음 8장 22-26절『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
넷슬알란드 성경과 스테파누스 성경은 차이가 있다. 스테파누스 성경은 7장 26절에서『 μηδὲ εἰς τὴν κώμην(코멘) εἰσέλθῃς.(또 마을 안에서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라는 부분이 있는데, 넷슬알란드 성경에는 없다. 개역개정 성경과 영어성경(niv)에도 없으며, 그러나 kjv성경은 스테파누스 성경을 번역하므로 nor tell it to any in the town이 표현되어 있다.
한글 개역개정과 헬라어 성경의 내용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맹인으로 번역된 뒤플론(τυφλὸν)은 투포우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에서『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교만한 자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자를 의미한다.
핲세타이(ἅψηται)는 만지다 손을 대다 라는 의미 외에도 관계되다 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7장 33절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헾사토의 어근은 헾사스(불을 붙이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누가복음 8장 16절에서『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에필라보메노스(ἐπιλαβόμενος)는 (목표 달성을 위해) 굳게하다 또는 붙잡다 라는 의미로서, 사도행전 9장 27절에서『바나바가 데리고(에필라보메노스)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그리고 누가복음 9장 47절에『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에필라보메노스) 자기 곁에 세우시고』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율법주의자(맹인)에게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해 굳게 붙잡는 의미가 된다.
옴마타(ὄμματα)는 눈으로 번역되었지만, 어원은 옾타노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자는 율법으로 눈이 향하게 되어있다. 율법을 지켜 의를 행하는 자가 바라보는 것은 율법의 규율인 것이다.
프튀사스(πτύσας) 는 침을 뱉다 라고 번역했는데, “두루마리를 접다” 라는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 4장 20절에서『책을 덮어(프튀사스)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두루마리(성경)을 접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접어놓는 것이다.
에피세이스 타스 케이라스(ἐπέθηκεν τὰς χεῖρας 안수하시고로 번역)에서 에피는 분배의 의미에서 무엇인가 위에 첨가하는 것을 의미한다.타스는 관사이고, 케이라스는 손 또는 권능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장 66절에서『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블레페이스(보이느냐)와 아나블레파스(ἀναβλέψας)보이나이다)에 대해서, 예수님은 블레페이스로 물었는데, 대답은 아나블레파스이었다. 블레페이스는 보다, 알다, 깨닫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깨닫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육의 눈으로 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질문하는데, 그는 육의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이다.
『나무 같은 것들(안드로푸스 호티(관계사) 호스(와 같은) 덴드라 ἀνθρώπους ὅτι ὡς δένδρα)이 걸어 가는(페리파툰타스 περιπατοῦντας) 것을 보나이다』
안드로푸스는 사람이다. 에베소서 3장 5절에서『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안드로포스)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비밀이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는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른 세대는 성령이 없는 세대를 의미한다. 다른 세대의 사람의 아들들은 율법주의에 사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덴드라는 드뤼스(상수리 나무)에서 유래된 것으로, 무화과 나무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아는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는 영적 맹인으로서 그가 보는 것은 율법주의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페리파툰타스(περιπατοῦντας) 는 행동하다, (말씀 교리 등에) 따르다 라는 의미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페리파테사이)』
오프달무스(ὀφθαλμοὺς)는 앞부분의 옴마타와 같이 눈으로 번역했다. 오프달무스는 오프타노마이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오프타노마이는 호라오 라는 단어의 변형형이다.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는 히브리서 9장 28절에서『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호라오)』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페데켄 타스 케이라스(ἐπέθηκεν τὰς χεῖρας) 다시 안수하시니)와 앞부분의 에피세이스 타스 케이라스(안수하는) 것의 차이에서, 에페데켄은 더하다, 눕히다, 입다 등의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 4장 40절에서『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에피세이스(ἐπιθεὶς)는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을 그속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 기적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권능있는 메시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를 무너뜨리는 그런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런데, 두번째, 에페데켄(ἐπέθηκεν) 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그리스도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있는 병자들이 예수님의 손과 연합되어 죽고, 그의 손으로 일으키니(부활) 병이 다 고쳐진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율법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가 주목하여(디에블렢센 διέβλεψεν) 보더니(아페카테스테 ἀπεκατέστη)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텔라우고스 τηλαυγῶς) 보는지라』
디에블레센은 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He opened his eyes)
아페카테스테는 회복되다 라는 의미다. 사도행전 1장 6절에서『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아포카디스타네이스)이 이 때니이까 하니』사람은 이 땅에서 범죄한 존재들이다. 세상이라는 감옥에 있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나라가 회복되고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오이콘 οἶκον)으로 보내시며(아페스테일렌 ἀπέστειλεν) 이르시되 마을(코멘 κώμην)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이콘은 집, 가정이라는 의미 외에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성전으로 보낸 것이다. 이 성전은 그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을 의미한다.
아페스테일렌은 보내다, 파견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마태복음 10장40절『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영적 맹인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므로서 그는 예수님이 보내시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코멘은 마을이라고 번역되었는데, 마을은 이미 세워진 옛성전(돌성전)을 의미한다.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율법주의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넷슬 알란드 성경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μηδὲ εἰς τὴν κώμην(코멘) εἰσέλθῃς.(또 마을 안에서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역시 마을(옛성전)에 있는 율법주의자에게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며, 오늘날에도 율법주의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
마가복음 8장 22-26절 내용을 패러디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는데,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이 하시는 기적 등을 통해서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다. 직접 혼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율법학자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서, 그 사람이 소개하므로 이렇게 성전에 있던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자신이 찾아온 경위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율법학자이지만, 당신의 능력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마치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가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 장면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예수를 좋지 않게 보는데, 율법학자가 예수를 만나서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사정을 잘 알므로, 이 사람을 데리고 성전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친구여,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잘 지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자기라는 육적 몸을 벗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오.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하는데, 동물을 죽여서 각을 뜨는 것은 죄의 본성인 자기라는 육적 자아가 죽는 의미가 있는 것이요, 그 살을 불에 태우는 것은 혼이라는 옷을 태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희생제사는 비록 동물이 대신 죽지만, 죄인도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희생제사를 통해서 날마다 죽는 동물을 대신해 메시야가 세상에 와서 백성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성경에 있지 않는가. 그 메시야가 바로 나라는 말이야. 나를 통과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지. 이제 좀 알아듣겠는가?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율법이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 시원히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왜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는가 라고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의미는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대속한 자와 연합되어야만, 죽었던 영이 부활할 수 있는데, 내가 먼저 그렇게 될 것이고, 이것을 믿는 자도 부활할 것이라는 말을 잘 설명해 주었더니, 율법학자는 그제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돌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옛성전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옛성전에는 율법주의자들만 득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성전도 찾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율법학자들도 만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첫댓글 소설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잘 파악을 하였건만
성경에는 까막 눈이였어요 ~~
올려 주신 글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있어서 감사 합니다 ^^
성경을 읽는데 정말 영적 의미를 모르면 그냥 이야기 정도가 되더라고요. 성경 전체 문맥의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이 글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는게 관건인데
권사님은 성경보는데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셨어요. 대단합니다😄
@시몬 ㅎ ㅎ ㅎ~~
왠 은혜이고, 웬 칭잔인지요~~
제가 성경에 높은 수준은 아니고요
이제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는 중 입니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