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만으로 충분한>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에는 도미노처럼 세워진 빌라단지가 여럿 있었다. 그 중 우리 가족이 보금자리를 틀었던 대동빌라는 한 채당 삼 층까지 있었고 각 층마다 두 세대가 살았다. 빌라 입구의 양옆으로, 그리고 베란다를 통해 내려다 보이는 건물 뒷편으로 작은 터가 있었다. 그 작은 터전은 빌라 사람들 중 누가 가꾸는 땅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철에 맞게 잘 가꿔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심고 가꿀 여유가 있는 사람, 빈 땅이 보이면 뭐든 심어야 성에 차는 사람이 차지한 땅이었으려나 하는 순진한 상상을 해본다. 거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면 그 작은 땅에 심긴 나무가 시야를 살짝 가렸다. 모기망 너머로 나무와 앞 건물,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거리, 언니가 다니고 있고 곧 내가 가게 될 초등학교가 보였다.
여름이면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가 푸른 잎을 매달고 바람을 따라 선들선들 몸을 흔들었다. 다른 땅에는 장독대가 심겨져 있었다. 앙다문 입처럼 꽉 닫힌 뚜껑은 항아리가 무엇을 품었는지 알 수 없게 독의 입구를 내리 누르고 있었다. 옆 단지에서는 풋고추가 익어가고 밑둥부터 부지런히 따먹은 상추가 긴 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빌라 단지 안에는 놀이기구가 없는 놀이터가 있었다. 그 놀이터는 무언가 생기려다 만 장소처럼 모래만 가득했다. 놀이터를 둘러 싼 나무가 만든 그늘 밑에는 벤치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해가 뜨거운 날이면 그 벤치 주변의 땅을 파며 개미를 쫓아 지하 세계를 탐험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아이들은 각각 그을린 얼굴을 하고 그 놀이터에 모였다. 주변에서 자라는 풀을 찧어 병원 놀이를, 비가 온 다음 날이면 축축해진 흙을 둥글게 뭉쳐 식사를 차리며 가족 놀이를 했다.
그 해 여름에는 놀이터 옆 작은 땅에 해바라기가 심겼다. 내 키를 훌쩍 넘긴 커다란 해바라기가 무거워진 머리를 숙인 채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갈색의 원에 검은 빗금을 엇갈려 그어 격자를 만든 후 뾰족한 노란 꽃잎을 둘러 그리던 해바라기. 그 실물을 그토록 가까이서 본 건 기억상 처음이다. 멀리서는 그저 검은 원이던 해바라기의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 보니 그 안은 씨앗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저마다 땀과 모래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던 아이들은 능숙하게 씨앗을 빼먹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해바라기 씨앗을 뽑았다. 인류의 채집 역사가 유전자에 남긴 견고한 징표, 작은 손 끝에 달린 둥근 손톱은 씨앗을 빼내기에 안성맞춤인 도구였다. 이빨과 손톱으로 세로 금이 그어진 씨앗의 껍질을 벗겨내면 부드러운 속이 나왔다. 배를 채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말 그대로 ‘손톱만한‘ 크기의 견과였다. 애초에 목표는 배 채우기도 아니었고 미식도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해바라기 머리에 매달려 씨앗을 하나씩 뽑아내 입에 넣는 건 그저 즐거운 일이었다.
작년 가을에 <키 큰 해바라기> 씨앗을 나눔 받았다. 뿔시금치, 쪼그리아욱 씨앗을 챙기다가 ’키 큰 해바라기‘ 씨앗을 덥석 집어든 건 순전히 이 기억 때문이었다. 텃밭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매주 농장에 찾아오는 초등학생 친구들과 올봄에 함께 그 씨앗을 심었다. 한 뼘이 안 되는 작은 포트에 씨앗의 두배 깊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 씨앗을 묻었다. 해바라기 씨앗을 심던 날부터 이름을 지어주며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한 아이가 ”짱아(해바라기에게 붙여준 이름)는 꽃이 피었을까요?“ 물어본다. 두 달 전 포트에서 땅으로 옮겨 심은 해바라기를 찾아 갔다. 긴 장마를 앞둔 7월 첫 주, 키가 2m까지 큰다해서 ‘키 큰 해바라기’라는 이름이 붙은 그 식물은 어느덧 내 키를 조금 넘겼다. 한 손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줄기가 굵어졌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아이들이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씨앗이 여물어 있을까, 걱정과 기대를 안고 성장 속도를 가늠해본다.
나는 기억 농사를 짓고 있다. 이것저것 가리는 음식이 많던 아이가 3년에 걸쳐 ”저 감자 좋아해요“라고 말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하는 것. 푹푹 쪄낸 완두콩을 껍질째 입에 넣어 쪽 소리나게 빨아 먹는 순간을 함께 하는 것. 물에 잠긴 논, 모가 심기 논,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논을 함께 걷는 것. 고개를 푹 숙인 해바라기를 올려다보며 씨앗을 함께 빼 먹는 것. 어른이 된 내가 오랜 기억에 이끌려 ’키 큰 해바라기‘ 씨앗을 덥석 집은 것처럼, 함께 만드는 이 순간이 아이들의 기억에 남았을 때 미래에 어떤 선택을 일으키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고를 수 있는 취향을 가지게 된다거나,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된다거나 하는 바람을 꿈꾸다가 그만 둔다. 그저 즐거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성장, 배움, 발전보다 앞서 그저 즐거운 기억 하나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처음 내가 해바라기 씨앗을 뽑아내 껍질을 벗겨 입에 넣었던 때의 즐거움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부디 어둡고 긴 장마를 잘 버텨주세요, 해바라기!